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 협정문이 비치된 국회 한미 FTA 특위 비공개 자료실을 지키는 외교통상부 직원들이 죽을 맛이다. 10평 남짓 좁은 자료실엔 창문도 없어 환기도 안 되는데다 문 앞엔 자료실 풍경을 취재하려는 기자들이 죽치고 서 있어 문도 못 연다. 그렇기 때문인지 직원들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다.
당연히 신경도 예민해진 상태다. '간단한 메모'는 허용하되 '필사'는 안 된다는 상부의 애매한 지침 탓이다. '메모냐, 필사냐'의 신경전은 그간 협상문을 공개할 때마다 계속 해 오던 것이지만 이번엔 "한미 양국 정부의 공동 자산"인 협정문인지라 경계가 새삼 높아졌다.
이들은 협정문을 열람한 보좌관 등이 퇴실 할 때 메모를 확인하고 있지만 쓸데없는 갈등만 불거질 뿐 들여다본다고 해서 '메모냐 필사냐'의 애매한 성격이 분명해질 턱도 없다. 한 외교통상부 직원은 '메모와 필사의 차이가 뭐냐'는 질문에 "그 기준이 명확치 않은 게 사실"이라고 얼버무렸다.
국회에 대한 불신도 높다. 협정문의 외부 유출을 우려해 국회의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문서화하지 않고 컴퓨터 모니터로만 열람할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지만 이에 더해 오후 6시 퇴근할 때는 컴퓨터를 캐비넷에 넣고 단단히 자물쇠를 채우고 가야 한다.
비상시국회의 "국회와 국민을 조롱하나"
협정문 공개의 실질적 첫날인 23일에는 '신고식'을 호되게 치뤘다. 김태홍(민생정치모임), 심상정(민주노동당), 정청래(열린우리당), 임종인(무소속) 등 '한미 FTA협상 졸속체결에 반대하는 국회의원 비상시국회의' 소속 의원들이 '항의방문'을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미 FTA 특위 자료실을 둘러보고 "이러한 방식으로는 검증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공개 방식을 바꾸기 전까지 열람을 거부하기로 했다. 정청래 의원은 "국제적 통상 협상에서 국문을 쓰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며 "해석의 여지가 많은 영어 원문을 정보공개라고 하는 것은 사람 조롱하자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여기가 미국 국회냐"고 비판했다.
임종인 의원은 "한미 FTA 특위 의원들만 열람이 가능하도로 해놓은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한미 FTA는 상임위마다 관련이 없는 분야가 없는데 검증은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고 따졌다. 임 의원은 '산업자원위원회' 소속 의원 자격으로 별도로 협정문 열람 신청을 해놓은 상태이지만 거부당할 게 뻔하다.
비상시국회의는 이날 각계 전문가 43명이 참여하는 정책자문단을 발족했지만 협정문 열람이 '국회의원 1인, 보좌관 1인'으로 한정돼 사실상 열람이 불가능한 것도 문제다. 시국회의 자문단에는 정태인 성공회대 교수, 이해영 한신대 교수, 이태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우석훈 성공회대 교수, 우석균 보건의료연합 정책실장, 송기호 변호사 등 그간 한미 FTA에 비판적인 주장을 펼쳐 온 각계 전문가들이 포함됐다.
비상시국회의는 이날 성명을 내 "국회의원의 책임 있는 의정활동에 족쇄를 채우는 정부의 반민주적인 열람방식을 전면 거부한다"며 "정부가 국회의원 전원에게 협정 문안 전체는 물론 요구하는 모든 자료를 국영문 문서 사본 형식으로 즉각 공개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한 "공개되는 모든 자료는 공정한 검증을 위해 관련 전문가들의 검토에 대한 보장을 전제로 해야 한다"며 "정부가 계속 이를 거부하고 계속 국회와 국민을 우롱할 경우 법적 대응을 포함한 모든 조치를 취해나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비상시국회와 자문단은 6월 초 '한미 FTA 국민보고서'를 발간할 예정이다. 시국회의는 또 국회의원 및 시민사회 전문가 등 200여 명이 참여하는 '국민회의'를 조만간 구성, 각 지역을 순회하면서 강연회와 토론회를 개최할 방침이다.
열람해보니…
물론 외교통상부 직원만 힘든 것은 결코 아니다. 비상시국회의가 협정문 열람을 공식적으로 거부하기 전까지 열람했던 각 의원실의 보좌관들은 "이런 식으로는 검증이 결코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3급 비밀 문서를 언제든 유출할 가능성이 있는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고 서약서 등을 쓰는 것도 썩 유쾌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최재천 의원실의 한 보좌관은 "통상용어로 가득한 협정문을 외부의 도움 없이 컴퓨터 모니터로 보는 일이 만만치 않다"며 "이러한 방식을 바꾸지 않는 한 검증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시국회의에서 '열람 거부'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잠시 들여다봤지만 투자자-국가소송제를 비롯해 몇몇 문안들이 알려진 것과 미묘하게 다른 것 같더라"며 "앞으로도 자구 수정 등을 거치며 큰 의미 차이가 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심상정 의원실의 한 보좌관도 "잠시 협정문 중 유일하게 한글로 되어 있는 목차만 들여다봤지만 그것도 메모한 내용을 '사후 검열'하기에 아예 메모를 하지 않았다"며 "웃기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그는 "아까 내가 들여다봤을 때에도 보좌관 한 명만이 열람하고 있더라"며 "현재 협정문을 열람하고 있는 의원실은 거의 없을 것으로 보이며 앞으로도 줄어들 것 같다"고 말했다.
열람 거부를 천명한 반대파 의원들은 물론이고, 한미 FTA에 찬성하는 의원들조차 열람에 엄두를 못내는 가운데 외통부 직원들만 '철통보안'에 곤욕을 치러야 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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