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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사람'을 부르다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道'] 제12장 반정공신들의 몰락<61>

반정공신들의 몰락을 서경덕이 희소식이라고 반색하며 반긴 것은 뜻밖이었다. 천마산에 은거하며 세상을 잊고 사는 것 같았는데, 그는 단박에 희소식이라며 맞장구를 쳤던 것이다. 마치 자신이 예견했던 대로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는 표정을 짓기까지 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입맛을 다시며 미소를 지었음이었다. 조광조는 서경덕에게서 사람을 끄는 기이한 흡입력을 느꼈다.
  "화담, 주역점이라도 쳐보았습니까."
  "물론이지요. 조정이 어찌 돌아갈지 궁금하여 가끔씩 괘를 따져봅니다."
  "나라가 어찌 되겠습니까."
  "간신 유자광은 죽어 제삿밥을 얻어먹기도 힘들 것 같고, 뒷사람들의 비난이 두려워 자신의 무덤까지 숨겨야 하는 박복한 운입니다."
  "하늘이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지 않습니까. 밝은 하늘을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유자광이 참혹하게 죽은 것은 천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실제로 유자광은 바닷가로 유배를 갔고, 죽기 전에는 두 눈이 멀어 맹인이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자광은 죽어서 서경덕의 주역점대로 화를 두려워하여 자신의 묘를 평지처럼 깎게 하여 자취를 감춰버렸는데, 패륜아인 두 아들은 아비를 장사 지내주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제는 박영문과 신윤무에게 재앙이 미칠 차례입니다. 누가 먼저인지 순서가 정해지지 않았지만 반정공신들은 하나 둘 사경을 해멜 것입니다. 다만 박원종만은 선대로부터 지은 복이 많아 큰 재앙이야 면하고 겨우 천수는 누릴 듯합니다."
  기준이 또 나서서 말했다.
  "박영문은 작년 겨울부터 대간들에게 탄핵받고 있습니다. 비록 공조판서의 자리에 있으나 머잖아 죄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어쩌면 자신이 스스로 물러날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박원종의 비호를 받고는 있다고 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늙은 박원종도 예전만 같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를 지지했던 대신들이 발을 조금씩 빼고 있습니다. 노회한 성희안, 유순정 등도 대간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으니까요."
  
