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도 없는 한밤중이었다. 누군가가 명경의 문을 쾅쾅 두들겼다. 한천은 취객인 줄 알고 모른 체했다. 그러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좀처럼 물러가지 않고 있었다. 잠잠하다가도 한천이 잠을 청하려고 눈을 붙이려들면 다시 문을 두드리곤 하는 것이었다.
한천은 문을 열어 줄까 하다가도 이부자리를 뒤집어쓰고 고슴도치처럼 가만히 있었다. 김만교의 외동딸 소옥이를 다시 만나 노량진의 갈대밭을 거닐고 있는 꿈을 꾸던 중인데 취객이 달콤한 꿈을 앗아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한천은 드러누운 채 행복한 꿈의 잔영을 뒤쫓았다. 그러나 꿈속에서 호호호 하고 웃던 소옥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취객인 듯한 사람이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한천이 나서지 않으니 피곤하기도 하거니와 무섭기도 하여 명경의 그 누구도 모른 체하고 있었다. 지체 높은 벼슬아치는 아닌 모양이었다. 타고 온 말이 진저리치거나 아랫것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지는 않았다. 이윽고 명경 앞길을 지나가던 순라군의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게 누구시오."
"명경을 찾아온 사람이오."
그러고 보니 취객은 아니었다. 들리는 목소리가 또렷하지는 않지만 또박또박한 말투였다.
"야심한 밤에 왜 돌아다닌 것이오."
"급한 일이 있어 찾아온 것이오."
"야심한 밤에 돌아다니는 놈은 도둑놈뿐이오. 갑시다, 포도청으로."
"허허, 난 낙산에 사는 갖바치요."
순라군 포교가 크게 말했다.
"갖바치라니, 그렇다면 백정이란 말인가. 이놈은 도둑질하러 온 것이 분명하다. 두 손을 묶어라."
한천은 그제야 옷을 주섬주섬 입고 뛰어나갔다. 갖바치는 벌써 저만치 순라군들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한천이 달려가 소리쳤다.
"이보시오. 그분은 나의 스승이오. 어서 묶은 손을 풀어주시오."
"이 백정 놈이 스승이라고 했는가."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스승님 보고 도둑이라니, 누명을 씌운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고나 하는 말이오."
한천이 다그치자 순라군의 포교가 먼저 발을 뺐다. 그러자 순라군들이 포승줄을 풀더니 투덜거리며 물러갔다.
"초저녁부터 동대문에서 혜화문까지 왔다리갔다리하다가 겨우 한 놈 붙잡았더니 또 공치고 말았네."
도둑이 횡행하자 순라군들은 날을 정해 놓고 도둑을 잡아들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마터면 갖바치도 포도청까지 갔다 올 뻔했던 것이다. 포도대장의 지시로 목표치를 채우기 위해 순라군들은 앞뒤 사정을 가리지 않고 야심한 시각이면 아무나 잡아들이고 있었다. 이것도 양인들을 못 살게 구는 큰 폐단이었다. 심지어는 날이 더워 바람을 쐬러 나왔다가, 또는 물가에서 목욕을 하던 중에 포도청으로 끌려갔다가 나오는 양인들도 있었다.
한천의 방으로 들어온 갖바치는 한천에게 삼배를 받고는 조금 전에 당한 봉변부터 얘기했다.
"몸을 숨겼으면 순라군들이 나를 보지 못했을 터이나 도둑이 아닌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겠느냐."
"스승님, 무슨 일로 한밤중에 오셨습니까."
"초설이를 보러 왔다. 오늘 낙산으로 상궁 하나가 찾아왔는데 오늘 국문이 있었다고 하더구나."
"저도 알고 있습니다."
"네가 어찌 안단 말이냐."
"정암 선생님이 연루되었다기에 어제는 과천엘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초설에게 들었다는 것이냐."
"네. 누님에게 들었습니다."
"국문 이후의 얘기도 들었느냐."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누님도 몹시 궁금해 하다가 조금 전에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초설이를 깨워 어서 불러 오거라."
갖바치가 명경에 온 것은 낙산을 찾은 김 상궁에게 조광조까지 연루되었다는 국문의 전후 사정을 다 듣고 나서는 그 얘기를 초설에게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조광조와 김식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훈방되었지만 그 여파는 화근이 되어 오래오래 갈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자다가 나온 초설이 갖바치에게 삼배를 올리려 했으나 갖바치는 일배만 받고는 사양을 했다.
"됐다. 일배만 하거라."
"국문 소식을 들었느냐."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은 알고 계십니까."
"낙산에 자주 오는 김 상궁에게 자세히 들었다. 역모 사건으로 조정이 시끄럽다구나."
초설은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여 갖바치의 얘기를 잘랐다.
