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반갑습니다. 평일 오후에 그것도 날씨가 이렇게 청명한데 여기까지 와주신 여러분의 성의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자리는 방금 소개한 대로 <프레시안> 창간 5주년을 기념하는 강연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그 마지막 회를 <프레시안>과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정책위가 공동으로 주최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오늘 드릴 말씀은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의견이라는 것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6.15 남측위의 선배님들을 비롯한 여러분께서 와 계십니다. 사정들은 잘 아실 텐데, 만일 오늘 제가 남측위 내부에서 합의된 공식적인 입장만을 갖고 말한다면 재미가 없을 것이고, <프레시안> 창간기념 행사의 흥행에도 실패할 것 같습니다. 저 개인의 의견을 말해서 얼마나 더 재미있어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개인 의견인데 다만 그동안 남측위 상임대표로서 2년 가까이 지내 온 경험과 여러가지 고민이 반영된 내용이 될 것입니다.
북 핵실험으로 새 국면, 그러나 '한반도식 통일' 멈출 수 없어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10월 9일 북의 핵실험으로 6.15시대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는 것, 그러나 '한반도식 통일'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앞으로 민간의 몫이 점점 중요해질 것이라는 점입니다.
핵실험 이후 6.15시대가 완전히 끝났다는 이야기도 보수언론에서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보수층뿐 아니고 6.15공동선언의 실천활동에 함께 해 온 분들, 남북의 화해를 주장해 온 분들 가운데서도 6.15시대가 흔들리고 있다는 표현이 나오기도 합니다.
저는 6.15시대라는 것이 본질상 애초부터 흔들거리면서 진행되어 온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요즘 좀 많이 흔들리긴 합니다만, 6.15시대는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말입니다.
핵실험으로 남녘 민간운동의 몫 오히려 더욱 커질 것
한편 통일운동 일각에선 "북의 핵실험이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다. 북측이 핵보유를 선언한 것은 작년 2월이고 핵실험으로 인해 바짝 긴장했었지만 6자회담도 재개되고 하니까 핵문제로 너무 떠들 것은 없다. 원래 하던 대로 통일운동을 하면 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런 주장에 대해 어느 일면은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핵실험으로 벌어진 이 새로운 국면을 너무 가볍게 보는 태도는 옳지 않다고 봅니다. 객관적 환경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 것은 분명합니다. 이제는 이 상황을 제대로 점검해서 자세를 가다듬을 시점입니다.
한마디로 핵실험이 일깨워준 것은 우리에게는 통일도, 분단도 정말로 장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가 통일을 장난이라고 했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겠습니다만, 통일운동이든, 분단 속에서 사는 생활에 대해서든 타성에 젖어서 좀 너무 쉽게 넘어 온 면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점에 대해선 북의 핵실험이 우리의 정신을 번쩍 차리게 해줬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역설적이지만 핵실험으로 인해 남녘 민간운동의 몫이 더 커질 것이라는 점입니다. 요즘 흔히 선진화를 말합니다만, 우리가 민간운동의 그러한 증대될 몫을 제대로 감당해내기만 한다면, 그래서 '한반도식 통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나면 그야말로 비로소 멋진 한반도 선진사회가 건설될 것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한반도식 통일'이란 시민이 참여하는 점진적 통일
먼저, 제가 '한반도식 통일'이란 말을 내세웠는데, 도대체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가부터 말씀 드리겠습니다.
물론 한반도에서 통일이 되면 다른 지역의 통일과는 다른 상황에서 진행되게 마련입니다. 굳이 이것을 '한반도식'이라고 이름을 붙일 때에는 우리 한반도에서 진행되는 통일은 그 동안 우리가 보아 온 다른 분단국의 통일과 근본적으로 다른 특징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담고 있습니다.
우선 몇 가지 선례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쉽게 발견됩니다. 가장 두드러진 예는 베트남과의 차이입니다. 베트남에서는 무력으로 통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국전쟁 이후 남에서든 북에서든 "다시는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 평화적인 통일을 해야 한다"는 점에 국민적 합의가 이뤄진 지 오래입니다.