  공조판서 박영문에게 처음으로 비난의 포문을 연 사람은 대사헌 박열(朴說)과 대사간 성세정(成世貞)이었다. 중종과 마주앉은 경연 자리에서였다.
  "박영문은 탐하고 험하고 간휼하니 육경에 합당하지 않으며, 유세웅이 포도대장으로 도적을 잡은 것은 당연히 맡은 일을 한 것이거늘 특별히 계급을 올려준 것은 조정을 업신여기고 벼슬자리를 더럽히는 것이오니 마땅히 벼슬을 가시옵소서."
  그러나 반정공신이자 좌의정인 유순정은 박영문을 감쌌다. 바람벽 같았던 박영문이 밀리면 자신도 추워지기 때문이었다.
  "근래에 도둑이 창궐하여 감히 막아낼 수가 없는데 세웅이 능히 도둑을 잡아 다스리오니 벼슬을 중히 아껴야 한다지만 그 공로도 역시 크옵니다."
  중종이 박열의 간언을 허락하지 않자, 유순정은 시기를 보아 자신의 심복인 무관들을 천거하기 위해 말했다.
  "경기는 도둑의 굴혈(掘穴)인데, 그중에도 인천과 장단이 더욱 심하니 관리를 보내는 데는 마땅히 무부를 써야 합니다."
  도둑을 소탕하기 위해서는 무인 출신을 기용하여야 효과적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무인 출신들이 벼슬을 받아갔을 때 폐해도 적지 않았다. 무조건 강압적으로 다스리려 하다가 화를 자초한 적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문인이 칼이나 활을 빼들지 않고도 도둑을 다스릴 수만 있다면 그것이 더 좋은 정치인 것이었다. 그런데 유순정이 굳이 무부를 쓰려고 한 것은 자신은 문반 출신이면서도 국경에 오래 동안 나가 있을 때 아랫사람들이 무관들이었으므로 공로의 경중을 따지기보다는 일단 그들을 기용하고자 하는 속셈이 있어서였다.
  어쨌든 유순정이 박영문을 감싸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대간들이 끊임없이 간하기 때문에 버티는 것이 힘들었다. 박영문에 대해서 탄핵하는 내용은 포도대장 유세웅 건 말고도 몇 가지가 더 있었다.
  첫 번째는 반정하던 처음에 원종공신(原從功臣)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박영문에게 뇌물을 바쳐 정국공신이 되는 일이 허다했다. 반면에 재물이 없는 자는 공을 크게 세웠어도 정국공신이 되지 못하고 원종공신으로 밀려나니 원망이 물 끓듯 했다.
  이때 박영문은 박원종을 속여 말하기를 '대간과 문사들이 무인으로 삼공(三公)이 된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니다 하여 공을 탄핵하려 하니 이제 이 일이 내게까지 미치겠으니 미리 도모하시오'라고 말하여 조정의 문사들에게 화를 입히려 한 것도 대간들이 박영문을 탄핵하려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또 박영문은 군기시 관원에게 부탁하여 대궐 안에 있는 과녁을 내오는데, 문지기가 물으니 임금의 명을 받았다고 둘러대고는 내다가 자기 집에 둔 일도 있었다. 박영문이 중종에게 자신의 입장을 변명했지만 대간들의 논박은 다음해까지 이어졌다. 박영문은 은근히 중종의 마음을 떠보고 압박을 하기도 했다. 사임을 요청하는 것도 임금에게 압박을 가하는 흔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신은 사람이 용렬해서 판서에 합당하지 않으므로 전날 거듭 사양했으나 승인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하오나 공정한 의논이 있겠기에 다시 말씀을 올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대간에서는 신더러 원종공신 등록 때 뇌물을 많이 받았다고 하였는데 말은 옳습니다. 하오나 그때 신은 죄를 지고 파면되었기 때문에 거기에는 수긍할 뿐이었습니다.
  그 뒤에 신이 폐주 때 임금을 모욕한 자들이 모두 공신으로 등록되고 신의 종도 그 중에 들어 있는 것을 보고는 하도 놀라워 큰소리로 외치기를 '임금을 모욕한 놈들을 등록할 수 없다'고 하였더니 박원종이 이 말을 듣고 당장 그 이름들을 지웠습니다. 이밖에도 간사한 무리로서 이름을 같이한 자가 100여 명이나 있기에 신이 당하관들을 데리고 당상관의 집에 가서 다 지웠더니 삭제당한 자들이 신을 미워하다 못해 죽이려고 신을 가리켜 뇌물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이 어떻게 변명하겠습니까.
  신은 사경에 들었다가 하늘의 해를 다시 보게 되어 종3품에서 정2품으로 되었습니다. 신은 전하가 장수하고 자손들이 번창하며 조정에 어진 관리들이 가득 차 있기를 원하는데, 어째서 대신과 대간을 대립시키려고 하겠습니까. 신이 용렬한 탓으로 간사한 자들에게 미움을 사서 탐욕스럽다고 지목을 받았으니 이는 신의 잘못입니다. 신의 벼슬을 고쳐 임명해 주시면 신은 자나 깨나 편안하겠습니다."
  
  대사헌 박열 못지않게 대사간 성세정도 극렬하게 간했다. 이때도 박원종은 무반의 동지로서 박영문을 옹호해 주었다.
  
  "박영문의 일은 모두 모호한 일인 바 대간에서 말한 음험하다는 것은 신과 영문이 더불어 이야기한 말을 두고 하는 말인데, 대간에서 신을 공박하고자 한다는 말은 실상 윤탕로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영문이 젊었을 때 신과 함께 무술을 배워 같은 해에 과거에 올랐으며, 나라 일을 반정할 때에도 공로가 같았으니, 의(義)가 형제보다 중한 터에 만일 이 말을 듣고 신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이야말로 음험한 것이요, 들은 대로 말한 것이 음험한 것은 아닙니다.
  과녁이 비록 대궐 안 물건이지만 전설사(典設司) 장구(帳具)와 같이 외인도 때로는 내다가 쓰는 것이니, 신도 또한 무인으로서 전일에 때로 내다가 활을 쏜 일이 있으니 이것은 족히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도둑을 잡은 일로 논공한 것은 또한 명단을 써서 정원에 올린 것이요, 자기 혼자 들어가 아뢴 것이 아닙니다. 성종이 공신 박지번, 정유지가 서쪽 전쟁에 공이 있었다 하여 높은 벼슬을 주어 그의 수고로움을 갚았으니, 무릇 이 두 사람은 글자 한자도 알지 못하는 무부이건만 성종이 관작을 아끼면서도 그에게 육조 참판을 제수했거든, 하물며 영문의 정국한 공로가 그보다 만 배는 되는 데야 어찌하오리까. 영문이 생원으로 무과에 올라 일찍이 형조정랑이 되었을 때 그때 당상관들이 모두 그의 능함을 칭찬하였거늘 하물며 이제 대훈(大勳)에 참예하여 훈위(勳位)가 2품에 열해 있는데, 그에게 공조판서를 제수하는 것은 신은 불가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좌의정 유순정도 박원종의 편을 들어 말했다.
  
