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엔 팔레스타인 공동내각 출범을 중재하고 이번 달 초엔 이란과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등 부시 미 행정부가 난색을 표할 법한 사건을 주도하더니 마침내 28일에는 압둘라 알 사우드 국왕이 "이라크 전쟁은 외국의 불법적 점령"이라며 미국을 직접 겨냥하기에 이르렀다.
사우디를 위시한 중동 내 친미국가들을, 이스라엘을 돕기 위한 도구로만 활용하려 든 부시 행정부의 지독한 '이스라엘 편애'가 아랍 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는 사우디 왕가로 하여금 등을 돌리게 했다는 분석이다.
팔레스타인 중재, 이란과 정상회담…사우디 '변심'의 징후
이날 사우디 리야드에서 열린 아랍연맹(AL) 회원국 정상 연례회의 기조연설에서 나온 압둘라 국왕의 미국 비난 발언은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일으킬 전망이다. 이제껏 사우디의 지도자들이 미국의 대 이라크 정책을 비판한 사례는 더러 있었으나 아예 미군의 이라크 주둔을 '불법'이라고 규정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뉴욕타임스>는 "사우디의 정책이 미국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했다.
사우디 정부와 부시 행정부 간에 시각차를 드러낸 사례는 비단 이날 발언만이 아니다.
지난 달 압둘라 국왕은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및 파타당의 수장과 3자 회동을 갖고 양 당이 주요 각료를 나눠 갖는 공동내각 출범 합의를 엮어 냈다.
이로써 내전 직전까지 치달았던 팔레스타인 내분은 소강기를 맞았지만 미국과 이스라엘이 '테러리스트'로 규정한 하마스의 권력을 인정한 이 중재안에 미국과 이스라엘은 난색을 표했다는 후문이다.
압둘라 국왕은 팔레스타인 공동내각이 구성된 만큼 1년 여간 계속돼 온 서구의 팔레스타인 경제봉쇄를 해제해 줄 것을 촉구했지만 미국과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마스를 정치세력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양새다.
미국이 호시탐탐 공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이란의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을 리야드로 불러 정상회담을 가진 것도 '미국의 우방'으로선 파격적 행보였다. 이 자리에선 이란이 지원하는 헤즈볼라와 사우디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포우드 시니오라 정부가 갈등을 겪고 있는 레바논의 정국 안정이 주로 논의된 것으로 알려진다.
압둘라 국왕이 4월 중 백악관 만찬에 참석키로 했던 일정을 "스케쥴 조정"이란 이유로 지난 주 돌연 취소한 것도 '이상 징후'로 풀이된다.
이 같은 사우디 왕궁의 기류 변화에 대해 요르단대학 국제전략센터 무스타파 하마네이 센터장은 "언제나 이스라엘 편에서 사우디에겐 요구만 전하는 미국을 향해 사우디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풀이했다.
사우디 왕가와 가까운 칼럼리스트 아델 알 토라이피는 "사우디가 부시 행정부로부터 거리를 두기로 결정한 것 같다"며 미국 권력의 중심이 민주당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판단을 한 사우디가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과의 협력 확대를 원하고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이스라엘과 주도권 다툼, '아랍 평화안' 채택 두고 본격화
일각에서는 압둘라 국왕의 발언을 아랍 국가들에게 이스라엘과의 관계 개선을 촉구한 지난 26일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 발언에 대한 반발이 표출된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라이스 장관의 발언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갈등 해결을 아랍 국가가 주도하고 있는 현 상황을 꺼림칙하게 바라보는 부시 행정부의 입장을 반영한 것으로 분석됐다. 팔레스타인의 권리를 인정하길 요구하는 아랍 세력이 이 문제에 관여하는 것을 무엇보다 이스라엘이 원치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사이의 이 같은 주도권 다툼은 이번 연례회의를 통해 본격화될 전망이다. 아랍연맹 회원국들은 이번 회의에서 지난 2002년 베이루트 회의 때 채택했지만 이스라엘의 거부로 무산됐던 '아랍 평화안'을 재추진할 예정인 것이다.
평화안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직전을 기준으로 한 아랍권의 영토에서 이스라엘이 철수하고 팔레스타인의 주권국가 수립을 받아들일 경우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압둘라 국왕은 이번 발언을 통해 이라크 문제와 관련해서도 아랍 국가들이 주도권을 쥐고 풀어나가야 한다는 입장을 확실히 해 '이라크 민주화'를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는 부시 행정부와의 갈등을 예고하고 있다.
압둘라 국왕은 "사랑하는 이라크가 외국의 불법적인 점령의 그늘에서 형제 간에 유혈사태를 겪고 있으며 추악한 정파주의가 내전을 위협하고 있다"며 "이라크의 미래가 외국의 힘에 의해 결정되지 않도록 아랍 국가들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아랍의 지도자들이 서로 신뢰를 회복하면 "이라크에 희망의 바람이 다시 불 것이고 외세가 이라크의 미래를 결정하지 못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아랍 땅에는 아랍민족주의의 깃발만이 펄럭이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같은 사우디 정부의 기류변화는 사우디를 중심으로 중동 지역을 동맹과 적국으로 이분했던 부시 행정부로서는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요르단, 레바논을 이스라엘과 함께 동맹국으로 묶고 시리아와, 레바논의 헤즈볼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를 이란과 함께 적국으로 분류한 미국은 동맹국들의 협조를 얻어 적국들을 하나하나 쳐 나간다는 부시 행정부의 '중동 전략'의 기본 전제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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