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교수노조,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참여연대, 문화연대 등 13개 시민단체들이 12월 4일부터 '제2회 한반도평화주간'을 선포하고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 단체들은 그 활동의 일환으로 한반도 평화에 관한 릴레이 기고를 4~5회에 걸쳐 <프레시안>에 할 예정이다. 배성인 한신대 외래교수가 그 첫번째 기고문을 보내왔다. <편집자>
야만과 안보의 늪에서 평화의 싹을 키우자
내 '마음'은 진정 평화로운가. 가끔씩 일이 잘 안 풀리거나 성질이 나면 입에서 욕지거리를 내뱉게 된다. 최근의 아파트 문제에서 한미FTA나 북핵 문제에 이르기까지 내 마음의 고요함과 평화로움이 깨지면서 분노의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곤 했다. 요즘 초등학생에서부터 대학생 그리고 성인에 이르기까지 '열라', '졸라'라는 표현은 이제 보편적인 일상용어가 되어 경쟁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으로 대변되고 있다.
이들 용어의 기원을 잘 알기에 거의 사용하지도 않고 그럴 마음도 없지만 마음 한 구석에 무거운 짐을 얹어 놓은 듯하다. 비록 이 용어의 상징성과 현실 풍자에 대한 사회적 의미를 고려해도 마음이 편치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아마 이것은 알량한 직업의식에서 비롯된 위선과 거만의 허위의식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러한 부류의 언어사용은 하고 싶지 않다. 평화로운 말과 글이 평화의 씨앗이 된다는 명제를 전제로 평화를 말하고 싶다.
지속가능한 미국의 야만, 그 끝은 어디인가
흔히 말하는 탈냉전시대에도 한반도와 동북아는 여전히 냉전구조의 틀 속에서 전통적인 안보 이슈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불안정의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는 미국의 패권전략이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가 미국이 쳐 놓은 안보의 늪에 빠져 미국과 함께 허우적거리며 나만은 살아야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그리 질기지도 않은 지푸라기를 잡으려는 꼴을 보면 정말 가관이다. 우리 사회는 미국이 주도하는 안보의 늪에 빠져 결국 예속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물론 미국 주도 하의 한국 경제개발이 그 늪을 더욱 깊게 했지만 말이다.
우리사회에서 흔히 회자되는 세계화는 곧 미국화와 다름없으며, 제국주의 확대전략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현재 미국의 자본주의 체제를 주도하고 있는 세력은 투기적 금융자본이며 이들의 영향권 내에 일체의 자본분파가 독점적으로 포섭되고 있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 아니라 '보이는 시장(visible hand)'과 '보이는 자본(visible capital)'에 의해 평화가 침탈당하고 있다. 예전에는 독점자본과 파시즘이, 현재에는 제국주의와 초국적 자본이 평화의 최대 걸림돌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는 미국의 이라크 침략을 통해 21세기 미국의 야만을 새삼스레 목격했다. 20세기 그들의 야만이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라크에서는 미국의 발포에 의해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들이 늘어가고 있다.
발포를 하는 미군 병사의 모습을 보면 영화 <공공의 적>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데 이유가 있냐"라는 대사를 연상되며, 제2의 십자군 전쟁을 방불케 한다. 이처럼 미국의 '지속가능한 야만'은 바로 군사력으로 대표되는 안보와 자본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으며 그것이 그들의 정체성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들은 평화의 이름으로 전쟁을 통제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그 실상은 통제할 수 없는 전쟁을 통해 평화주의자들을 무참히 희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그들의 야만이 해방 이후 60여 년간 지속된 것에 대해 더 이상 부연설명한다는 것은 인내심의 한계이자 신경쇠약증의 또 다른 표출이리라.
그들이 자행했던 자본과 군사적 폭력은 미국 뉴올리언스에 불어 닥쳤던 카트리나를 수만 배 능가하는 거대한 힘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 누구도 그들의 폭력에 맞서서 잿더미가 되지 않은 적이 없던 것도 현실이다.
