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 4년 3월이었다.
능주의 정여해는 해망산에 해망단을 조성하여 터를 연 지 1년 만에 다시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능주 출신의 구두남도 서울에서 내려왔고, 함종의 어계선, 김해의 김경추, 함양의 박간손, 삭녕의 최언수 등이 차례로 도착해왔다.
능주는 어느 고을보다 안개가 짙은 곳이었다. 안개가 몰려오는 날이면 지석강은 물론 해망산과 주변의 올망졸망한 산봉우리들이 안개 속으로 숨어버렸다. 서너 걸음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안개였다.
정여해는 안개가 끼는 날을 좋아했다. 안개가 자욱해지면 광주로 나가는 지석강 너머의 세상이 안개로 덮여버렸으므로 은둔의 기분이 더 처절하게 들었던 것이다. 안개는 둔재(遯齋)라는 정여해 자신의 호처럼 세상의 모든 것들을 숨겨 주었다. 둔(遯)자는 주역의 33괘에 나오는 숨을 둔 자인 것이었다.
양팽손이 뒤늦게 찾아와 정여해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우리 능주에 선생님처럼 도학에 깊은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면서도 늦게 찾아뵙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나더러 도학에 깊다니 듣기가 송구하오."
"아니옵니다. 일전에 정암 조광조 선배를 만났을 때 선생님이야말로 점필재 선생의 제자들 중에 상례에 으뜸이라고 들었으며, 정암의 스승이신 한훤당 선생과 각별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우리 능주의 자랑이십니다."
"허허허. 나는 둔한 말과 같은 재능과 상수리나무 같은 쓸모없는 자질을 지닌 늙은이일 뿐이오. 이제 그대 같은 젊은 선비들이 지치(至治)를 일구어 유도가 바로선 나라를 만들어야 할 것이오."
"선생님은 무엇을 지치라 하옵니까."
양팽손은 누구를 만나든 토론하기를 좋아했고, 상대의 주장이 틀릴 때는 결코 양보하지 않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지치란 왕과 신하들이 군자가 되어 지극한 정치를 펴 백성들이 편안해지는 것을 말하오."
"듣던 대로 선생님은 도학의 군자이십니다."
중병이 들어 몸을 잘 가누지 못하는 정여해였으나 문제의 핵심을 찔러 말하는 실력은 비범했다. 그러나 그의 겸손함은 양팽손의 자세를 가다듬게 했다.
"아니오. 나는 상수리나무처럼 쓸모없는 사람일 뿐이오."
"선생님이 그리 말씀하시니 제가 더 부끄러워집니다."
"하늘이 장차 큰 난리를 이 세상에 내릴 때는 반드시 그 난리를 그치게 할 사람을 낳아서 미리 기다리게 하는 법, 나는 그대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참으로 크다오."
"무슨 말씀이신지요."
"오늘날 하늘이 난리를 내림이 이처럼 참혹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알 수는 없지만 난리를 그치게 할 사람이 누구이겠소. 바로 젊은 그대들이 아니겠소."
정여해는 비록 숨어 산다고는 하지만 조광조의 동지들을 주목하고 있었다. 양팽손에게 한 말은 바로 조광조 등을 두고 한 말이었다.
"난리를 그치게 하는 사람은 우리 같은 미혹한 젊은이들이 아니라 바로 선생님처럼 숨어서 유도를 밝히는 분들이옵니다. 예부터 참된 선비는 숨어 있다고 했습니다."
"허허허."
정여해는 양팽손에게 자신이 1년 전에 해망단의 터를 열 때 썼던 축문을 건네주었다. 양팽손은 축문을 받아들고 정자 마루 끝에 앉아 머리를 조아렸다. 축문에는 정여해가 나라를 사랑하는 충분(忠憤)이 절절하게 배어 있었다.
