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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주에 대한 연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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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주에 대한 연민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道'] 제8장 새 세상의 아침<40>

중종이 내린 은사(恩赦)의 대상은 주로 연산군 갑자년 이후에 사화에 연루되어 죄를 진 청류사림들이 대상이 되었다. 그때 극형을 받은 선비들은 관직을 추증했다. 그러나 현행범이나 흉악범, 파렴치범과 잡범은 제외되었다.
  김종직의 제자인 남곤과 이장곤 등도 귀양살이에서 풀려났다. 예전에 빼앗겼던 임명장도 다시 돌려주고 관직은 예전의 품계를 기준으로 복관되었다. 반정 공신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대간들이 근무하는 사간원과 사헌부, 홍문관을 살리고, 연산군의 놀이터로 변했던 성균관을 수리하고, 백성들의 출입을 금했던 서울 주변 땅의 금표를 철거함으로써 폐지시켰던 고을, 광주 양주 고양 양천 등을 되살려 원을 임명하고, 연산군의 눈과 귀를 멀게 했던 중앙과 지방의 벼슬아치들을 일제히 교체하는 것이었다.
  특히 총애를 받았던 환관이나 품계가 높은 궁녀를 이용하여 벼슬한 자들을 발본색원하여 죄질에 따라 참형에 처하거나 귀양을 보내거나 물러나게 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장녹수의 형부인 김효손이었다. 김효손은 연산군 10년에서 12년 사이에 벼락승진해서 정 3품 당상관까지 올라 신료들의 분노를 산 인물이었다.
  연산군의 주연을 위해 설치했던 기생들의 교육을 위한 계방원(繼芳院; 장악원을 고친 이름)을 없애고, 사냥을 위해 대기시켜 두었던 1만 명의 응사군도 폐지시켰다. 흥청(대궐 안의 기생)과 운평(일반기생)들을 베 1필만 받고 본래 자리인 관청이나 개인집으로 돌려보냈는데, 돌아갈 형편이 되지 못한 기녀들은 서울 거리를 떠돌았다. 임사홍이 갑자년에 채홍사가 되어 전국에서 운평 3백 명을 뽑아 올리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대궐로 들어온 흥청만 해도 1만 명이나 되었으니 서울 거리에는 기녀들이 넘쳐날 수밖에 없었다.
  초설이 운영하는 명경에도 일자리를 찾아 기녀들이 몰려들었다. 초설은 심정의 부탁을 받아 기녀를 3명이나 받아들였다. 그러나 명경은 기녀집이 아니므로 더 이상 받아들이기는 무리였다. 그래서 초설은 과천에 기방을 하나 차렸다. 한강을 건너는데 노량진으로만 다니도록 하여 영호남으로 가려면 몹시 불편했는데, 이제는 모든 나루터를 다 개방하여 새 왕조가 들어선 이후 과천은 행인들로 붐볐다.
  그렇다고 초설이 과천 기방에 아무 기녀나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엄격하게 면접을 해서 통과시켰다. 반정이 성공한 다음날 광화문 밑에 있던 군기시로 끌려가 몰려든 백성들에 둘러싸여 바로 처형당한 장숙용 녹수와 전숙용 전비, 그리고 김숙원 귀비 등에게 줄을 댔던 흥청이나 운평은 기방의 물을 흐릴 것이라 하여 가려냈다.
  
  심정은 명경을 매일 드나들었다. 그날은 심순경과 함께 명경을 들렀다. 심순경은 박원종과 교분이 두터운 무부로 반정 하는 날에는 진성대군의 사저를 호위한 공을 세웠던 인물이었다. 그는 또 폐주를 강화도 교동까지 호위하기도 했다. 그들의 화제는 당연히 폐주 이야기였다.
  "폐주를 호위하느라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권력을 내놓은 폐주는 의외로 순하게 굴었습니다. 붉은 옷에 갓을 쓰고 띠도 띠지 않은 초라한 차림으로 대궐을 나섰습니다. 내전문으로 나오더니 땅에 엎드려 새 임금님을 향해 절을 하기도 했습니다."
  "무어라 하던가요."
