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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입으로 두 말 한 게 누구냐?"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道'] 제8장 새 세상의 아침<41>

초설이 운영하는 서울의 명경이나 과천의 기방은 연산주의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더욱 번창했다. 한강의 모든 나루터가 개방되고 나자 서울의 거리는 완연하게 활기가 돌았다. 땅을 잃고 떠돌던 서울 주변의 양인들도 고향으로 되돌아갔고, 보따리 장사나 나무꾼들도 성문 밖에서 장사진을 이뤘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반드시 술청이 생겼고, 기녀가 모여들었고 돈이 돌았다.
  명경에서 인기를 끄는 기녀는 단연 지과흥청 출신인 달이였다. 대궐 안에서만 살던 달이의 미모는 곧 성 안팎으로 소문이 퍼졌고, 능구렁이 가 된 퇴기나 촌티 나는 기녀만 보아 왔던 벼슬아치들 사이에서 인기가 치솟았다. 그러나 달이는 어느 한 사내의 기첩(妓妾)이 되는 것을 꺼려 했다. 한 사내에게 만족하지 못했다. 어느 사내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다. 그것이 달이가 생각해낸 상처를 받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달이가 지과흥청일 때 연산주에게 꼬리쳤다가 장녹수에게 불려가 영영 여자 구실을 못할 뻔했던 적도 있었다. 달이의 미모를 질투한 장녹수가 가만 놔두지 않았던 것이다. 달이는 내시들에게 붙잡혀 쥐도 새도 모르게 장녹수의 방으로 불려가 화로에 묻어둔 인두로 고문을 받았던 것이다. 장녹수는 차마 달이의 얼굴에 상처를 내지는 못했다. 곧바로 연산주에게 발각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고도 없이 연산주가 장녹수의 방을 찾은 탓에 달이는 살아났다. 그렇지 않았으면 장녹수는 벌건 인두로 달이의 음부를 못 쓰게 했을 것이었다. 달이는 영영 여자구실을 못하는 석녀가 됐을 터였다.
  달이는 생각만 해도 끔직했다. 그러한 달이였으므로 장녹수가 군기시에 잡혀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으로 달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반정이 성공한 바로 그날 오후였다. 장녹수는 군기시로 끌려와 참형을 당했던 것이다.
  중종의 윤허를 받은 참형이었다. 형장에는 추관이 나와 있지 않았고 국문도 없었다. 유자광이 형식적으로 죄인을 확인하는 절차만 밟고 있었다.
  "그대가 장녹수인가."
  "그렇소. 나는 종 3품의 장숙용이오."
  "쯧쯧. 폐주에게 받은 그까짓 종 3품이 그리 중한가."
  "폐주라 하시 마시오. 그대가 폐주라고 부르는 전하께 아부한 것을 나는 다 알고 있소."
  "아니, 저년 좀 봐라. 나졸들은 무얼 하느냐."
  나졸들이 꿇어앉은 장녹수를 걷어차려 하자 오히려 장녹수가 큰소리로 독을 뿜어냈다.
  "무엄하구나. 나는 구차하게 살고 싶지 않느니라. 내 몸에 손을 대지 마라."
  그때 군기시 안으로 한 떼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장녹수의 사저를 불태우고 몰려온 사람들이었다. 장녹수가 연산주의 도움으로 사저를 마련했을 때 화재의 위험이 있다고 주위의 민가를 빼앗거나 헐값에 사들였는데, 그때 민가를 잃은 억울한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은 집을 잃고 떠돌다 장녹수의 집을 불태우고 오는 길이었다.
  "그래,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은 없느냐."
  "똑똑히 들으시오. 오늘은 저승으로 내가 먼저 가지만 그대들도 곧 나를 따라 올 것이오."
  "그 말뿐이냐."
  망나니는 벌써 술에 취해 큰 칼을 휘두르며 장녹수 주위를 서서히 돌고 있었다. 그러나 장녹수는 조금도 미동 하지 않고 말했다.
  "또 있소.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주상전하를 손가락질한다 해도 나는 그리 못하오. 나에게 주상전하는 하늘같은 분이오."
  "왜 그러하느냐."
  "나는 원래 천한 여자이기에 저잣거리에서 몸을 팔아 생계를 연명했고, 결혼도 여러 번 했소. 그러다 제안대군의 집종과 결혼했소. 그래도 먹고 살기 힘들어 다시 거리로 나가 몸을 팔았소. 나중에는 내 몸에 제 값을 받기 위해 춤과 노래를 배워 기녀가 됐소. 이런 나에게 주상전하께서는 좋은 비단옷을 하사하셨고, 나에게 철마다 좋은 음식을 하사하셨고, 나에게 좋은 집을 하사하신 분이오. 그러니 주상전하는 나의 하늘인 것이오."