물론 정부가 공인하는 합의가 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죠. 옛날에는 평화통일 말하면 잡혀갔습니다. 북진통일을 이야기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시기에도 대중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지금은 남북한 그리고 국제사회 모두가 평화통일의 원칙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베트남식 통일에도 장·단점이 있겠습니다만 그런 것을 떠나서 우리가 그런 무력통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음 독일의 통일이 있습니다. 우선 평화적 통일이었다는 점, 그리고 강대국과의 절충이 있었긴 했지만 어쨌든 독일 사람에 의해 이뤄진 자주적 통일이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선 우리가 바라는 평화통일, 자주통일의 원칙에는 부합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처음에는 동독 내에서 시민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으로 통일의 움직임이 시작됐으나, 서독 정부가 개입하면서 인위적으로 통일과정을 촉진시키고, 화폐 단일화라든가 이런 작용을 해서 결국은 동독이 서독에, 기존의 독일연방에 주로 편입되는 일방적 흡수통일로 귀결됐습니다.
한반도에서는 우선 북측에서 이것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이런 것을 시도하다가는 전쟁이 날 위험성 있습니다.
또 독일이 통일 이후 엄청난 후유증을 겪었습니다. 대한민국은 경제력을 봐도 서독에 비해 훨씬 약해서 이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햇볕정책이 나온 이후에는 독일식 통일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 국가의 정책이고 남북 간 합의입니다.
예멘의 통일은 다른 사례에 비해 덜 알려졌지만 역시 크게 보면 평화적 통일이었죠. 물론 나중에 전투가 있었습니다만, 남북 예멘 정부당국이 대등하게 협상해서 타결했습니다. 얼핏 한반도의 통일에 어울리는 모델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예멘의 경우는 당국자들 간의 나눠먹기식 담합이었습니다. 한 쪽에서 대통령을 하면 다른 쪽은 부통령, 한 쪽에서 국무총리를 하면 다른 쪽이 국무위원을 조금 더 하는 식으로 담합해서 통일했습니다. 나중에 이 담합이 깨지다보니 양쪽이 충돌해서 결국 북예멘이 남예멘을 군사적으로 압도해 통일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몇 천 명이 희생됐습니다.
한반도에서 그런 일이 있으면 몇 천 명의 희생으로 끝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 실정에서는 당국자들이 국민을 제쳐두고 밀실에서 마치 3당합당 하듯 통일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독일식도, 베트남식도, 예멘식도 다 한반도식 통일의 방식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런저런 것은 아니다'라는 식이 아니라, 그 내용을 적극적으로 말하면 뭘까요?
저는 베트남과 독일과 예멘의 통일 그 어느 것에서도 없던 한반도 통일의 특징을 들라고 한다면 남북 정상이 6.15공동선언을 통해 점진적 통일방안에 대한 일정한 합의를 도출했던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6.15공동선언의 핵심은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해 나가기로 하였다"는 제2항입니다.
상당히 모호한 합의이기는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베트남에도 없었고, 독일에도 예멘에도 없었던 통일의 점진적 중간단계, 국가연합이든 낮은 단계의 연방제든 중간단계를 거쳐 간다는 것입니다.
예멘의 경우를 보더라도 남북의 합의로 통일됐지만 갑자기 단일국가가 됐고 그러면서도 군대는 따로 갖고 있었습니다. 싸움이 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6.15선언처럼 남북 예멘도 국가연합으로 출발했다면 훨씬 원만한 과정을 겪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어쨌든 제2항을 통해 '중간단계를 두고 점진적으로 통일해 나가겠다, 그 다음에 어떻게 할지는 모호한 상태로 남겨두자'고 합의했기 때문에 전부터 추진해 오던 인도주의 사업, 경제협력, 사회문화교류 등이 비로소 힘을 얻게 돼서 6.15이전 시대에 비해 남북교류 사업이 엄청나게 늘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말씀드린 단계적이란 점은 어떻게 보면 통일과정의 형식상의 특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용상의 어떤 특징이 생길 것인가라고 할 때 저는 그것을 시민참여형 통일 혹은 민중주도형 통일의 가능성이라고 봅니다. 물론 이 가능성을 얼마나 현실화하는가는 다분히 한반도 주민과 한민족 성원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후에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북 핵실험을 바라보는 4가지 명제
이제 북의 핵실험에 대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국내의 여론은 비판과 비난이 압도적입니다. 여론을 맹신할 필요는 없지만, 이런 여론을 너무 가볍게 보는 것은 민중주도, 시민참여 통일운동의 자세는 아니라고 봅니다.
