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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퇴양난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道'] 제10장 지극한 정치로 가는 길<52>

과천 기방을 떠난 양팽손은 한강을 건너지 못하고 뒤돌아서야 했다. 나룻배를 타는 도선장에서는 포교와 포졸들이 삼엄하게 검문과 검색을 하고 있었다. 배를 타려는 사람들이 지방에서 꾸역꾸역 밀려들어 장사진을 이루었지만 줄은 좀체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차가운 강바람이 몰아칠 때마다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불만을 터뜨렸다.
  "저놈은 포교에게 돈을 썼는지 새치기를 하고 있네, 그려."
  "맞아, 뒷돈이 오갔어. 내 눈으로 봤다니깐."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방망이를 든 포졸이 다가오자 입을 다물어버렸다.
  "어느 놈이 지껄이고 있느냐. 저 분은 지체 높은 나으리시다."
  어디선가 나타난 가마꾼들은 '물럿거라! 물럿거라!'를 외치고 있었다. 줄이 줄어들지 않고 있는 것은 벼슬아치들이 느닷없이 나타나 끼어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어느 누구 하나 불평만 터뜨릴 뿐 앞으로 나서서 따지지는 못했다. 줄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포졸들이 망아지 다루듯 발길질을 했다.
  "이보시오. 오늘 중으로 배를 타려면 줄을 똑바로 서시오."
  성 안에 특별 경계령이 내렸는지 포장(捕將)이 말을 타고 나타났다가는 포교에게 검문을 철저하게 하라고 소리치고는 사라졌다.
  "불손한 놈이 있으면 절대로 도선시키지 말라."
  "네, 포장 나으리."
  포졸들은 사람들이 소지하고 있는 호패를 검사하고 있었는데, 미소지자는 신분이 확인될 때가지는 절대로 승선을 시키지 않고 있었다. 양팽손은 호패를 가지고 나서지 않았으므로 입맛을 다시며 돌아서야 했다. 장사진을 이룬 줄의 사람들을 둘러보았으나 자신의 신분을 확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몇 사람들은 강바람이 몹시 차가웠으므로 더 기다리지 못하고 대열에서 이탈하기도 했다. 일부는 강가에서 나뭇가지를 주워와 불을 피우며 추위를 견디었다. 양팽손은 슬그머니 화가 났다. 대감 같은 품계 높은 관리가 나타나면 배에 탄 양인들은 모두 내려야 했다. 양팽손은 포교 한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이보시오. 지금 한 나절을 기다리고 있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오."
  "알 것 없소. 우리는 위에서 시킨 대로 하고 있을 뿐이오."
  "이대로 기다리가는 얼어 죽고 말겠소."
  "얼어 죽지 않으려면 돌아가면 될 거 아니오. 우리도 추운데 이런 일을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시오."
  "제기랄!"
  포교는 짜증이 난 듯 모래를 발길로 걷어찼다. 모래는 바람에 날려 양팽손의 눈을 때렸다. 이번에는 양팽손이 '제기랄!' 하고는 눈을 부비며 모래를 닦았다.
  그때였다. 포교가 가마를 향해 달려가더니 고개를 숙였다. 앞 가마에서 내린 사람은 수염이 허연 벼슬아치였다. 몸집이 우람한 그는 강바람에 날리는 자신의 수염을 만지작거리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줄을 선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두 손을 크게 저으며 오고 있었다. 그 거만한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았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포장이 바람같이 나타나 고개를 숙였다.
  "대감, 어인 일이십니까."
  "입궐하는 중이네. 이곳은 아무 이상이 없는가."
  "수상한 자를 모두 가려내고 있사옵니다. 그러니 안심하시옵소서. 대감."
  "어서 배를 대시게, 전하가 찾으시니 급히 입궐해야 한다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즉시 배를 대도록 하겠습니다."
  "날도 차가운데 고생이 많네."
  그가 다가오자 포장은 배에 가득 탄 양인들을 모두 내리게 명했다.
  "전하께서 불러 가시는 길이라 하니 너희들은 속히 배에서 내려라. 어서."
  그를 뒤따라 온 두 번째 가마에서는 젊은 여인이 내렸다. 사람들이 젊은 여인의 미색을 보고는 추위에 떨면서도 감탄을 했다. 달덩이 같은 얼굴은 복사꽃처럼 불그스레했고, 땋아 올린 머리에 꽂은 황금과 칠보 장식들은 눈부시게 번쩍였다. 양팽손은 그 여인이 과천 기방의 지월심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저 자가 박원종이라는 말인가.'