  "내가 큰 죄를 지었는데도 특별히 임금의 은혜를 입어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고 절을 했습니다. 간사한 것 같았지만 나라도 그리 했을 것입니다. 목숨에 애착이 있고 연명하려니 별 수 있었겠습니까."
  심순경은 조금도 과장을 하지 않고 말했다. 연산군으로 강등된 폐주는 대감들이 타는 평교자를 타고 이동했는데, 시위하는 무리도 격하되어 내인 4명, 내시 2명, 반감(飯監) 1명, 군사를 거느린 당상관 1명이 고작이었다.
  폐주의 기는 꺾일 대로 꺾이어 중병에 걸린 환자 같았다. 선인문과 돈의문을 통과할 적에는 갓을 숙여 쓰고 머리를 들지 못했다. 소문을 듣고 달려온 백성들이 길을 막고 야유를 보내는 바람에 강화 교동까지 가는 데 세 군데서 유숙했다. 연희궁(衍禧宮)과 김포, 그리고 통진(通津)에서 묵었던 것이다.
  "백성들이 뭐라고 손가락질하던가요."
  "노인과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길가로 나와 다투어 손가락질하며 통쾌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폐주의 사냥터로 농토를 빼앗겼다가 다시 돌려받았으니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귀향지는 어떠했습니까."
  "안치소는 말 그대로 감옥 같았습니다. 둘러친 가시울타리 안이 몹시 좁고 해도 볼 수 없었습니다. 창문은 단 한 개가 있었는데 겨우 음식이나 들여보내고 말이나 전달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가시울타리 안에 들어서자마자 내인들이 모두 소리를 내어 통곡하였습니다."
  "그때 폐주가 한 말은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하직을 고하니 '나 때문에 멀리 오느라 수고했으니 고맙다'고 했습니다. 저렇게 순한 사람이 어찌 폭주가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심정과 심순경은 폐주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탓이었는지 연민의 감정으로 말을 주고받았다. 한때는 폐주의 말 한 마디에 그들의 심장이 얼어붙을 정도였으므로 그럴 만도 했다.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졸지에 임금이 된 중종의 측은지심도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폐주가 교동에 안치됐다는 보고를 받고는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애처로운 마음이 들어 이렇게 지시했던 것이다.
  "전왕의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안 되었다. 나는 종사가 위태하고 신민(臣民)이 추대하므로 여러 사람의 뜻을 어길 수 없어 피하지 못하고 이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전왕은 나와 의리로는 임금과 신하였고, 정의로는 형과 아우이다. 지금 날씨가 점차 추워지니 의복과 음식물을 실어 보내라."
  또 전교하기를,
  "교동에는 털옷이 없을 것이니 털옷과 어물을 따로 보내라. 또한 가시울타리를 처마 밑에서 10자쯤 뒤로 물러 세우라."고 하였다.
  
  심정이 명경으로 심순경을 부른 것은 박원종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중요한 직책을 얻을 수 있을 것인데, 아무리 꾀를 내도 기회를 잡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조정에 아침 일찍부터 나아가 기웃거려도 박원종이나 유순정, 성희안을 좀체 만날 수 없었다. 반정에 성공한 후 그들의 권력이 범접하지 못할 정도로 세졌기 때문이었다.
  중종이 내린 첫 인사에서도 심정은 중요 직책에 끼지 못했다. 영의정 유순, 좌의정 김수동, 좌참찬 박원종, 형조판서 성희안, 승정원 동부승지 홍경주, 대사간 안당, 홍문관 부제학 정굉필, 직제학 이희보, 전한 성몽정, 응교 최숙생, 부응교 이윤, 사헌부 지평 신세호, 교리 정환, 부교리 김안국 등을 임명한 바 심정은 어느 자리도 차지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정국공신의 등급에서도 심정은 3등 공신을 겨우 받아냈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심정은 출세의 의지를 굽히지는 않았다. 박원종과 같은 실세와 줄을 댈 수 있는 사람들을 부지런히 만나고 다녔다. 명경으로 심순경을 초대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이보시오, 심 장군. 평성군을 한번 뵙게 해주시오."
  "요즘은 바빠서 나도 뵐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바쁘셔도 잠깐 동안 만날 시간이야 없겠습니까."
