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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인배들의 세상'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道'] 제9장 끊이지 않는 역모<46>

이과(李顆)의 역모 사건이 터져 조정이 또 한 번 뒤집히고 뒤숭숭할 때였다. 그러니까 조광조까지 연루된 김공저와 박경의 역모 사건이 일어난 지 8개월만이었다. 중종이 즉위한 지 2년이 지나가고 있건만 아직도 왕의 권위가 바로 서지 못하고 조정이 혼란스럽다는 증거였다. 반정 공신들이 권력을 장악하여 중종이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대신들의 잘잘못을 논박하는 대간들도 반정 공신들을 견제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처형당하고 없는 박경의 옛집으로 조광조, 김식, 김정, 김구, 기준 등이 속속 모여들었다. 역모의 수괴로 죽은 박경의 옛집은 관에 몰수당했으나 초설이 얼마 전에 사들여 예전보다 더 말끔하게 수리해 놓고 있었다.
  이들이 모여든 것은 초설이 갖바치를 초대하여 천도재를 지내주자고 제의한 일이 있어서였다. 조광조는 불가의 의식을 못마땅해 했지만 동지였던 박경을 추모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갖바치가 재주(齋主)가 되어 재를 지낸다고 하므로 마지못해 허락했던 것이다. 조광조는 서얼 출신의 박경이 처형당한 날 너무도 억울하여 집으로 돌아와 가장 비통하게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재물은 한천이 아랫것들을 시켜서 명경에서 가져와 놓았으므로 더 이상 준비할 것은 없었다. 걸망을 멘 봉두난발의 갖바치가 도착하자, 천도재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바로 시작되었다. 갖바치는 요령을 흔드는 것으로 천지의 신들에게 재를 알렸다. 조광조는 갖바치 바로 뒤에 앉았고, 그의 동지들은 좌우로 앉아 갖바치가 외는 천도(薦度)의 발원염불을 들었다. 한천은 두 손을 모으고 재단 옆에 서서 헌다의식이 있을 때마다 찻잔에 차를 따르는 역할을 맡았다. 발원염불을 시작하거나 한 대목씩 끝날 때마다 갖바치는 요령을 큰 동작으로 흔들었다.
  
  '옛 부처님도 이렇게 가셨고, 현세의 부처님도 이렇게 가시며, 오늘 영가도 이렇게 가고,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도 언젠가는 이렇게 갈 것입니다.
  영가여!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어느 곳에서 왔으며, 이 세상을 하직하고서는 이제 어느 곳을 향해 가십니까.
  태어나는 것은 허공에 한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는 것은 한조각 구름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구름 자체는 실체가 없는 것, 생사의 오고감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생사와 상관없는 한 물건이 있어 온갖 이름이나 모양에서 벗어났으므로 밝고 고요하고 청정함이 뚜렷이 드러나 생사를 따르지 않습니다.
  영가여! 이 도리를 분명히 아십시오. 이러한 도리를 알고자 한다면 허공처럼 마음을 텅 비워 청정하게 하십시오. 번뇌와 망상을 떨쳐버리면 마음 내키는 일마다 거리낌이 없을 것입니다.'
  
  불가의 의식에 거부감을 느낀 김구와 기준이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나이가 어린 그들이었으므로 참을성이 부족한 탓도 있었다. 김정은 조는 듯 무반응이었고, 김식과 조광조는 갖바치와의 인연 때문에 눈을 지그시 감고 갖바치의 발원염불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갖바치는 그들의 반응에 상관하지 않고 애절한 목소리로 박경의 영가를 불러 놓고 대화하듯 소리치고 있었다.
  
  '영가여! 지금 내가 하는 말을 들으십니까. 분명히 보고 듣는다면 보고 들을 줄 아는 그것이 무엇인지 한번 살펴보십시오.
  참 법신불(法身佛)은 진공묘지(眞空妙智)가 갖추어져 둥근 보름달 같고, 천 개의 해가 눈부시게 빛을 발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허망하고 덧없는 꺼풀을 벗어버리고 금강석처럼 견고해서 무너지지 않을 참 몸을 얻었습니다. 청정한 법신에는 안팎이 없으니 육신의 생사 또한 지난 밤 꿈과 같은 것입니다.'
  
