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의 동헌이 보일 무렵부터 눈이 내렸다. 동헌을 지키는 포졸은 눈을 맞으면서도 꿈쩍을 안 했다. 땅에 내리는 대로 쌓이는 탐스런 함박눈이었다. 그러나 양팽손에게는 갈 길을 더디게 하는 고약한 눈이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더 걸어야 했지만 양팽손은 할 수 없이 주막을 찾았다. 그렇다고 주막에 들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눈을 맞고 가기에는 무리였고, 배도 고프고 발목이 아파 천안쯤에서 쉬어야 했다. 무리하며 강행군하여 걸었더니 다리에 먼저 이상이 왔다.
천안의 삼거리 저잣거리에는 유독 숙박을 하는 큰 주막들이 많았다. 여느 주막이나 서울과 지방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양팽손은 길모퉁이의 큰 주막으로 들어가 주뼛거리며 물었다.
"김 진사 댁이 어디쯤 있습니까."
"무슨 일로 김 진사 댁을 찾습니까."
주막주인은 마치 김 진사 댁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오히려 양팽손에게 캐물었다. 양팽손은 경계하지 않고 말했다.
"하룻밤 신세를 지려고 합니다."
"여기서 가까운 곳이니 몸이나 좀 녹이고 가구려."
주인은 호의적이었고, 말투로 보아 천안 토박이는 아니었다. 양팽손에게 친절을 베푸는 그는 경기도 사람이 분명했다.
"저 사람들도 모두 서울 가는 객들이오."
"왜 모여 있는 것입니까."
"눈도 오고 하니 말벗 삼아 술 한 잔 하고 있는 게지요."
"난 그럴 시간이 없소."
사실 양팽손은 시간보다는 호주머니에 돈이 없었다. 장성재를 넘으면서 도적떼에게 돈을 다 털려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양팽손은 주막 안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했다. 그런 그의 사정을 눈치 챈 주막주인이 말했다.
"이곳은 나라백성이라면 누구라도 외상을 준다오."
"난 그럴 생각이 없소. 어서 김 진사 댁이나 가르쳐 주시오."
"바로 저기 솟을대문이 있는 대갓집이오."
양팽손은 주막을 나와 걸었다. 그러나 주인은 수중에 돈이 없는 양팽손을 한 번 믿어보려는 듯 바짝 붙어 말했다.
"내가 안내해 드리겠소. 김 진사 댁은 무엇 하러 가시오."
"하룻밤 자러 갈 뿐이오."
양팽손은 천성적으로 거짓말을 못했다. 그러자 주막 주인이 시골뜨기인 양팽손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말했다.
"손님, 과거를 보러 가는 길이구먼."
"그렇소."
"손님 얼굴을 보니 그렇게 쓰여 있소. 하하하."
"알아맞히는 것을 보니 놀랍소."
양팽손은 걸음을 멈추고 그제야 주막주인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손님을 돕고자 따라온 것이니 무뢰배 바라보듯 하지는 마시오."
"아, 그리 보였다면 사과하겠소."
"그렇다고 사과할 것은 없지요. 주막을 몇 년 하다 보니 사람 보는 눈이 생겼을 뿐이지요."
"저를 돕겠다고 하시는데 무엇을 돕겠다는 것이오."
"그런 얘기를 여기서 꼭 해야겠소. 부귀영화를 손에 잡느냐 마느냐 하는 얘기인데 말이오."
"부귀영화라니, 난 문과가 아니라 고작 생원시를 보려는 사람이오. 주인장께서는 날 잘못 본 듯하오."
"생진사시만 급제해도 선비 대접을 받고 미관말직이지만 벼슬자리를 얻는 것 아니오. 생진사시라면 더욱더 잘됐소."
양팽손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수중에 가진 것이 없으니 더 물어볼 염치가 없었다. 하기는 과거 문제가 사전에 유출되어 시험 시기를 다음해로 넘긴 적도 있고 보면, 주막주인의 얘기를 무시할 수만도 없었다. 시험관이 주막주인을 통하여 문제 장사를 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양팽손은 고개를 돌렸다.