  "네가 폐주에게 한 짓거리를 알고 있거늘 그러고도 어찌 뻔뻔스럽게 폐주를 하늘이라고 하는 것이냐."
  "그대가 어찌 말해도 좋소. 허나 나는 주상전하가 원하는 것을 해주었소. 주상전하께서 어린 아이가 되고 싶어 하면 나는 어른이 돼주었고, 주상전하께서 상소리를 듣고 싶어 하시면 주저하지 않고 상소리를 해주었소. 나는 주상전하께서 무엇을 원하는지 묻고 원하는 대로 해주었을 뿐이오."
  "폐주를 능멸하고도 뻔뻔하기 그지없구나."
  "나는 주상전하를 욕보이지 않았소. 오히려 그대들이 주상전하를 능멸한 것이오. 한 입을 가지고 두 말을 하고, 앞에서는 주상전하라고 부르고 뒤에서는 반정을 모의한 그대들이 주상전하를 능멸한 것이오."
  "네 이년, 폐주의 눈과 귀를 멀게 하여 대간으로 하여금 네 년의 사저를 짓는데 감독케 하고, 대궐을 드나들 때는 무장들이 네 년을 앞서 호위케 하고, 승지와 내시들로 하여금 네 년의 가마를 뒤따르게 한 것이 바로 폐주를 능멸한 것이 아니더냐."
  "아니오. 주상전하께서는 선비들이 출세에 눈이 멀고 치부에 혈안이 돼 온갖 수단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 가소로워 그렇게 벌을 내린 것이오. 벼슬아치들이 미천한 나에게 굽실거리도록 한 것은 바로 그런 까닭이 있었던 것이오."
  "아니, 뭣들 하느냐. 당장 저년의 목을 베지 않고!"
  장녹수의 목은 망나니가 휘두른 칼에 베어져 땅에 뒹굴었다. 붉은 피가 쏟아져 군기시 마당을 적셨다. 그제야 둘러서 있던 사람들이 손에 들고 있던 돌멩이를 던졌다.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시신에게 달려가 발길질을 했다.
  그러나 달이는 장녹수를 향해 저주를 못하고 물러서버렸다. 시신이 살아 있는 장녹수보다 더 무서웠다. 장녹수의 두 눈은 사람들의 발길질에 밟히면서도 부릅뜨고 있는 것 같았다. 유자광도 장녹수의 그런 모습에 질렸는지 도사에게 전숙용 전비와 김숙원 귀비 등의 참형을 맡기고는 침을 퉤 뱉으며 자리를 떠버렸다. 달이는 그 날 밤에 평소 안면이 있던 심정을 찾아갔고, 심정은 달이를 자신의 사랑채에 재워준 뒤 명경의 주인 초설에게 부탁을 해주었던 것이다.
  그래도 달이는 심정을 알았기에 지과흥청이었지만 장형을 받거나 변방 관기로 쫓겨 가지 않을 수 있었다. 천과흥청 의춘도는 죄가 크다 하여 중형을 받았고, 연산군의 사랑을 빌미로 잡음을 일으킨 관흥방, 소신흥, 옥매춘 같은 흥청들은 장 1백 대에 변방 관기로 보내졌던 것이다.
  
  명경에 있는 달이를 찾아 온 벼슬아치들 중에는 민효증과 유경도 있었다. 새 왕조가 들어서 민효증은 의정부의 정2품 벼슬인 우참찬이 되었고, 유경은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승문원의 정 3품 벼슬인 판교가 되었지만 그들은 나름대로 고민과 시름이 깊어가고 있었다. 어느 시대건 새 왕조가 들어서면 자신이 세운 공과 벼슬에 만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불만이 있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었다. 민효증과 유경도 그런 부류의 벼슬아치 중 하나였다.
  유경은 공신대장 앞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대해서 불만이 컸다. 그래서 며칠 전에는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이달 초이튿날 의로운 일을 일으킬 때 신은 판서 성희안을 따라 우의정 김수동 집에 들어가서 함께 의논하였습니다. 그 후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등 3대장이 모이기로 약속한 곳에 갔다가 개천 남쪽 길로 해서 바로 돈화문 밖에 나가서 밤새도록 있었습니다. 군사들이 대장의 명을 받아 죄가 있는 사람들을 처단한 뒤 여러 장수들과 함께 경복궁으로 달려가서 전하를 맞이하였으며 전하가 왕위에 오른 것을 축하하고 대비전하의 명을 반포할 때에도 교지를 펼쳐드는 임무를 수행하다가 이어 승문원에서 숙직을 했습니다.