  박경을 추모하여 인내하던 김정은 갖바치의 염불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끝내 일어서 나가버렸다. 유가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혼백을 불러 밥과 술을 주어 위로해 주는 일인데, 불가의 재는 이 세상에 미련을 버리고 근심 걱정 없는 저 세상으로 가라며 달래는 의식이었다. 김정이 고개를 흔들며 나오자 마루에 앉아 뭔가 얘기를 나누고 있던 김구과 기준이 김정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형님, 저 중의 얘기를 듣고자 우리가 여기로 왔습니까."
  "이보게. 무슨 말을 그리 심하게 하는가."
  "저 중이 무슨 자격으로 박경 형님의 혼백을 부른단 말입니까."
  "아우님들, 중이라고 비하하지 말게. 정암이나 노천이 인정하는 중이라면 뭐가 달라도 다를 것일세. 자네들이 먼저 나가도 대범하게 재를 지내고 있는 것을 보면 엉터리는 아닐세.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
  "정암 형님이 언제부터 상것들하고 상대하고 다녔는지 한번 따져 물어봐야겠습니다. 노천 형님도 마찬가지고요."
  "오늘은 억울하게 죽은 박경의 혼백을 위로해주는 날이니 말을 삼가게나. 불도를 꺼리는 정암이나 노천이 저렇게 앉아 있는 것은 다 박경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겠는가. 불가의 재가 싫으면 나처럼 조용히 비껴 있으면 그만일 것이네."
  그제야 김구와 기준이 입을 다물었다. 방 안에서는 여전히 갖바치가 외는 천도의 발원 염불소리가 계속되고 있었다.
  
  '영가여! 이러한 이치를 알아듣겠습니까.
  서산으로 지는 해는 동녘으로 다시 솟아오르고, 동녘에 솟은 달은 반드시 서산으로 기웁니다. 영가여! 이 다음 생에는 부디 좋은 인연의 몸 받아 금생에 못다 이룬 꿈을 원만히 이루소서.
  서방정토 아미타불께서 오늘 당신을 맞아하시니 열반의 기쁨을 누리소서.
  나무 마하반야 바라밀.'
  