  양팽손은 소옥에게 지월심이 박원종의 기첩이라고 들었던 것이다. 지월심은 자신을 돌봐주는 박원종을 따라 도선장까지 나온 듯했다. 박원종이 배에 오르고 나자 사람들 입에서 또 불만이 터져 나왔다.
  "임금님도 쥐락펴락하는 박원종이 아닌가. 주지육림에 빠져 사는 저 대감도 갈 날이 멀리 않은 것이야."
  "저년은 아마 박 대감의 기첩일 것이야."
  지월심은 박원종이 탄 배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총은 아랑곳하지 않고 늙은 박원종을 전송하고 있었다. 지월심이 돌아서더니 양팽손을 보고는 잠시 멈칫거렸다. 양팽손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을 테지만 그녀는 본능적으로 무언가 냄새를 맡은 듯했다. 지월심이 다가와 말했다.
  "어디서 오는 길이옵니까."
  "먼 곳에서 오는 길이오."
  "소옥이를 아시옵니까."
  "소, 소옥이를 말이오."
  양팽손은 더듬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호호호. 이제 보니 우리 집에 들었던 손님 같사옵니다. 그렇지 않사옵니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오."
  양팽손은 순식간에 몰려든 사람들의 눈이 따가웠으므로 그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지월심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소옥이에게 얘기를 들었사옵니다. 과거를 보기 위해 올라오셨다는 것을."
  "사실은 그렇소."
  "그렇다면 어서 배를 타셔야지요. 고지식하게 줄을 서 기다린다면 아마 오후 늦게야 배를 타실 것이옵니다. 오늘을 넘길 수도 있고요."
  "그게 무슨 말이오."
  "배를 타는 것도 순서가 있사옵니다. 벼슬이 있어야 하고, 벼슬이 없다 하더라도 유생이어야 하고, 양반 양인이어야 하고, 그 다음이 중인, 천민 순입니다."
  "난 호패를 가지고 오지 않았소. 그래서 배를 타지 못하고 있는 것이오."
  "호호호. 여기 호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사옵니까. 호패를 조사하는 것은 검문을 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옵니다."
  성종 때 세금과 군역을 공평하게 부과하고 유민을 방지하기 위해 시행된 적이 있었던 호패제도는 연산주 때 흐지부지되고 말았는데, 그 모순투성이의 제도를 느닷없이 부활하여 조사하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신분에 따라 2품 이상은 아패(牙牌)를, 4품 이상은 각패(角牌)를, 5품 이상은 황양목패(黃楊木牌)를, 7품 이상은 소목방패를, 서인 이하는 대목방패를 소지하고 다니도록 한 것이 호패제도였던 것이다. 사람들이 웅성거리자, 포교가 재빨리 달려왔다.
  "거기서 무엇들 하느냐. 줄을 서지 않고 무엇들 하느냐."
  그러나 포교는 지월심을 보더니 안면이 많은 듯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물었다.
  "무슨 일이오."
  "이 선비님을 잘 모셔야 합니다. 평성군 대감님을 뵈러 가는 분입니다."
  "그러시오. 알겠으니 걱정 마시고 가시오."
  갑자기 양팽손은 포교가 안내하는 대로 맨 앞줄에 서서 배를 기다렸다. 그러나 양팽손은 지월심이 사라지고 난 뒤 다가온 배를 타지 않고 앞줄에서 망설이었다. 기첩의 도움을 받는 것도 내키지 않았고, 새치기를 해서 강을 건넌다는 것도 도학자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빨리 배를 타시오. 뒷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지 않소."
  "먼저 타시오. 난 내일 다시 와야겠소."
  
  양팽손은 그날은 강을 건너지 않기로 하고 도선장을 떠났다. 그런 뒤 노량진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주막을 찾아들었다. 호주머니 속에는 천안의 김 진사가 준 노잣돈이 거의 그대로 있었으므로 숙박하는 데 걱정이 없었던 것이다.
  "혼자 자는 방에 드시겠수, 아니면 여럿이 합숙하는 방으로 드시겠수."
  "하룻밤 묵을 것이오. 그러니 여럿이 자는 방도 무방하오."
  양팽손은 돈을 아끼기 위해 합숙을 원했다. 서울의 민심도 들어 보고도 싶었고, 길동무가 생길지도 몰랐다.
  양팽손의 예상은 적중했다. 주인에게 소개되어 들어간 방에는 먼저 들어와 있는 손님들이 큰소리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역시 어디를 가나 사내들이 모이면 정치를 하는 대신들이 입도마에 올랐다.
