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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부는 역모의 피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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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부는 역모의 피바람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道'] 제8장 새 세상의 아침<43>

조광조는 25세가 되어서야 용인 초당을 벗어나 자유롭게 서울을 출입했다. 그때 조광조는 천민 갖바치와 나눈 얘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일찍이 낙산에 사는 비승비속의 갖바치가 조광조에게 '한훤당 공(公)이 세상에 나오지 않고 숨어 사는 것을 도학의 근본이라 했습니다. 인정(仁政)을 펴던 성종 조의 일이니 그것이 그때는 순리였습니다. 허나 패악의 시대에 도학을 닦는다고 세상에 나오지 않는 것은 도학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 도학이란 숨고 나오는 것을 초월한 곳에 있는 것입니다. 숨는다거나 나온다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세상의 부름, 순리에 응하는 것이 바로 초월이라는 말이지요' 하고 말했을 때 조광조는 '우리 한원당 선생께서 사사를 당하신 후였습니다. 공부를 하다가 목숨과 바꾸어도 좋을 그 무엇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세상에 나아갈 힘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하고 갖바치에게 말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봉두난발의 갖바치가 조광조에게 한 말은 미망에 사로잡힌 제자를 깨우치기 위해 몽둥이로 내리치는 선가의 봉(棒)이나 다름없었다. 조광조는 자신의 머리를 몽둥이로 내리치는 듯한 충격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패악의 시대에 도학을 닦는다고 세상에 나오지 않는 것은 도학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백성들은 패악의 시대가 가고 새 세상의 아침이 열렸다고 하지만 조광조의 눈에는 폐조(廢朝; 연산주 시대)의 시대와 달라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인정을 펴던 성종 조의 정치로 되돌아가고는 있었지만 벼슬아치는 바뀌지 않고 그대로였다. 토지가 부족하여 양인들이 먹고 사는 일상도 여전히 곤궁했다. 반면에 무오년에 옥사(獄事)를 일으켜 청류사림들의 씨를 말린 장본인 유자광은 여전히 권세를 누리고 있고, 박원종은 연산주의 궁녀와 흥청들을 자기 사저로 몰래 불러들여 대궐 밖의 대궐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반정의 3대장들은 아들과 사위 외척, 유자광은 고향 사람들까지 공신대장에 오르게 하여 백성들의 살림을 힘들게 하였으며, 이를 막아야 할 중종까지 외삼촌인 형조참판 윤탕로는 물론 심지어 왕이 되기 전 이웃에 살며 친했던 목사(牧使) 조한손(曹漢孫) 등 19명에게도 슬그머니 원종공신(願從功臣; 등급이 있는 공신 외에 작은 공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공신)의 칭호를 주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조광조와 그의 동지들 눈에는 결코 새 세상의 아침이 아니었다. 겉만 새로운 세상이었지 속은 폐조의 시대나 다름없었다. 세상이 조광조에게 용인 초당을 벗어나게 했다. 이러한 부조리를 더 이상 방관하는 것은 갖바치의 말대로 도학을 욕되게 하는 일이었다.
이 무렵 조광조가 자주 만나는 사람은 자신보다 10여 년 연상인 박경(朴耕)이었다. 고향이 나주인 박경은 서얼 출신이었는데 선산으로 가 정붕(鄭鵬) 문하에서 공부를 한 사람이었다. 정붕은 김굉필과 제자의 인연이 있었으므로 조광조나 박경은 같은 문인이 셈이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바로 친해질 수 있었다. 더구나 정붕은 조광조가 흠모하는 선비 중의 한 사람이었다.
얼굴이 웅위하고 키가 8척 장신이었던 정붕은 김굉필에게 도학을 배웠는데 특히 <논어>의 대가였다. 남이 알아주었을 뿐 아니라 정붕 자신도 버릇처럼 '논어 같은 글은 내가 오랑캐에게 가르쳐도 능히 대의(大義)를 알게 할 것이니라'고 하였던 것이다.
