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이 지나자 바람 끝이 완연히 부드러웠다. 차가운 기운은 여전했지만 바람 끝이 옷 속으로 파고들어 살갗을 에이지는 못했다. 개울물도 개울가에만 살얼음이 얇게 얼 뿐 해가 뜨면 한줌의 햇살에 곧 녹아버렸다. 남쪽에는 이미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렸다는 소식이 서울로 전해졌다.
박경의 옛집도 조광조의 동지들이 모여들면서 침울한 공기가 가셨다. 양팽손은 이미 지난해 초겨울부터 기거하고 있었고, 입춘 전전 날에 조광조가 거처하면서부터 유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조광조와 김식을 따르는 후배들이 공부하고자 밤낮으로 오가곤 했다. 물론 그들이 종일 공부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조광조가 좌장이 되어 글을 읽다가도 휴식하는 시간에는 토론이 벌어졌다. 대부분 부모의 강권으로 생진사시에 합격한 유생들이었으나 벼슬길의 관문인 문과급제는 부러 외면하고 유도를 닦는 데만 힘쓰는 수재들이었다. 그들에게 조정의 대신들은 언제나 손가락질의 대상이었고, 그들 중에서 아직 생진사시도 보지 않은 조광조는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가장 순수한 선비이자 도학자인 셈이었다.
그런데 조광조가 진사시를 보겠다고 용인에서 올라왔으니 그들의 충격은 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 중에서도 이미 스무 살 전에 생진사시를 모두 1등으로 합격한 김구의 반발은 더욱 거칠었다. 누구보다도 조광조만은 순수한 도학자로 남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정암 형님, 용인에서 올라오신 까닭이 진사시를 보기 위해서라는데 이 소문이 사실입니까."
"사실이네."
"30살 문턱에서 진사시를 보아 무엇을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김구의 무례한 말에도 조광조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자네와 비교해 보면 너무 늦은 것이 아닌가. 자네가 말했다시피 이제 내 나이 29살, 내년이면 도학을 이룬 것 없이 30살이라네. 세상에 빚만 지고 있으니 미안하지 않은가."
"형님도 별 수 없이 속물이 되시려고 그러는 것입니까. 진사시에 붙어 양반 행세나 하려고 그러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김식이 김구를 나무랐다.
"대유(大柔; 김구의 호), 무슨 소리를 그리 거칠게 하는가. 아무렴 정암이 진사시나 합격하여 고작 양반 소리 들으려고 그러겠는가."
김식도 이미 17세에 진사시를 합격한 적이 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아직까지도 성균관 입학이나 문과에 나서지 않는 유생이었다. 그러나 옆에서 듣고만 있던 괄괄한 성격의 기준도 김구 편을 들었다.
"정암 형님은 우리 후배들의 정신적인 지주이십니다. 형님마저 입신양명을 위해 진사시를 보겠다면 어찌 실망이 크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쌓아 온 형님의 명성이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저는 흥분하고 있는 대유를 이해합니다."
"입신양명이라니, 난 정암이 출세를 위해 진사시를 보겠다는 것이면 누구보다도 내가 나서 만류할 것이네."
김식이 약간 기분이 상한 듯 바로 맞받았다. 박학다식하고 할 말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쏘아버리는 김식이 조광조를 옹호했다. 이런 분위기에 익숙하지 못한 양팽손은 구석자리에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조광조는 후배들이 하는 얘기를 귀담아 듣기만 했다. 이번에는 박훈이 나서 말했다.
"나도 정암이 양반 행세를 하기 위해 진사시를 본다고 생각지는 않소. 그럴 사람이었으면 어찌 이제야 나서겠소. 정암은 이미 15세 이전에 사서오경을 통달한 사람이오. 더구나 도학의 고사(高士)이신 한훤당의 제자가 아니오. 내 생각으로는 정암 나름대로 생각이 있을 것이니 정암의 얘기를 들어보는 것이 어떻겠소."
"형지(馨之; 박훈의 자) 형님,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정암 형님을 흠모하는 우리들이기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몇 해 전 용인 초당에서 동지를 위해서는 무슨 말이라도 스스럼없이 하기로 맹세하지 않았습니까."
양팽손은 그때 용인에서 김구에게 들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계곡으로 세족을 나갔다가 김구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도학 하는 사람들의 즐거움 중에 무엇이 가장 크겠소. 권력을 쥐는 것도 아니고, 명예를 쥐는 것도 아니고, 부를 얻는 것도 아니지요. 다만 뜻이 맞는 동지들과 함께 어울려 공부하는 일이 아니겠소.'