논리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북의 핵실험이 이미 기정사실이고, 6자회담도 재개됐는데 굳이 핵실험 갖고 이러쿵저러쿵 따져서 남북관계를 더 어렵게 만들 필요가 있느냐"는 주장도 있습니다. 또 "핵실험을 한 것은 북측이지만, 사태의 책임은 미국에 더 있다. 이것을 따져야지 북측을 비판해서 무엇 하는가" 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따지더라도 북의 핵실험이 불행한 사태니까, 이러한 불행을 불러온 미국에 책임을 따져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합니다. 핵실험이 잘된 일이라고 하면 미국의 책임을 굳이 논할 필요도 없어지는 거지요.
민주노동당이 방북할 때 많은 내부 진통을 겪은 끝에 '강한 유감'을 표명하는 선에서 정리가 됐습니다. 지금 우리는 방북하면서 공식적인 입장을 정리하는 자리도 아니고, 이렇게 우리끼리 모여서 핵실험 이후 사태를 의논하고 성찰하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유감의 강도를 정하는 일보다 북의 핵실험이 유감스럽다면 어떤 견지에서, 왜 유감스러운가를 밝히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난달 말께 일본에 가서 국제심포지움에 참여했습니다. 그 원고를 미리 달라고 하기에 북측이 핵실험을 하기 전에 원고를 써줬습니다. 그 직후에 북이 핵실험을 하겠다는 발표가 나왔고 10월 9일에 실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10월 28일 심포지움 당일에 가서 핵실험에 대한 저의 태도를 원고에 없던 4가지 명제로 정리해서 발표했습니다.
그 내용이 활자화돼서 <역사비평> 겨울호에 실리게 됐습니다만, 겨울호가 서점에 나오려면 다음 주 초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당시 정리한 4가지 명제를 일단 인용하는 것으로 논의의 출발점을 삼겠습니다.
첫째, 군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동안 미국의 대북압박정책이 계속되어 왔고 선제공격의 위협마저 없지 않았던 상황에서 '군사적 억지력 확보'를 위한 핵무장이라는 북측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런 사태가 오게 된 데 대한 미국측의 책임문제를 빼놓은 채 북측만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공정한 태도가 아니다. 더구나 북의 행위에 대한 책임추궁을 재일동포들에게 돌려, 무고한 청소년들에게까지 박해를 가하는 일부의 행태에 대해서는 일본 국민들이 깊이 반성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둘째, 단순한 군사적 억지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궁극적인 한반도 비핵화를 목표로 외교적 협상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핵무기를 보유한다는 것이 기존의 다른 핵보유국들이 내걸었던 명분과 구별되는 특징인데, 이번의 핵실험이 북측이 바라는 협상 카드로서 얼마나 유효할지는 지켜볼 문제이며, 설혹 협상이 재개되더라도 이 시점에서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 최선이었는지는 두고두고 논란의 대상으로 남을 것이다. 외교에는 상대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외교의 궁극적 목표가 북측 사회가 안고 있는 온갖 문제들의 해결에 있는 만큼 핵실험으로 인해 문제가 악화되는 면을 함께 고려하는 종합적인 정치적 판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북측이 6자회담 복귀를 선언해서 협상재개가 예상되는 현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셋째, 나 자신을 포함해서 남쪽의 민간운동이 강조해 온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의 관점에서는 북의 핵실험은 매우 불행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 일반시민들과 함께 이룩해가는 통일과정을 중시할 때, 핵실험으로 인해 많은 남쪽 국민들이 6.15 공동선언의 정당성과 유효성에 의문을 갖게 된 상황은 비록 일시적일지언정 중대한 타격이다. 그뿐만 아니라 보편적 대의를 중시하는 시민운동의 경우, 예컨대 반전반핵의 원칙이 생명인 평화운동이라든가 남한에서 핵발전소의 건립마저 반대해 온 환경운동이 북의 핵실험에 대한 분명한 입장표명 없이 남북교류를 지속할 수는 없게 되었다. 실제로 6.15 공동선언실천운동에 참여해 온 몇몇 단체가 강력한 비판을 공개적으로 표명하기도 했다. 넷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서의 시민참여형 통일과정은 진행 중이라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다른 대안이 없음은 본론에서 더 설명할 참이지만, 핵실험의 충격으로 남쪽 내부의 담론지형이 재정비되고 있는 것도 하나의 희망적인 사태전개다. 당장에는 반(反) 6.15 담론이 크게 위세를 떨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결국은 그것이 대안 없는 담론이라는 점이 시간이 흐를수록 분명해지게 마련이며, 낡은 통일지상주의와 반미 일변도 단순논리의 국민설득력이 떨어진 것도 하나의 전진이라고 본다. 게다가 그동안 한반도의 분단현실과 북의 존재를 제쳐둔 채 남한만의 선진화 또는 진보와 변혁을 주창해 온 담론들 또한 그 공허함이 드러났다. 시민참여형 통일이 제대로 진행할 또 하나의 계기가 주어진 것이다. |