  한강에서 포졸들이 검문하고 있는 얘기도 나왔다. 그러니까 한 달 전에도 조정이 한바탕 시끄러웠던 모양이었다. 중종이 즉위한 해부터 매년 반정공신을 향한 역모사건이 터지더니 급기야 한 달 전에는 왕실에서 임금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사건이 터져 대궐이 지금까지 뒤숭숭하다는 것이었다.
  "임금님을 죽이려고 왕실 종친이 화살촉을 30개나 만들었다고 합디다. 그것도 임금님의 덕을 가장 많이 사는 왕실 종친 놈들이 말입니다."
  "에구, 소문을 어떻게 믿나. 가만히 있어도 종친부에 들어 편히 먹고 사는 종친들이 무엇 때문에 딴 마음을 먹었겠소. 사냥하려고 그랬다 하더구먼."
  "사냥이라니, 당근질을 하고 주리를 틀어 전모를 다 자백받았다고 합디다. 이번 사건은 역모가 분명합니다."
  "아무 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임금님이 왕실의 질서를 잡기 위해 침소봉대한 사건이라니까요."
  방에 든 손님들은 두 패로 갈라져 있었다. 중종을 옹호하는 쪽은 '왕위를 넘보는 놈들은 씨를 말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반대편은 '임금이 아무 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대신들에게 명하여 공포감을 조성하고 피를 부르고 있다'고 불평했다.
  양팽손은 누가 옳은지 헷갈렸다. 화살촉 30개를 놓고 임금을 위해할 목적으로 만들었다는 주장과 단지 사냥을 하려고 만들었다는 주장이 팽팽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종과 추관들은 역모로 결론을 내렸다. 당사자들에게 사지를 찢는 극형을 내리고 연루된 종친들은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한강 도선장에서 검문을 강화하고 있는 것도 그 여파가 분명했다.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자는 취지에서 도성 안을 출입하려는 사람들에게 호패를 조사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검문은 기사년을 넘기고, 중종 5년인 경오년에 들어서도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유생들의 악행이 문제가 되었다. 유생들이 공부는 하지 않고 절로 가 불경을 훔치거나 기방에 출입을 하여 행실이 몹시 문란해 진 것이었다. 연산주 때부터 부와 권력을 세습한 벼슬아치들의 자녀인 유생들은 곳곳에서 행패를 부리거나 사고를 쳤다.
  기사년 12월에 발생한 사건도 그랬다. 청계사의 주지 일정(日精)이 불경과 놋쇠 그릇을 도둑질한 유생을 고발하여 사건은 해를 넘기며 경오년 벽두부터 시끄러웠다. 청계사를 놀러갔던 유생들이 절에서 도적질을 한 바 주지 일정이 절의 종을 시켜 포도청에 고발하였던 것이다.
  당시 청계사는 선교 양종의 명맥을 유지하던 사찰이었다. 연산주는 서울은 물론 서울 가까이에 있는 모든 사찰을 폐하고 임시관청으로 사용하였는데, 그때 청계사만은 사찰로 허락하여 신도들이 드나들게 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청계사의 종 가운데는 내수사의 종도 있었다. 중종의 어머니인 자순대비의 배려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불심이 돈독한 중종의 어머니 자순대비는 청계사에 상궁이나 궁녀, 내수사의 종을 보내 기도하게 하고 물자를 보시하곤 했다.
  중종은 숭유(崇儒)를 장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비의 숭불(崇佛)을 묵인해 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 대비의 마음을 간파한 포장이 청계사에 간 유생들의 악행을 중종에게 직접 아뢰어 사건은 복잡하게 돼버렸다.
  처음에 중종은 불교를 믿는 대비와 조정의 대신들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중종은 내금위장 이종례의 보고를 받았을 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었다.
  "김동의 고소를 받아 절 물건을 훔친 사람의 뒤를 밟아 보니 세 곳이 다 유생의 집이었고 훔친 물건은 불경뿐이었습니다."
  내금위장은 다른 물건이라면 도둑이 되겠지만 불경을 가져간 것은 크게 흠이 될 것이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일정이 고발한 놋쇠 그릇의 행방은 일부러 흐지부지해버렸다. 놋쇠그릇을 훔쳤다면 그것은 불경과 달리 명백한 도적질이기 때문이었다. 중종 역시도 마음속으로는 내금위장의 태도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만약 유생이라면 불경만 가져갔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의 아들인가를 심문해서 서면으로 보고하라."
