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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서든 우린 들어가고 말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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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서든 우린 들어가고 말 거예요!"

팔레스타인과의 대화 <41> 제닌의 소녀들

행복이란 빛이며, 가슴을 누르는 압력을 가진 빛이라서 행복을 느끼는 동안에 신체의 다른 부분은 나른하게 무감각해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나쁘지 않다. 행복은 원래 그렇고, 강하며 완고하다. 행복은 절대로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다.

행복을 느끼기 위해 나는 제닌 난민촌에서 낭독을 하려 한다. 고통이 커져서 내 영혼을 독식하는 걸 막고, 고통을 끝장 내려고. 제닌에는 내 어린시절의 추억이 어려 있건만, 나는 난민촌에는 2002년에1)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봤고 이제 다시 몇 년 만에 가볼 것이다.

어렸을 때 나는 아버지를 따라 매주 금요일에 제닌에 가곤 했다. 줄 지은 가게들마다 천장에서 색색의 물건들이 늘어져 있었다. 한 가게 주인이 고객과 이야기를 하면서 무언가를 끌어내리던 장면을 나는 뚜렷이 기억한다. 그는 마치 마술사가 마술봉을 흔들 듯, 오른손으로 끝에 갈고리가 달린 막대기를 들어 공인지 돈 상자인지를 천장에서 끌어내렸다. 아주 작은 아이였던 나는 그 순간까지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제닌의 하늘에서 늘어진 저 색색의 물건들은 새들만이 건드릴 수 있을 줄만 알았는데.

내가 성장하면서 내가 사는 도시도 커져 갔다. 반면에 제닌은 작은 채로 남아 있었다. 나는 예루살렘이나 라말라에서 제닌에 가까운 고향 마을로 가면서 지나칠 때 말고는, 그 도시에 가지 않았다. 그나마 2000년 이후로는 봉쇄 장벽과 늘어나는 검문소 때문에 팔레스타인 차로 제닌을 들르는 길을 지나기는 불가능해졌다. 이 봄, 나는 독일 외교관 차에 탄 승객으로서 그 길을 갈 것이다.

제닌으로 가는 길을 떠올려 보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최소한 나블루스와 제닌 사이 길만이라도 떠올려 보려 한다. 그 길은 오른쪽으로 굽어 내려가고, 아몬드 나무 몇 그루가 밀밭을 굽어보고 있었다. 갑자기 나는 지독한 두려움에 빠진다.

- 그 나무들이 더 이상 그 자리에 없다면? 요 몇 년 동안 수 천 명이 죽었으며 수 천 채 가옥이 파괴당했고, 수 천 에이커의 땅이 몰수되었다. 또한 나무 수 천 그루가 뽑혔다. 고통이 슬며시 돌아와, 가슴 벅찬 행복을 밀어내고 대신 자리를 차지해간다. 그래서 나는 냉담함으로 고통의 느낌, 그리고 행복의 느낌도 마찬가지로 쓸어내 버린다. 냉담함에 의지해 나는 중얼거린다. 그 아몬드 서너 그루는 아직 거기 있든지, 아니면 없겠지 뭐.

그리고 뭘 입을까 하는 생각으로 돌아간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오빠가 선물해준 검은 셔츠를 입자. 얼마 전에 산 엷은 고동색 바지를 입고. 신발은? 나는 내가 디뎌야 할 땅바닥을 생각해 본다. 2002년 봄에 내가 제닌 난민촌을 방문했을 때는 길에 온통 부서진 건물의 파편이 널려 있었다. 당시에 나는 신고 있던 신발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방문을 끝내고 돌아오자마자 신발을 내던져 버렸다. 그것이 밟았던 모든 파괴의 기억과 함께. 나는 그 방문에 대해서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한 마디 하지 않았다. 나는 할 수 없고, 하고 싶지 않으며, 내 자신이 그렇다는 사실에 개의치도 않는다. 말을 한다면, 또는 말을 할 수 없다고 쓰기만 해도, 나는 피곤해지고 상처 받을 듯싶다.