이윽고 조광조가 자신에게 비난이 쏟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백정들이 사는 낙산에는 갖바치 대사가 살고 있소. 가사장삼을 벗어버린 중이지요. 그가 한 말이 잊히지 않소. 내게는 벼락같은 말이었소. 세상의 때를 묻히지 않고자 산천에 숨어 유도를 닦는 것도 도학자의 삶이요, 세상의 때를 묻히며 유도를 실천하는 것도 도학자의 삶이라고 했소. 다만 어느 것을 선택할지는 세상의 순리를 따르라고 했소."
"그래서 정암 형님은 세상에 나서려는 것입니까."
"그렇다네. 대유의 말처럼 속물이 되려는 것이네. 세상에 나서는데 어찌 때가 묻지 않겠나. 세상에 나서려면 오히려 철저하게 속물이 되어야지."
"어찌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말할 수 있습니까. 형님은 이제 어제 만났던 정암 형님이 아닙니다."
"이보게, 대유. 우리도 갖바치 대사처럼 살아야 하네. 갖바치 대사는 세상이 버린 백정들을 위해 금강산에서 내려와 그들과 고락을 함께 한다네."
갖바치가 금강산을 하산하여 낙산 마을의 천민들과 동고동락하는 것처럼 조광조 자신도 용인 초당을 떠나 백성들과 더불어 살고 싶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나이 어린 김구나 기준은 어이가 없었다. 조선의 도학을 이끌어갈 조광조가 비승비속의 갖바치를 닮고 싶다니 기가 차 말문이 막혔다.
"정암 형님, 지하에 계신 한훤당 선생이 비통해 하실 일입니다. 도학을 닦으신 형님께서 어찌 승려 따위를 닮고 싶다는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자네들은 내 마음을 아직 모르고 있네."
그러자 김식이 조광조를 대신해서 말했다.
"정암은 불도를 숭상하자는 것이 아니네. 오해들은 말게나. 갖바치 대사가 고통 받는 중생 속으로 뛰어든 것처럼 우리 동지들도 이제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자는 것이네."
양팽손은 갖바치를 만난 적이 있으므로 조광조를 두둔했다.
"갖바치 대사와 하룻밤을 함께 잔 적이 있소. 그는 여느 중과는 다르게 지혜가 밝은 승려였소. 세상을 꿰뚫어보는 눈이 부끄럽게도 나를 압도했소. 정암 형은 갖바치의 지혜를 타산지석으로 삼자는 뜻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오."
"갖바치 대사가 한 말이오. 산을 오르려면 산꼭대기까지 오르고, 산을 내려가려면 바다 밑까지 가라고 했소. 갖바치 대사는 금강산 산꼭대기까지 올랐다가 이제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백정들이 사는 낙산이라는 바다 밑까지 내려온 사람이오. 단지 그가 불도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비난할 자가 우리 중에 누가 있단 말이오. 이제 우리 동지들도 세상의 때를 묻히며 속물이라는 비난을 듣더라도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하는데 내 생각이 진정 틀렸단 말이오."
조광조가 속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자 대들던 김구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기준도 입을 다물어버렸다. 방안의 분위기가 가라앉자 김식이 크게 소리 내어 말했다.
"형지, 오늘은 내가 한잔 사겠소. 정암은 역시 대인이오. 어느새 정암은 산처럼 드높고 바다처럼 깊고 넓은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소. 아무리 갖바치의 도가 높다한들 정암의 산봉우리 아래요, 정암의 바다에 뜬 일엽편주일 뿐이오. 자, 그러니 오늘은 정암을 위해 내가 한 잔 올리겠소."
마침 김식이 술꾼답게 아랫것을 시켜 지게에 지고 온 술독이 있었으므로 굳이 술청으로 나갈 필요는 없었다. 토론하던 방안이 그대로 술자리로 변했다. 모인 사람들이 대부분 마셨다. 기꺼이 술을 마시고 술잔을 돌리므로 해서 조광조가 세상에 나서겠다는 것을 추인해주는 셈이 되었다.
조광조에게 대들었던 김구까지 가지고 온 거문고를 뜯음으로 해서 술자리는 더욱 흥이 넘쳐났다. 김구는 조광조가 가장 좋아하는 한훤당 김굉필의 시를 거문고 음률에 맞추어서 읊조려 주었다.