"정암님은 어찌 되었습니까."
"나도 그 때문에 한밤중인데도 왔다."
"무사합니까."
"그렇다. 나이가 어리다는 것이 참작이 되어 김식과 함께 풀려났다."
초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편히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찌나 걱정되든지 뜬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초설이는 아직도 정암 선생을 사모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정암님이 아니라도 죄 없는 선비가 무함을 받아 형벌을 받는다면 억울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용인에서 공부만 한 분이 무슨 연유로 역모에 가담하겠습니까."
"초설이는 애착이 강하구나. 형벌을 받는 것도 전생의 업이라고 하지 않더냐. 업이라 생각하고 선을 쌓는 공덕을 지어야지 억울하다고만 하면 어느 때 업을 씻을 것이냐. 원한은 원한을 낳을 뿐이다."
"무함을 받아 형벌을 받는데도 말입니까."
"무함한 사람이나 무함 받는 사람이나 다 전생에 얽히고 얽힌 인연이 있었을 것이니라. 내가 여기 온 것은 정암이 풀려났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러 왔다. 정암이 전생에 무슨 선업을 그리 많이 쌓았는지 나도 궁금하구나."
"선생님, 소식을 전해주어 고맙습니다."
"허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이다."
"그것은 또 무슨 말씀입니까."
"말이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아니더냐. 이번 사건만 해도 내가 듣기에는 역모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개운치 못하다. 그래도 그럴듯하게 역모를 엮으니 역모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럴 듯하게 엮은 사람이 있었으니 대궐 뜰에서 국문을 하게 된 것이 아니겠느냐."
"그 자가 누구입니까."
"정암과 김식이 빛이라면 그들은 어두운 그림자이다."
한천도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스승님, 그 무도한 자들이 누구입니까."
"호군 심정과 승지 남곤이다. 아마도 그들은 이번 일의 공으로 높은 품계에 오를 것이다. 그들은 출세할 수 있는 절호의 때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 허나 그들은 양심을 죽이는 사약을 스스로 마신 것이나 다름없으니 운이 다하면 어느 때인가는 불행하게 죽게 될 것이다."
초설은 숨이 막혔다. 심정이라면 명경을 열 때 민가를 구입하는데 주선해 주고, 지금까지 명경을 운영하는데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인물인 것이다. 조광조가 밝은 빛이라면 심정은 어두운 그림자라고 하니 초설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초설은 그들의 운명을 단정 지어 말하는 갖바치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정지(심정의 자)님이 왜 그림자가 되는 것입니까."
"정암과 정지는 섞일 수 없는 운명인 것 같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까."
"너는 아무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니 너는 가만히 있어야 한다. 네가 움직이는 것은 재앙의 불을 더 번지게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선생님, 어찌 불구경만 하고 있으란 말입니까."
"그릇은 이미 깨어져 버렸다. 심정과 남곤이 고변을 해버렸으니 그것을 어찌 주워 담겠느냐. 이제 그들은 서로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서로 화해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입니까."
"정암은 양심을 천금보다 귀하게 여기는 도학자이다. 반면에 심정과 남곤은 출세를 위해 양심을 헌신짝 버리듯 한 소인배들이다. 특히 언젠가 내가 교언에 능한 심정을 경계하라고 일렀지 않느냐. 네 생각으로는 두 사람이 화해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러기는커녕 네가 움직일수록 화가 더 커질 것이다. 그러니 너는 노자의 무위(無爲)의 지혜를 알아야 한다.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무엇을 하려고 작위(作爲)에 빠지지 말라는 말이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기다리는 것뿐이다. 오직 기다려야만 순리를 얻을 수 있다. 불가에서는 이것을 중도(中道)라고 한다. 중도란 가운데가 아니라 이쪽과 저쪽을 여읜 것을 말한다. 그러면서도 두 쪽을 다 포용하는 것을 말한다. 알겠느냐."
초월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갖바치가 한꺼번에 많은 얘기를 했기 때문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자신은 도를 닦은 도인이 아니라 저잣거리에 사는 한낱 중생일 뿐인 것이었다.
"중도란 정암이나 정지를 떠나되 그렇다고 두 사람을 버리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너로서는 받아들이기가 아직 어려울 것이다."
한천이 끼어들었다.
"이전처럼 두 분을 똑같이 호의로 대해주라는 말입니까."
"부족하기는 하지만 굳이 말한다면 그렇다."
"선생님, 이 얘기를 해주기 위해 오신 것입니까."
"나는 너를 알고 있지 않느냐."
초설은 갖바치에게 더 묻지 않았다. 기다리면 순리라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데, 아직은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조광조는 사모의 대상이었고, 심정은 많은 흠결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도운 은인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갖바치는 곧 자리를 떴다. 그제야 초설이 한천에게 말했다.
