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팽손은 돈을 괴나리봇짐 속에 깊숙이 넣고는 도롱이를 걸쳤다. 가능하면 여비를 쓰지 않을 작정이었고, 애지중지하는 사서삼경 책이 빗물에 젖으면 큰일이었다. 빌려온 책을 한 달에 걸쳐 필사한 책이었지만 양팽손에게는 신주단지나 다름없었다. 가을비를 맞고 가면서도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하는 걱정거리는 바로 그 책들이었다.
장성까지는 길을 가는데 눈을 감고 갈 수도 있었다. 몇 해 전, 그러니까 16살에 장성을 오가며 영광 삼계현 출신인 송흠의 문하에서 공부를 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송흠이 장성에 없었다. 송흠은 중종 1년에 사헌부 지평을 제수 받았다가 노모를 봉양하고자 외직을 자청하여 보성군수로 왔다가 다시 내직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이었다.
가을비는 오락가락했다. 능주와 광주의 경계인 너릿재를 지날 때는 잠시 멈추었다가 광주의 저잣거리로 들어서자 다시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양팽손은 한기가 들었지만 저잣거리의 주막술청을 그냥 지나쳤다. 술청에서 풍기는 추어탕 국물 냄새가 코를 심하게 자극했지만 여비를 아끼고자 꾹 참았다.
술청을 지나칠 때마다 술청어멈이 호객을 했지만 양팽손은 못 들은 척 지나칠 뿐이었다.
"젊은이 뜨뜻한 국밥이 있다우. 옷도 말릴 겸 한 그릇 후딱 비우고 가더라고."
"장성까지 가려면 쉴 시간이 없소이다."
양팽손은 장성에 가서 점심 겸 저녁을 해결할 생각이었다. 장성에는 송흠 문하에서 함께 배우던 문인들이 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공짜로 신세 질 생각은 없었다. 양팽손이 괴나리봇짐 속에 세필의 붓과 모지랑붓을 넣고 온 것은 신세 진 사람들에게 그림을 한 점씩 그려주기 위해서였다.
양팽손은 사군자부터 산수화까지 스스로 터득하여 능주로 부임해 오는 현령이나 찰방을 몹시 놀라게 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기후가 따뜻한 능주 땅에 대나무와 매화나무, 난, 국화 등이 지천으로 자생하고 있었고, 비단 천 같은 지석강과 안개 낀 올망졸망한 산들이 양팽손의 타고난 재능을 격발시킨 화연(畵緣)도 무시할 수 없었다.
모지랑붓 한 자루만 있으면 어느 곳을 가든지 양팽손은 배고픔을 면할 수 있었다. 양팽손이 한걸음에 장성으로 가려 한 것도 그림을 그려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더구나 밤이 되면 도적떼가 횡횡하는 장성재를 넘어 정읍으로 간다는 것은 무리였다.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장성에서 하룻밤을 묵고 새벽녘에 장성재를 넘어 정읍으로 가는 것이 안전했다.
광주의 극락강을 건너 황룡강에 이르자, 비가 멈추었다. 구름이 동녘으로 몰려가고 하늘이 손바닥 만하게 빤히 트였다.
그제야 양팽손은 오들오들 한기를 느꼈다. 비에 젖은 옷이 체온을 빼앗고 있기 때문이었다. 양팽손은 들판 가운데 빈 초가에 들어서 웃옷을 벗어 쥐어짰다. 마당에 잡초가 나 있는 것을 보니 비운 지 오래 된 초가였다.
문짝 대신에 쳐놓은 거적때기마저 누군가가 가져간 듯 방 안이 이 빠진 노파의 입속처럼 훤히 드러나 보였다. 경작할 토지가 없는데 관에 바칠 세금은 그대로이니 떠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이 집 식구들도 유랑민이나 도적떼가 되었겠지.'
장성까지 오는 동안 양팽손은 빈 집을 여러 채 봤던 것이다. 능주의 양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흉년이 들어 세금을 내지 못하다 보면 다음해에는 세금이 갑절로 불어나 본의 아니게 빚쟁이가 되고 빚을 갚을 길이 막연해지게 되면 야밤에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양팽손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장성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반정으로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반정공신들의 부귀영화는 하늘을 찌르고 백성들의 삶은 고달프기만 하구나. 아, 우리 임금님은 무엇을 보고 생각하고 계신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양팽손은 장성 성안으로 들어서 곧장 송흠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했던 김춘걸 집으로 갔다. 김춘걸은 양팽손보다 두어 살 위였지만 등치가 작고 약골이어서 실제 나이보다 어리게 보이는 향교 교생이었다.
"팽손이, 어서 오게."
"가는 길에 또 신세 좀 지려고 들렀네."
"신세는 무슨 신세인가. 그리 말하니 섭섭하네."