  가만히 헤아려보건대 신의 공로는 1백 사람 아래로는 떨어지지 않을 것인데 이처럼 공신을 많이 봉하는 때에 오직 신의 이름만 빠졌으므로 통분하기 그지없습니다.
  전하께서 밤낮으로 뛰어다닌 신의 수고를 기특하게 여겨 공신들이 맹약을 다지는 자리에 참여하게 하고 공신명부에 정당하게 올려주시기 바라나이다.>
  
  그러나 대간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승문원 판교 유경은 공신으로 등록하는 문제를 가지고 번잡스럽게 글을 올렸는데 그에게 털끝만한 공로라도 있다면 처음 공로를 평가할 때 의리를 제창한 대장들이 왜 등록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는 체면도 모르는 사람이니 선비 축에 넣지 말기를 바랍니다."
  유경은 우여곡절 끝에 결국 3등 공신에 올랐으나 결코 만족할 수 없었다. 1등 공신까지는 못 된다 하더라도 2등 공신만 되어도 2등급을 높여 벼슬과 품계를 올려 주고, 부모처자도 2등급의 품계를 올려주되 아들이 없을 경우에도 1등급의 품계를 올려주었던 것이다. 또한 반당(나라에서 주는 병졸) 8명, 노비 10명, 구사 5명, 토지 100결, 은 30냥중, 안팎옷감 1감, 내사복시의 말 1마리를 주었던 것이다.
  유경은 대뜸 민효증에게 중종을 비난하는 말을 했다.
  "전하께서는 지방에 나가 있던 외삼촌 윤탕로까지 공신에 넣어달라고 지시하는 판입니다. 이러한 때에 공을 세우고도 공신에 들어가지 못하면 바보가 되는 것 아닙니까."
  "과욕을 부리지 말게나. 그러다가 개망신을 살 수 있어. 자네는 3등 공신이라도 됐지만 난 4등 공신이 아닌가."
  "그럼, 우참찬께서는 4등 공신에 만족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어허, 요즘 나는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요. 정승들의 천거로 우참찬 벼슬을 받고 나니 대사간 안당을 비롯하여 새파란 대간들이 나를 밀어내려고 험담하고 있어요."
  "원래 대간들의 하는 일이 남의 꼬투리를 잡는 것이니 그러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셔야 합니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네."
  "도대체 무슨 억울한 일이 있습니까."
  "전왕 때 형조 참의로 있을 당시 내가 악질이고 포악했다는 것이네."
  유경은 입을 다물었다. 민효증에게 그런 비난을 받을 만한 구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반대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기 때문에 오해를 받았을 수도 있었다.
  "그 일이란 것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아닙니까."
  유경이 말한 그 일이란 연산군이 민효증에게 장을 칠 때 감독하라고 지시하였던 바 그때 민효증은 억울하게 벌을 받는 선비들에게 엄격하게 법조문을 적용하는 등 야박하게 굴었던 것이다. 장을 칠 때도 옷 속에 물건이 있는지 의심하고는 옷을 찢곤 했다. 실제로 한 선비의 옷 속에 노루가죽이 들어 있자 당하관을 시키지 않고 자신이 달려가 보고하여 연산군에게 칭찬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형을 집행하는 당하관들에게 자주 상소리로 꾸짖곤 하여 인심을 잃었는데, 그것도 형을 신속하게 집행하기 위해 그랬으나 품위를 지켜야 할 당상관으로서 거친 것도 사실이었다.
  "봉변도 큰 봉변일세. 강직하다는 말을 들어 왔던 내가 무얼 잘못했다는 것인지 아무래도 사직을 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야 할까 보네."
  그러나 사헌부의 대간들은 민효증을 강직한 사람이라고 보지 않았다. 반정 공신인 정승들이 중종 앞에서 민효증을 감싸고 나서자, 대간들이 쉽게 물러서지 않고 반박을 하고 나선 것이었다.