<중종 3년 무진 3월 11일 임오(壬午)에 전 지평 정여해는 삼가 술과 과일을 갖추어 감히 토지신(土地神)에게 아룁니다. 우리나라 문명의 발전은 고려 말부터 시작되고 우리 본조(本朝)에 이르러 현명한 선비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우리 돌아가신 스승 점필재 김 선생은 밝고 슬기로운 자질로서 정주학(程朱學)의 계통을 이어 훌륭한 제자를 길러 학통을 전하니 문명이 크게 진작되었습니다. 조정에서 믿고 불러 특별히 발탁되어 잘 대우했으니 유도가 크게 세상에 밝아지기를 바랐사온데 점필재 선생이 돌아가신 후 여러 간신들이 임금의 총명을 가리어 화가 무덤 속까지 미쳤으며, 여러 현인들을 해치게 될 것을 어찌 생각했겠습니까.>
하늘의 도가 무너져버린 것을 탄식하는 바는 양팽손 같은 젊은이나 정여해 같은 늙은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겨울은 봄을 준비하기 위한 계절이기도 하듯 정여해는 절망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다하고 있었다. 그것은 해망단을 만들어 비명에 죽어간 도학자들을 기리는 일이었다. 일찍이 김굉필이 정여해에게 누군가는 살아남아 도학의 강이 어디서 흘러와 어디로 흐르는지 증언해야 한다고 말했던 적도 있었던 것이다.
양팽손은 축문의 뒷부분을 마저 읽어 내려갔다.
<생각하건대 노둔하고 졸렬한 이 몸은 캄캄한 밤에 나라 일을 걱정한 노나라 과부처럼 분에 지나친 정성이 간절하여 현시(現時)에 일어난 일에 분개하여 가슴이 답답하므로 산속에 들어와 스스로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에 깨끗한 곳을 가려 단(壇)을 하나 설치하고서 좋은 날을 택하여 감히 제사를 지내는데, 점필재 김 선생은 북쪽에서 남향으로 모시고, 일두 정공(公)과 한훤당 김공(公)은 동향과 서향으로 모시어 스승과 제자로 하여금 함께 배향하오니, 토지신께서 혼령이 계시옵거든 명명(冥冥)한 중에 특별히 복을 내리시어 유도의 한 가닥 바른 줄기가 끊어지지 않게 하시옵소서. 흠향하시기를 바라옵니다.>
양팽손은 끝 문장에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유도의 한 가닥 바른 줄기가 끊어지지 않게 해달라는 정여해의 호소가 가슴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양팽손은 눈물을 닦고는 정여해에게 가 말했다.
"점필재 선생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대략 알고는 있사오나 선생님으로부터 직접 듣고 싶사옵니다."
"점필재 선생까지 도학이 끊어진 지 1백년이 흘렀던 것이오. 정주(程朱)의 학문을 이을 사람이 없으니 이단의 학설이 벌떼처럼 일어나 선비들이 갈 바를 몰랐었소. 우리 돌아가신 스승님께서는 학문의 연원이 매우 발랐었소. 유도를 처음으로 발휘하시어 태양처럼 크게 밝혔던 분이오."
양팽손은 정여해가 새삼스럽게 존경스러웠다. 스승을 이처럼 높이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정여해는 김종직을 천지간에 밝은 빛을 뿌리는 태양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우리 스승을 성종께서 불러들여 벼슬을 주었지요. 도를 펴는 데 길이 트였으나 어찌하여 돌아가신 후에 참혹한 화가 일어났는지…. 유도가 재액(災厄)을 만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이극돈과 유자광이 합세하여 선비들을 죽인 갑자년의 사건을 두고 정여해는 재액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었다.
정여해는 양팽손을 등지고 일어나 허공을 향해 중얼거렸다.
'마침내 유도가 밝았는데도 다시 어둡게 되었고, 유도가 이어졌는데도 다시 끊어지게 되었으니…. 선비의 갓을 쓰고 선비의 옷을 사람들이 땅바닥을 쓸 듯이 흔적도 없어져 버렸으니…. 하느님이시여, 그것을 어찌 하시렵니까. 아아! 이를 말한들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둔재 선생님, 해망단에서 현인들을 제사 지내는 것은 지치의 촛불을 켜는 것입니다. 유도를 밝게 켜는 것입니다. 이 일은 선생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고맙소. 숨어 사는 나를 알아주는 젊은이가 있으니 어찌 고맙지 않겠소."
양팽손은 은둔해 있는 정여해의 모습을 보고 크게 감동했다. 모든 유생들이 벼슬을 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줄을 서는 판국인데, 정여해는 일찍이 사헌부 지평이란 정 5품의 벼슬을 버리고 참혹하게 죽은 도학의 영령들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었다. 양팽손은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의 혼을 껴안고 있는 정여해야말로 숨은 도인이라고 여겼다.