홀로 한가한 곳에 있으니 오가는 이 드물고
오직 달을 부르니 가난하고 외로운 나를 비추네
그대 생각으로 나에게 묻지 말게
넓은 바다 안개 긴 물결, 첩첩 산들이 가득하다네.
處獨居閒絶往還
只呼明月照孤寒
憑君莫問生涯事
萬頃煙派數疊山
양팽손은 몇 년 전에도 용인에서 김굉필의 시를 한번 들은 기억이 났다. 거문고를 잘 다뤘을 뿐만 아니라 양반 말인 서울말을 쓰고 있던 김구가 자신의 선대가 광주에서 살았다고 하며 자신을 허물없이 대해 주었던 것이다.
"술맛이 어떤가."
"모르겠네."
양팽손은 자신에게 술이 오면 마시는 시늉만 하고 술잔을 비우곤 했다. 실제로 양팽손은 그때까지도 술을 마실 줄 몰랐고 술을 배울 기회도 없었던 것이다. 양팽손은 거침없이 말도 잘하고, 술도 잘 마시고, 거문고도 잘 타는 김구가 부럽기만 했다. 기준도 호족의 자제답게 구김살이 없었고 나이답지 않게 패기만만하여 양팽손은 자꾸만 자신이 초라해지는 것을 느꼈다.
술자리는 초저녁이 되어서야 파했다. 김식은 또 다시 주동하여 일행을 초설이 운영하는 명경으로 끌고 갔다. 그러나 조광조와 양팽손은 멀리서 들려오는 소쩍새 울음소리에 귀를 세우며 자리에 누웠다. 양팽손은 불현듯 자신처럼 그림을 잘 그리고 과묵한 김정이 떠올라 물었다.
"충암(沖菴; 김정의 호) 형은 어디에 계십니까."
"순창 군수로 나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소."
"바람 잘 날이 없는 내직보다는 외직이 더 마음이 편하겠습니다."
"충암이 원해서 나간 것으로 알고 있소."
술을 마시지 않은 양팽손은 몇 마디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정신이 더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조광조도 그러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누운 채로 얘기를 계속했다.
"정암 형은 진사시를 보겠다고 했는데, 무슨 이유라도 있는 것이오."
"특별한 이유는 없소."
"도학자들은 원래 시나 문장 짓는 일을 탐탁지 않게 여기며 유도를 닦는 데만 전념하는 선비들이 아니오. 진사시의 시험과목인 부(賦)는 분명 문장 짓는 일입니다. 헌데도 정암 형이 진사시를 보겠다고 하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듣고 보니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겠소."
"들다마다요. 정암 형은 시문 짓기를 멀리하는 도학자이니 사서오경에서 문제가 나오는 생원시를 보아야 더 유리할 터이나 시문을 짓는 진사시를 보겠다고 하니 무슨 이유가 있는가 싶은 거지요."
진사과는 1편의 부(賦)가 필수이고, 고시(古詩)와 명(銘), 잠(箴) 중에서 한 편을 선택하여 글을 짓도록 되어 있으니 결국 문장 능력에 따라 합격이 결정되기 마련이었다. 조광조로서는 사서오경을 보는 생원시가 훨씬 더 부담이 적을 것인데도 진사시를 보겠다고 하니 양팽손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굳이 이유가 있다면 수월한 생원시보다는 부담스러운 진사시를 택한 것뿐이오. 아무리 문장을 멀리했다고 하나 설마 불합격이야 하겠소."
그제야 양팽손은 조광조를 이해했다.
"정암 형의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소."
"그건 그렇고, 낮에 동지들과 함께 있을 때 갖바치 대사와 하룻밤을 잤다고 했는데 사실이오."
"그렇소. 이 집에 처음 드는 날 갖바치 화상을 만났소."
"다시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소."
"캄캄한 이 시간에 말이오."
"여기서 낙산은 걸어서 두 식경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이니 못 갈 것도 없소."
"좋소."
양팽손은 갖바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조광조와 함께 일어났다.
"정암 형은 왜 갖바치 대사를 만나고 싶은 것이오."
"사실 이곳에 온 이후 인사를 가지 못했소. 갖바치 대사는 내 눈을 뜨게 해준 스승이나 다름없소. 갖바치 대사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내가 생각하는 도학의 울타리에 갇혀 세상을 보지 못할 뻔했소. 그러니 갖바치 대사는 나의 스승이나 다름없소."