  "전하의 지시 때문입니다. 3정승, 6조판서, 승정원과 병조의 당상관들 및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대감에게는 늘 빈청으로 출근하여 일을 처리하라는 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심 장군. 부탁이오. 평성군을 한 번만 만나게 해준다면 내 한 턱 크게 내리다."
  "노력해 볼 터이니 두고 보십시다."
  이때 심정의 부탁으로 명경에 들어온 흥청 출신의 기녀 달이가 들어와 애교를 부렸다.
  "나으리, 소녀가 평성군 대감댁을 찾아가 보겠습니다요."
  "아니, 네가 어찌 감히 평성군 대감댁을 가겠다고 나서는 것이냐."
  "우리 흥청들이 궐 밖으로 나와 이렇게 자유의 몸이 된 것은 모두 평성군 대감님의 은혜이옵니다. 큰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이옵니다. 그러하오니 찾아가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감사의 인사를 어찌 하겠다는 것이냐. 네 몸이라도 주겠다는 것이냐, 아니면 폐주한테 받아 숨겨둔 보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
  "대감께서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라도 다 드리겠사옵니다."
  "허허허. 궐 안에서 놀더니 간덩이가 보통으로 커진 것이 아니구나. 거기가 어디라고 네가 함부로 간단 말이냐. 허허허."
  심순경이 기가 찬 듯 헛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심정은 반정에 한 자리 개입하려고 박원종 집을 찾아갔다가 홀대를 받은 적이 있으므로 기녀 달이에게라도 부탁하고 싶었는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네가 정녕 약속할 수 있겠느냐."
  
  "나으리, 섭섭하옵니다. 소녀가 이곳에 온 것도 나으리께서 주선해주시지 않았사옵니까. 나으리께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성사시키겠사옵니다."
  "흥청이라선지 못할 말이 없구나. 사람은 자고로 큰물에서 놀고 볼 일이야."
  "그래,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천하의 박원종 대감을 무슨 수로 만나겠다는 것이냐."
  심순경은 흥미를 느꼈는지 달이를 자신의 옆자리에 앉게 하고는 말했다.
  "나으리, 소녀는 운평에서 가(假)흥청이 되었다가 흥청이 되자마자 얼마 후 임금님을 가까이 모시는 지과흥청(地科興淸)이 되었사옵니다."
  "지과흥청이었으니 대감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것이냐."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비록 놀이터이긴 하지만 전하를 가까이서 뫼시었으니 대감 또한 편하게 모실 자격이 있다는 말씀이옵니다."
  "똑똑하구나. 과연 지과흥청답구나."
  심순경은 술이 오른 듯 기녀 달이를 끌어안았다.
  "하오나 소녀는 임금님과 동침한 흥청을 하늘이 내린 흥청이라 하여 천과흥청(天科興淸)이라 하온데 아직 성은을 입지는 못했사옵니다."
  "그렇다면 오늘 밤 나의 사랑이라도 받겠다는 것이냐."
  "성미가 너무 급하시옵니다."
  "폐주와 동침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너에게는 복이 될 것이니라. 알겠느냐. 만약 동침하였다면 너는 당장 이 자리에서 쫓겨나야 할 것이니라."
  심순경이 정색을 하고는 무섭게 말하자 기녀는 다시 분위기를 부드럽게 돌렸다.
  "소녀는 전하를 즐겁게 하는 유희만 배운 지과흥청이옵니다. 노려보지 마시옵소서. 소녀가 다시 술을 한 잔 따르겠사옵니다."
  "지과흥청이 됐든 천과흥청이 됐든 지은 원죄가 크니라. 너희들이 쓰는 화장 도구의 비용까지도 모두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들였으니 백성들의 재산이 거덜 난 것이 아니겠느냐."
  달이는 심순경의 꾸짖음에 입을 비쭉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심정이 달이 편을 들어 말했다.
  "심 장군. 이게 어디 흥청들의 잘못이겠습니까. 패란한 폐주가 그리 명한 것이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그야 두말 하면 잔소리겠지요. 폐주가 저지른 일이란 것을 모르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초설이 방으로 들어와 눈짓을 보내자, 달이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초설이 늦게 들어온 것은 오랜 만에 홍경주가 찾아와 축하연이 벌어져서였다. 홍경주는 의정부 정승들의 추천으로 승정원의 동부승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의정부 정승들의 추천이라기보다는 박원종의 천거가 있자 이를 정승들이 추천하여 중종이 윤허한 것에 불과했다.