▲ 김굉필 친필. ⓒ프레시안

그는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가 되었다가 연산주 갑자년에 김굉필의 제자라는 이유로 곤장을 맞고 영덕으로 귀양을 갔다가 반정으로 돌아왔으나 벼슬 하지 아니하였다. 그 이유는 모사에 능한 홍경주를 보고 조정의 앞날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벗들이 권면한 데다 중중에게 불리어 마지못해 조정에 나아갔으나 곧 그만 두고 선산으로 돌아와 버렸다. 벗들이 그 이유를 물으니, '임금의 부르심이 간곡하기에 마지못하여 조정에 나갔더니 자못 마음을 놀라게 하는 일이 있으므로 고향에 물러가서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이에 벗들이 '무엇이 마음을 놀라게 한 일이냐'고 묻자 '임금에게 사은숙배(謝恩肅拜)하려고 대궐에 나아가 승정원 문 앞에 이르니, 서각대(犀角帶)를 두른 어떤 재상이 등을 돌리고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멈칫하고 두려워서 숨을 죽이면서 서 있었는데 조금 후에 돌아다보는 그 얼굴을 보니 홍경주였다. 그 관직을 물어보니 찬성이었다. 나는 갑자기 마음이 섬뜩해서 몸을 빼쳐 물러나와 벼슬할 생각이 없어졌다'고 하였다.
그래도 좌의정 성희안은 정붕을 신뢰하여 그를 청송부사로 추천했다. 그런 뒤 성희안은 젊었을 때부터 친한 친구였던 정붕에게 서신으로써 스스럼없이 청송의 잣과 벌꿀을 서울로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정붕은 '잣은 높은 산꼭대기에 있고, 벌꿀은 민가의 벌통에 있으니 부사 된 사람이 어찌 이를 얻겠는가' 하고 답장을 보내 성희안을 부끄럽게 했다. 이 일로 정붕은 사직하고 아예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해버렸다.
폐조 갑자년에 영덕으로 귀양을 갈 때 유자광의 험한 조롱에도 정붕은 의연하게 처신하여 김굉필의 제자들로부터 '과연 운정(雲程; 정붕의 자)이요 신당(新堂; 정붕의 호)답다'라는 칭송을 들었으니 나이 어린 조광조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자광의 조롱은 권세를 이용하여 짓밟는 협박에 가까운 것이었으나 정붕은 조금도 자신의 기를 꺾지 않았다. 귀양 가는 정붕에게 유자광이 자신의 하인에게 독약이 든 주머니를 보내면서 '이번 걸음에 아마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것을 가지고 자처(自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지만 정붕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독약주머니를 그대로 간직하였다가 유자광이 귀양을 가게 되자, '이 물건은 전일에 나에게 준 것인데, 귀양 가는데 필요할 것이므로 지금 돌려준다.'고 하였던 것이다.
정붕은 도학자들 간에 지조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유자광과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을 때도 정붕은 그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친척 간이므로 유자광에게 문안하는 예절만은 버리지 않았으나 그를 몹시 경계했던 것이다. 정붕의 계집종이 유자광 집에 갈 때는 반드시 삼노끈으로 팔을 단단히 묶어 보냈다가 돌아오면 풀어주었으니 이는 계집종이 아픔을 느껴 유자광 집에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함이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정붕이 대궐에 입직해 있을 때 그의 집에 양식이 떨어져 부인이 유자광 집에 꾸어주기를 청하니 유자광이 기꺼이 '친척 간에는 서로 도와주는 것이 의리인데, 교리가 너무 고집이 세서 그렇지 내가 어찌 무심하리요.' 하고 쌀자루와 장항아리를 노새에 실어서 보낸 적이 있었다. 정붕이 대궐에서 집으로 돌아와 흰 쌀밥을 보고 부인에게 물어 사정을 알고는 웃으며 밥상을 밀치며 '내가 입직하던 아침에 비지를 사서 죽을 끓였는데도 조처하지 않은 것은 나의 실수다'하고 친구에게 쌀을 구해다가 유자광 집에 돌려보냈던 것이다.
조광조는 이와 같이 고상한 인품을 지닌 정붕의 제자인 박경과 금세 친해졌다. 정붕의 제자들 중에서 박경은 점잖기보다는 튀는 쪽이었다. 박경은 문과에 응시할 수 없는 서얼이었므로 부조리한 것에 불만이 많았고, 그것을 개혁하는 데 관심이 누구보다 강했다.