  "전하께서는 민효증이 강직해서 남의 비위를 맞출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진짜 강직한 사람이란 반드시 안팎이 한결같고 티없이 순수해야만 진짜 강직한 사람인 것입니다. 민효증은 폐주의 비위를 맞추어 착한 벼슬아치라는 명예를 낚았던 것입니다. 때문에 폐주가 말하기를 '힘 있는 세력도 두려워하지 않기를 민효증쯤은 되어야 한다'고 하였으니 그가 어찌 강직한 사람일 수 있겠습니까. 섭섭하기 그지없습니다."
  민효증과 유경은 어느 새 반정 공신들과 새롭게 등장한 대간들 간의 힘겨루기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전왕에게 충실하여 출세한 벼슬아치들을 응징하려는 대간들과 그들과 얽힌 인연이 있으므로 그들을 감싸고 가려는 반정 공신들 간의 갈등이었다.
  달이가 술상을 들고 들어오자, 그제야 민효증과 유경은 화제를 돌렸다. 민효증이 달이를 알아보고 말했다.
  "가만히 보자. 내가 널 어디서 보았더라. 옳거니, 경회루 후원에서 보지 않았더냐."
  "나으리, 연서정에서도 뵙고, 만원정에서도 뵈었사옵니다."
  "그렇구나, 그래. 내가 도총관으로 일할 때 여기저기서 보았던 것도 같다. 너는 폐주 옆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잘 불렀었지. 그러니 흥청 중에서도 너를 기억하지 아니할 수 없구나."
  유경은 연산군의 주연 자리에 가본 적은 있으나 달이를 본 적이 없어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달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눈을 마주칠 수 없을 정도로 미모가 빼어난 것에 탄복했다. 대궐 안에 이런 미인을 두고 내가 모르고 있었다니, 하고 자신의 안목을 탓하기도 했다.
  "아니, 자네는 이런 미인을 두고 왜 말이 없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아이를 들이라 함세."
  "대감, 세조 때 허리가 가늘어 초요갱이라 부르던 미인이 있어 왕실의 법도를 어지럽혔다는 얘기를 들은바 있습니다만."
  "나도 들어 알고 있네. 왕실의 종친들이 촌수를 따지지 않고 간통하는 등 서로 차지하려고 한 기녀였지."
  "얼마나 미인이었으면 그랬겠습니까."
  "얼굴만 곱다고 그랬을 리는 없어. 잠자리에서 남자가 원하는 것을 다해주니까 그랬을 것이야."
  "저는 지금 초요갱의 환생을 보는 듯하여 잠시 숨이 막혔습니다."
  "이 사람이. 오늘은 참아야 돼. 나의 것이니까."
  "어찌 그것을 대감이 결정하십니까."
  "그렇다면 자네가 달이를 가로채기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대감께서는 저를 색한으로 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달이의 마음은 이미 결정되었을 것입니다."
  "무엇으로 결정했다는 말인가."
  "대감, 제가 농담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저는 젊고 대감은 늙었사옵니다. 저는 3등 공신이고 대감은 4등 공신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앉아 술을 따르는 달이가 아닌 어떤 여자라도 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자네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구먼."
  민효증이 유경의 농담에 모처럼 여유를 찾고 웃어젖혔다.
  "대감, 웃으면서 얼버무릴 일이 아닙니다. 반격을 한번 해보시지요."
  두 사람은 달이와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 금세 마음이 풀어져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여자가 무엇을 가장 좋아하는지 아는가. 그건 권력도 아니고 젊음도 아니네. 아무리 젊다 해도 늙기 마련이고, 권불십년이란 말 들어보지 못했는가. 아무리 권력이 있다 해도 곧 삭아지기 마련이네. 달이는 내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대감, 그렇다면 대감께서는 여자를 유혹하는 비장의 무기라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허허. 우리 진한 농담이나 한번 해볼까."
  민효증이 달이에게 물었다.
  "너는 젊은이의 고추를 무어라 하는지 아느냐."
  "풋고추라 하옵니다."
  "그렇다면 늙은이의 고추는."
  "꽈리고추라 하옵니다."
  "너는 무슨 고추를 좋아하느냐."
  "소녀는 풋고추도 좋아하고, 꽈리고추도 좋아하옵니다."
  "왜 그러느냐."
  "초여름의 풋고추는 싱싱해서 좋고, 가을 서리 맞은 꽈리고추는 매워서 좋습니다."
  여기까지는 일진일퇴 무승부였다. 달이가 유경도 좋고, 민효증도 좋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내가 승문원 판교를 꼼짝 못할 승부수를 띄우겠다."
  "그것이 무엇이옵니까."
  "달이가 한번 맞추어 보거라."
  "감히 소녀가 대감님의 깊은 사정을 알겠사옵니까."