  실제로 모든 벼슬의 임명은 반정의 3대장인 박원종과 유순정, 성희안의 천거로 이루어졌다. 그들이 천거하면 정승들은 아무 소리도 못하고 즉시 중종에게 추천하여 허락을 받아냈다. 그러니 반정의 3대장 앞에서 정승이나 중종은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정국공신을 정하는데도 반정의 3대장이 천거를 하면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했다. 그들이 1등으로 천거한 사람은 유자광, 신윤무, 박영문, 장정, 홍경주였고, 2등으로 천거한 사람은 운수군 이효성, 심순경, 변수, 최한흥, 윤형로, 조계상, 유순, 김수동, 김감, 운산군 이계, 이계남, 구수영, 덕진군 이할 등이었고, 심정은 겨우 3등 공신으로 턱걸이를 하였던 것이다.
  다만 자신들의 공은 영의정 유순과 우의정 김수동이 중종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하였다.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은 맨 먼저 큰 계책을 결정하여 큰 업적을 쉽게 이룩하였으니 그 순위가 유자광 위에 놓여야 합니다."
  "알겠다. 그리 하시오."
  그런데 반정의 3대장은 공신대장에 자신들의 가족과 인척을 넣는 바람에 훗날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성희안의 경우도 자신의 매부인 신수린을 억지로 넣어 화를 자초하고 말았다. 성희안이 자기 어머니에게 "박원종, 유순정과 나 세 사람의 아들과 동생이 다 공신등록에 들었는데 나의 아들과 동생들이 제일 많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어린 수린은 말을 뗄 형편이 못되었습니다"고 하자 성희안의 어머니가 화를 내며 "나는 다시 네 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누워버렸다. 이에 성희안은 이튿날 박원종을 만나 사정사정하여 신수린을 공신대장에 올렸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백성들에게 신망이 두터웠던 김수동도 아우가 공신이 되는 것에 은근히 관심을 가졌던 바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심지어는 중종조차 왕위에 오르기 전후 자신과 놀았거나 도왔던 사람들의 이름을 써서 빈청에 내려 보내며 공신으로 등록할 것을 요구했다.
  심정이 방으로 늦게 들어온 초설에게 타박하듯 말했다.
  "설마 공신의 등급에 따라서 접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겠소."
  "나으리, 감축 드리옵니다. 3등 공신에 오르시어 조만간 상을 받으실 거라는 얘기를 방금 동부승지 나으리에게 들었사옵니다."
  "나보다는 심 장군이 더 크게 축하를 받아야 하오. 심 장군께서는 2등 공신에 오르셨거든."
  "그렇사옵니까. 감축 드리옵니다."
  "명경 주인은 오직 정지(貞之: 심정의 자) 수찬(修撰)께서 3등 공신이 되시어 화천군에 봉해진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소. 두 사람이 주인과 손님 사이가 아닌 것 같은데 내 눈치가 틀린 것입니까."
  심정이 맞받았다.
  "하하하. 화살이 과녁을 뚫는 것처럼 정확하게 맞추셨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정지께서 술을 한 잔 사야겠습니다."
  "아니옵니다."
  초설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니라니. 정지께서 술을 크게 살 일이 아니란 말이오."
  "공신이 되신 두 분 나으리께 오늘은 소첩이 술을 사겠사옵니다. 허락하시겠사옵니까."
  "하하하."
  심순경과 심정은 마음껏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던 심순경이 갑자기 웃음을 멈추더니 말했다.
  "나는 이만 동부승지 홍경주가 있는 자리로 물러나겠소이다."
  "나으리, 소첩이 실수라도 했사옵니까."
  "사랑하는 사람끼리 앉아 있는 방에 눈치 없이 앉아 있기가 미안해서 그렇소이다. 마치 내 신세가 개밥에 도토리 같소이다."
  그제야 초설이 좀 전에 나갔던 기녀 달이를 부르려고 했다.