  조광조와 김식은 갖바치의 천도 발원염불이 끝나고 목탁을 두드리며 <금강경> 독경을 시작하자, 할 도리를 다했다는 듯이 밖으로 나왔다. 햇살이 어느새 마루 끝까지 들어와 마루까지 달구고 있었다. 며칠째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 한여름이었다. 조광조의 얼굴은 비장했다.
  "나는 이것으로 박경의 혼백이 위로받았다고 생각지 않네."
  "나도 그러이."
  조광조와 김식은 서로 통하는 바가 있었다. 억울하게 죽은 박경을 생각하면서 의기가 투합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20살을 넘기지 못한 김구나 기준은 선배들의 뜻을 헤아리기에는 아직 마음이 협량했다.
  "형님, 박경 형님에게 무엇을 해주어야 형님의 혼백이 위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참으로 알고 싶습니다."
  "아우님들이 나를 혼내주려고 작정한 모양이오."
  "갑자기 불가의 의식을 치르는 형님들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네들 말이 맞아. 승려를 집으로 맞아들여 불가의 천도재를 지내준다고 박경의 혼백이 위로받는다고 생각지는 않네."
  "헌데도 형님께서는 왜 천도재에 참석하신 것입니까."
  "갖바치 대사께서 박경과 인연이 깊어 재를 지내준다고 하니 고마운 일이 아닌가. 그 점은 우리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허물일세. 억울해 할 뿐 누구 하나 나서서 박경을 위로해주자고 한 일이 있는가. 믿음이 다르다고 고마움까지 내쳐서는 아니 되네. 자비한 마음으로 온 갖바치 대사를 무시하는 것은 우리가 무자비한 사람이란 것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네. 우리가 배우고 행해 온 인(仁)은 무자비가 아니네."
  "무엇을 해야 박경 형님의 혼백이 위로받을 수 있겠습니까. 제사를 잘 지내주는 것입니까."
  "아닐세. 생전의 박경은 유도의 형식을 쉰 음식처럼 싫어 했어."
  조광조는 단호하게 도리질을 했다. 그러자 기준이 물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박경이 펴보지 못한 꿈과 생각을 우리가 이루어주는 것일세."
  "이제 형님께서 세상에 나서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게 생각해도 틀린 말은 아니네. 나는 세상에 나아가 먼저 간 박경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일세."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한 김구는 한 번 더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형님, 생진사시도 볼 생각이십니까."
  "현실 정치를 하려면 당연히 보아야지. 허나 유자광 같은 이가 득세하고 있는 지금은 아닐세. 적어도 그가 물러날 때를 보아 나갈 셈이네."
  "형님, 힘이 납니다. 형님께서 나선다면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김구뿐만 아니었다. 김식도 벼슬에 뜻이 없어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해놓고도 성균관 입학을 꺼려했던 것이다. 기준도 마찬가지였다. 벼슬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김정뿐이었다. 그러나 김정은 반정공신들을 증오하여 벼슬을 사직하고 쉬고 있는 중이었다. 만약 벼슬을 한다면 서울의 내직보다는 지방외직을, 그것도 변방의 자리를 얻어 나가려 생각하고 있는 참이었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지금은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네. 유자광 같은 간신이 거들먹거리는 세상인데 어찌 그 밑에서 고개를 숙이고 벼슬을 할 것인가."
  "정암, 머잖아 유자광은 귀양을 가고 말 것이오."
  "충암, 누구에게 들은 얘깁니까."
  "대간들이 유자광을 지목하여 계속 논박하고 있으니 아마도 반정공신들이 더 버티지 못하고 유자광을 귀양 보내는 선에서 타협을 해올 것이오."
  어린 나이답지 않게 과격한 기준이 한 마디 거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할 것입니다. 뻔뻔하기로 따진다면 간신 유자광을 따를 자가 없을 것입니다.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나는 간신 중에 간신입니다."
  "충암, 좀 전의 그 말을 자세히 들려 줄 수 없소."
  "박원종 대감 등이 마냥 유자광을 보호만 하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오. 대간들의 저항이 자신에게 미치기 전에 유자광을 자르고 말 것이오. 이제는 박원종 등도 유자광을 계륵 같이 여기고 있으니까."
  박경의 죽음도 조광조를 현실로 나오게 한 계기가 된 것만은 분명했다. 조광조는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박경과 밤새 얘기하기를 좋아했는데, 그만큼 그와 동감하는 바가 많았던 것이다. 서얼 출신으로 피해의식에 젖어 있던 박경은 세상의 불합리한 것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고, 도학에 묻혀 용인 초당에서만 지내 왔던 조광조에게는 신선한 자극이 되어 젊은 가슴에 야망의 불을 당겨주곤 했던 것이다.
  '나는 그대가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 이루고 말 것이다.'
  조광조가 천도재에 참석한 것은 박경이 미처 펼쳐보지 못했던 것을 자신이 이루어주겠다고 다짐을 하기 위해서였다. 야생마 같은 박경이 한 얘기들은 거칠었을망정 그만큼 조광조의 가슴에 깊이 각인돼 있었던 것이다.
  "정암 형님, 무얼 그리 생각하고 계십니까."
  "음, 박경이 한 얘기들을 되짚어보고 있었네. 아무리 생각해도 박경은 우리보다 서너 걸음 앞서간 동지였어. 반걸음만 앞섰어도 죽지는 않았을 텐데. 아까운 사람이야. 우리는 천재 하나를 잃은 셈이야."
  갖바치가 재를 마치고 나오자, 조광조가 먼저 일어나 말했다.
  "대사님, 감사합니다."
  "영가의 한이 많은지 정신이 집중이 잘 안 되서 혼이 났습니다. 하지만 선법(禪法)으로 천도했으니 박 공(公)의 영가는 좋은 세상에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박 공이 일찍 죽은 것은 이 세상과 인연이 잘 맞지 않아서이니 너무 안타까워하지는 마십시오. 그것도 불가에서는 집착이라 하고 병이라 합니다."
  "대사님, 낙산으로 가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오늘은 한천이가 대사님을 잘 모시고 가거라."
  걸망을 멘 갖바치는 큰 삿갓을 깊이 눌러쓰더니 한천을 앞세우고 곧 떠나버렸다. 해는 중천에 떠올라 불볕을 퍼붓고 있었다. 그늘 진 방에서 한 발짝만 나가도 땀이 금세 이마에 돋았다. 초설이 박경의 옛집을 관에서 사들인 것은 조광조 등이 독서당으로 이용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나중에 집 관리는 한천이 하기로 했다. 어차피 한천은 역과 복시에 급제하면 벼슬아치들이 드나드는 명경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김식 등이 샘가로 가서 등물을 하고 돌아왔다. 그들의 얼굴은 천도재를 지낼 때와는 달리 쾌활해져 있었다. 조광조는 좀 전에 하던 얘기를 마저 꺼냈다.
  "박경이 한 얘기 중에 가장 잊히지 않는 것은 바로 이것이오. 과거제도의 모순이오. 대체로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특성은 공명심과 권력욕이 강한 사람들이 아니겠소. 그 자들의 꿈은 오로지 입신양명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뿐이오. 그러니 애초부터 왕도정치나 군자가 되는 것에는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오. 또한 그 자들에게 과거급제란 얼마나 쉬운 일이오. 과거 시험문제는 이미 다 나와 있겠다, 그것을 몇 년이고 외기만 하면 되니 얼마나 쉬운 일이오. 수신제가도 되지 않은 소인배들이 벼슬아치가 되는 세상이니 백성들의 고통이 어찌 사라질 날이 있겠소."
  "맞습니다. 초야에 묻혀 유도를 연마하는 선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 중에서 관리를 임명하는 것이 유도를 바로 세워 지치를 이룰 수 있는 지름길일 것입니다. 그리만 된다면 왕도정치를 이룰 날이 꿈만은 아닐 것입니다."
  "박경은 과거를 볼 수 있는 자격에도 문제가 있다고 했소. 공인, 상인, 무당, 승려, 노비, 서얼 등도 재주가 있고 유도에 밝으면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했소. 박경은 갖바치 대사를 예로 들어 천민일지라도 지혜가 뛰어난 이에게는 삼고초려를 해서 대궐로 불러들여야 한다고 했소. 그렇게 하는 임금이 어진 임금이고 그렇게 하는 대신이 지혜로운 대신이라고 했소."
  그러나 박경이 했다는 두 번째의 얘기는 너무나 충격적이고 파격적이어서 아무도 대꾸를 하지 못했다. 과격한 말을 하여 동지들을 곧잘 놀라게 했던 기준조차도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박경의 얘기는 나라를 지탱하고 있는 신분제도를 무시하고 각자의 능력에 따라 벼슬도 주고 예우하자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화제는 박경의 얘기보다는 최근에 벌어진 이과의 역모 사건으로 돌았다. 김식이 이과의 얘기를 꺼내면서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아우님들은 성희안의 4촌인 이과가 왜 역모를 꾸몄다고 생각하오."
  "이과 자신도 폐주를 물리치려고 비록 귀양지 전라도였지만 군사를 모은 사람인데 반정공신들이 공을 크게 쳐주지 않고 원종공신으로 책정한 것에 불만을 품고 역모를 꾸민 것 아닙니까."
  "나는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소. 부패한 반정공신도 싫고, 왕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임금도 실망스러워져 역모를 꾸민 것이라고 생각하오. 이과는 머리도 좋고 패기가 만만찮은 사람이오. 이 점이 박경 동지 때의 사건과 다른 점이오."
  