  중종은 유생들이 불경만 가지고 간 것이라면 문제 삼지 않겠지만 그 부모는 자식을 바르게 가르치지 못했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단하여 그렇게 명했다.
  심문은 포도청에서도 했으나 다시 혐의가 있는 유생 조문신, 유분, 김영홍 등 3명을 불러다 놓고 승정원에서 맡아 하였다. 동부승지 이희맹이 조사한 결과를 보고하자 중종은 유생들보다는 시종 그 아버지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그러자 아침경연 자리에서 시독관 김정이 말했다.
  "지난번에 청계사 중은 막된 아이들이 불경을 도적질해 갔다고 하여 임금에게까지 보고하게 하여 그 집을 수색해 본 결과 도적질한 물건은 없고 몇 권의 불경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유생이 이단을 배척하여 불경사본을 빼앗은 것입니다. 아름다운 일은 아니나 이와 관련하여 전하께서 '부형에게 죄를 주어 유생이 늘 학당에 나가 있고 절간에 드나들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 일은 법을 가지고 다스리거나 구속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유교를 숭상하고 도를 존중한다면 자연히 교화가 잘 되어 점차 감화될 것입니다. 나라에서 인재를 길러내는 일을 고작 유생을 점검하는 방법으로 하시겠습니까. <상서>에 이르기를 '다섯 가지 지시를 반포하되 너그럽게 하라'고 하였으니 학문을 가르치는 데도 이렇게 해야지 왜 유생의 부모에게 법을 적용하려고 합니까."
  그러나 중종은 아무 절에나 가 놀기 좋아하는 유생들의 방탕한 행태를 끝내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요즘 유생들이 학당이나 성균관에 나가지 않고 있다. 포도대장이 유생을 잡아 따지니 '나뿐만 아니라 이전에도 절에 가 불경을 가져온 사람이 많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고서야 글은 언제 읽겠는가. 학당에 나가 공부에 힘쓰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명하였다."
  중종의 명은 대간들이 시비를 못하게 방어하는 측면이 강했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대비의 사정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불심이 돈독한 대비는 절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내시를 시켜 그곳의 사정을 알아오게 하여 중종을 통하여 시정케 하였던 것이다. 그 한 예로 유생들이 정릉에 있는 흥인사의 불경을 훔쳐갈까 봐 내수사로 옮겨 놓도록 한 일도 있었다. 실제로 흥인사에는 선대왕 때부터 왕실의 보물을 쌓아두었는데 유생들과 절 부근의 주민들이 도둑질한다는 소문이 있어 대비가 내시 김귀지를 보내 조사케 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기세등등한 유생들의 반발이 드셌다. 정릉 부근에 사는 유생들이 몰려와 김귀지에게 욕을 하고, 김귀지가 데리고 간 사람들을 묶어놓고 구타까지 하였다.
  더구나 유생 중 한 명이 '이 절간이 어떻게 되나 보자'고 협박한 다음 날 밤 초경에 불이 나 5층 사리각이 전소돼버렸다. 그 불빛이 어찌나 치솟았는지 도성 안 골목까지 환하게 비췄다. 대비는 내시에게 수모를 준 것까지는 참아 넘기려고 했으나 사리각이 전소되자 노발대발했다. 곧 중종을 불러 엄하게 추궁할 것을 당부했다.
  중종은 영의정 김수동, 좌의정 유순정, 우의정 성희안, 우참찬 신윤무 등을 불러놓고 명하였다.
  "대비가 과인에게 말하기를 '얼마 전에 유생들과 건달들이 여러 날 정릉 흥인사에 드나들면서 옛날부터 전해오는 보물과 불경을 훔쳐간다고 했고, 내시를 시켜 돌아볼 때에도 유생들이 버젓이 물건을 훔쳐가면서 도리어 돌멩이로 내시와 따라간 사람들을 구타하고 욕설까지 하더니 이튿날 밤에는 절간을 불태워버렸다. 이는 내가 범죄 사실을 조사한다고 하였는데도 감히 이런 짓을 하였으니 통분하기 짝이 없다. 보관해 오던 물건은 아까울 것이 없으나 오래된 절간이 하루아침에 몽땅 타버린 대하여 도성 안이 놀랍게 여기고 있다."