미국은 민주주의와 자유의 가치를 이식하기 위한 수단으로 또는 분쟁해결의 방법으로 전쟁이라는 최악의 선택을 했으며 이에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선택은 자신을 파멸로 내몰고 있다는 것이 역사의 진리다. 현재의 미국을 통해서 우리는 전쟁이 자살적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이제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최악의 선택을 지속하면서 파멸로 갈 것이냐 아니면 고해성사를 통한 개과천선으로 평화의 길을 선택할 것이냐. 그들에게 후자의 길을 기대할 수 있을까?
한반도와 동(북)아시아를 평화의 공간으로
한반도를 중심으로 동(북)아시아를 평화의 공간으로 설정해 놓고는 있지만 실천의 구체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공간 형성과정이 매우 느리게 진행되고 있으며, 곳곳에 암초가 놓여 있어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최근 북핵문제와 동북아 안보정세의 유동성 등으로 인해 평화를 구축하는 설계와 실제 진행과정이 쉽지 않게 되어 있다. 동(북)아시아라는 공간 속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부문을 논할 때 미국을 빼놓을 수가 없다. 동(북)아시아라는 공간은 미국이 실제 깊숙이 들어와 있는 정치적 공간이다. 미국의 정치적 공간은 미군 기지와 미국 자본에 의해 동(북)아시아로 확장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익숙하고 편한 공간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반도가 '평화의 공간'으로 창출되어야 할 것이며, 이를 동북아시아 혹은 동아시아로 확장해 친근하고 익숙한, 그러면서도 바람직한 공간을 창출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핵무기의 폐지나 군비축소의 문제가 평화문제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핵심은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욕망, 경쟁, 불안, 공포, 이익 등 신뢰의 문제이며 정치적 문제다.
한반도에서 평화담론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보수 세력에 의해 주도되어 왔다. 진보 진영의 평화담론은 보수 세력의 담론에 파묻혀 비 맞은 생쥐마냥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열심히 정말 열심히 뛰어 다녔다.
그 결과 고양이의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도 결국 열정과 의지 그리고 지혜로움으로 무장된 평화세력 앞에서는 한 없이 작아져 가고 있는 형국이다. 보수 세력의 관념적인 언어, 자신이 의로움으로 가득 찼다는 착각과 독선 그리고 안보의 광기는 평화를 위협하고 있지만 허공 속에 묻혀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광기는 가슴이 터져라 목 놓아 평화를 외치는 진보 진영을 과격함과 폭력의 이름 아래 절대 악으로 평가하고 있다. 어쩌면 그리도 부시 행정부를 닮았는지, 부시 행정부가 이들에게는 학습효과가 된 셈이다. 그러면서 공권력을 포함한 물리력으로 더욱 과격하고 폭력적으로 진보 진영의 진압에 나서고 있다.
한반도에 평화의 등불을 밝혀야
이제 우리는 더욱 더 평화의 등불을 높이 밝혀야 한다. 이 세상 모든 어둠이 사라지고 밝음이 찾아와 등불이 불필요하게 될 때까지 드높이 밝혀야 한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진정 평화의 의지가 있는지 확인해 보자. 우리는 항상 평화를 말하지만 그것도 립 서비스는 아닌지, 진정한 평화의 시작이 내 마음속에서 시작되어야 하는데, 내 자신은 진정 평화로운지, 나아가 내 가정 그리고 우리 사회는 평화의 싹을 얼마나 키우고 있는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되묻게 된다. '진정' 내 마음은 평화로운가.
나의 평화가 너의 평화가 되고 그것이 모여 우리 모두의 평화로 상승되어, 평화의 기운이 온 나라를 덮칠 때 비로소 한반도의 평화가 첫 발을 내딛게 되는 것이다. 민중 개개인의 마음 속에 평화가 안착될 때 그것이 본격적인 평화의 신호탄이 되는 것이다.
인간이 평화를 지향한다는 합목적성은 가능한 것이기도 하고 필연적인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평화로움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상대방과의 동일성을 인정하면서 공동의 의식을 함유하는 것이다. 이제는 전쟁의 소용돌이와 안보의 심연이 평화의 소용돌이와 평화의 심연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더 이상 늦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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