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강당에 앉아 있으면 세상의 온갖 소식이 다 전해져 마음이 산란하고 어수선했다. 대궐에서 아침에 일어났던 일도 하루만 지나면 성균관의 유생들 입에 오르내렸다. 유생들 중에는 대신들의 자제가 많았으므로 그들이 집에서 들은 얘기가 곧장 퍼트려졌던 것이다.
조광조가 성균관 유생이 되었을 때 처음 듣게 된 얘기는 삼포의 왜변이었다. 제포, 부산포, 염포를 삼포라고 불렀는데, 왜인들이 그곳에 들어와 살기를 간청하므로 세조가 마지못해 허락하였던 땅이 삼포였다. 그런데 인구가 불어난 왜인들이 중종 때에는 군사의 방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 진의 질서를 무시하고 방자한 행동을 하기 일쑤였다. 공석에서 진장(鎭將)에게 욕을 하거나 심지어는 칼을 들이밀기도 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왜인을 다스리는 진장들도 강압적으로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부산포 첨사 이우증이 겁을 주기 위해 한 왜인의 머리털을 노끈으로 묶어 나무에 매달아놓고 활을 쏘아 노끈을 맞추는 일도 있었고, 우수사 이의종은 바다에서 함부로 고기 잡고 해초를 캐는 왜인 수 명을 죽여 원망을 크게 샀던 일도 있었다.
마침내 제포의 왜인들은 대마도의 왜노(倭奴)들 끌어들이어 세가 커지자 성 밖의 민가를 불태우고 난동을 부렸다. 이른바 삼포의 왜변을 일으켰다. 왜적들은 둘로 나뉘어 제포와 부산포를 공격하여 성을 함락시켰는데, 제포 첨사 김세균은 성을 넘어 도망가다 잡혔으며, 부산포의 이우증은 자기 몸을 풀과 나뭇잎으로 위장하고 있다가 왜인들에게 잡혀 살점이 갈기갈기 찢겨 죽었다.
이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김석철이 장계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달 4월 4일 고성현령 윤효빙, 웅천현감 한륜, 군기시 직장 이해 등이 와서 보고하기를 제포에 거류하는 왜인 우두머리 대조마도, 노고수장 등이 갑옷 차림을 하고 활과 화살, 창과 방패를 든 4000~5000여 명의 왜인들을 데리고 와서 성을 에워싸고 성 밑에 있는 인가에 불을 질러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닿을 지경이었습니다.
성을 함락하려고 하므로 윤효빙 등이 통사 신자강을 보내어 까닭을 따지니 왜적이 대답하기를 '부산포 첨사가 소금을 굽고 기와를 굽느라고 화목(火木)을 바치라고 독촉하고, 웅천현감은 왜인들이 장사하는 것을 일체 금지하고 식량을 제때에 주지 않는가 하면 제포첨사는 해초를 뜯는 왜인 4명을 죽였기 때문에 도주가 병선 수백 척을 파견하여 이곳과 부산포 등의 변방 장수들과 싸울 뿐이다'라고 하면서 기관, 서집 등 세 사람을 살상하였습니다.
군관 문개보는 말하기를 '이달 4일에 왜인들이 성문을 부수고 달려들어 첨사를 쏘아 맞혀 첨사가 운신을 못하게 되었고, 신이 왜인 3명을 쏘아 맞힌 뒤에 곧 성이 함락되자 줄을 타고 성을 넘어서 도망쳐 왔다'고 합니다.>
관찰사 윤금손도 급히 보고하기를 '대마도 왜인들이 많이 나타나서 제포를 함락한 다음 근처의 각 포구를 한꺼번에 공격하였는데 웅천진은 현재 포위당해 있고 성 밑에 있는 민가들은 모두 전화에 휩싸여 있기 때문에 지금 신이 군사를 이끌고 달려갑니다'고 하였다.
실제로 왜군들은 제포와 부산포의 노약자들과 군사들을 모조리 죽이고 나아가 웅천과 동래성을 포위하고 있었다. 우두머리를 따르는 왜인과 왜노들의 군사는 자못 기율이 서 있었으며, 유병(遊兵)들이 마을을 불태우고 약탈하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가렸고 관리와 백성들이 다투어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김석철이 남은 병사 수백 명으로 왜군을 상대하기에는 중과부적이었다. 그러니 김석철은 장계를 급히 올려 조정에 고할 뿐이었다.