  이틀 전에 이과, 하원수(河源守) 찬(纘), 손유(孫洧) 등을 참형에 처하고 병조정랑 윤귀수(尹龜壽) 등을 유배를 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시켰는데, 김식의 얘기대로 중종의 충격은 매우 컸다. 이번의 역모는 자신을 폐위시키자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였다.
  종실의 서얼인 노영손이 고변하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됐을지 모를 아찔한 사건이었다. 노영손이 역시 종실의 서얼인 자신의 7촌 조카사위 하원수 찬의 집에서 이과, 구현휘 등이 역모를 모의하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는 중종에게 즉시 고변했던 것이다.
  거사 날도 구체적으로 잡아놓고 있었다. 중종이 선왕이 묻힌 선릉에 가서 제사지내고 대궐로 돌아오는 길에 양인들의 농사를 살펴볼 계획이 있었는데, 그때를 이용하여 중종을 폐위시키자는 것이었다.
  노영손은 하원수 찬에게서 들은 얘기를 그대로 고변했다. 김공저와 박경 사건 때보다도 훨씬 더 치밀했다. 중종은 크게 충격을 받아 이가 떨릴 지경이었다.
  양반으로 가선(嘉善)이 된 사람은 다 군호를 받았는데 반정 때 공을 세운 구현휘는 아직 봉군되지 못하여 큰 불만을 가지고 있고, 손유 역시 반정 때 군사 400여 명을 지휘한 공이 있는데 4등 공신에 올랐다가 거기에도 끼지 못하여 벼르고 있고, 병조정랑 윤귀수는 3등 공신에 올랐다가 4등 공신에도 오르지 못하여 분을 삭이고 있으니 이들을 이용하여 이과 등이 모의하고 있다는 고변이었다.
  특히 윤귀수는 임금을 호위하는 내금위 군사 400여 명을 지휘하고 있으므로 중종이 선릉에서 돌아올 때를 이용하여 그 군사로 중종을 폐위시키고 측실 소생이지만 성종의 아들인 견성군(甄城君) 돈(惇)을 새 왕으로 추대한다고 하니 중종으로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지 않을 수 없었다. 중종은 조정의 대소신료들 앞에서 자신의 무력감을 토로하는 장탄식을 했다.
  "내가 원래 덕망이 없는데도 여러 대신들이 나를 왕으로 추대한 것은 내가 종실의 윗자리에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침 그때는 내가 병을 앓고 난 다음이라 기력이 없어서 이를 피하려 하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세 번이나 사양하였다는 것은 윤형노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나는 그때 윤형노가 나의 뜻을 여러분에게 전했는지, 혹은 경황이 없던 때인지라 잊고 전하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내가 왕위에 오른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또 간사한 무리들이 말을 퍼뜨리고 있으니 내 마음이 답답할 뿐이다. 얼마 전에는 김공저가 대신을 해치려 하여 조정에 큰 변고가 있었는데, 지금은 대신을 모해할 뿐 아니라 왕을 넘보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이런 미친 소리들은 항상 논공이 공평하지 못하여 분을 참지 못하겠다는 것인데, 이것이 어찌 여러 대신들의 잘못이겠는가. 모든 것은 내가 덕이 없고 나라의 명령이 일관되지 못하여 일어난 것일 뿐이다. 이 무리들이 어찌 대신들만 해치려 하겠는가. 지금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모든 게 내가 덕이 없기 때문에 생긴 일들이다."
  중종은 대신들을 질책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럴 힘도 없었다. 즉, 이과는 성희안과 4촌이고, 윤귀수는 노공필과 4촌이었으나 죄인들과 그들을 분리시켜 말하였다.
  역모에 가담했다는 증거가 없는데도 견성군은 그해 10월 결국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사사를 당했다. 육조의 대신들이 함께 입을 모아 중종을 압박했던 것이다.
  "대의로써 결단하여 종사를 편안케 하옵소서."
  이는 죄 없는 견성군을 죽임으로써 반정에 가담하고도 공을 인정받지 못하여 불만이 많은 무리들을 견제하자는 협박이었다. 그러나 반정의 공훈에 대한 불만은 대소의 벼슬아치들뿐만 아니라 종실의 종친들에게까지 넓게 퍼져 있는 형국이었다.
  중종은 마지못해 견성군을 사사하기는 했으나 부의(賻儀)를 보내고 왕자로 예우하여 예장(禮葬)케 명했으며 견성군의 아내에게는 봄가을로 쌀 20석을 주게 하였다. 견성군의 자녀들을 종실의 족보에서 빼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중종은 '돈(惇)을 죽게 한 것은 종사를 위해 부득이한 일이었다. 죄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자녀를 왕실의 족보에서 뺀단 말인가' 하고 거절했다.
  
