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최고 국제관계 전문가로 꼽히는 미 하버드대 케네디 스쿨 산하 밸퍼 과학·국제 관계 연구소의 그레이엄 앨리슨 소장 역시 미국의 노선변경 조짐에 주목하며 부시 행정부가 이번 '2·13 합의'를 통해 " '현실세계(reality zone)'로 향하는 의미 있는 첫 걸음을 뗐다"고 평가했다.
부시 행정부가 '악행에는 보상이 없다', '북한과 양자회담은 없다' 등 네오콘의 지지를 받으며 고집했던 원칙을 깨고 북한과의 양자회담을 통해 단계적 보상책을 제시한 것은 "실패한 과거 정책으로부터의 탈피 노력"으로 판단됐다. 명분을 앞세운 강경론이 현실에선 먹혀들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앨리슨 소장은 부시 행정부의 이같은 변화가 대 이란 정책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네오콘들 사이에서는 공습 주장이 난무하지만 이번 6자회담에서 보여준 '변화된 태도'대로라면 이란과의 협상 여지도 없지 않다는 전망은 다른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제기되고 있다.(14일자 기사<부시, '또 다른 惡' 이란과도 협상할까?> 참고)
다음은 6자회담 합의문이 발표된 13일 미국 우파 매체인 <내셔널 인터레스트 온라인> 히메나 오르티즈 편집장과 앨리슨 소장의 인터뷰 전문이다. 원문은 <내셔널 인터레스트> 웹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오르티즈: 비확산의 관점에서, 또 북미 간 외교정책의 관점에서 2.13 합의는 어떤 의미라 할 수 있나? 비확산의 관점에서 북한이 합의한 조치는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이며, 외교정책의 관점에서 이 합의는 부시 행정부가 기존 행동방식을 탈피하려는 의지를 보인 것인가? 당신은 공동집필한 지난 에세이에서 부시 행정부의 외교 방식을 '절대론자(absolutist)', '근시안적 자세' 등으로 표현했다.
앨리슨: 조지 부시 행정부가 '현실세계'로 향하는 의미 있는 첫 걸음을 뗌과 동시에, 과거 실패한 접근법에 과감하게 이별을 고한 것이다. 훌륭한 첫 걸음이다. 이것이 좋은 소식이라면, 나쁜 소식은 북한이 지난 4년 간 핵폭탄 8개 상당의 플루토늄을 새로 만들어냈으며 한 번의 핵 실험을 했다는 것이다.
북한 입장에서 이번 합의는 하나의 작은 조치이다. 이번 합의가 이미 클린턴 행정부와 영변 원자로 동결키로 약속했던 1994년 합의의 반복이라는 점에서 큰 조치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북한은 이미 핵실험을 감행한 상태이기에 더욱 그렇다. 북한은 핵폭탄을 총 10개 가량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갖고 있고 2차 실험을 준비 중일지도, 혹은 핵폭탄의 또다른 연료인 고농축 우라늄 생산을 계속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확산의 관점에서 이번 합의는 긍정적이다. 북한이 스스로 북한 내 모든 핵 관련 활동들을 중단하겠다고 약속한 9.19 공동선언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말과 행동이 달라 아직 합의의 진가를 측정하기엔 한계가 있다. 비확산의 관점에서 앞으로 벌어질 일은 상당부분이 협상하기에 달렸다는 얘기다. 과거 경험에 비쳐보면 북한이 핵무기와 핵물질을 실질적으로 모두 제거하기까지는 아직 가야할 길이 먼 것 같다.
오르티즈: 이번 합의에 따라 북한은 핵 프로그램에 관한 모든 목록 공개를 요구받을 것이다.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으로 무기급 핵연료 제조를 해 왔다는 미국 측의 주장의 가부를 증명해 내야할지도 모른다.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때문에 2002년 제네바 합의가 깨졌다는 것이 미국의 주장이니 말이다. 고농축 우라늄에 대한 미국의 의구심이 해소될 수 있을까? 앞으로는 핵무기 비확산이나 정보와 관련한 오판 때문에 미국 정부가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이게 될 가능성은 없을까?