"정암 형이 갖바치 화상을 그리 높이 평가하시다니 놀랍기만 하오. 대비마마께서 왜 갖바치 대사를 대비전으로 불러들여 법문을 들었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소."
"대비마마께서 갖바치 대사를 대궐로 불러들였다는 것이오."
"그날 밤 그랬소."
양팽손이 그날 밤 갖바치가 대비의 부름을 받고 대비전으로 오고간 이야기를 해주자 조광조는 한동안 말없이 도리질만 했다.
"정암 형, 왜 그리 어두운 표정을 지으시오."
"갖바치 대사를 존경하는 마음은 변함없으나 왠지 불길한 생각이 드오. 대비마마가 큰 실수를 하신 것 같소."
"왜 그런 것이오."
"승려를 대궐로 불러들인 일은 대비마마께서 대궐의 법도를 스스로 무너뜨린 것이오. 이 일이 대간들 사이에 알려지는 날에는 갖바치 대사의 목숨은 부지하기 힘들 것이오."
조광조 역시 김식과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김식도 그때 갖바치의 법력을 인정하면서도 대궐에 드나들었다는 사실에는 몹시 경악했던 것이다.
"전하도 용서치 못할 것이오. 대궐의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이오."
조광조는 좀 전보다 더 서둘렀다.
"이러고만 있을 일이 아니오. 어서 낙산으로 갑시다."
양팽손은 조광조를 따라 집을 나섰다. 순라꾼들이 다니지 않은 길로 두 사람은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조광조는 초설이 운영하는 명경의 불빛을 멀리서 보고서야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명경은 아직도 김식 등이 얘기를 나누고 있는지 불빛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 조광조는 문득 떠오른 초설을 지우기 위한 듯 고개를 흔들며 걸음을 다시 떼었다. 영문을 모르는 양팽손이 물었다.
"저 불빛이 켜진 집을 아시오."
"초설이라는 여인이 운영하는 다장(茶莊)이오. 노천(老泉; 김식의 호)이 아직까지도 술을 마시고 있는 모양이오."
양팽손은 초설을 모르고 있었다. 조광조가 양팽손에게는 한 번도 얘기를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조광조는 초설이 자신을 사모하고 있는 줄 뒤늦게 알았지만 늘 애써 외면하곤 했다. 용인에서도 하인을 시켜 그녀가 자신의 금비녀를 조광조에게 보내왔을 때도 바로 돌려주어버렸고, 갖바치를 통해 그녀가 자신을 사모하고 있음을 알았을 때도 피해버리곤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조광조가 그녀의 호의까지 뿌리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박경의 옛집도 초설이 사들여 한천에게 주었던 것인데, 한천이 사신 일행으로 중국으로 떠나 있는 동안 조광조의 동지들이 사용하도록 했고, 그들이 명경에서 마시는 차와 술값을 받지 않고 장부에 적기만 했던 것이다. 조광조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걸음을 떼었다.
'어느 땐가 초설을 만나리라. 만나서 얘기를 나누리라. 베풀기만 하는 그녀를 위로해 주리라. 고맙고 미안하다고 말하리라.'
낙산 마을은 불이 하나도 켜져 있지 않았으므로 칠흑같이 어두웠다. 갖바치가 머물고 있는 집도 캄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조광조는 갖바치가 불은 끈 채 좌선삼매에 들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좌선 중에는 짚신을 마루에 올려놓아 표시를 해두곤 했기 때문이었다.
조광조는 갖바치의 헛기침 소리가 날 때까지 마루에 앉아 기다렸다. 좌선 중이지만 인기척이 느껴질 때는 반드시 헛기침을 하여 방안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려왔던 것이다. 마침내 방안에서 좌선을 끝낸다는 죽비소리가 났다.
"대사님, 정암이 왔습니다."
"소식이 궁금하여 기다리고 있었소. 어서 들어오시오."
그제야 방안에 불이 켜졌다.
"동지를 한 사람 데리고 왔는데 괜찮겠습니까."
"그게 어디 허락을 받을 일이오."
조광조는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절을 했다. 양팽손도 조광조를 따라 절을 했다. 갖바치도 맞절을 하는데 두 사람보다도 오래 했다. 두 사람이 고개를 들었을 때도 갖바치는 머리를 땅에 대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은 무안해 했다.
"용인에서 올라온 지 며칠 됐습니다. 인사가 늦어 송구합니다. 이 동지는 능주에서 온 양팽손이라 합니다."