"그래도 정암님이 풀려난 것은 지월심이 박 대감을 찾아갔기 때문일 것이야."
"지월심 누님의 공이 큽니다."
"나도 그리 생각하고 있다. 네가 수고롭지만 다시 한 번 과천을 다녀와야겠다. 지월심이 수고했는데 모른 체하고 지나갈 수는 없지 않느냐."
"누님, 그렇습니다."
"지월심에게 답례로 무엇을 해주면 좋겠느냐."
"상금을 주면 어떻겠습니까."
"지월심이 돈을 받겠느냐."
"누님께서는 선물을 하실 생각인 모양입니다."
"중국에서 온 사신들에게 구한 용뇌향(龍腦香)이 있는데 그것을 주어야겠구나."
"용뇌향이라면 서역산이 아닙니까."
용뇌향은 돈황에서 들어온 향료로 양귀비가 사용했다 해서 사대부 여인들에게 인기가 좋았는데, 중국 사신들이 들어오면 밀거래를 할 정도로 수요가 많았다. 특히 궁녀들 사이에서는 금은과 바꾸는 풍조가 만연해 있었다. 초설은 중국 사신에게 고려인삼과 물물거래를 하여 구해두었던 것인데, 조광조를 무사히 풀려나게 한 지월심이 어찌나 고마웠던지 선뜻 내놓으려 했던 것이다.
한천이 향료 용뇌향이 서역산이라는 것을 안 까닭은 역과 복시를 준비하면서 알게 된 상식이었다. 돈황의 특산물 중에는 옥으로 만든 야광술잔과 남자의 코를 마취시키는 용뇌향이 유명했던 것이다.
"헌데 네가 과천에 가는 것은 무리가 아니냐. 곧 역과 복시가 다가오고 있지 않느냐."
"아침 일찍 다녀와 복시를 준비해도 탈이 없을 것입니다."
한천은 역과 복시가 곧 다가오고 있었지만 굳이 과천을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것은 초설의 심부름을 핑계 삼아 소옥을 만나보기 위함이었다. 초설은 한천의 들뜬 마음을 의아하게 여겼으나 묻지는 않았다.
한천은 간밤에 현몽을 했다고 생각했다. 초설의 심부름으로 또 소옥을 만나게 됐으니 그럴 만도 했다.
"복시에 지장이 없다면 아침 일찍 다녀오너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일찍 나서서 남소문 술청어멈 집에서 국밥 한 그릇 비우고 한 걸음에 다녀오겠습니다."
한천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소옥을 단 한번 보았던 것인데, 꿈속에서는 자신과 오래도록 사귄 연인으로 나타나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한천은 간밤의 꿈을 가만히 떠올려보았다. 한번 만났는데도 낯이 익은 것은 전생에 인연을 맺었던 여인이 틀림없었다. 전생에 그런 인연이 아니라면 자신의 꿈에 나타날 리가 없는 것이었다.
한천은 달콤한 공상을 하면서 아침을 기다렸다. 자신이 역과 복시에 급제하면 때를 보아 소옥과 백년가약을 맺고도 싶었다. 그리하여 소옥이 원한다면 중국 땅으로 건너가 중국의 명산을 유람하며 아들 딸 낳아 살고도 싶었다.
한천은 나지막이 소옥이를 중얼거리며 선잠에 들었다가 경고의 북소리에 벌떡 일어나 행장을 꾸렸다. 다행히 늦잠은 아니었다. 명경의 여자들이 아직 잠에서 깨어나기 전이었다. 한천은 초설이 준 용뇌향을 바랑 깊숙이 넣고 명경을 나섰다. 초여름 이른 아침의 바람은 촉촉하고 상쾌했다.
그날 오후, 정오가 막 지난 후였다. 이조정랑 김정이 김식을 데리고 명경을 찾아왔다. 김식은 어제 국문을 받은 사람답지 않게 쾌활했다. 김정이 김식에게 술을 사려고 초대했으나 초설이 보기에는 입장이 바뀐 듯했다. 김식이 김정을 위로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김식은 여전히 다변이었고, 김정은 너무 과묵하여 침울해 보일 정도였다. 초설은 김식을 보자마자 공손하게 허리를 구부려 말했다.
"노천 나으리,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오늘은 소첩이 직접 상을 마련하여 올리겠습니다."
"난 아무렇지 않소. 어제 받은 국문도 김공저나 박경이 받은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소. 그들은 모진 담금질까지 받았지만 나나 정암은 곤장 한 대 맞지 않고 추관들에게 구두로만 국문을 받았소. 허나 나와 정암이 박경과 나눈 얘기는 지금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얘기일 뿐이오. 그것을 역모라 한다면 앞으로는 벙어리처럼 아예 입을 닫고 살아야 할 것이오. 충암(김정의 호),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마다요. 반정 때 공이 없는 사람들이 공이 있다 하는 것을 비난하고, 반정으로 권력을 얻은 박원종의 호화생활을 비난하는 것이 어디 노천(김식의 호)만 하는 얘기겠소."