  "박영문의 소행이 정말 대간에서 간한 바와 같다면 판서를 교체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단지 박영문이 뇌물을 받았다는 말은 원종공신에도 들지 못한 자의 앙심에서 나왔으니 곧이 들을 수 없고 영문을 헐뜯는 말도 실은 윤탕로에게서 듣고 원종에게 전한 말이니 영문을 탐욕스러운 자라느니 재상과 대간을 이간시켰다느니 하고 규탄하면서 드디어 영문의 일생 결점으로 삼는다면 과연 애매하지 않습니까. 대궐 안에 있는 과녁을 제멋대로 옮긴 문제에 대해서는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조사한 뒤에 죄를 주어도 늦지 않으니 꼭 벼슬을 먼저 파면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세정의 반격도 만만찮았다. 성세정의 날카로운 논변을 알기에 대신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긴장하며 들었다.
  
  "원종이 아뢰는 바를 신은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비록 영문으로 하여금 자기가 와서 변명을 하여도 역시 이와 같지 않겠습니까. 성종께서 사기를 길러서 언로가 열리게 하였더니 폐조에 이르러서 약하게 들리고 곧은 말 듣기를 싫어하며 당시 대신들이 모두 음험한 사람들로서 일찍이 바른 선비가 자기를 논박하는 것을 원망하여 무오년에 이르러 바른 선비를 모두 죽였고, 갑자년에 이르러서는 사람 죽이는 것이 삼을 베듯 하고 대간은 자리만 채웠을 따름이요, 기강이 크게 무너지고 인륜이 망할 지경으로 상중에 있으면서도 고기를 먹고 음란한 짓을 하는 둥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반정한 뒤에도 그 남은 풍습이 오히려 있으니 이때에 탁한 것을 헤쳐내고 맑은 것을 선양하지 않으면 조정에 어찌 청명한 정치를 볼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하는 것이 대간의 책임인데, 원종이 이제 배척하고자 하니 영문의 죄악은 임금께서 밝게 살피신 것인데 원종이 극진히 변명하니, 신은 원종의 말하는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두 해 전만 해도 감히 박원종 앞에서 이렇게 말할 사람은 조정에 아무도 없었는데, 이는 놀라운 변화이자 사건이었다. 두 해 전에는 중종도 박원종의 눈치를 보며 정사를 논해야 할 정도였던 것이다. 이제는 어찌 보면 대간들의 힘이 반정공신들보다 우위를 점한 듯 보였다. 중종은 반정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대간들의 논박을 제지하지 않고 방임하기 일쑤였다. 박원종의 얼굴은 성세정의 논박에 붉으락푸르락했다. 중종을 의식하지 않고 무례하게 목소리도 격하게 변했다.
  
  "대간의 말이 매양 사람의 뜻을 억측하여 말하므로 원망하는 이가 많습니다. 그리고 영문의 일로 대간이 논박하느라고 사직하여 자신의 일을 보지 못한 지 오래입니다. 그러니 사직한 대간의 말을 받아들여 그들을 그대로 사직케 하고, 영문을 다시 공조판서로 제수하신다면 다음에 오는 대간이 더 이상 의논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박원종은 사직한 대간들을 그들의 뜻대로 물리치고 박영문을 다시 신임한다면 다음에 오는 대간이 더 이상 문제 삼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로 중종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정광필이 반대했다. 그것은 임금이 권력을 남용하는 것에 불과하고, 반정공신들의 힘을 견제해 온 대간들을 위축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 정광필의 판단이었다. 정광필은 사직한 대간들 편에서 말했다.
  
  "전하, 대간이 사직한 지 여러 날이 되매, 조정에 기강이 없고 또한 귀와 눈이 없으니 신은 생각하기에 급히 영문의 벼슬을 바꾸고 대간으로 하여금 자리에 복귀하여 일을 보게 하는 것이 옳을까 하옵니다."
  
  결국 박영문은 공조판서 벼슬을 바꾸고, 대간들이 다시 일을 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박영문의 불만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반란을 일으켜 조정의 벼슬아치들을 모조리 바꾸어버리고 싶었을 정도였다.
  