북 핵실험에 대한 미국의 책임도 물어야
첫번째 명제에서 "일리가 있다"고 한 것은 물론 전면적 긍정은 아닙니다. 그러나 미국은 1994년 북미 제네바합의를 통해 여러 가지를 약속했고, 그 중 하나가 정치학자들이 말하는 소극적인 안전보장입니다. 핵보유국인 미국이 핵이 없는 북에 대해서 핵공격을 시도하지는 않는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제네바합의를 먼저 파기한 것은 미국이었습니다. 뒤이어 부시가 '악의 축' 운운하면서 말하자면 소극적인 안전보장 약속도 철회한 것입니다. 미국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쳐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이른바 부시 독트린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군사적 관점에서 북이 "우리가 핵을 가져야만 국가와 체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겠다"고 하는 것을 터무니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안전보장이라고 할 때 군부에서 원하는 100% 보장이란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 있습니다. 어느 선에서 최대한 안전보장을 도모하면서 어느 정도는 리스크를 부담하면서 가야 합니다. 만일 북측이 핵무장을 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미국이 북한에 쳐들어갔겠느냐 하는 문제에는 논란의 여지가 남습니다.
어쨌든 핵실험을 한 주체는 북측이지만, "안전보장을 해 주면 핵을 포기한다"는 거듭된 북측의 주장을 묵살했던 미국의 책임을 묻지 않고 북측만 비판하는 것은 공정치 못합니다.
과거와 달라진 미국의 '북한카드' - 남한을 미 영향권에 묶어두기 위해
그런데 미국의 책임을 따질 때 북측에서는 거론하지 않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미국이 북에 대해 압박을 가할 때 과연 미국의 유일한 정책목표가 실제로 북을 쳐들어가겠다고 하는 것이었나 하는 점입니다.
큰 희생 없이 북한에 쳐들어갈 수 있으면 부시 같은 사람은 그렇게 하겠지만, 오로지 북에 대한 침공만을 위해서 정책목표를 세웠다가 북측의 미사일이나 핵무기에 막혀 좌절했다고 하는 것은 미국을 너무 만만히 보는 것입니다. 미국 같은 나라는 언제나 여러 차원의, 여러 수를 동시에 노리게 마련입니다.
저는 미국이 북측에 압박을 가한 것은 북에 대한 압박 그 자체의 효과도 있지만, 긴장을 조성해 자기들의 군사적 이익, 일본의 우경화 등 여러 목적을 동시에 노렸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한국이 그나마 한미동맹의 관계를 재조정하고, 좀더 건강하고 자주적인 관계로 나아가겠다고 하는 움직임을 견제하는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옛날 미국이나 주변국가가 '북한 카드'라는 것을 우리와의 외교관계에서 행사했는데, 남북이 대결하는 상태에서 "남쪽이 말을 안 들으니 북한에 잘해주겠다"고 해서 남한을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미국의 경우는 '북한 카드'의 성격이 바뀌었습니다. "북한에 압박을 가해 한국이 끌려오게 만든다"는 전략입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는 "이라크 파병을 해주면 미국이 한반도문제 해결에 조금 더 건설적으로 나오지 않을까, 전략적 유연성을 들어주면 우리를 봐줄까"라는 식으로 계속 끌려들어갑니다. 이런 점에서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은 실패가 아니라 상당히 재미를 봐 왔다고 할 것입니다.
남쪽에서 통일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이 점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국과 북측의 군사 독트린이 설정한 논의구도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 구도를 전제로 "미국의 잘못이냐, 북한의 잘못이냐"를 따지게 될 때, 미국의 잘못을 말하면 말할수록 다수 국민들 사이에 "저 사람들은 북한이 무조건 잘했다고 옹호하는 친북세력이구나"라는 인상을 주게 마련인 것입니다.