"이번에도 조광조를 만나러 용인 가는 길인가."
그때도 양팽손은 김춘걸 집에서 하룻밤 유숙을 했던 것이다. 사랑방으로 드니 그때 그려준 산수화 한 폭이 아직도 벽에 붙어 있었다.
"이번에는 용인이 아니라 서울로 가는 길이네."
"무슨 일로."
"생원시를 보러 가는 길이라네."
"자네는 선생님의 수제자가 아니었는가. 꼭 합격할 걸세. 나는 보다시피 상중(喪中)이어서 공부를 하지 못했다네. 그러니 다음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김춘걸은 몹시 부러워하는 눈치를 보이며 말했다. 양팽손은 화제를 바꾸어 김춘걸을 위로했다.
"옥천군수로 가신다는 선생님을 뵌 적이 있는가."
"상중인데 어디를 마음대로 가겠는가."
"상중이었다는 자네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나는 선생님께서 보성군수로 와 계시는데도 찾아뵙지 못했다네. 보성은 능주 바로 옆이거든. 그러니 이번 상경 길에는 꼭 뵙고 사죄드려야겠어."
"더 확인해 보게. 선생님께서는 아직 옥천군수로 부임하시지는 않았을 걸세. 선생님은 세상이 알아주는 효자가 아니신가. 부모님을 봉양하고자 외직을 원하시니까 내년쯤에 부임하신다는 소문이 돌고 있을 뿐이네."
"난 또 부임하신 줄 알았지. 더 알아보겠네."
얘기 중에 사랑방으로 겸상이 들어왔다. 김춘걸은 밥을 뜨는 둥 마는 둥했지만 양팽손은 상에 놓인 반찬그릇에 놓인 반찬까지 깨끗이 비워버렸다. 숭늉도 단숨에 한 그릇을 다 마시고는 트림을 했다.
"어지간히 시장했던가 보이."
"곰소에서 장사치들이 가져오는 자네 집 젓갈이야말로 밥도둑이 아닌가."
곰소에서 고창을 거쳐 축령산 재를 넘어온 반가운 손님의 상에만 올려지는 젓갈이었다. 양팽손이 특히 좋아하는 젓갈은 씹히는 맛이 일품인 아가미젓과 고춧가루로 버무린 갈치속젓이었다. 양팽손에게 아가미젓과 갈치속젓은 밥 한두 그릇 정도는 순식간에 먹어치우게 했다. 그래서 양팽손은 아가미젓과 갈치속젓을 밥도둑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양팽손은 상을 물리치고 난 후, 곧바로 곤하게 골아 떨어졌다. 김춘걸에게 그림을 한 점 그려주고 말고 할 새도 없이 피로가 밀려와 주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김춘걸이 잠시 화장실에 갔다가 들어오더니 투덜거렸다.
"새벽 일찍 장성재를 넘어간다더니 일찌감치 눈을 붙였네 그려."
양팽손은 빗물에 젖은 바지저고리를 방바닥에 넣어놓고 큰 대자로 드러누워 자고 있었다. 김춘걸은 스승 송흠이 한 말이 떠올랐다. 어느 날인가 송흠이 제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능주에 가서 양팽손을 만난 적이 있지. 양팽손에게 경사(經史)에 대해서 이것 저것 물어 본 바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지. 우리 동방에 전도(傳道)할 사람이 있다면 바로 양팽손이가 될 것이야.'
송흠은 능주 현령을 만나서도 "옛 사람의 말에 '자네 고을에 안자(顔子; 공자의 제자)가 있다'고 하는 얘기가 있는데, 나 역시 양수재(梁秀才)를 두고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네" 하고 능주를 떠났던 것이다.
송흠은 15세의 양팽손을 단 한 번 만나보고는 유도를 전하게 될 수재라고 칭찬해 마지않았음이었다. 그러니 김춘걸은 스승이 탄복한 양팽손의 재주와 능력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귀한 손님에게만 대접하는 곰소 젓갈을 부엌데기에게 내오게 하였던 것이다.
양팽손은 일찍 잠에 떨어졌던 만큼 이른 새벽에 일어났다. 그냥 김춘걸 집을 떠나기가 미안했다. 그래서 먹을 갈아 묵죽도를 그려 한 점 남기고는 김춘걸 집을 나서 장성재로 향했다.
이른 새벽이었으므로 사위는 아직 어둑어둑했다. 가을비가 갠 다음날이어선지 찬바람이 목덜미를 움츠리게 했다. 그러나 양팽손은 옥천에 와 있을지도 모르는 스승 송흠을 만나고자 잰걸음으로 장성재로 향했다.
도둑떼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출몰하는 재를 넘으면서는 등골이 오싹하여 스승 송흠의 시 한 수를 읊조리기도 했다.