간단히 말해, '고통'. 그러나 나는 자신에게 한 번 더 상기시킨다. 이번에는 내가 난민촌으로 특종에 혈안이 된 기자들과 가는 게 아니라, 초대 작가로 간다고. 나는 우아한 검은 신발을 신기로 하는데, 즉각 새로운 공포에 사로잡힌다. 제닌으로 가는 길에 아직도 파괴가 널려 있다면? 나는 길을 막고 있는 검문소나 봉쇄 장벽을 피해 어쩔 수 없이 산을 타넘는 자신을 상상해 본다. 총알이 날아 와 내 몸을 꿰뚫는 장면도. 나는 그 부위를 할당한다. 총알은 내 다리나 가슴에 맞을 것이다. 나는 다리 쪽이 낫다고 생각하지만, 감히 말하건대 가슴이라고 해도 상관은 없다. 오늘 이 더러운 세상에서 제닌 난민촌에 들어가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길에 버티고 있을 모든 위험과 난관을 그려보면서, 나는 가방에 구두솔과 검은 구두약을 집어넣는다. 나는 제닌 난민촌의 관객들 앞에 깨끗하고 반짝이는 신발을 신고 서고 싶다. 비록 내 몸은 죽었을지라도.

난민촌에 도착해도 나는 거리나 골목을 알아보지 못한다. 5년 전에 죽음으로 뒤덮였던 난민촌에 이 맥 빠진 오후에는 일상이 돌아와 있다. 두 남자가 닭가게 앞에 앉아 있고, 어린애 하나가 분홍색 유모차를 길로 밀고 나온다. 우리가 타고 가는 차 바퀴가 아이를 치는 상상이 떠올라 나는 크게 비명을 지른다. 아직도 내 코에는 죽음의 냄새가 진동한다. 그 냄새는 이 지역을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이다.
▲ 제닌 난민촌에 최근 '자유 극장'이라는 문화 공간이 생겼다. ⓒ자유극장

최근에 문을 연 '자유 극장'에서 곧 낭독회가 시작될 것이다. 젊은이들이 극장 바깥마당을 채운다. 입구에서 나는 성난 눈으로 팔짱을 낀 한 떼의 소녀들과 부딪쳐 묻는다. "뭐가 잘못 됐지, 얘들아?" 문을 지키는 남자가 자기들을 들여보내주지 않는다고 소녀들은 답한다. 그들의 성난 눈동자에서 나는 제닌의 내 어린 시절을 본다. 나 자신을 포함한 어른들이 있는 곳으로 소녀들은 들어가고 싶어 하며, 나는 그들 속에 끼어 있는 어린 소녀다. 나는 극장 감독에게 바깥에 있는 소녀들을 들여보내 달라고 애원하지만, 그는 완강하게 말한다. 안 됩니다. 이 행사는 그 연령 대에 맞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은 소란만 일으킬 겁니다. 소녀들과 내가 지시를 잘 따르고 극장 뒤에 조용히 앉아 있겠다고 약속하건만, 그는 여전히 거절한다.

나는 소녀들에게 진심으로 약속한다. 단지 그들만을 위해서 반드시 제닌에 다시 오겠으며, 그때 우리는 어른들은 들여보내지 말자고. 하지만 그들은 인내도 믿음도 없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기만 한다. 왜냐하면 이제껏 그들과, 그들의 부모들과, 조부모들에게 수많은 약속이 퍼부어졌으나 지켜지지 않았으므로. 극장에 들어가면서 나는 소녀들이 멀리서 극장 문지기를 향해 외치는 소리를 듣는다. "우린 들어갈 거예요. 어떻게 해서든 들어가고 말 거예요!"

그들은 모른다. 자기들이 극장에는 못 들어왔을지라도 내 지친 영혼으로 들어와서, 새 생명을 불어넣었음을. 참 생명을.
▲ 어린이 공연을 관람하러 온 어린이들.ⓒ자유극장

옮긴이 주:

1) 제닌은 이스라엘에 대한 저항의식이 높은 도시다. 2002년에 이스라엘 군대가 제닌 난민촌에 난입해 적어도 50명 이상(주민들 주장은 300명 이상)을 죽이고 난민촌을 초토화한 '제닌 학살 사건'이 벌어졌다.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www.palbridge.org) 기획·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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