아무튼 북의 핵실험에 대한 책임이 북측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 대북제재조치도 한반도 비핵화를 달성하기 위한 대화와 협상의 수단으로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고 봅니다. "다른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고, 북한만 잘못을 했으니 응징을 해야겠다"는 식의 제재에는 동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응징의 방법으로 북에 쳐들어가자든가 폭격하자는 것은 미국도 안하겠다는 것이니까 논외로 하겠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PSI가 있습니다. 최근 우리 주변에서 보면 잘 알지 못하는 영어를 약자로 써서 본질을 흐리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데, PSI도 그런 것 같습니다. 풀어 써도 아리송합니다.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 뭐 이런 정도로 번역이 되는데, 쉬운 말로 바꾸면 "북녘을 드나드는 선박은 선적이 어디든 상관없이 공해상에서라도 아무 때나 검색하고, 필요하면 나포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서 우리더러 같이 하자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하자는 게 많습니다만, 핵심은 한반도 주변의 바다에서 북측 선박을 검색하는 데 한국 해군이나 해안경비대가 같이 하자는 겁니다. 이것은 유엔결의안에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로서는 함께 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선, 너무 위험한 짓입니다. 꼭 그 배를 검색하다가 그 배하고 교전이 일어난다든가, 거기서 충돌이 벌어지지 않더라도 위험합니다. 서해교전이라는 것이 두 차례 있었는데, 제3, 제4의 서해교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북방한계선(NLL)이라는 것이 휴전선이 아니기 때문인데, 자세한 사실관계를 말하자면 이야기가 길어지니까 일단 넘어갑니다.
PSI의 취지는 북측이 핵물질을 배에 싣고 다른 나라에 가져가는 것을 막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한반도 주변에서 한국이 막지 않아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요. 한반도 주변만 항해하는 배라면 러시아, 일본, 중국 아니면 한국에 오는 배입니다. 북측이 핵물질을 싣고 그 중 어디로 가겠습니까? 일본이나 중국, 러시아, 한국에 핵물질을 왜 갖다 주겠습니까? 만약에 간다면 먼 바다를 지나 딴 나라로 갈 테니 미국이 먼 바다에서 잡으면 되는 거예요.
우리 정부가 참여하지 않기로 했는데 대단히 잘한 일입니다. 미국 입장에서 떨떠름하긴 하겠지만 이것 갖고는 아직 정면으로 시비를 못 걸고 있습니다.
셋째,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을 포함한 경협을 중단한다는 것은 특정 외국, 까놓고 말하면 미국이지요, 미국과 국내 수구세력의 압력에 굴복한 자해행위가 될 것입니다.
넷째로 인도적 지원이 일시적으로 축소되는 건 불가피하더라도 이를 '제재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북의 핵실험 이후 여론이 나빠서 민간에서 모금이 잘 안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인도적 사업의 중단을 제재수단으로 명시한다는 것은 명분과 실리를 다 잃는 일입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미국과 일본의 원안을 대폭 완화해서 유엔 안전보정이사회가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1718호 결의안은 우리 정부가 엄격히 해석해서 준수하는 것이 필요하리라고 봅니다.
핵실험은 과연 대미 협상과 북 내부 문제 해결을 위한 최선의 선택인가?
두번째 테제로 넘어가겠습니다.
북측의 핵실험은 다른 나라의 핵실험과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다른 나라들이 핵실험을 할 때는 국방을 위해, 또는 국가의 위신을 위해 핵무기를 갖기로 하고 실험을 했습니다. 북측에서는 "궁극적인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핵을 보유하겠다"고 나오는 것이 아주 특이한 면입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 포기하겠느냐"라고 하는 시각도 있지만 두고 볼 일이고, 하여튼 북측에서 내세운 명분은 궁극적 비핵화를 위한 협상력을 높이고자 핵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0월 말 북측이 6자회담 재개에 동의하고, 부시가 한국전쟁 종전선언의 가능성을 내비치는 상황에서는 일정한 협상력을 발휘했다고 볼 만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미국의 태도가 이만큼 변한 데 있어 북의 핵실험과 미국 중간선거에서의 민주당의 압승 중 어느 것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했는가 하는 것은 더 분석해봐야 할 일이지요. 가령 핵실험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미국의 민주당은 북미대화를 촉구했었는데 북이 핵실험을 안했다고 해서 미국이 끝내 협상을 거부했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논란의 여지는 남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실제로 6자회담이 재개됐을 때 협상이 얼마나 진행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더욱 미지수입니다. 미국의 부시나 백악관 대변인의 유화적 발언이 더러 있었으나 9.19 공동성명에는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의 원칙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서로가 하나씩 주고받으며 핵폐기를 진행하고 그 과정에서 구체적 조치를, 말하자면 매칭(matching)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아직 이것을 얼마나 성의있게 하겠다는 건지 확인된 바가 없습니다.
