전범재판이 열린다지만...
이즈음 캄보디아 프놈펜에서는 유엔의 개입 아래 킬링필드 관련자들이 기소될 움직임이 보인다. 장소는 캄보디아와 유엔이 2006년7월 공동으로 설립한 캄보디아 국제전범재판소 법정. 그곳에 서게 될 피고들은 이제는 다들 노인이 된 크메르 루즈 정권 지도자들이다. 이 가운데 실제로 몇 명이나 기소돼 유죄판결을 받게 될지는 불투명하다(크메르 루즈 최고지도자 폴 포트는 지난 1998년 캄보디아 북부 정글에서 73살로 눈을 감았다).
여기서 따져볼 문제 두 가지. 첫째, 캄보디아에서 저질러진 학살범죄에 책임을 져야할 사람들이 폴 포트를 비롯한 크메르 루즈 지도자들뿐인가. 둘째, 캄보디아 학살이 1970년대 후반 크메르 루즈 집권시절에만 벌어졌던 것인가. 캄보디아 국제전범재판소는 크메르 루즈 집권시절인 1970년대 후반에만 국한시켰다. 그렇다면 캄보디아 학살에 관련된 미국 전 대통령 리처드 닉슨과 그의 보좌관 헨리 키신저에게 사면장을 쥐어주는 셈이다.
아침작전, 점심작전, 스낵작전, 후식작전...
1970년대 후반 폴 포트가 이끈 크메르 루즈 군의 공포정치가 있기 앞서 캄보디아 사람들은 베트남 전쟁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 1968년 초 미국의 베트남전 군사개입이 한창일 때 미군 병력은 55만에 이르렀다. "베트남전을 끝내겠다"는 공약 아래 1969년1월 미 대통령이 된 리처드 닉슨과 백악관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는 오히려 전선을 캄보디아로 넓혀나갔다.
닉슨과 키신저는 캄보디아 동부 베트남 접경지대의 '호치민 루트'를 따라 움직이는 적대세력(북베트남군과 베트남인민해방전선, 즉 베트콩)을 겨냥한 대규모 공습을 결정했다. 그에 따라 B-52기들이 캄보디아로 출격했다. 공습은 '메뉴'(Menu)라는 은어로 일컬어졌고, 공습작전 이름도 식사시간과 관련됐다. 아침작전, 점심작전, 스낵 작전, 저녁작전, 그리고 후식작전 등이다.
미국대사, "커다란 악을 저질렀다"
미군의 북베트남 공습은 1973년1월 파리 평화회담 뒤로 그쳤다. 그러나 캄보디아 공습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공습은 미 의회나 언론, 국민들에겐 비밀이었다. 닉슨 대통령의 사임(1974년8월)을 몰고 온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져서야 비로소 캄보디아 공습 사실이 알려졌고, 그제야 공습도 멈췄다. 1973년 공습 마지막 6개월 동안에 집중적으로 공습이 행해졌다(25만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일본에 떨어뜨린 폭탄(16만톤)보다 9만톤이 많았다.
캄보디아 공습은 키신저가 바라던 대로 공산세력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지 못했다.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왔다. 당시 캄보디아를 취재했던 영국 저널리스트 윌리암 쇼크로스는 "크메르 루즈 세력이 불어난 것은 미국의 군사개입이 주요원인"이라 지적했다. 공습으로 가족과 생활터전을 잃은 캄보디아 농민들은 미국의 지지를 받았던 론 놀 장군의 친미 군사정권에 적개심을 품게 됐다. 그들은 반군세력인 크메르 루즈를 위해 기꺼이 총을 들고 나섰다.
당시 캄보디아 주재 미 대사 에모리 스원크는 미군 공습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1973년 캄보디아 주재 미 대사직을 그만 두면서 미국의 캄보디아 공습을 가리켜 '인도차이나의 가장 헛된 전쟁'이라 불렀다. 그 무렵 캄보디아를 방문했던 미 하원의원 페티 맥클로스키는 "미국은 베트남전쟁 때문에 전세계 어느 나라에서 미국이 저지른 악(evil)보다 더 큰 악을 캄보디아에서 저질렀다"고 말했다(1975년2월 미 상원 외무위원회에서의 증언).
"킬링필드, 1960년대에 시작됐다"
캄보디아 농민들은 낮에는 논밭에서 일하다가 폭격으로 죽고, 밤에는 집에서 자다 네이팜 탄에 불타 죽었다. 5만에서 15만 사이의 농민들이 목숨을 잃고, 2백만명이 논밭을 버리고 난민이 됐다. 따라서 "캄보디아의 '킬링 필드'(killing field)는 크메르 루즈 치하의 1970년대 후반이 아니라 이미 1960년대에 시작됐다"고 말하는 것이 딱 맞다.
캄보디아 공습 결정을 내렸던 키신저는 그러나 지금껏 자신의 정책이 잘못됐다고 인정하거나, 사과한 한 적이 없다. 1994년 사망한 닉슨도 마찬가지다. 아직도 미국정치권에 나름의 영향력을 지닌 키신저가 무덤 속의 닉슨과 함께 캄보디아 국제전범재판소로 불려나와 준엄한 단죄를 받을 날은 영영 오지 않을까. '역사의 심판'이란 용어는 그들 사전엔 없는 것일까. (시사주간지 <한겨레 21> 최근호에 실린 글을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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