김식이 초설을 보며 웃더니 말했다.
"정암도 무사하니 걱정하지 마시오."
"갖바치 어른께 들어 알고 있습니다."
"하하하. 갖바치 어른이야말로 장안의 소식통이오. 대궐의 소식을 누구보다 먼저 알고 있으니 말이오."
"노천의 태도를 보니 내가 위로를 받아야 할 것 같소."
"아니, 충암은 이조에서 정랑이란 벼슬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헌데 무엇이 불만이란 말입니까."
"반정의 정승들이 거들먹거리고 다니는 꼴을 어찌 제 정신으로 바라볼 수 있겠소. 차라리 지방으로 나가 있는 것이 마음 편할 것 같아 유순정 대감에게 부탁했소."
"충암, 생각을 잘했습니다. 지방으로 나가 좋아하는 그림이나 그리시고 좋은 세월을 기다리면 되지 않겠소."
"그럴 생각이오. 추강은 낚시로 세상을 잊었지만 나는 낚시 대신에 그림을 그릴 것이오. 외직으로 나간다면 아주 멀리 전라도로 가고 싶소."
초월이 김식에게 술을 따라 올리며 말했다.
"대궐에 가셔서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놀랐다기보다는 기가 찼소. 유자광이 추관으로 나와 앉아 있는데, 그 자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었소."
"노천, 나도 꼭 그놈의 끝을 보고 싶소. 권선징악이라는 것이 있다면 말이오. 신수근은 그렇다 치고 왕비 신씨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폐위시켰단 말이오. 그것은 그들이 저지른 행동이 의롭지 못한 것을 스스로 자인하는 것이 아니겠소. 더구나 신씨는 전하의 조강지처로 얼마나 전하와 정분이 두터운 분이었습니까. 부부 사이의 인륜을 짓밟은 그 자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것이 있겠소."
초설은 김정의 말에 감격하여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중종의 첫 왕비였던 신씨를 옹호하는 김정의 사내다운 태도에 흠뻑 반해버렸다. 김정이 화조도를 잘 그린 데는 그림에까지 그런 그의 마음이 묻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초설은 생각했다. 자신의 방에 걸린 화조도도 일찍이 김정이 그려준 것이었다.
"충암, 그림을 그릴 줄 아는 그대가 부럽소. 난 서울에 남아 무슨 낙으로 살아야 할지 막막하오. 이 나이에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는 것도 쑥스러운 일인 것 같고."
"동지들이 많이 있지 않소."
"서울이란 곳이 어디 우리 동지들만 사는 땅입니까. 특히 이번 일로 나는 사람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습니다. 심정은 나와 아주 가깝게 지내는 선배였습니다. 심정 집을 드나들며 술을 마시고 끼니 때가 되면 함께 밥을 먹는 사이였으니까요. 허나 앞으로는 그럴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번에 심정의 진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 말입니다."
"노천, 그대의 말을 들으니 서울 땅을 더욱더 떠나고 싶소. 심정과 남곤 같은 소인배들이 설쳐댈 서울 땅이 정말 싫소."
초설은 잠시 밖으로 나왔다. 그때 한천이 바랑을 손에 들고 명경으로 들어왔다. 한천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소옥을 만난 한천의 얼굴에는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어찌 됐느냐."
"지월심 누님이 선물을 받지 아니했습니다."
"그것은 또 무슨 까닭이냐."
"그날 밤 지월심 누님이 박 대감 댁으로 찾아갔으나 대감을 만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박 대감은 그날 밤 대궐에서 나오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정암님은 누구의 힘으로 방면된 것인지 알 수 없구나."
"어젯밤 갖바치 어른의 말씀대로 나이가 어려 훈방조치된 것이 분명합니다. 김 상궁에게 그렇게 들으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찌됐든 다행한 일이야."
"누님, 다시 가져온 용뇌향을 받으셔야지요."
"한 번 내 손에서 나간 것이니 이제 그 용뇌향은 내 것이 아니다. 그러니 네 마음대로 해라. 너도 인사할 데가 있지 않겠느냐."
한천은 단번에 소옥을 생각하고는 초설에게 용뇌향을 돌려주지 않았다. 한천이 소옥에게 용뇌향을 전하러 왔다고 말하자 몹시 부러운 얼굴을 했던 것이다. 한천은 방으로 들어와 역관 복시를 준비하면서 흥에 겨워 콧노래를 불렀다.<계속>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는 화순군 홈페이지와 동시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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