"못 들은 것으로 하겠소. 그러니 돌아가시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어찌 그냥 돌아가겠소. 김 진사 댁까지 안내하고 가리다."
"알아서 하시오."
주막주인은 김 진사 댁에 이르러 솟을대문 앞에 쌓인 눈을 쓸고 있던 아랫것들에게 무어라고 이르더니 곧 물러갔다. 양팽손은 그가 사라진 쪽을 한 동안 응시하며 돌아섰다. 눈발이 더 굵어져 벌써 솟을대문은 고깔을 쓴 것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가 무어라고 양팽손을 소개했는지는 모르나 아랫것들이 공손하게 말했다.
"진사 어르신께서 출타 중이니 잠시 사랑방에서 기다리시오."
"언제 오시는가."
"저물기 전에 오신다고 했습니다요. 그래서 대문 앞 눈을 쓸고 있습지요."
양팽손은 사랑방으로 안내되어 여자 아랫것에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구마를 새참으로 받았다. 양팽손은 고구마를 순식간에 몇 개를 먹고는 물을 한 그릇 마셨다. 그제야 속이 더부룩하니 차고 허기가 가셨다. 소문대로 김 진사는 지나가는 객들의 그림과 글씨를 좋아하는지 방 한쪽에는 아예 벼루와 한지가 한 아름이나 놓여 있었다.
양팽손은 몸이 물 먹은 솜처럼 쳐지는 피로를 느꼈다. 게다가 식곤증까지 겹쳐 눈이 사르르 감겼다. 몹시 피곤했던지 금세 잠이 들었고 꿈까지 꾸었다. 꿈속에 길 떠난 능주의 풍경이 아련하게 나타났다. 용머리를 휘감고 흐르는 지석강에도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강가 갈대밭에는 새들이 낮게 날고, 대나무 숲으로 둘러쳐진 초가에는 저녁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차 달이는 동자가 휘어진 노송 아래서 자신을 부르나 그는 귀 먹은 듯 삿갓과 도롱이 차림으로 눈 내리는 강에서 조각배를 탄 채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지나가는 바람결처럼 짧은 꿈이었다. 누운 채 잠깐 코까지 골았다. 그윽한 꿈에서 깨어난 양팽손은 꿈의 풍경이 하도 소쇄하여 벼루에 물을 붓고는 먹을 갈았다. 조금 전에 꾼 꿈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김 진사가 헛기침을 하며 문을 두드린 것은 그림을 다 그리고 붓을 막 벼루 물에 헹구고 있을 때였다. 출입하는 모양새로 보아 그가 바로 김 진사라는 것을 양팽손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양팽손은 일어서서 김 진사에게 고개를 숙였다.
"능주에 사는 양팽손이라 하옵니다. 서울 가는 길에 들렀사옵니다."
"먼 데서 아주 귀한 손님이 왔구먼. 어서 앉으시오."
"절 받으십시오."
"절이라니요. 정 하시겠다면 맞절을 하십시다."
그러나 김 진사는 소문대로 그림 수집에 관심이 많았다. 양팽손의 그림을 보더니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아니, 손님이 이 그림을 진정 여기서 그렸단 말이오."
"방금 그렸사옵니다."
"우리 집에 있는 모든 그림을 손님에게 주겠으니 이 그림을 나에게 주시오."
"과찬이십니다."
"과찬이 아니오. 일찍이 궁중화사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사흘 만에 그렸다는 <몽유도원도>를 본 바 있소. <몽유도원도>를 본 이후로 살아생전에 이런 수작은 처음이오."
"안견이 그림을 잘 그렸다는 것을 듣기는 했소만."
양팽손은 안견의 그림을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인품을 비루하게 여겼으므로 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안견과 자신이 비교되고 있자 양팽손은 은근히 거부감을 느꼈다. 양팽손은 얼굴 표정을 바꾸어 말했다.