중종은 왜변을 처음 겪는 일이었으므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했다. 대신들을 불러 모아 대책을 의논하게 하였을 뿐이었다. 그러자 영의정 김수동이 말했다.
"왜적의 침공을 보면 형세가 매우 맹렬하니 장수로 하여금 성주 등지의 군사를 맡아 더 이상의 변고에 대처케 하고, 도체찰사에게 지시하여 서울에서 조치를 취하게 하고, 다른 지방의 일들은 방어사가 맡도록 할 것입니다. 미리 충청도의 군사를 뽑아서 대기하게 하는 동시에 좌의정 유순정을 체찰사로 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서울에서 조치를 취한다 함은 서울에 머물고 있는 왜인들이 변란을 일으킬지 모르니 그들을 감시하자는 것이고, 다른 지방의 일들이란 주로 함경도 야인들이 일으킬지도 모르는 변란을 경계함이었다.
그런데 반정의 공신인 유순정은 왜변에 맞서 싸우는 것을 꺼렸다. 반정의 공신들 중에 유독 자신만 전장에 나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신은 본래 병이 많고 암둔하여 일을 처리하지 못합니다. 이런 큰일을 맡았다가는 책임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중종은 순간 나서기를 꺼려하는 유순정이 야속했지만 그를 달랬다.
"경은 병조판서를 겸하고 있고 변방 일도 잘 알고 있는 만큼 사양하지 마시오."
그러나 유순정은 거듭 사임을 청했다.
"신이 병조의 일을 맡고 있지만 일처리에 어두워 책임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감히 거듭 사임을 청하옵니다."
중종은 병조참판 안윤덕에게도 실망했다. 그를 도순찰사로 삼아 군령을 바로 세우려 했으나 '신은 군사 일을 알지 못하는데다가 병이 많아서 큰일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고 궁색하게 사임을 청했던 것이다. 중종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노회한 반정의 공신들이구나. 지금까지 온갖 호사를 누리더니 나라가 위급한데도 나서는 이 하나 없구나. 과인의 복심(腹心)은 진정 없는 것인가. 과인의 마음을 읽는 이가 아무도 없단 말인가. 아, 답답하고 외로운지고.'
어느 새 반정 공신들은 중종의 마음속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변고에 임하여 당황하고 있는 젊은 중종을 위로하고 안심시키기는커녕 자신의 안위를 위해 한 발 빼고 있는 공신들이었던 것이다.
전장에 나서겠다고 하는 사람은 현직에서 밀려나 있는, 다시 권력을 잡고 싶어 하는 전 승지나 전 방어사들뿐이었다. 중종은 유순정이 사임을 요청하므로 전 방어사 유담년을 병조판서로 임명했다. 그러자 유담년은 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용기 백배했다. 영의정 김수동이 유담년에게 방어사를 천거하라고 하자 그는 거침없이 말했다.
"좌도(左道)는 내가 마땅히 가서 막을 것이요."
"우도(右道)는 누가 좋겠소."
방어사란 적이 침략했을 때 군사를 이끌고 실제로 전투에 임하는 야전 장수를 말했다. 전투의 지휘부인 도원수나 부원수 등과는 달리 전투능력과 용맹이 뛰어나야만 맡을 수 있는 직책이었다. 그러니 실제 전투에서는 방어사의 능력이 중요했다.
"스스로 감당할 자가 있습니다."
"그 자가 누구요."
"만일 말을 하면 반드시 대신들이 그를 헐뜯을 것입니다."
유담년은 전 승지 황형(黃衡)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황형은 승지로 있으면서 재물을 탐하고 성격이 포악하다 하여 체직을 당한 인물이었다. 그래도 유담년은 그의 배짱을 높이 사 천거하고 싶었다.
"그 자를 헐뜯다니 평판이 좋은 인물은 아닌 모양이구려."
"그렇습니다. 그러니 그 자를 임금 앞에 나가 말하리다."
"허허허."
김수동은 소리 내어 웃으며 더 묻지 않았다. 유담년은 곧 중종 앞에 나아가 말했다.
"전하, 경상우도 방어사를 할 만한 인물이 있사옵니다."
"가히 장수의 책임을 맡길 만한 자가 있단 말이오."
"좌도는 신이 맡을 것이옵니다."
"우도는 어느 장수가 맡는단 말이오. 어서 말해 보시오."
"전하, 가히 쓸 만한 장수가 있사오나 대신들이 반드시 불가하다 할 인물이옵니다."