그러나 서둘러 나온 것이 화근이 되었다. 양팽손의 목소리를 들은 도적떼가 재를 막 넘어서는 순간 앞을 가로막았다.
"어떤 놈이냐."
"정읍으로 가는 길손이오."
"조용히 넘어갈 일이지 소리를 질러 왜 잠을 깨우는 것이냐."
"잠을 깨웠다면 미안하오."
양팽손은 도적떼가 억지를 부리는 줄 알면서도 공손하게 사과를 했다. 그러나 도적떼는 양팽손의 사과를 무시하면서 콧방귀를 뀌었다.
"이미 잠을 깨워놓고 사과는 무슨 얼어 죽을 사과요. 이곳을 무사히 삐져나려면 봇짐에 무엇이 들었는지 풀어보시오."
"공부하는 교생의 봇짐에 책밖에 무엇이 있겠소."
"책이라, 이놈도 나중에는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을 작자군."
교생이라고 하니 몽둥이를 들고 있던 도적의 우두머리가 험악한 얼굴로 대들었다.
"네놈도 탐관오리가 되는 것이 꿈이더냐."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양팽손은 선선히 봇짐을 내려놓고 도적떼가 풀어보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도적떼 중에서 얼굴에 상처가 난 사람이 다가와 봇짐을 풀기 시작했다. 봇짐 속에서는 책이 나오고 나중에는 돈이 나왔다.
도적떼 우두머리가 횡재를 했다는 얼굴을 하며 말했다.
"보아하니 공부만 하는 교생인 듯하니 그냥 보내주겠다. 이 돈이면 우리 동지들이 한 달은 남을 괴롭히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니 그리 알고 가게나."
양팽손도 빨리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으므로 도적들의 뜻대로 응해 주었다.
"책들은 이리 주시오."
그러나 도적떼는 책들을 내팽개친 채 숲속으로 사라졌다. 양팽손은 책들을 봇짐 속에 주섬주섬 넣은 뒤 재를 빠져나왔다. 새벽꿈을 꾼 듯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으므로 양팽손은 어안이 벙벙하기도 했다. 하늘은 서서히 푸른 빛깔로 변해가고 있었다. 너무 일찍 김춘걸의 집을 나선 것이 실수인 것도 같았으나 봇짐 속의 돈이 사라지고 나니 마음이 편한 것도 사실이었다. 바로 그 돈 때문에 재를 넘으면서 마음이 불안했던 것이다.
이제부터는 할 수 없이 부잣집에 들러 그림을 그리면서 서울까지 가는 수밖에 없었다. 주인의 취향에 따라 그림을 한 점 그려주면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팽손은 정읍에서, 또 태인과 김제, 익산에서 각각 하룻밤을 잔 뒤 여산에 도착하여 경상도 변군에서 옥천을 거쳐 처가를 찾아온 박신무와 길벗이 되었다. 박신무 역시 초시를 보기 위해 서울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아마도 박신무가 여산의 처가를 찾은 것은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인 듯했다.
주막술청에서 만난 박신무는 씀씀이가 컸다.
"보아하니 나그네 행색인데 어디로 가는 길이오."
"서울로 가고 있는 중이오."
"묻는 그대는 어디로 가고 있는 중이오. 말투로 보아 경상도에서 온 듯하오만."
"맞소. 경상도 변군에서 옥천을 거쳐 이곳으로 왔소. 처가가 여산에 있어 장인에게 인사를 드리러 온 것이오. 나도 지금 서울로 향하고 있는 중이오."
"옥천을 거쳐 왔다고 했소."
"경상도에서 여산으로 오려면 당연히 옥천을 거쳐야 하오. 옥천에 지인이라도 있는 것이오."
양팽손은 박신무와 오래 된 벗인 양 스스럼없이 얘기를 주고받았다. 박신무의 쾌활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 선생님이 옥천군수로 부임하신다는 소문이 있어 물어본 것이오."
"선생님 함자는 어떻게 되오."
"성은 송이고 이름은 흠자이시오."
"그렇다면 갈 필요가 없겠소. 아직까지는 우리 집안 인척이 옥천군수를 하고 있소."
"고맙소. 괜히 헛걸음 할 뻔했소."
송흠이 옥천군수로 부임한 것은 중종 5년의 일이었으니 박신무의 말은 옳았다. 양팽손과 박신무가 서울을 향해 가고 있었던 때는 중종 4년 가을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뒤늦게 통성명을 했다.
"전라도 능주에서 온 양팽손이라 하오."
"경상도 변군에서 온 박신무라 하오."
수인사를 나눈 뒤 양팽손이 크게 웃었다.
"우리 두 사람은 서울에서 천리 밖에 사는 시골뜨기들이오."
"그게 무슨 웃을 거리라도 되는 거요."