  서산사 주지스님이 향기로운 술을 내왔다. 머루와 다래로 빚은 과일주였다. 화상들이 속이 더부룩할 때 소화제로 복용하거나 손님들이 왔을 때를 대비해서 빚어놓은 술이었다. 서산사의 주지스님은 과장이 심했다.
  "천마산 상상봉의 이슬을 받아 모은 감로수에다 머루 다래를 담가놓고 10년 이상 빚은 곡차이니 한 되를 마시면 도인이 되고 한 말을 마시면 신선이 되는 술입니다. 부디 통음하시고 신선이 되셨다가 하산할 때는 도인이 되어 돌아가소서."
  조광조와 기준은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
  "소승은 화담선생의 손님이라 해서 특별히 곡차를 내온 것입니다. 화담 선생의 손님이 아니라면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주지가 자신을 추켜세우자 서경덕은 민망해 했다.
  "이분들은 모두 소과복시에 급제한 분들입니다. 아니, 그보다도 우리나라 도학의 맥을 이어갈 귀인들입니다. 그러니 이 자리는 나나 화상이 아니라 이분들이 주인공입니다."
  "소승을 용서해 주십시오. 함부로 떠들었으니 구업(口業)을 지었습니다."
  주지가 황망히 물러가자 기준이 다시 좀 전의 화제로 말머리를 돌렸다.
  "화담께서는 반정공신들의 몰락을 어느 때부터 예견하셨습니까."
  "굳이 주역점을 쳐보지 않더라도 세상의 모든 일은 생로병사, 흥망성쇠가 있는 것입니다. 계절로 말하자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부귀영화가 물러갈 때가 됐다는 말씀입니까."
  "반정할 때가 봄이었다면, 권력을 주무를 때가 여름이었으니 이제는 퇴장을 준비하는 가을이 되겠고, 머잖아 가진 것 다 내놓아야 하는 겨울이 온다고 보는 겁니다."
  "겨울 이후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물러가도 세상은 망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나타나 봄을 만들어나갈 것입니다."
  "누가 다가올 봄을 맞이하겠습니까."
  조광조가 찔러 묻자 서경덕은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것을 말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서경덕은 굳이 무엇을 감출 생각이 없는 듯했다. 망설이지 않고 바로 말했다.
  "전하가 부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전하 곁에 그 사람이 아직 없다는 말입니까."
  "반정공신들이 사라지면 전하는 그 자리에 반드시 새 사람을 부르실 것입니다."
  밤늦게 그들은 자리에 누웠다. 달빛이 창호에 어리자 서경덕이 나직한 소리로 즉흥시를 읊조렸다.
  
  글 읽는 당일에는 세상 건질 경륜에 뜻을 세웠으나
  나이 늙어 오히려 안씨(顔氏; 顔子)의 가난함을 달게 여기네
  부귀는 다툼이 있는지라 손을 대기 어렵고
  산수는 금하는 이 없으니 가히 몸을 편안케 하리
  산에 가 나물 뜯고 물에 낚시질하여 배를 채우고
  달을 읊고 바람을 노래하니 마음이 상쾌하네
  학문이 의심 없는 지경에 이르니 참으로 쾌활하구나
  헛되이 백년 인간이 되는 것을 면했구나.
  讀書當日志經綸 歲暮還甘顔氏貧
  當貴有爭難下手 林泉無禁可安身
  採山釣水堪充腹 咏月吟風足暢神
  學到不疑眞快活 免敎虛作百年人
  
  다음 날 조광조가 눈을 떴을 때 옆자리가 허전하게 비어 있었다. 서경덕이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조광조는 기준을 깨웠다.
  "이보게. 화담을 보지 못했는가."
  "이불이 개어 있는 것을 보니 길을 떠난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와 주지를 붙들고 물었다.
  "화담을 보지 못했습니까."
  "지족암으로 갔습니다."
  "언제 말입니까."
  "새벽 예불을 마치고 갔습니다."
  "허허허."
  "두 분께서 편히 머물도록 자리를 비워주신 것입니다. 두 분께서는 공부를 하러 오신 것 아닙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조광조는 서경덕이 거처하던 방을 빼앗은 것 같아 당황했다.
  "이거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더니 우리가 그 짝입니다."
  "화담 선생께서 무슨 뜻이 있어 자리를 양보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공부를 더 깊이 하여 하산하십시오."
  조광조는 어젯밤에 서경덕이 읊조리던 시 중에서 한 구절이 유난히 생생하게 떠올랐다.
  
  '학문이 의심 없는 지경에 이르니 참으로 쾌활하구나.'
  
  조광조는 서경덕이 부러웠다. 자기보다 7세나 어린 서경덕이 이뤄낸 경지가 '의심 없는 지경'이라니 할 말이 없었다. 마음이 쾌(快)하다니 그럴 만도 했다.<계속>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는 화순군 홈페이지와 동시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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