"진사 어른, 감히 저를 안견과 비교하다니 귀가 가렵습니다. 비록 그림이 안견보다는 못할지 모르지만 저는 비굴한 안견을 닮고 싶지는 않소이다."
"허허허. 나는 내 느낌을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오."
"아닙니다. 이 그림을 통해서 내 귀가 가려웠으니 나는 이 그림을 지금 불에 태워 버릴 것이오."
양팽손이 방금 그린 산수화를 손에 쥐고 구겨 버리자 김 진사가 사색이 되어 말렸다.
"이보시오. 그림은 그림이고, 사람은 사람이 아니오."
"허나 화즉인(畵卽人)이 아니겠소. 그림과 사람이 어찌 다를 수 있겠소이까."
"허허허. 내가 손님을 몰라보았소."
"진사 어른, 제가 무례했다면 용서하십시오."
"아니오. 나도 안견이 안평대군을 배반하고 수양대군과 신숙주의 편에 섰다는 것쯤은 알고 있소."
안견이 사흘 만에 그린 <몽유도원도>-.
안평대군이 29세 때 봄날 밤에 꾼 꿈에서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핀 산중의 무릉도원을 보고 나서는 궁중화사 안견을 불러 사흘 만에 완성케 한 그림이 바로 <몽유도원도>인 것이다. 사흘 동안 밤낮으로 화중삼매(畵中三昧)에 빠져 미친 듯이 <몽유도원도>을 그린 것은 붓놀림이 번개처럼 빠른 천재 화사(畵師)가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찍이 안견의 빼어난 재능을 알아본 사람은 안평대군의 아버지인 세종이었다. 궁중화원이 오를 수 있는 최고 품계는 종 6품이었으나 세종은 안견에게 파격적으로 종 4품의 호군이란 벼슬을 주어 격려하였던 것이다.
안평대군이 꾼 꿈의 내용은 이러했다. 안평대군이 남긴 <몽유도원기>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는 것이다.
'정유년 4월 20일 밤에 바야흐로 자리에 누우니, 정신이 아른하여 깊은 잠에 들어 꿈을 꾸게 되었다. 박팽년과 더불어 어느 산 아래에 당도하니, 산봉우리가 층층이 솟아 있고, 깊은 골짜기가 그윽하게 아름다우며, 복숭아나무 수십 그루가 있고, 오솔길이 숲 밖에 다다라서는 여러 갈래로 갈라져 어디로 갈지를 몰랐다.
그때 산관(山冠)을 쓰고 야복(野服)한 사람이 나한테 고개 숙이고 말하기를 "이 길을 따라 북쪽으로 휘어진 골짜기로 들어가면 도원(桃園)이외다." 하므로 나는 박팽년과 함께 말을 채찍질하여 찾아가니, 과연 산벼랑이 울뚝불뚝하고 나무숲이 울울하며, 시냇물은 돌고 돌아 거의 백 굽이로 휘어져 흘러 우리를 홀리게 하였다.
그 골짜기를 돌아가니 마을이 넓고 탁 트여 족히 2,3리쯤 될 듯하며, 사방의 벽이 바람벽처럼 치솟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데, 싸리문은 반쯤 닫히고 토담은 이미 무너졌으며, 닭과 개와 소와 말은 없고, 앞 시내에 오직 조각배가 있어 물결을 따라 오락가락하니, 정경이 소슬하여 신선의 마을과 같았다.
이에 주저하며 오래 둘러보고 박팽년에게 이르기를 "바위에다 가래를 걸치고 골짜기를 뚫어 집을 지었다더니, 어찌 이를 두고 이름이 아니겠는가. 정말로 도원동이다."라고 하였다.
곁에 두어 사람이 있으니 바로 촤항, 신숙주 등인데, 함께 시운을 지은 자들이다. 서로 짚신감발을 하고 오르내리며 실컷 구경하다가 문득 깨었다.'
그런데 <몽유도원도>를 그려 바친 안견은 계유정난 2년 전에 안평대군을 배반하고 만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탐내어 동생 안평대군을 모반죄로 강화도로 귀양을 보낸 사건이 바로 계유정난이었는데, 이미 권력은 수양대군 쪽으로 급속히 기울고 있었다.