박신무가 의아하게 묻자 양팽손이 말했다.
"하하하. 서울에서 천리 밖에 사는 촌구석이라는 겁니다."
"촌구석이라니 얌전한 표현입니다. 죄인들을 보내는 유배지가 아닙니까."
"변군이 그리 먼 곳입니까."
"동해가 가깝다면 먼 곳이 아니겠습니까. 최근에는 천하에 간신 중에 간신이 유배를 와 우리 고향을 더럽히고 있소."
"그 자가 누구인데 그렇소."
"말하는 내 입이 더러워질까 두렵소."
박신무가 말하고 있는 사람은 유자광이었다. 이태 전에 대간들의 탄핵을 받아 처음에는 전라도로, 다시 관동으로 이배되었다가 최근에는 경상도 변군으로 주거제한을 시킨 유자광이었다. 귀양이라지만 유자광의 경우는 관과 민에 의해 오지에 내팽개쳐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박신무의 얘기에 따르면 주거를 제한한 움막 적소(謫所)가 바닷가에 있는데, 아무도 찾아주는 이 없고 설령 사람들을 간혹 만난다 하더라도 손가락질을 당하므로 유자광은 움막에만 틀어박혀 사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유자광이 변군의 현령에게 호통을 치는 등 거드름을 피웠다고 한다. 그러나 현령이 관에서 주던 음식마저 끊어버리자, 그때부터 유자광은 거지와 다름없는 몰골로 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끼니 때가 되어도 먹을 것이 없으니 굶다가 민가로 기어나가 구걸했고, 문전박대를 당하는 등 구걸마저 여의치 않자 바닷가로 나가 해산물을 뜯고 주워 먹으며 아사 직전까지 갔다는 것이었다.
"세상 보기가 무서워 본인이 스스로 눈에 독약을 넣어 멀게 했는지는 모르나 차츰 장님이 돼 갔소."
부황이 든 유자광은 눈이 멀기 시작했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더니 마침내 다른 한쪽 눈마저 캄캄해져버렸다.
"유자광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자주 보았지요. 하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유자광을 볼 때마다 사람들이 침을 뱉고 지나갔지요. 아녀자들은 손가락질을 했어요."
"장님이 된 유자광은 그 후 어찌 됐습니까."
"거렁뱅이가 되어 아직도 바닷가를 헤매고 있소. 지나가는 길손들이 유자광인지 모르고 불쌍하여 던져주는 밥덩이를 받아먹고 연명하고 있지만 그러다 결국 병들어 죽고 마는 것 아니겠소."
"그러고 보면 하늘이 무심하지는 않는 모양이오. 하늘에 순응한 자는 흥하고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유자광을 보면 틀림없소."
"어디 유자광뿐이겠소. 연산군도 그러하지 않았습니까. 천도를 거스른 자는 하늘이 내리는 재앙을 받을 수밖에."
양팽손은 경상도 변군에서 왔다는 박신무와 길동무가 되어 여산을 떠났다. 박신무는 폐주 때 변군으로 귀양 온 선비들에게 글을 배워 제법 문리가 트여 있었다. 양팽손처럼 시골뜨기였지만 하늘의 도가 무엇인지를 아는 청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박신무는 공주 부근에 이르러 병이 나고 말았다. 갑자기 구토를 하며 심한 몸살을 앓게 된 것이었다. 양팽손이 공주에서 이틀을 간병했지만 차도가 전혀 없었다. 더구나 공주 부근의 한 마을에서는 몹쓸 병이 돌아 마을사람들이 격리되어 치료를 받고 있었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시오. 난 다음 기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게 됐소. 이것도 운명이니 어찌 하겠소."
"그럼, 다음에 만납시다."
할 수 없이 양팽손은 홀로 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또 다시 그림을 그리며 숙식을 해결해가며 서울로 가야 했다. 박신무는 큰돈을 주고 수레에 실려 유자광이 거지 몰골로 떠돌고 있다는 변군으로 돌아갔다.
양팽손이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박신무의 말은 하나도 과장이 없었다. 홧병에다 영양실조로 눈이 멀기 시작한 유자광은 결국 중종 7년에 객사하게 되는데, 중종은 옛정을 생각하여 장사를 지내는 것만은 허락하나 유자광의 아들들은 변군으로 내려가지 않고 아버지의 죽음을 모른 체해 버렸다. 비록 간신이라고는 하지만 상례를 지키지 않은 아들들 또한 천하의 후레자식이었던 것이다.
장남 유진(柳軫)은 아버지가 죽었다는데도 여색에 빠져 변군으로 내려가지 않았고, 차남 유방(柳房) 또한 병을 핑계 대며 술에 취해 아버지의 장사를 돌보지 않았던 것이다. <계속>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는 화순군 홈페이지와 동시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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