"걱정 마시오. 천거하고 싶은 장수를 말해 보시오."
"하오나 전하께서 여러 대신들의 의견을 배격하시고 그 자를 쓰시겠다면 신은 마땅히 천거하겠사옵니다."
"좋소. 그대에게 약속하겠소."
"전하께서 약속하시니 말하겠사옵니다."
"천거해보시오."
"전 승지 황형이 바로 그 사람이옵니다."
그러자 중종 앞에 도열해 있던 대신 중 한 사람이 즉각 반발했다.
"전하, 황형은 일찍이 자기 장인을 때려서 체직을 당한 사람이옵니다. 그러니 거두어 쓸 수가 없사옵니다."
중종도 하필이면 왜 황형을 천거하느냐는 듯 원망스럽게 유담년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유담년은 자신의 뜻을 꺾지 않고 말했다.
"전하, 효기(孝己)와 미생(尾生)과 같은 높은 행실이 있다 하더라도 군사의 운용에 이익이 없으면 쓸 것이 못 되옵니다."
"그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바 아니나 행실도 반듯하고 전술도 뛰어난 장수라야 군사들이 따르지 않겠소."
효기는 은나라 고종의 아들인데 효자로 이름이 높았고, 미생은 신의(信義)가 뛰어난 자로서 한 여자와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가 오지 않는 여자를 기다리다 큰물을 만나 다리기둥을 안고 죽었다고 전해지는 사람이었다. 초한(楚漢) 전쟁 때 진평의 행실이 나쁘다고 말하는 자가 있어 진평을 추천한 위무지(魏無地)가 '지금 비록 미생이나 효기 같은 행실이 있더라도 성패(成敗)에 상관없다'고 말했던 바 유담년도 그 고사를 떠올리며 말하고 있었다.
"설령 황형에게 불미스런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이 급한 터에 딴 것을 헤아릴 여유가 있겠사옵니까. 두 개의 계란 때문에 간성(干城)의 재목을 버리는 것은 옛날부터 그르다 할 것이옵니다."
유담년은 문식이 깊은 장수답게 고사를 적절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위후(衛侯)가 그의 장수 구변(苟變)이 남의 계란 두 개를 먹었다는 죄로 쫓아낸 일을 두고 자사(子思)가 위후에게 '계란 두 개 때문에 간성의 인재를 버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음이었다.
유담년이 자신을 천거했다는 소식은 황형의 귀에도 들어갔다. 황형은 의기양양해서 팔을 걷어붙이고 큰소리 쳤다.
"가물 때는 나막신 신세더니 비가 오니까 쓰려고 하는군, 그래."
성희안이 유담년의 의견에 동조하면서 황형은 이윽고 경상우도 방어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중종은 전장에 나가기를 꺼려하는 정승과 대신들이 끝내 못마땅하여 마침내 왕명으로 밀어붙이기로 단안을 내렸다. 첫 번째 왕명으로 병조참판 안윤덕부터 부원수로 임명하여 경상도로 내려가게 했다.
안윤덕은 미적미적 삼포의 전황을 살피면서 10여 일 동안이나 머뭇거리다 내려갔다. 이번에는 유순정을 전장으로 보내려고 하였으나 그도 역시 안윤덕처럼 가기를 주저했다. 다른 신하에게 자신에게 주어지려는 직책을 떠넘기려고 하였다.
"우의정 성희안이 꾀가 많고 판단을 잘하니 가히 큰일을 맡길 수 있습니다."
이에 성희안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순정이 군사(軍事)에 밝습니다. 그러니 그를 당할 자가 없습니다."
성희안은 반정의 공신들 중에 그래도 그의 이름을 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으나 이제는 그도 사치를 숭상하고 재산을 귀하게 여기는 자로 타락해 있었다. 중종은 화가 나 병석에 누워 있는 박원종을 제외하고 반정의 큰 공신들을 대부분 전장으로 내보냈다. 유순정을 도원수로 삼고, 함양군 박영문을 도순찰사로 삼고, 안윤덕을 부원수로 삼고, 성희안을 도체찰사로 삼아 서울을 떠나게 했던 것이다.
비로소 방어사를 자원한 황형과 유담년은 첫 전승을 올렸다. 우울해 하던 성균관 유생들이 환호했다. 천마산으로 가려던 조광조도 모처럼 안도했다. 유생들 사이에 퍼진 전승의 소식은 대략 이러했다.