안견은 안평대군의 부름을 받고 자하문 밖에 사는 안평대군의 사저인 무계정사(武溪精舍)를 찾았다. 안평대군이 안견을 부른 것은 중국에서 구입한 용매먹(龍煤墨)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안평대군은 안견을 몹시 아끼어 중국에서 들여온 진귀한 화첩이나 그림들을 보여주고는 안견의 안목을 키워주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안견은 그때 안평대군의 곁을 떠나야겠다고 변절의 꾀를 내고 있던 중이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이제는 수양대군 사람이 되어야 했다. 안견은 비겁하게 꾀를 냈다. 안평대군이 잠시 방을 비운 사이 용매먹을 자신의 소매 속에 숨겼다. 일을 보고 온 안평대군은 용매먹이 없어진 것을 알고는 하인을 불러 노발대발 화를 냈다. 그때 안견은 일어서며 소매 속에 감춘 용매먹을 일부러 떨어뜨렸다.
그러자 안평대군은 도둑으로 변절한 안견에 대한 실망감과 배신감으로 다시는 자신의 집에 오지 말라고 호통을 쳤다. 그것은 안견이 내심 바라던 바였다. 안평대군과 소원한 관계라는 소문을 퍼뜨리기 위한 수작이었던 것이다.
안견은 자신이 바라던 대로 안평대군이 36세의 나이로 사사당한 후 세조의 시대에도 궁중화사로서 영화를 누렸다. 신숙주 등과 함께 변절한 자로 지탄을 받았지만 북송(北宋) 화단의 영향을 넘어 조선의 안견파라는 화풍을 이루었고, 조선 중기의 화가들에게 그림의 스승으로 존경받았던 것이다.
물론 화원이 아닌 선비 양팽손은 예외였다. 양팽손은 안견을 멀리하고 비판했다. 안견의 그림들이 비록 뛰어난 수작이기는 하지만 선비의 의리와 충절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양팽손의 불만이었다.
"제 그림을 좋게 보아주니 고맙습니다만."
"저 구겨진 그림을 소장할 수 있게 해주시오. 보관을 잘하여 우리 집안의 가보로 길이길이 전하겠소."
"세상의 더러움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제 마음의 심상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실제로 제 고향 능주는 서울로부터 천 리나 떨어져 신선이 사는 듯한 선경입니다."
김 진사는 양팽손이 구겨서 버린 그림을 정성스럽게 펴더니 충절의 기상이 밴 소나무와 잣나무, 그리고 초가를 둘러싼 대나무 숲을 일일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조각배에 앉아 낚시를 드리운 선비가 세상을 등지고 있는 것 같소."
"낚시를 하고 있기보다는 마음을 닦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도학자의 그림이구먼. 이제야 비로소 손님의 그림을 이해할 것 같소."
"그림을 알아주시니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생원시에 급제하면 반드시 이곳을 다시 들러 그림을 한 장 남기고 가겠습니다."
양팽손은 기분이 좋았다. 서울로 가는 길에 십여 군데나 부잣집에 들러 그림을 그려주었지만 이처럼 자신의 그림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어찌 제 집을 알고 찾아왔소."
"이미 길손들에게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또한 주막에 들러 진사 댁을 묻자 예까지 친절하게 안내해 준 사람도 있었습니다."
"코가 크고 초립을 쓰지 않았던가요."
"맞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집에 집사로 있다가 돈을 모아 밖으로 나간 사람이오. 재주가 많긴 하지만 믿을 만한 사람은 못되는 사람이니 조심하시오."
"알겠습니다."
양팽손은 김 진사의 환대를 받았다. 여비도 적잖게 받았고, 하인이 방에 들어 잠자리를 펴주기까지 했다. 밤에는 바람까지 가세하여 눈보라가 방문을 흔들었다. 양팽손은 다음날을 걱정할 겨를이 없이 깊은 잠에 곧 빠져들었다. 그만큼 양팽손은 능주에서 천안까지 강행군하여 걸어오느라고 심신이 지쳐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다음날, 일찍 나서려는데 예의 주막주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장, 이른 아침에 웬일이오."