  흥인사는 본래 신라 고찰이었는데 조선의 태조가 신덕왕후의 죽음을 슬퍼하여 절 안에 5층 사리각을 짓고 그 안에 보물과 불경을 두게 하였던 왕실 원찰이었다. 그러나 연산주 때부터 절을 폐하여 분사복시(分司僕寺)란 관청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유생들이 사리각을 방화하여 허망하게 사라지게 한 것이었다.
  내시 김귀지를 욕보인 유생은 윤형(尹衡) 등이었는데, 승려들을 협박하고 절의 물건을 갈취하기로 유명한 건달과 다름없는 무뢰배들이었다. 대비의 눈치를 보아가며 못된 유생들을 나무라던 중종은 이제 드러내놓고 분노하였다. 그만큼 일부 유생들의 행동은 파렴치하고 악행을 일삼고 있었다.
  "유생들이 이단을 배척하여 불경을 빼앗을 수는 있으나 일찍이 관청 건물을 불태운 일은 없었다. 성 안에 있는 절간을 제멋대로 불을 놓았으니 어디 털끝 만치인들 조정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겠는가. 까닭 없이 불을 놓는 것도 옳지 않은데 더구나 대비의 지시에 감정을 가지고 감히 이렇게 할 수 있는가. 옛말에 '쥐를 잡자고 해도 그릇을 깨칠까 봐 삼간다'고 하였다. 대비가 보낸 내시가 아무리 보잘것없어도 임금의 지시는 존중해야 할 것이다. 어쩌자고 임금을 업신여기는 것이 이 지경까지 되었는가. 조정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대비에게 욕을 보였으니 그 죄를 어떻게 이루 다 말하겠는가. 이것은 참으로 과인이 덕이 없는 까닭이다. 이는 아버지나 형들의 세력을 믿고 조정을 우습게 여겨 꺼리는 데가 없기에 그런 것이다."
  중종의 화가 여기까지 치밀었으나 좌우에 늘어선 대신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는 중종을 더욱 분노케 하였다.
  "이 문제를 엄중하게 따지자면 반역할 마음을 먹은 것이나 다름이 없고 경하게 치자면 도적이나 다름이 없으니 어찌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하겠는가. 그런데도 조정에 말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이래서야 되겠는가. 예로부터 일부 유생을 미친 녀석이라고도 하였으나 이들은 조정에서 써야 할 인재인데 어찌 사리를 아는 사람의 소행이라고 하겠는가. 이는 아마도 유생으로 가장한 자들의 소행인 것 같다. 조정의 뜻은 어쩐지 모르겠다. 영의정이 의금부에 가서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하라."
  "신이 직접 국문하여 사실을 보고하겠사옵니다."
  김수동은 그렇게 아뢰었으나 대부분의 대신들은 절간의 화재 때문에 유생을 취조하는 것은 이단을 비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기었다. 영의정 김수동이 군말 없이 중종의 지시를 받고 있는 것을 오히려 애석하게 여길 정도였다.
  그러나 중종은 대비의 눈치를 보아서가 아니라 해이해진 유생들의 타락을 방관할 수만은 없었다. 중종은 유생들의 짓이라고 단정하고는 즉시 4부학당 중에서 중학(中學), 서학(西學)의 유생들과 절 이웃의 4방 열 집에 사는 유생과 주민들을 함께 잡아다가 의금부에 가두도록 명하고, 즉시 명을 집행하지 않은 의금부 경력 김보(金俌)를 파면시켰다.
  그래도 중종의 조치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윤형을 잡아 곤장을 쳐서 귀양 보내고, 잡혀온 그 나머지 유생들은 매를 치거나, 과거시험 자격을 정지시키도록 명하였으나 대간과 삼공(三公)과 6조의 판서들이 날마다 합문 밖에 엎드려 '유생들이 불경을 가져왔다 해서 이것으로 화재까지를 그들의 짓이라고 의심해서 매질을 함부로 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고 물러서지 않고 간함으로 그들의 죄를 모두 면해주었던 것이다.
  중종은 또 한번 진퇴양난에 빠졌다. 불교를 믿는 대비와 조정 대신들 사이에 있는 중종의 갈등이자 번민이었다. 그러나 대비를 중심으로 대궐의 여인들은 불교를 버리지 못하였다. 불교에는 유교에 없는 흡입력이 있었다. 현실의 소원을 성취시켜주는 기도가 있고, 사후에도 안심할 수 있는 극락세계가 있었다. 중종의 어머니 자순대비를 따라서 불교를 믿는 여인이 또 있었으니 그가 바로 중종의 둘째 계비 문정왕후였다.<계속>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는 화순군 홈페이지와 동시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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