  "나으리,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소첩이 맞추겠사옵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는 말이오."
  "그렇사옵니다."
  "어디 말해 보시오."
  "좀 전에 나갔던 달이를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아니, 어찌 그리 맞출 수가 있는 것이오."
  "다장을 몇 년 하다 보니 사람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이 조금 생겨났을 뿐이옵니다."
  초설이 기녀 달이를 불러들이니 비로소 심정의 짝은 초설이 되고, 심순경의 짝은 달이가 되었다.
  심순경은 대취하여 달이를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 술 마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잠시 후에는 달이의 손을 끌고 초설에게 빈방을 묻더니 나갔다.
  그런데 심정은 심순경이 방을 나가자 자세를 바로하고 초설을 맞은편 자리로 가게 했다. 초설이 옆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자못 부담스러워했다. 초설이 느닷없이 조광조의 얘기를 꺼냈기 때문이었다.
  "나으리, 부탁이 하나 있사옵니다."
  "무슨 부탁인지 말해 보시오. 내 언제 거절한 적이 있었습니까."
  "약속해 주셔야 하옵니다."
  "글쎄, 말해보세요."
  "용인의 정암을 아실 것입니다."
  "잘알고 있소. 나보다 10여 년 후배지요."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답답하게 아직 공부만 하고 있사옵니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이제 생진사시라도 보아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올해가 바로 생진사시와 문무과 과거시험을 치기로 된 해지요. 허나 시험제목이 이미 각도에 돌아 정묘년으로 넘겨진 것으로 알고 있소. 내 용인으로 서신을 보내 시험을 보도록 권면해 보겠소."
  "고맙사옵니다."
  "고맙다니 정암과 어찌 아는 사이오."
  "예전에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흘려들었나 보오. 다시 말해 보시오."
  "한훤당 선생께서 희천으로 유배와 계실 때 정암님은 제자로서 공부를 하고 있었고, 소첩은 한훤당 선생의 처소를 청소하는 아이로 가 있었사옵니다. 그러니 소첩도 한훤당 선생의 제자라면 제자이옵니다."
  "그렇다면 정암과 한 스승 밑의 같은 문인이라는 말이 아니오."
  "같은 문인이라 하기에는 분에 넘치는 표현이옵니다."
  그제야 심정은 안심이 되는 얼굴 표정을 지었다.
  "난 또 두 사람 사이에 사모하는 연정이 있는 줄 알고 공연히 긴장을 했소."
  초설은 심정이 무심코 뱉어낸 '사모하는 연정'이라는 말에 얼굴을 붉혔다. 무엇을 숨기려다 들킨 사람처럼 허둥대었다. 다행이 심정이 눈치를 채지 못했지만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심정이 은근하게 손을 뻗어 초설의 손을 잡으려 했으나 초설은 얼른 손을 빼어내 술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정암님의 용인 초당에는 그분의 동지들끼리 도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분들 모두 새 세상에 나와 벼슬을 한다면 나라의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초설의 마음을 내 알았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용인으로 내려갈 기회가 생긴다면 얘기를 해보겠소."
  "나으리. 고맙사옵니다."
  "초설의 부탁인데 내 어찌 거절하겠소. 나 심정이는 초설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다 들어줄 각오가 돼 있소. 초설이도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겠소."
  "소첩도 나으리 부탁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믿어도 되겠소."
  "맹세코 거절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러나 심정은 초설에게 아무 부탁도 못했다. 술을 마시지 않은 날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고 싶었다. 초설이 비록 술과 차를 파는 다장을 운영하고 있으나 그녀를 천하게 여겨본 적이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었다. 심정은 초설을 자신의 아내보다 더 사랑스럽고 귀하게 생각했다.
  초설은 술 취한 심정을 방에 눕혀 놓고 밖으로 나왔다. 보름달이 명경을 보살펴주는 수호신처럼 자애롭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초설은 조광조가 공부하고 있는 용인 쪽을 바라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술에 취한 심순경이 기녀 달이를 데리고 들어간 방에는 이미 불이 꺼져 있었다. 초설은 동부승지 홍경주가 떠드는 방으로 건너갔다.<계속>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는 화순군 홈페이지와 동시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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