"거사님을 본 적이 있소. 그래, 정암이 할 말이란 것이 무엇이오."
"처음에는 인사를 드릴 생각뿐이었으나 지금은 긴히 할 얘기가 생겼습니다."
"긴히 할 얘기라고 했습니까."
"대사님께서 대비전을 드신 일이 있습니까."
"대비마마께서 불러 법문을 한 일이 있소."
"대사님의 지혜를 흠모했습니다만 그게 사실이라면 실망이 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그러는 것이오."
"문제가 왜 되지 않겠습니까. 전하의 자리가 흔들릴 정도로 재앙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유도의 나라가 아닙니까. 그런데 대사님께서 대비마마의 가마를 타고 대비전을 안방 드나들듯이 했다는 소문이라도 나는 날에는 조정이 어찌 돌아가고 대사님의 목숨은 또 어찌 될 것인지 생각이라도 해보신 것입니까. 물은 이미 엎질러졌으니 어찌 합니까. 어서 낙산을 뜨시어 목숨은 부지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갖바치는 방바닥에 놓인 염주를 끌어당겨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양팽손이 조광조를 거들며 말했다.
"정암의 얘기는 진정으로 고언(苦言)을 드리는 것입니다."
"나는 대비마마의 가마를 탄 일도 없고, 대비전으로 들어간 일도 없소."
양팽손은 말을 바꾸는 갖바치에게 살망하여 말했다.
"대사님, 어찌 두 말을 하십니까. 그때는 대비마마의 가마를 타고 대비전으로 들어갔다고 말하시고, 이제는 그런 일이 없다고 하시니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정암은 그 일에 매달려 있고 나는 그 일에서 이미 떠나 있으니 그런 일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이지요."
그래도 양팽손은 갖바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찌 그리 말할 수 있습니까."
"두 분이 보잘것없는 중을 위해 여기까지 오신 것은 잘 알겠소. 허나 이 얘기를 한번 들어보지 않겠소."
갖바치는 느닷없이 어쩔 수 없이 파계를 하게 된 어느 노승 얘기를 했다.
"한 노승과 상좌가 길을 가고 있었소. 헌데 두 중은 강가에 이르러 급류에 떠내려가는 여인을 보게 되었고, 젊은 상좌가 망설이자 노승이 뛰어들어 여인을 업고 무사히 강을 건넜던 것이오. 젊은 상좌도 뒤따라 강을 건넌 뒤 여인이 보이지 않을 때쯤 노승에게 '스님, 어찌 여인을 업고 강을 건널 수 있습니까' 하고 따졌소. 그러자 노승이 "이놈아, 나는 이미 여인을 잊어버렸는데 너는 어찌 하여 아직도 여인을 업고 있는 것이냐" 하고 나무랐던 것이오. 정암은 이 얘기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조광조는 갖바치의 얘기를 듣고 나서야 합장을 했다. 그러나 양팽손은 어리둥절했다. 그러자 갖바치가 다시 말했다.
"어제의 일은 이미 지나가버린 것, 또 내일의 일은 아직 오지 않은 것, 그러니 어제의 일이나 내일의 일은 허깨비 같은 것이 아니겠소. 나를 걱정해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나에게는 오직 오늘만이 있을 뿐이오. 두 분과 함께 있는 이 찰나만이 있을 따름이오. 설령 소문이 나 국법에 따라 극형을 받는다 해도 그것은 내가 지은 업이니 누구를 탓하겠소. 죄를 준다면 죄를 받아야지요."
그래도 조광조는 갖바치의 신변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사님을 걱정해서 드리는 말씀이니 오해는 마십시오."
"정암의 뜻을 소승도 알고 있소. 허나 그 일은 이미 내게서 떠난 일이고, 나는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바로 그것을 바라보며 충실하고 있을 뿐이오. 지나간 일에 집착하는 자는 마음이 늘 번거롭고 방하착(放下着), 놓아버린 자는 마음이 늘 편안하고 한가로운 것이오."
조광조는 할 말을 다한 듯 곧 일어섰다. 그제야 양팽손도 갖바치의 비범함을 다시 깨달았다. 김식은 조광조를 높이 추켜세웠지만 갖바치는 아직도 조광조가 넘어야 할 산이고, 건너야 할 바다였다. 양팽손은 그렇게 생각하며 소쩍새 울음소리가 들리는 밤길을 걸었다.<계속>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는 화순군 홈페이지와 동시에 연재됩니다.
☞ 화순군 홈페이지 바로가기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