  박경의 옛 집은 다시 조용해졌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마당을 여전히 뜨겁게 달구고 있을 뿐이었다. 조광조는 동지들을 다 보내고 난 뒤 방에 혼자 남아 있음을 느끼고는 쓸쓸해했다. 날이 더워 책을 펴고 책장을 넘겼으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천정을 휘둘러보니 드러난 서까래 사이에서 허연 그림자 한 점이 어른거리는 것도 같았다. 그러고 보니 방 안에 자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까래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그것도 있었다.
  '저것이 무엇인고.'
  잠시 후 조광조는 그것을 박경의 혼백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허연 그림자는 단번에 사라져 다시 볼 수 없었다.
  '내가 헛것을 본 것일까.'
  조광조는 자세를 고쳐 앉고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박경, 이제 갖바치 대사의 말대로 이 세상에는 미련을 버리고 자네가 가고 싶은 세상으로 가시게나. 자네의 꿈을 내가 이루어줌세. 우리 동지들이 자네의 꿈을 이루어줄 걸세. 그러니 이 세상을 자꾸 뒤돌아보지 말게. 아직도 이 세상은 소인배들이 날뛰는 난장판이네. 공을 서로 차지하려고 끝없이 모함하고 저주하고 있네. 반정 공신들이 처음 나라를 안정시켰을 때 인과 예를 바로 세우는 유도를 멀리하고 그들 자신부터 소인배의 본색을 드러내어 권력과 욕심을 채웠기 때문일세."
  조광조는 박경의 옛 집에 앉아서 눈물을 흘렸다. 처음에는 박경의 애처로운 혼백이 불쌍하여 눈물을 흘렸지만 나중에는 무력한 중종이 불쌍하여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계속>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는 화순군 홈페이지와 동시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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