"천 리 밖에서 고생고생하며 올라왔으니 꼭 시험에 붙어야 되는 것 아니겠소."
"그야 내 실력대로 평가받을 일이지요. 천리 밖 사람이라고 붙고, 가까운 데 사람이라고 낙방하라는 법이 어디 있겠소."
양팽손이 퉁명스럽데 반응하자, 주막주인은 더 노골적으로 말했다.
"내년 생진사시 시험관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말씀을 삼가시오."
"허허. 아무라도 시험관이 되는 줄 아오. 박원종 대감 댁을 드나드는 선비가 아니면 어림도 없지요."
박원종이 중종을 쥐락펴락하고 있다지만 생진사시는 물론이고 문과, 무과의 시험관까지 장악하여 과거 장사를 하고 있다는 것은 뜻밖이었다. 그러나 양팽손은 그런 얘기에 귀 기울기고 싶지 않았다.
"어찌 그런 자들을 선비라 할 수 있겠소. 선비들을 모욕하는 소리는 그만 하시오."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아셔야지요. 그걸 모르고는 낙방할 수밖에 없어요."
"주인장께서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난 이래봬도 박원종 대감 댁을 드나드는 고사(高士)들을 잘 알고 있소. 내년 3월 생진사시 시험관이 누가 될 것인지도 알고 있소."
"그래서 어떻다는 것이오."
"시험관을 아는데 시험 문제를 아는 것이야말로 식은 죽 먹기가 아니겠소."
양팽손은 시험문제를 알고 있다고 대드니 마음에 갈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주막주인을 물리쳤다.
"이보시오. 정 이러시면 관아에 고발하겠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무엇을 고발하겠다는 것이오."
"그러니 어서 돌아가시오."
"사서오경을 달달 외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시험문제를 미리 알고 과장(科場)에 들어가는 경쟁자들에게 백전백패할 수밖에."
양팽손은 종종 걸음으로 주막 주인을 따돌렸다. 그러자 주막주인이 소리쳤다.
"어이, 시골뜨기 교생 들어보소. 고생하지 말고 가진 여비만 내게 주소. 사서(四書) 중에 나올 한 문제, 오경(五經) 중에 나올 한 문제를 알려주겠소."
그러나 양팽손은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길을 나섰다. 주막주인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겠지만 시험생들의 초조해진 마음을 이용하여 벌이는 사기극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과거는 엄정하지 못하고 문란한 것도 사실이었다.
문란한 행위도 갖가지였다. 표절도 있고, 대리시험도 있고, 책을 몰래 들고 들어와 보고 쓰기도 했다. 가벼운 부정행위는 과거 응시를 일정기간 제한하는 벌을 내렸지만 남의 재주를 빌려 합격하는 소위 대리시험은 곤장 1백대와 감옥에 가두는 도형 3년을 집행했으나 과장의 문란은 좀체 가라앉지 않더니 박원종이 권력을 장악한 중종 초기에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시험관까지 매수하여 문제를 유출시키는 방법 등으로 자신의 세력을 키우는 데 이용했던 것이다.
눈은 북쪽으로 갈수록 더 많이 내리고 있었다. 양팽손은 수원에서 다시 하룻밤을 머물고 과천에서는 더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서울이 지척인데 박원종의 애첩인 지월심이 운영하는 과천 기방에서 하룻밤을 또 묵었던 것이다. 기방에는 마침 소옥이 있었으므로 양팽손은 한천의 소식을 들었다. 한천은 이미 사신을 따라 중국에 가고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양팽손은 능주에서 서울로 올라오기 전에 조광조와 약속했던 대로 한천이 기거하던 박경의 옛집으로 가려고 했다. 조광조도 머잖아 합류할 것이므로 공부하고 토론하는 데는 박경의 옛집이 더 없이 좋을 터였다.<계속>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는 화순군 홈페이지와 동시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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