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심의 흔적인가, 내부 혼선인가, 아니면 고도의 연막작전인가.
7일 "한국에 배치한 미국의 핵무기를 없애지 않으면 핵을 포기할 수 없다"던 북한이 다음날인 8일에는 "부시 정권이 임기 내에 현안을 다 해결하자는 자세를 표시한 것만 해도 큰 진전"이라는 긍정적인 입장을 간접적으로 내비쳐 주목된다.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는 이날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과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의 베이징 회동 등을 거론하면서 현재 국면이 '클린턴 행정부 말기'의 상황을 방불케 한다고 평가했다.
조선신보는 "힐 차관보가 제시한 내용 속에 핵무기와 모든 핵개발 계획의 완전포기라는 전제가 붙어 있지만 조선전쟁의 종전선언과 조미관계 정상화, 대조선 에너지 및 경제지원, 다방면적인 유대 등 큰 틀거리가 포함돼 있다고 전해진 것은 주목할 만하다"며 적극적으로 평가했다.
클린턴 행정부 말기의 상황이란 2000년 조명록 북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미국을 방문해 북미공동코뮈니케를 채택했던 일을 일컫는 것이다.
공동코뮈니케 채택 이후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 국무장관은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하고 빌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 문제를 논의하는 등 양국은 관계정상화 일보 직전까지 갔었다.
이에 북미관계의 정상화를 바라는 모든 이들은 2000년 상황을 양국관계의 최고 절정기로 평가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신보의 이같은 표현은 지난달 28~29일 북미협의를 보는 더없이 긍정적인 시각이 아닐 수 없다.
이 신문은 힐 차관보의 대북정책조정관 내정에 대해서도 "구구한 평가가 있지만 부시 정권이 임기 내에 현안을 다 해결하자는 자세를 표시한 것만 해도 큰 진전"이라고 밝혔다. 6자회담에 대해서도 "유관국까지도 다 말려들게 함으로써 동북아시아에서 냉전 종식과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오히려 유익한 측면도 있다"고 평했다.
조선신보가 조총련 기관지라는 점에서 이날의 평가가 북한의 시각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북한이 그간 자신들의 생각을 내비칠 때 조선신보를 활용해 왔고, 조선신보 역시 북한의 뜻에서 벗어나는 말을 하지 않아 왔기 때문에 이날의 평가는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6자회담 연내 재개 불가까지 내비치더니…
하지만 북한이 6일과 7일 연이어 러시아의 유력 통신사들을 통해 미국이 요구하는 선제 핵포기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던 사실에 비춰 볼 때 조선신보의 8일 평가는 사뭇 다른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러시아의 이타르타스통신은 7일 북한 소식통들의 말을 인용해 "북한은 미국이 한국에 핵무기를 배치해 두고 있다고 믿고 있어 자신들에 대한 핵위협이 지속되는 한 핵 프로그램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소식통은 또 "대북 압박 기류가 완화되거나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가 완화되기 전까진 6자회담에 합류하지 않을 것"이라며 6자회담 복귀 약속마저 뒤엎으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앞서 러시아 인테르팍스통신은 6일 중국에 있는 북한 외교관의 말을 인용해 "지난달 베이징에서 열린 북미접촉에서 미국이 내놓은 핵폐기 요구사항은 북한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며 "미국의 입장이 변하지 않는 한 이달 또는 가까운 장래에 6자회담이 재개될 가능성은 없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통신사를 통해 우회적으로 밝힌 북한의 입장은 △핵폐기 인센티브가 아무리 커도 선(先)핵 폐기는 있을 수 없고 △6자회담을 핵군축 회담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됐다. 이에 북한이 협상력을 제고하기 위해 신경전을 벌인다거나, 핵군축 회담을 주장하기에 앞서 전초전을 벌인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던 와중이었다.
솔깃할 수밖에 없는 미국의 제안
그랬던 북한이 다음 날 북미관계가 가장 좋던 시절과 지금이 유사하다고 상반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미국이 제시한 인센티브에 대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는 증거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베이징 북미협의에서 힐 차관보는 2008년까지 핵무기를 폐기하면 조지 부시 대통령이 한국전쟁 종전을 선언하는 것은 물론 북미관계정상화까지 할 수 있다고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록 핵폐기라는 대전제가 붙어 있지만 북한으로서도 솔깃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것은 즉각적인 반응을 자제하고 '돌아가서 협의하겠다'고 말했던 김계관 부상의 태도에서도 읽혀졌다.
북한은 그 후 9일이 흐른 8일까지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은 채 장고(長考)를 거듭하는 대신 러시아 언론과 조총련 기관지를 통해 전혀 다른 시각을 보여준 것이다.
일각에서는 미국의 제안에 대한 북한 내부의 다른 시각이 두 경로를 통해 흘러나오는 게 아니냐는 해석을 하기도 한다. 또 전혀 상반된 두 개의 메시지를 미국에 보냄으로서 미국의 시야를 흐리려는 연막작전이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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