조광조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이보다는 박경 같은 사람이 좋아했다. 그래서 박경을 만나면 밤새도록 토론을 하고 속마음을 주고받았다.

그날도 조광조는 서울로 올라와 박경을 만나고 있었다. 조광조는 초설이 명경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으나 그곳으로 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그곳보다는 박경이 자취를 하는 허름한 민가가 편했다. 박경은 술잔을 기울였고 조광조는 차를 마셨다.
"정암, 도학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갖바치가 이 시대의 진정한 스승이오. 내 스승은 신당(新堂; 정붕의 호) 선생이나 사실은 불만이 많소."
"신당 선생만큼이나 지조와 기개 있는 선비가 이 세상에 어디 또 있겠습니까."
"간신들이 보기 싫다고 산으로 숨어버린다면 누가 이 더러운 세상을 청소하겠소."
"그래도 신당 선생 같은 분이 있으니 세상이 덜 썩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누가 뭐래도 나는 신당 선생을 존경합니다. 간신 집의 쌀 한 톨도 입에 넣기를 꺼렸던 지조와 1품의 벼슬도 탐하지 않았던 의리는 우리 후학들이 본받아 칭송할 일입니다."
박경은 스승 정붕과 기질이 달랐다. 정붕은 숨어 지내기를 좋아했고, 박경은 드러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박경은 스승과 달리 경박하게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다변은 이치를 벗어난 일이 없었기에 가볍지 않았으므로 조광조는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 때가 많았다.
"정암, 서얼인 내가 과거에 나서지 못해 세상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오. 수신보다는 문장에 치우친 과거제도라는 것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정암도 잘 알고 있지 않소. 수신도 안 되고 경험이 일천한 젊은이들이 정해진 서책 몇 권을 달달 외워 벼슬하는 세상이오. 도대체 그들이 난마처럼 얽힌 이 세상을 얼마나 알겠소. 백성들의 고통을 얼마나 알겠느냔 말이오. 지방에 은거하여 유도를 연마하는 선비들을 나라에서 왜 부르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소. 신분이 천하지만 지혜가 빼어난 이들이 또 얼마나 많소. 정암이 흠모하는 낙산의 갖바치 같은 인물도 있지 않소. 내가 임금이라면 갖바치 같은 천민도 삼고초려 하여 대궐로 불러들여 지혜를 구하겠소. 그뿐만 아니오. 왕실의 종친 중에도 훌륭한 사람이 얼마나 많소. 내가 임금이라면 그들을 종친부에 가둬두지 않고 능력에 따라 판서도 시키고 정승도 시키겠소."
박경의 주장은 이단이자 파격이었다. 유가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주장을 거침 없이 해댔다. 또한 그는 새 왕조의 출현에 대해서도 대단히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유자광 등이 반정을 성공시키어 새 왕조가 들어섰다고 하지만 세상은 달라진 것이 하나 없소. 박원종은 자신의 사저를 아방궁으로 만들어 백성들은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고기 굽는 냄새와 흥청들의 가무가 끊이지 않고, 유자광은 폐조 무오년에 죄 없는 선비들을 죽인 죄과가 하늘을 덮을 만큼 큰 데도 새 왕조에서도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으니 어찌 세상이 바뀌어졌다고 할 수 있겠소. 백성들은 또 속고 속아 벼슬아치들을 원망만 하고 있소. 겉만 개혁이지 속은 그들의 야욕을 채우기 위한 역모일 뿐이었소. 그들이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 진정시킨 정국공신이라니 이런 망발이 어디 있소."
조광조도 공감하지만 박경의 불만은 거칠기 짝이 없었고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래서 조광조는 박경의 조급함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은 장애가 나타나면 돌아 흘러갑니다. 그래도 물은 적실 것은 다 적시지 않습니까. 물처럼 느긋하게 기다려야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쇠뿔도 단 김에 빼라고 했소. 우리 모두 반정이 쉽게 성공하는 것을 목격하지 않았소. 어영군을 묶어두고 성안의 훈련원 군사만 동원해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지 않았소. 박원종이 불과 하룻밤만에 식은 죽 먹듯이 대궐을 접수하지 않았소."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몇 사람 힘으로 가능한 일이겠소."
