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실체적 근거도 없이 '대량살상무기 제거'라는 이유를 내세워 이라크에 대한 침략을 저지른 미국은 지금 그 이라크에서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오만과 탐욕, 그리고 폭력의 권능에 대한 집착이 자초한 업보가 아닌가 합니다. 파죽지세로 바그다드를 점령했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미국은 저항세력의 포위망에 둘러싸이게 되고 지금까지 수습이 되지 않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이라크에 대한 공격은,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이 국제기구의 사찰을 모두 받은 이후 사실상 대량살상 무기가 없다는 것이 드러난 다음 즉각 이뤄졌습니다. 유엔의 동의 없는, 말하자면 국제법의 파괴행위였고 명백한 침략행위였습니다. 유엔은 이러한 미국의 일방주의적 패권전략 앞에서 무기력했고 침략행위를 중단시키는 후속 조처에도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미국 부시정권의 이라크에 대한 공격은 상대를 각종 국제기구의 압박을 통해 무장 해제시키고 나서 공격하는 전략을 취한 결과라고 해석하기에 별반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당시 후세인 정권으로서는 미국의 침공 임박 위협 앞에서 국제사회의 사찰 요구에 대한 동의가 이뤄지면 국제사회의 여론이 미국을 제지하면서 사태는 달라질 수 있다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는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한 이유는 유럽의 결속과 중국의 부상 앞에서 세계적 에너지의 원천을 장악함으로써 동요하고 있는 미국 패권체제의 위기를 막아내고, 중동 지역에 대한 지정학적 근거를 확고히 다지려는 것에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과 적대관계가 된 이라크에 친미정권을 수립하고 이란에 대한 측면 압박 내지 공격의 근거를 마련함으로써, 중동지역의 정치지도를 다시 그리려 한 것입니다.
이라크의 예는 적어도 세 가지 교훈을 남기게 됩니다. 그 하나는 그 어떤 강력한 국제적 강제력을 수반하는 보장이 없는 상태에서 미국과 적대관계에 있을 때 무장해제 하는 것은 자멸의 수순이 될 수 있다는 점. 두 번째는 미국의 선제공격 전략이 포기 되지 않는 한, 일체의 국제적 보장도 궁극적인 안전책이 될 수 없다는 점. 셋째, 따라서 안보에 대한 국제적인 보장은 차선의 보완책은 될 수 있겠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지켜낼 능력이 있느냐의 여부라는 점 등이 그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은 지금 핵무기 사용을 전제로 한 선제공격 전략을 새로운 군사지침으로 정식화하는 작업에 들어가 있습니다. 핵 비확산조약인 NPT는 핵을 갖지 않은 나라에 대한 공격은 금지하고 있는데, 미국의 핵 선제공격 전략은 이러한 NPT의 보장체계를 근본적으로 무력화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왕 이렇게 될 바에야 핵무기를 가지고 핵 선제공격 전략에 대비하는 편이 자신을 지키는 데에 더 낫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북한과 미국 사이에 이어지고 있는 끈질긴 논쟁과 전략충돌은, 기본적으로 강대국의 패권전략의 위협 앞에 놓인 약소국의 자위적 대응이라는 점을 배제하고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뉴욕 타임즈>지는 미국과 같이 최강국이 핵을 가지고 자신의 안보를 확보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 보다 작은 나라의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라면서 미국의 핵전략 수정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평화는 강한 자가 평화의 손을 내밀 때 비로소 실질적인 진척을 이뤄낼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아니라면 아마도 미국은 내심 평화가 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센타'(오후 4-6시/FM 104.5, www.ebs.co.kr)의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에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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