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던 지난 가을까지의 상황과 비교하면 환영하지 않을 수 없는 변화다. 그러나 그런 이벤트와 미래의 청사진에 대한 즐거운 고민이 우리 앞에 놓인 당면한 문제점으로부터 관심을 벗어나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도 지울 수 없다.
6자회담의 본질은 북한의 핵 포기와 북미 관계정상화를 실현시키는 데 있다. 모든 프로그램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회담의 성과가 아무리 좋아도 북미관계가 악화되는 순간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점이 우리가 1994년부터 시작된 이 지루한 과정을 통해 배운, 무엇보다도 중요한 교훈이기 때문이다.
남미 순방에서 드러난 부시의 '고심'
다만 최근까지의 진행상황을 보면 북한 핵시설의 불능화 단계까지는 조심스럽게 낙관할 수 있을 것 같다. 방코델타아시아(BDA) 금융제재 문제가 풀리면서 60일 내에 취하기로 한 초기조치의 이행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사실 이 문제의 해결방안은 이미 1월 베를린 회담에서 큰 틀이 정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조치가 이행된 후부터 불능화까지는 좀 더 어려운 협상이 예상된다. 다음 협상단계에서 주고받을 품목 중에는 불능화와 같이 여전히 개념이 불분명한 사안에서부터, 테러지원국 해제 등 민감한 사안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속히 진행될 수 있는 초기조치와는 달리 이 단계부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고, 따라서 여러 정치적 이해관계가 개입될 소지도 많다. 최근 미국의 몇몇 하원의원이 성급하게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북한을 제외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하고 나온 것이 그런 사례 중 하나다.
그러나 불능화 단계까지 나아갈 수 있는 모멘텀은 북한과 미국 모두가 갖고 있다는 것이 낙관의 근거가 된다. 이라크 문제를 계기로 조지 부시 미 행정부가 외교정책을 조정해 가고 있는 것은 단기적인 것만은 아니다. 지난 주 진행된 남미 순방에서도 부시는 부드러운 태도를 계속 견지하면서 다양한 지원을 약속하는 등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인상을 심어줬다.
북한도 대외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빠진 미국을 계속 압박하는 길보다 협상을 추진하기로 결정한 것을 보면 그 협상의지는 눈앞의 어려움을 모면하기 위한 수준은 넘어서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같은 양자의 협상의지가 효력을 발휘한다면 불능화 단계까지는 본질적인 문제의 해결 없이도 서로의 이익을 교환하면서 협상국면을 유지하는 게 가능하다.
미국 입장에서는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북한을 삭제하는 등 북한에게 일정한 이익을 주는 동시에 북한과의 관계정상화 카드나 북한체제의 보장 여부에 대해 최종적 답을 주지 않을 수 있다. 북한 역시 영변 핵시설을 포기하며 미국의 체면을 세워줄 수 있지만 이미 개발한 핵은 계속 보유할 수 있을 것이다.
불능화 이후의 시나리오 두 가지
불능화 단계까지의 변화가 북미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인가? 낙관은 금물이다. 불능화 단계 이후에는 본질적인 문제가 본격적으로 부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북한이 이미 개발한 핵무기를 어떻게 처리할 것이며 북미 관계 정상화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그려볼 수 있다.
먼저 북한이 핵무기를 계속 보유하면서 북미 관계정상화를 추진하는 것이다. 이는 협상을 추진하는 미국, 특히 부시 대통령에게는 정치적 자살행위라는 점에서 가능성이 제로에 가깝다.
반대로 북한이 먼저 핵무기를 포기하고 북미 관계정상화가 뒤로 미루어지는 순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도 북한 지도부에게 자살행위에 가깝다는 점에서 역시 가능성이 제로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가능성을 제외한다면 다음의 두 시나리오가 남는다.