"선생님이야말로 도학자 중에 도학자이십니다."
"그런 소리 마시오. 내가 물러가는 겨울이라면 그대들은 다가오는 봄이오. 내가 지는 해라면 그대들은 떠오르는 태양이오. 부디 조정에 나아가 유도의 싹이 트게 하고, 유도의 빛을 뿌리어 지치를 이루도록 하시오."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안개는 여전히 걷히지 않고 있었다. 해망단은 안개에 젖어 축축했고, 해망산 주변의 산봉우리들은 선경을 빚어내고 있었다. 양팽손은 정여해가 기거하는 집의 처마 밑에 걸어놓은 손바닥만한 둔(遯) 자 편액을 보며 다시 전율했다.
'저 한 자의 둔(遯) 자에 선생의 모든 생각과 마음이 담겨 있구나.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한 자이구나. 촌철살인의 글자가 있다더니 바로 저 한 자를 두고 하는 말이었구나.'
해망단의 제사는 엄숙하게 시작하여 정성스럽게 술과 차를 올리고 마지막에는 축문을 읽은 뒤 배향한 신위(神位)를 향해 일제히 절을 하는 것으로 마치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제주가 된 정여해는 비록 중풍의 후유증으로 몸을 비틀거렸으나 신위를 볼 때마다 살아 있는 사람 대하듯 예를 다했다.
제사가 끝나자 정여해의 제자들과 양팽손이 마주 앉아서 음복을 했다. 양팽손이 먼저 자기 소개를 했다.
"능주가 고향이고 스승은 지지당(知止堂) 송흠 선생이옵니다."
그러자 구두남이 말했다.
"저도 능주가 고향이오만 처음 뵙는구려. 지지당이라면 삼마태수 선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스승님의 별명은 삼마태수이옵니다."
삼마태수란 고을원이 이임할 때 백성들이 전별금으로 일곱 마리 정도의 말을 주는 것이 관례였으나 송흠은 어머니와 자신, 그리고 아내가 탈 세 마리만 받아갔다는 데서 연유한 청백리를 상징하는 말이었다.
"고집이 센 분입니다. 중앙의 대간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함께 일하기를 꺼려할 정도니까요."
구두남은 비록 높은 벼슬은 아니지만 광흥창(廣興倉)에서 관리들의 봉급을 나누어주는 일을 하고 있었으므로 송흠의 인품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스승님도 내직보다는 외직이 편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늙으신 춘추인데도 외직으로만 돌고 있습니다."
얘기를 듣고만 있던 정여해가 양팽손에게 말했다.
"초시는 보았소."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또한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허나 최근에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왜 벼슬할 생각을 버렸던 것이오."
"일찍이 정암의 용인초당에서 동지들과 약속한 일입니다. 소인배들이 날뛰는 세상에는 나아가지 않기로 했었습니다."
"허나 지금은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는 세상이니 때를 놓치지 마시오."
"지평 어르신. 저희 동지들도 지금은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평이 뭔가. 난 벼슬에서 악취를 맡는다오. 그러니 둔재라고 불러 주시오."
"알겠습니다. 정암과 내년에는 초시를 보기로 했습니다. 유자광 같은 간신이 유배를 갔으니 이제는 조정의 분위기가 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둔재 어른께서 점지해 주시니 더욱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습니다."
"부디 생진사시에 합격을 하더라도 1등을 하시오. 1등의 들러리가 되지 말고."
중종 5년은 생진사시가 있는 해였다. 조광조가 인편에 편지를 보낸 적이 있는데, 그 내용 가운데는 양팽손에게 함께 초시를 보자는 글도 있었던 것이다. 정여해가 응시하려면 남의 들러리가 되지 말고 1등이 되라는 격려에 양팽손은 크게 고무되었다.
"둔재 어르신, 제가 술과 안주를 올리겠습니다."
"고맙소."
"이 술은 제 마음을 담았으니 받으십시오."
"나는 일찍이 부모님의 산소에서 6년 동안 시묘살이를 한 적이 있소. 여막을 치고 살았지만 눈보라가 치는 날에는 풍찬노숙이나 다름없었소. 그때 병을 얻어 지금까지 상한 몸을 비틀거리며 끌고 다니고 있소."
"그런지도 모르고 술을 권했습니다."
