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의 어두운 초상화
"아랍계 피를 아프리카에다 퍼뜨린다." 이는 선거구호가 아니다. 아프리카 수단 서부지역 다르푸르에서 벌어져 온 성폭력의 명분이다. 지난 2003년부터 내전이 벌어져 왔다. 전쟁이란 교전 당사자가 있는 게 일반적인데, 이곳 전쟁은 거의 일방적인 폭력이 저질러졌다. 국민회복전선(NRF) 같은 다르푸르 반군조직이 있긴 하지만 무장이 엉성해 교전상대가 안 된다. 폭력의 종류는 학살, 방화, 추방, 그리고 흔히 '성폭력'이란 이름으로 순화된 강간이다.
가해자는 수단 정부군과 그 지원을 받는 잔자위드(Janjaweed, 인종적으로는 아랍인) 민병대이고, 피해자는 다르푸르의 아프리카 흑인 토착민들이다. 일부 난민들은 이웃나라 차드와 중앙아프리카공화국으로 넘어갔지만, 많은 난민들이 600km에 이르는 수단 서부 국경선 가까이에서 고달픈 삶을 이어가는 중이다. 영양실조에 걸린 어린이들의 어두운 초상화는 지구촌 분쟁 보도사진의 단골메뉴가 됐다.
유엔의 한계 다시 드러내
'인종청소'라는 비난을 받아 온 다르푸르 위기를 맞아 유엔은 고유기능의 하나인 국제평화유지에 다시 한계를 드러냈다. 주권국가인 수단의 하르툼 정부가 '주권 침해'를 이유로 유엔평화유지군의 다르푸르 진주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단 정부는 인권침해 등 다르푸르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입국하려던 유엔 다르푸르 인권침해조사단에 대한 입국비자 발급도 거부했다(이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국제평화유지군 파병이나 조사단 입국을 거부하는 논리와 같다. 차이점이라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있기에 점령지에 대한 '주권'을 주장할 수 없는데도 주권을 내세운다는 점이다).
수단정부는 "우리는 소말리아와 다르다. 이른바 '실패한 국가'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국제사회의 개입을 거부해 왔다. 1990년대 초 소말리아는 중앙정부가 무너져 국가공권력이 증발해 '실패한 국가'로 낙인 찍혔고, 1992년 평화유지군(UNSOM) 파병을 불렀다. 그 15년 뒤 수단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유엔은 힘을 못 쓰고 있다.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6년 8월 1만7000명 규모의 유엔 평화유지군 파병 결의안이 안보리에서 통과됐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다. 수단 정부에 "평화유지군 진주에 푸른 신호등을 켜달라"고 설득하는 수준이다. 지난 3월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의 아랍정상회의에서 오마르 알 바시르 수단 대통령을 만났으나, 반 총장이 들은 대답은 "No!"였다.
지금 다르푸르 지역에는 2004년 아프리카연합(AU) 깃발 아래 파병된 평화유지군 7000명이 고작이다. 이런 소규모 경무장 병력으로는 다르푸르 폭력을 막는 데 턱없이 모자란다. '평화유지'는커녕 제 한 몸 건사하기에 급급한 실정이다. 발칸 보스니아 내전(1992-95년) 당시 세르비아계 장군 락토 믈라디치가 유엔평화유지군(UNPROFOR)으로 파병된 경무장 병력을 가리켜 '유엔자기보호군'이라고 조롱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국제사회 압력 석유로 버텨
다르푸르 학살에 책임이 있는 수단정부가 국제사회의 압력을 버티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 다름 아닌 석유다. 수단은 석유부국이다. 추정매장량이 30억 배럴에 하루 50만 배럴을 생산하는 수단의 석유이권에 줄을 대려는 미국이나 유럽국가들, 중국 등은 저마다 수단 하르툼 정권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 힘쓰는 모습이다.
수단 석유에 관한 한 중국이 선수를 쳤다. 수단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한 국가가 중국이다. 그 규모는 40억 달러에 이른다. 그 반대급부로 중국 석유천연가스공사(CNPC)는 유정, 정유소, 송유관 등 수단의 석유지분 상당량을 확보했다. 중국은 수단 석유를 더욱 많이 수입해간다는 계획이다. 수단정부는 석유를 판 돈으로 중국산 무기들을 들여오는 중이다. 지난해 8월 유엔평화유지군 파병결의안을 비롯, 유엔에서 수단정부를 겨냥한 제재안이 나올 때마다 중국이 기권표를 던진 것도 그런 속사정에서다.
석유자원이 없다면...
미국도 수단 석유에 눈독을 들이는 중이다. 미국 외교협회장 리처드 하스는 2006년 보고서 <인도주의를 넘어: 아프리카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접근> 머리말에서 "2010년에 이르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미국의 에너지(석유) 수입에서 중동만큼이나 중요한 곳이 될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갈수록 반미감정이 높아 가는 페르시아 만의 산유국들 대신 미국이 대안으로 꼽는 지역이 바로 수단을 비롯한 아프리카 산유국들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 수단에 석유가 없었다면, 그래서 별 볼일 없는 나라였다면, 국제사회가 수단정부 동의 없이 사태를 어떻게든 수습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말 그대로 '별 볼일 없는 나라'이기에 다르푸르 비극을 그야말로 강 건너 불로 여길 것이다. '인도주의' 깃발을 내걸고 개입해봤자, 챙길 이득이 없는 탓이다. 이래저래 다르푸르 흑인난민들의 삶은 엉망이 됐다. 국가이익을 따라 움직이는 비정한 국제질서의 희생양이 바로 그들이다.
(시사주간지 <한겨레 21> 최근호에 실린 글을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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