  "그렇다면 자네가 말해보게나."
  "대감의 선친 때부터 축재해 온 재산을 말하는 것입니까."
  "재산, 그것도 여자들이 좋아하는 것이지. 허나 재산도 삼대를 가지 못해. 언젠가는 거덜이 나고 마는 것이 재산일세. 나는 여자들이 무엇보다 좋아하는 것을 가지고 있어."
  "대감, 수긍이 가면 당장 달이를 양보하리다. 그러니 돌려대지 마시고 속히 말해보십시오."
  "나에게는 육보(六寶), 여섯 가지 보물이 있네."
  "가보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유경은 고개를 내밀고 대답을 기다렸으나 달이는 이미 알고 있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까르르 웃었다. 유경이 난처해진 얼굴로 달이를 다그쳤다.
  "네가 나를 놀리려드느냐. 알고 있다면 속이 일러라."
  "나으리, 대감께서 말씀하신 육보란 소녀는 이렇게 알고 있사옵니다. 고추가 여섯 가지를 갖추고 있는 것을 말하옵니다. 즉, 솟구치는 것을 앙(昻)이라 하옵고, 뜨거운 것을 온(溫)이라 하옵고, 머리가 큰 것을 두대(頭大)라 하옵고, 길이가 긴 것을 경장(莖長)이라 하옵고, 단단하게 움직이는 것을 건작(健作)이라 하옵고, 오래 끄는 것을 지필(遲畢)이라 하온데, 이 여섯 가지를 육보라 하옵니다. 길면 가늘고, 두터우면 짧고, 길고 두터우면 단단하지 않는 등 사내마다 흠결이 있기 마련이온데 필시 대감께서는 육보를 모두 가지고 있는 듯하옵니다. 그렇다 하오면 여자가 무엇을 더 바라오리까."
  "이제야 내가 사내로 보이느냐. 나에게는 육보가 있느니라. 하지만 내가 육보를 가지고 있다 해서 구멍을 함부로 찾지는 않느니라. 속궁합이 맞아야 하지 않겠느냐. 남녀가 함께 즐거워해야 공평하지 않겠느냐."
  유경은 민효증의 말에 기가 죽었다. 유경은 술을 자작으로 마셨고, 민효증은 달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너에게는 무엇이 있느냐."
  "남정네에게 육보가 있다면 빼어난 흥청에게는 육희(六喜)가 있사옵니다."
  "어서 말해 보아라."
  "좁은 것을 착(窄)이라 하옵고, 따뜻한 것을 온(溫)이라 하옵고, 꼭 무는 것을 치(齒)라 하옵고, 몸을 흔드는 것을 요본(搖本)이라 하옵고, 기뻐 소리 지르는 것을 감창(甘唱)이라 하옵고, 빨리 젖는 것을 속필(速畢)이라 하옵니다."
  "네가 육희를 다 가지고 있다는 말이냐."
  "아니옵니다. 앞의 세 가지인 착과 온과 치는 가지고 있으나 나머지 세 가지는 그날 기분에 따라 달라지옵니다. 또한 저만 육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옵니다."
  "그럼, 또 누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냐."
  "흥청들 사이에 퍼진 소문이옵니다만 후궁이 된 녹수와 전비, 귀비 등이 가지고 있었고, 또 천과흥청 십수 명이 가지고 있다고 들었사옵니다."
  "헌데도 넌 무슨 까닭으로 지과흥청밖에 되지 못한 것이냐."
  "전하와 잠자리를 같이 할 기회가 있었으면 반드시 천과흥청이 됐을 것이옵니다. 허나 이것도 소녀의 운명인가 봅니다. 하오나 지난 불행이 오늘의 행운이 될 줄 누가 알았겠사옵니까. 세상만사 새옹지마이옵니다. 천과흥청이 되지 못한 까닭에 장형을 받거나 변방 관기로 쫓겨 가지 않고 오늘에는 나으리를 뵙는 복을 누리고 있지 않사옵니까."
  그런데 민효증은 뒷날을 기약하며 달이를 유경에게 양보했다. 대간들에게 시달리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벼랑 끝에 매달려 있는 형국이니 꽈리고추가 오그라들어 있기만 했던 것이다. 유경 또한 달이가 박원종을 만나러 간다고 하는 말에 그만 기가 죽어버렸다. 왕위에 오른 중종도 아직 눈치를 보는, 세상의 권력을 쥐락펴락하는 우의정에 오른 박원종이기 때문이었다.<계속>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는 화순군 홈페이지와 동시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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