"아무리 식은 죽 먹기라지만 몇 사람으로 되는 일이 어디 있겠소."
"그렇지요. 노천(김식의 호)과 유생 조광좌, 조광보와도 이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소. 조씨들은 정암의 친척 형뻘이잖소."
조광조는 친척 형뻘이 가담하고 있다고 해서 놀라지는 않았다. 박경이 지적한 얘기들은 조광좌, 조광보뿐만 아니라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들과 의식 있는 유생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불만들이었다.
"누구를 내세우겠다는 것입니까."
박경은 조광조를 믿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군사를 일으켜 박원종과 유순정, 유자광과 노공필을 제거하고 문종의 외손이자 단종 임금의 조카가 되는 정미수(鄭眉壽)를 영의정으로 내세워 정치를 바로 잡을 것이오."
박경의 모의는 조정을 전복시키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반정을 일으켜 사욕을 채우는 박원종과 무오사화의 원흉 유자광 등 몇 명을 제거하겠다는 것뿐이었다.
"노천에게도 이 사실을 얘기했습니까."
"물론이오. 노천의 집을 드나들며 밥을 먹고 있는 처지인데 감출 이유가 없지 않소."
조광조는 박경이 듣기에 따라 역모를 모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그의 주장에 자신도 어느 부분 공감하고 있었고 역모라 하기에는 너무나 엉성하고 유치했으므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 정암영정. ⓒ프레시안

한편, 명경에서는 심정과 장악원정(掌樂院正) 김극성(金克成)이 문사(文士) 문서귀(文瑞龜)를 만나고 있었다. 문서귀가 심정에게 밀고할 것이 있다고 만나기를 청했기 때문이었다. 심정은 명경에서 가장 은밀한 방을 초설에게 부탁하여 김극성과 함께 문서귀를 맞이했다.
심정은 초설에게 술과 진수성찬을 부탁해 두었던 바 상에는 보기 드물게 궁중요리가 놓여 있었다. 문서귀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심정과 김극성에게 인사하더니 초설을 물리쳤다.
"부르면 오시오. 호군(護軍; 정4품 무관)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소."
"나으리. 언제든지 부르시면 다시 오겠사옵니다."
그러나 초설은 방을 나와 물러가려다 걸음을 멈추었다. 심정과 문서귀가 나누는 말 중에서 조광조의 이름이 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호군 나으리. 이장길(李長吉) 3형제와 의관 김공저(金公著), 유생 조광보(趙廣補), 서얼 박경 등이 역모를 모의하고 있습니다."
"조광보라 하면 조광조의 친척 형뻘이잖소."
"그렇습니다. 조광조도 박경과 긴밀히 자주 만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초설은 깜짝 놀랐다. 조광조가 역모에 연루되어 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초설은 그들의 얘기에 귀를 더 기울였다. 김극성이 믿기지 않는 듯 문서귀를 다그치고 있었다.
"이 사람아. 의관인 김공저가 무슨 힘으로 역모를 일으킨단 말인가. 또한 조광보는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유생이 아닌가. 일개 유생이 역모를 일으키려고 했다면 누가 믿겠는가. 더구나 박경은 벼슬을 할 수 없는 서얼이 아닌가. 누가 그를 믿고 따르겠는가. 아니 그런가."
"장악원정 나으리. 제가 모의하는 현장에 있었습니다.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이 두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사실이 아니라면 그대가 무고죄를 받으리라. 달게 받겠는가."
