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가 5일 이번 6자회담에 나서는 북한이 취할 협상 논리의 윤곽을 드러내 주목된다.
핵심은 △금융제재를 '선결조건'으로 내세우지 않겠다는 것 △현존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기 위해서는 경수로 제공과 경수로 완공 때까지 대체에너지 공급(중유)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 △'현재의 핵'인 핵무기와 '미래의 핵'인 핵 프로그램을 분리하고 후자에 대해서만 협상하겠다는 것이다.
■ '제제 해제가 선결조건' 고집 꺾나
금융제재를 선결조건으로 내세우지 않겠다는 입장은 명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다만 조선신보는 지난달 끝난 북미 금융회의와 관련해 "미국이 문제해결의 올바른 방향을 정하고 핵문제 토의의 돌파구를 열었다고 판단하면 조선(북)은 여기에 적극 호응할 것"이라며 '제3자에 의한 전망' 형식으로 북한의 입장을 드러냈다.
그러나 조선신보는 북한이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조선은 조건이 성숙되는 데 따라 영변의 핵시설 가동을 중단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검증감시를 허용할 수 있고 가동중지는 폐기를 전제로 한다는 입장을 미국을 비롯한 6자회담 참가국들에 전달했다"고 소개했다.
이는 금융제재 문제의 우선 해결을 요구하며 핵폐기 논의 자체를 진척시키지 않았던 지난해 12월 5차 3단계 6자회담 때와는 다른 태도로 이번 회담에서는 핵폐기와 상응조치에 관한 협상을 본격적으로 하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이는 또 지난해 12월 6자회담에서 북한 대표단을 동행 취재하던 조선신보가 12월 20일자 기사에서 "미국이 조선을 적대시하는 법·제도적 장치들을 유지하면서 제재 봉쇄를 계속 강화하는 조건에서는 조선도 폐기를 전제로 한 핵시설 가동중지를 결단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도한 것과 다른 태도다. (☞관련기사 바로가기)
이같은 보도는 또 핵시설 가동중단과 IAEA 사찰 수용에 대한 북한의 전향적인 태도를 확인함과 동시에, 미국이 금융제제에 관해 상황 악화 조치를 더 이상 취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두 문제를 분리해 대응하겠다는 뜻이 함축돼있다.
■ 경수로·중유 요구는 '당연한' 수순
핵시설 가동중단과 IAEA 사찰 수용 등 '핵폐기를 위한 초기이행조치'를 하면 경수로형 원자력발전소와 대체에너지를 제공해야 한다는 입장은 금융제재 때문에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지난 6자회담에서도 이미 나온 것이다. 지난 12월 20일자 조선신보는 '핵 계획(프로그램) 포기 논의를 진행하는 다른 하나의 조건'으로 같은 요구사항을 보도했다.
또 "일관하게 주장해 왔다"는 조선신보의 말대로 북한은 핵 프로그램을 폐기하면 전력생산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라는 논리로 1994년 제네바합의에서 경수로·중유 제공을 이끌어냈다. 2005년 9.19공동성명에서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수로 제공 문제를 적절한 시기에 논의한다"는 문구를 넣자고 고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북한의 이같은 '일관된' 태도로 미뤄볼 때 6자회담에서 금융제재 문제가 떨어져 나가고 핵폐기라는 회담의 본령만을 다룬다면 경수로와 중유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북한이 연간 50만톤의 중유나 그에 상응하는 대체 에너지의 공급을 요구할 것이라는 일본 아사히신문의 4일 보도는 이를 입증한다.
따라서 이번 6자회담에서 북한은 경수로와 중유를 요구하면서 미국과 줄다리기를 하고, 그에 대한 기초적인 합의가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6자회담 미국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가 지난달 30일 이번 회담에서 "제네바합의와 유사하게 될 수 있으나 이는 서막일 뿐"이라고 언급한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힐 차관보는 4일에도 "9.19공동성명에서 에너지 및 경제지원 관련 조문이 있다"고 말해 중유 제공 가능성을 시사했다. 우리 정부 고위 당국자도 "중유는 제도적·법적·기술적으로 한·미·중·일·러 등 5개국이 합의하면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오픈돼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미국은 제네바합의 때처럼 단독으로 중유를 주지는 않으려 할 것으로 보인다. 제네바합의로 돌아간다는 인상을 받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조지 부시 미 행정부가 6자회담 참가 국가들이 공동으로 부담하는 체제를 만들려 한다는 것이다. '한·미·중·일·러 5개국의 합의'를 운운한 우리 정부 당국자의 말이나, 힐 차관보가 5일 국내 일부 기자들을 만나 중유 지원 비용은 미국만의 몫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는 보도는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미국은 핵실험을 실행한 국가의 평화적 핵이용 권리는 인정될 수 없다는 논리로 경수로 제공에 대한 논의를 다음 6자회담이나 9.19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하부 실무그룹의 협의로 넘기려 할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이번 회담에서 북한이 경수로 논의를 고집하고 미국은 추후 회담 테이블로 미루려 하면서 줄다리기가 벌어질 것으로 전망하는 한편 2005년 남한에서 제의한 200만kW 대북 송전 계획이 논의의 교착을 타계할 수도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 '현재 핵' '과거 핵' 분리에 미국은 무대응
핵무기와 핵 프로그램의 개념을 분리하고 후자만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 역시 지난 6자회담에서 이미 나온 것이다.
당시 조선신보는 한반도비핵화는 북한의 핵무기뿐만이 아니라 미국이 한국에 제공하고 있는 핵우산까지도 철폐될 때 가능하고, 그같은 조건이 성숙될 때까지는 핵무기를 폐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계관 부상도 당시 회의에서 "미국의 적대시정책이 종식되어 신뢰가 보장되고 조선이 그 어떤 핵위협도 느끼지 않을 때에 가서는 한 개의 핵무기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었다.
현재의 핵과 미래의 핵을 분리하는 북한의 협상 전술에 대해 미국은 아직까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다만 힐 차관보를 비롯한 미국 협상가들은 9.19공동성명의 이행이 중요하다고 되풀이해 강조함으로써 '두 가지 핵'을 분리하려는 북한의 전술에 말려들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9.19공동성명에는 "북한은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계획을 포기할 것과 조속한 시일 내에 핵확산금지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조치에 복귀할 것을 공약했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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