첫째,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인정하는 대신 핵확산에 초점을 맞추어 북한과의 관계를 유지하지만 북미수교는 뒤로 미루는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핵무기가 체제유지를 위한 가장 확실한 안전판이 되기 때문에 이러한 시나리오를 선호할 수 있다. 미국도 중동상황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런 시나리오를 배제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과 미국의 관계가 정상화되었던 과정을 돌이켜보면 이런 시나리오의 가능성을 더욱 무시할 수 없게 한다. 중국과 미국은 1972년 닉슨의 베이징 방문을 통해 관계정상화에 합의했으나 실제 수교는 1979년에 이뤄졌다. 중국과의 관계정상화에 적극적이었던 닉슨 대통령이 위터게이트 사건으로 낙마하고 미국이 정치적 혼란기로 접어든 것, 그리고 타이완을 포기하는 것에 대해 미국 내의 반발이 강했다는 것 등이 주요 원인이었다.
그런데 주목할 필요가 있는 점은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도 중국과 미국은 이미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양국이 모두 기본적으로 소련의 팽창을 안보의 가장 커다란 위협요인으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양국관계가 관계정상화 약속 이전의 대립관계로 되돌아가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런 오랜 협력과정에서 축적된 신뢰 때문는 1979년 수교로 이어질 수 있었다.
현재 북한과 미국의 관계는 그같은 협력의 경험이 빈곤하다. 따라서 북미관계는 매우 불안한 기초 위에 성립된 것이고, 따라서 관계정상화로의 모멘텀을 상실하면 언제든지 역진(逆進)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북미 관계정상화로 나아갈 수 있는 시나리오에 더욱 역점을 둘 필요가 있다.
둘째, 북한의 핵무기 포기와 북미수교를 동시에 실현시키는 시나리오다. 이는 현재 북한과 미국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합의이며 형식논리로 볼 때 매우 합리적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부시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 내에 북한의 핵무기를 해결하거나 이를 위한 로드맵을 완성하는 것으로 외교적 성과를 인정받을 수 있다.
문제는 이 합의에도 비대칭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관계정상화 이후에도 미국은 북한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정책수단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북한으로서는 마지막 안전판이 제거된 상황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미국의 다원주의 정치체제 자체가 북한에게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북한은 미국과 관계정상화를 이룩하고 개방을 추진하면 장기적으로는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겠지만 단기적으로는 여러 새로운 문제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중국이 개혁개방의 성공사례라고 하지만 1980년대에는 심각한 사회·정치적 문제에 시달렸고 사회·정치적인 통제력을 상실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따라서 북한 정권에게도 이 과정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가 커다란 문제가 될 것이며 이에 대한 자신감이 없으면 전략적인 결단을 내리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이 이러한 세세한 문제들에 답을 줄 가능성도 없다. 한국의 적극적 역할은 이러한 비대칭적 성격을 메워주는 데 있다.
한국 대통령 선택의 기준 : '기회를 잡을 능력이 있는 자'
북미관계를 정상화 하기 위해서는 한국이 북한에 대해 더욱 대담한 접근을 할 필요가 있다. 즉 북한의 경제체제가 빠른 속도로 정상화되고, 개혁·개방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지원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이미 북한판 마샬플랜과 같은 방안이 아이디어 수준에서 많이 제출됐지만 지원 프로그램과 북한의 개혁을 연계시킬 수 있는 더욱 구체적인 계획이 준비되어야 한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이 다시 미국과의 마찰을 부를 가능성을 우려하겠지만 그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본다. 우선 불능화 단계 이후를 대상으로 하며, 동시에 핵 폐기로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미국이 북한의 체제 변화를 추구했던 시기에 나타난 한국과 미국의 갈등이 남북협력에 있어서는 심화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불능화에서 북미 관계정상화로 나아가는 국면이 한국의 대선일정과 겹칠 가능성이 많고, 이와 관련해 너무도 많은 불확실성이 우리에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역할이 약화되는 것은 미국과 북한이 따로 만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북미관계가 좋아질수록 우리의 역할이 증가할 수도 있다), 우리의 방침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협상에 참여할 경우에 발생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차기 대통령을 판단하는 주요 근거는 이 문제에 대해 얼마나 확고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으며, 수십 년 동안 우리를 억눌러 온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을 능력이 있는가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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