심정이 엄하게 표정을 바꾸어 말해도 문서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확신에 찬 어투로 말했다.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심정과 김극성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설령 사실이 과장되었다 해도 문서귀의 밀고대로 적당한 때에 고변(告變; 고발)하여 중종과 정승들의 신임을 얻어 출세하는 데 그만인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사실이든 아니든 중종과 정승들의 신임을 얻게 될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초설은 발을 동동 굴렸다. 역모는 발각되면 가차 없이 극형에 처해지는 대역죄인 것이었다. 심정이 문서귀에게 술을 크게 산 것으로 보아 입을 다물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렇다고 심정에게 조광조를 부탁할 수도 없었다. 조광조가 역모에 연루되어 있다는 증언이 문서귀의 입에서 나온 까닭이었다. 초설의 입장에서는 문서귀와 김극성의 입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초설은 해결책이 명경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박원종의 기첩이 된 달이에게 조광조를 부탁하기로 했다. 과천의 기방을 맡은 달이의 수완이라면 설령 조광조가 잡혀가 국문을 받는다 해도 살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초설은 안심이 되지 않아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심정은 문서귀를 보내고 김극성과 헤어진 후 친구 남곤의 집으로 갔다. 남곤은 승지로 있다가 부모상을 당하여 벼슬을 내놓고 상복을 입고 있었다. 남곤은 피곤하였던지 두건을 쓴 채 심정이 들어서는 줄도 모르고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심정이 큰 소리로 깨우자 남곤은 놀라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누웠다.
"피곤하이. 내일 오시게."
"지정(止亭: 남곤의 호), 우리 출세할 길이 생겼네. 오죽하면 한밤중에 자네 집으로 달려왔겠는가."
"술 취한 소리 그만하고 내일 만나세."
"어허, 이래도 잠을 자겠는가."
"무슨 소린가."
"역모를 하고 있음일세."
"뚱딴지같은 소리 그만 하고 어서 돌아가게."
남곤은 돌아누워 버렸다. 그러자 심정은 남곤의 귀에다 대고 소리쳤다.
"내일이면 조정이 발칵 뒤집어질 걸세. 그래도 한가하게 잠이 오는가."
"뭐, 뭐라고 하였는가."
그제야 남곤이 눈을 크게 뜨고 앉았다.
"조정이 뒤집어진다고 했는가."
"의관 김공저가 이장길 등과 상의하여 조정에 있는 1품 재상을 장수 삼아 몰래 박원종과 유순정을 기습한 뒤 정권을 잡으면 성군(聖君)의 치세를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네."
"1품 재상이 누구인가."
"정미수일세."
"정미수를 장수로 삼아 박원종을 친다는 말이지. 허허. 뭐가 엉성하지 않은가. 정미수가 박원종을 어떻게 친단 말인가. 바위에 달걀 던지기지."
"그 자들이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우리에게는 고변할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기회가 아닌가."
"더 없이 좋은 기회라."
남곤이 사팔뜨기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계산을 하자, 심정은 두 팔을 크게 휘젓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실제로 심정은 김공저와 박경 등이 역모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을 역모자로 몰아 고변한다면 공(功)을 논하여 자신들의 품계가 오를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기회일 뿐이었다.
다음날.
남곤은 상중인데도 상복을 벗고 나가 공조참의 유숭조(柳崇祖)를 만나 간밤에 심정에게 들었던 얘기를 했다. 친상 중이었으나 입이 간질간질하여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정이 나에게 말하기를 공저가 정미수를 장수 삼아 박원종과 유자광을 제거하려고 하는데, 일이 일단 터지고 나면 유숭조 대감과 같은 올바른 선비들이 동조할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나도 이웃에 사는 의관 김공저가 찾아와 얘기를 해주어 알았소. 오늘 중으로 전하께 고변할 것이오."
순간 남곤은 흥분한 자신이 실수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유숭조가 고변한다면 하루 전에 알았던 자신이 먼저 조정에 알리지 않은 죄가 성립되기 때문이었다. 남곤은 유숭조 집을 나와 바로 변복을 하고는 심정과 함께 유숭조보다 먼저 대궐로 들어가 김공저와 박경 등을 고발했다. 특히 심정은 문서귀에게 김극성과 함께 들은 후 고변할 때를 기다렸고, 남곤은 심정에게 역모의 얘기를 듣고는 어찌나 놀랐는지 밤새 잠을 잘 수 없었다고 꾸며댔다.
그들이 유숭조보다 먼저 중종에게 고변한 내용인즉 이계맹, 김감, 김공저, 박경, 이장길 3형제와 조광보, 김식 등이 군사를 일으켜 박원종과 유순정, 유자광, 노공필 등을 죽이고 정미수를 영의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것이었다.<계속>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는 화순군 홈페이지와 동시에 연재됩니다.
☞ 화순군 홈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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