앨리슨: 북한이 핵폭탄 생산 물질을 제조하고 있다는 등의 미국이 갖고 있는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과 관련한 정보는 확실한 게 아니다. 그런 시설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발견된 바가 없기 때문이다. 북한이 그런 시설을 갖고 있으리라는 추정은 파키스탄 핵 기술자인 압둘 카디르 칸이 북한에 관련 기술을 판 것으로 알려진 데서 비롯됐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북한이 농축 우라늄 시설과 관련한 작업을 진행해 왔으리라 추정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그러나 그 시설이 어디에 있는지, 최근 상태는 어떠한지 등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2002년 미 상원이 중앙정보국으로부터 받은 보고서는 2005년 중반이 돼야 그 시설이 가동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따라서 지금은 그러한 설비가 설치돼 가동되고 있을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으나 정확한 실태는 알 수 없다.
13일 합의에 따르면 북한은 보유하고 있는 모든 핵시설과 핵물질의 목록을 공개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북한이 이를 할지, 한다면 언제 할지는 불확실하다. 우라늄 농축 시설에 관한 북한의 설명이 불충분할 경우 상황은 어떤식으로 진행될지도 알 수 없다.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폐기라는 미국의 목표와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 간의 괴리는 이런 것이다. 이번 합의 역시 궤도를 이탈할 수 있다는 얘기다.
오르티즈: 이번 합의가 그간 별 성과를 내지 못했던 전 세계적 비확산 노력에 긍정적인 모멘텀을 제공할 수 있을까? 또 이란에 미칠 영향은 어떻게 전망하나?
앨리슨: 지금까진 긍정적이다. 일단 일 년에 핵폭탄 두 개를 만들 수 있는 양의 플루토늄 생산이 중단됐다. 2002년 후반 제네바 합의가 깨진 이후 플루토늄 생산은 계속돼 왔다. 적어도 이 영변원자로에서 더 이상 플루토늄이 생산되는 것은 막은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이번 합의는 비확산으로 가는 긍정적인 조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번 동결 합의는 북한이 이미 폭탄 10개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갖고 있고 핵 실험까지 한 이후 이뤄졌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합의를 이뤘지만 여전히 북한은 핵폭탄을 만들 재료를 갖고 있고 그 폭탄을 시험해 보려 할 것이다.
그렇다고 북한의 핵보유가 이란의 핵보유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오르티즈: 덧붙이고 싶은 말은?
앨리슨: 이번 합의는 부시 행정부가 실패했던 과거 정책으로부터 완전히 탈피하려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이번 합의를 정면 비판한 존 볼튼 전 유엔대사의 발언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볼튼 전 대사는 "이번 6자회담 합의 사항은 부시 대통령의 기본정책에 반한다"고 비판했는데, 맞는 말이다. 이번 합의는 볼튼 전 대사나 딕 체니 부통령 등이 지지했던 부시 행정부의 실패한 정책들의 기본 전제를 역행하는 내용이다.
몇 가지 중요한 변화들이 이런 판단을 가능하게 한다. 첫째, 부시 행정부는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의 폐기를 필수전제조건으로 내세웠었다. 무장해제가 우선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또 선행에 대한 당근을 제공치 않기로 결정했었다. 사실상 그들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악행에 대한 채찍도 없다는 점도 보여줬다. 세 번째로 부시 행정부는 북한과 양자회담을 하지 않겠다고 주장했었다. 나는 부시 행정부의 이 같은 행동들이 원칙적으로는 칭찬을 받을 만하나 현실적인 문제 해결에는 실패한 것이라 생각한다.
부시 행정부는 실패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들을 얻은 것 같고 앞으로 이란에 관한 정책에도 연관이 될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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