"아니오. 마시지는 않더라도 기분이 좋으니 술잔은 받겠소."
그러나 애주가였던 정여해는 양팽손이 주는 술을 훌쩍 받아마셨다. 그것도 한 잔이 아니라 제자들이 주는 술까지 물리치지 않고 마셨다. 마침내 정여해는 모처럼 대취하여 제자들과 지석강으로 나가 나룻배를 타고서 쌓인 회포를 풀었다.
어느 새 안개가 물러가고 연주산 아래 펼쳐진 능주의 수려한 풍광이 쏟아지는 햇살을 받고 있었다. 구두남이 능숙하게 거문고를 탔고, 어계선과 김경추는 쉬지 않고 김종직의 시를 창으로 읊조렸다.
연주산에 뜬 쟁반 같은 달이여
바람 잠든 수풀에는 이슬만 차갑구나
하늘에 가득한 뭉게구름 모두 지나가고
태평세월에 병영의 초소 찾아 무엇하랴
일년에 중추가 제일 좋은 줄 이제야 알랴만
나그네의 이 밤이 이토록 즐거운 줄 그 뉘가 알리
우리는 이제부터 서쪽 바다로 갈 것인데
손가락 끝으로 게꼬막 까먹을 일 뿐이로구나
그러자 양팽손이 금세 답가를 지어 거문고 가락에 실었다.
태평성대를 어찌 형용치 못하리오
백리 길 뽕과 삼은 자손들의 영화여라
눈앞의 푸른 산봉우리(연주산)는 현곽 앞에 있거늘
참으로 이 강가에도 이 정자가 있어야지.
太平從古豈無形
百里桑痲子弟寧
擡眼碧峰當縣郭
令公眞有此江亭
양팽손이 읊조린 강이란 두말 할 것도 없이 지석강을 말했다. 정여해나 양팽손에게 연주산과 지석강은 그들의 시심을 불러일으키는 능주의 산하 중에 산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양팽손은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에 능하여 수려한 능주의 절경은 곧잘 그의 그림 소재가 되곤 했다.
집으로 돌아온 양팽손은 조광조가 전에 진사시를 본다 하였으므로 자신은 생원시로 돌렸다. 생원, 진사의 초시 정수는 한성부 268명 등 전국적으로 1400명을 뽑아 소과의 2차 시험인 복시를 서울에서 2월이나 3월에 예조와 성균관 두 곳에서 나누어 시행하였다. 응시자들은 녹명소(錄名所)에 등록하기 전에 조흘강(照訖講)이라 하여 <소학>과 <가례>를 고강(考講)하여 첩문(帖文)을 받아야 했다. 첩문을 지녀야만 녹명소에 등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험은 종 2품 이하 2명을 상시관(上試官), 정 3품 이하 3명을 참시관(參試官), 감찰 1명을 감시관(監試官)으로 하여 먼저 진사과를 시행하고 하루 뒤 생원과를 시행하였다. 그리하여 소과 복시에 합격한 생원, 진사 각각 100명은 길일을 택하여 대궐로 나아가 시종하는 신하와 참하관(參下官)들이 도열한 가운데 방방의(放榜儀)라는 의식을 치렀는데, 여기서 왕으로부터 합격증인 백패(白牌)와 주과(酒果)를 하사받았다.
이로써 생원, 진사들은 대과인 문과에 응시할 자격과 성균관에 입학을 자격을 얻었고, 관직을 원하면 하급관리로 등용될 수도 있었다.
조광조와 양팽손은 초시 복시에 합격하면 하급관리가 되는 것보다 성균관에 입학하자고 서로 약속해 둔 적이 있었다.
그해 가을 양팽손은 짚신 열댓 켤레와 괴나리봇짐을 샀다. 짚신 열댓 켤레는 서울까지 가는 데 신을 신발이었고, 괴나리봇짐이 커진 것은 생원시 시험과목인 사서삼경과 나들이 때 입을 옷가지를 주섬주섬 넣었기 때문이었다.
양팽손은 박경의 옛집으로 가려고 했다. 이미 조광조가 한천에게 부탁해 두었으므로 그곳에서 기거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을 터였다. 구면인 김식에게는 아내와 식솔이 있으므로 공부를 해야 되는데 그곳으로 가 신세를 지기에는 부담이 더 컸던 것이다.<계속>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는 화순군 홈페이지와 동시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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