황형과 유담년이 함께 진군하여 적을 공격하는데, 깃대를 휘두르면서 용맹을 떨치는 황형이 유담년의 군사가 머뭇거리며 나가지 않으므로 그의 군졸 몇 명을 잡아다가 군법으로 목을 베어 장대 끝에 달아매니 그제야 유담년의 군사가 북을 울리며 진군했다고 전해졌다. 그렇게 전투에 임한 지 한참 만에 적이 달아나기 시작했고, 적은 달아나다 넘어져 죽거나 바다에 빠져 죽은 자가 속출했고 또한 아군의 칼에 목을 베여 죽은 자가 300여 명이나 된다는 승전보였다.
이와 같은 승리는 안동과 김해에서 차출한 돌 잘 던지는 장정들을 앞으로 내세운 방어사들의 지략 때문이었다. 두 고을의 풍속에 해마다 1월 16일이면 마을사람들이 모여서 좌우로 패를 나누어 돌 던지는 놀이를 하여 승부를 가리는데, 황형과 유담년이 마을사람들 중에서 돌 잘 던지는 자를 선발하여 적의 방패를 깨트리는 작전을 폈던 것이다.
성균관의 유생들은 며칠 동안 승전보를 즐겼다.
"우리 수군이 왜적의 배를 포위하여 공격하자 미처 배에 오르지 못한 적의 손가락들이 볼 만했다고 그러네."
서로 먼저 도망치려고 손으로 뱃전을 잡고 오르는 것을 우리 수군이 칼로 쳐서 적의 손가락들이 배 안에 떨어져 뒹굴 정도로 아군의 전세는 유리해져가고 있었다. 급기야 4월 19일부터는 왜적을 소탕하는 대추격전 벌어졌다.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 않고 야전의 장수들을 독려하는 부원수 안윤덕은 조정에 자신의 공인 양 보고를 올렸다.
<이 달 19일 새벽에 황형은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유담년은 군사 1900명을 거느리고, 김석철은 군사 2000명을 거느려 세 길로 나누어 육로로 진군하고, 이의종과 부산포 첨사 이보는 좌우익으로 나누어 수로로 나가니 적이 도망가지 못하고 제포 성 밖의 동쪽과 남쪽, 그리고 서쪽의 세 봉우리에 웅거했는데, 그 기세가 심히 날랬습니다. 그러나 황형이 먼저 들어가 공격하고 유담년이 계속 공격하니 적의 사기가 저하되었습니다. 이 때도 돌 던지는 군사가 선봉에 서서 왜적의 방패를 부수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적은 봉우리를 내주고 패퇴하였는데 배를 타려다 물에 빠져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뒤집힌 배가 5척, 머리를 베인 적의 군졸이 292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로써 왜변은 평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중종은 28일에 도승지 송천희(宋千喜)를 보내어 군사를 위로했고, 박영문과 안윤덕, 마지막으로 6월 초순에 유순정마저 서울로 돌아오니 중종은 유순정 이하 여러 장수들에게 술과 음식을 주어 위로했다.
전투가 끝나면 반드시 공로에 대한 뒷소리들이 무성하고 불평불만이 터져 나오기 마련이었는데, 특히 안윤덕의 막료 김근사(金謹思)는 누구보다도 불만이 컸다. 그는 장수들을 만나 팔을 걷어붙이며 투덜대곤 했다.
"적을 평정한 큰 공로가 있는데, 겨우 정옥(頂玉; 옥관자)을 얻었으니 마음이 실로 쾌하지 않다네."
박영문에게는 높은 계급이 입는 예복을 요구하기도 했다.
"저는 곧 예복을 입을 것입니다. 나라에서 주지 않으면 제가 스스로 장만하여 입고 다니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제의 직책을 받지 못했다. 대신 명예직이 주어지니 스스로 장만한 예복을 입고 으스댈 기회를 얻지 못했다. 전투가 끝나면 장수들의 불만은 늘 이런 식으로 조정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니 중종은 변란이 일어나도 고민이고 변란을 진압해도 이후가 늘 마땅찮았다.
'과인의 마음을 위로해 줄 신하가 아무도 없다는 말인가.'
조정이 어수선할수록 중종의 마음 한편에는 늘 자신의 마음을 대변해 줄 누군가를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중종의 마음을 읽고 힘이 되어 줄 신하는 조정 어디에도 없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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