북측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협상능력의 확보를 위해 핵무기를 만들었다는 것을 거짓말이라고 볼 필요는 없으나 일단 핵을 가진 이상 상황은 달라진 거죠. "이젠 핵 폐기보다는 핵 군축이다, 군축이라면 우리가 가진 핵무기 얼마를 줄일 테니 미국도 얼마 줄여야 한다"고 나올 수도 있는 것이죠.
재일 총련의 기관지 <조선신보>는 "구태여 말한다면 현시기 지역에 형성된 국제관계의 구도는 '4 대 2'이다. 동북아시아의 리해당사자들 가운데 조, 미, 중, 로의 4개국이 핵보유국이란 것이야말로 엄연한 사실이다"라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 이정철 교수는 지난 11월 17일 세교포럼에서 "향후 북한은 4+2 회담의 틀을 주장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하기도 했지요.
만일 북측이 핵 폐기가 아니라 핵 보유 지속을 전제로 핵군축을 하겠다고 나온다면 쉽게 타결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타결을 위한 협상력이란 면에선 핵실험의 약효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것이라고 봐야겠지요. 미국에 대폭 양보를 강요할 만큼 북핵이 미국에 무서운 존재도 아니라고 봅니다. 처음 북측에서 핵보유 이야기가 나왔을 때 온건파라고 하는 콜린 파월 당시 국무장관도 "북한이 두세 개의 핵폭탄을 가져봤자 두세 개 핵폭탄을 가진 것뿐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다는 뜻이지요.
더구나 군사적 안전을 넘어 경제회생과 인민의 생활향상이 국가의 궁극적 목표라 할 때 핵무기 보유가 최선의 선택이었는지는 쉽게 판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것 같습니다. 핵 카드를 통해 북미관계가 쉽게 타결돼 북녘 인민의 생활이 획기적으로 개선된다면 이건 북측이 원래 노렸던 목적을 달성한 것이 되겠지만, 타결에 시간이 한참 걸린다면 그 동안 고생할 인민들의 문제 등을 따져봐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핵 실험으로 남측 시민참여의 폭 크게 좁아져
이제까지 첫 번째와 두 번째 테제는 주로 국가전략의 차원에서 말씀드린 것인데, 세 번째와 네 번째 명제는 시민위주의 관점의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시민참여형 통일을 추진하려면 시민위주, 민중위주의 관점을 오히려 우선시해야 됩니다. 물론 이것이 국가전략 차원을 도외시하는 관념적 민중주의가 돼서는 안 되지만요.
시민참여형 통일은 일반시민들을 6.15공동선언실천에 최대한으로 동참시킴으로써 성취되는 것이니만큼 남북의 교류협력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를 크게 떨어뜨리고 6.15공동선언의 폐기마저 주장하는 냉전세력의 목소리를 키워준 사태는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때 국민들의 냉담이나 비난이 냉전세력, 수구보수 언론에 오도된 탓일 뿐이라는 태도는 사태의 심각성을 간과한 것이라고 봅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6.15 이전 시대의 타성을 보여주는 면도 있습니다. 6.15공동선언이 한반도식 통일의 윤곽을 제시했고 시민참여형 통일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는데, 자주평화통일의 원칙과 민간통일운동의 공간 확보를 위해 투쟁해야 했던 과거의 태도를 아직도 답습하는 면이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북의 핵실험이 시간이 지나면 흐지부지될 일시적인 불행이 아닌 것은 지속적인 시민운동, 민중운동을 가능케 해주는 원칙의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반전평화'는 북측도 강조하는 원칙이지만, 세계적으로 평화운동은 핵무기 반대를 최대의 과제로 삼아 왔습니다. 반전운동에서 '반핵'을 빼고, 그 '반핵'을 '반김반핵' 진영에 넘겨주는 것은 평화운동의 자기부정이자 통일운동의 패배를 자초하는 길이 됩니다.
환경운동의 경우도 핵발전소 건설마저 반대해 온 입장에서 핵무기 개발과 국토 내에서의 핵폭발을 용인하면서까지 대북협력을 추진하기는 어려워집니다.
그뿐만 아니라 핵무장 상태가 성립해서 관리되는 분단상황은 극소수의 정책결정자와 전문가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시민참여의 폭이 크게 제약되는 상황이 되게 마련입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이미 상당기간 흔들리며 해체기에 들어선 분단체제는 북의 핵보유 이후에도 안정적인 관리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최악의 사태는 재개된 6자회담이 결렬되어 북측이 추가 핵실험을 하고 국제사회의 제재가 강화되는 등 악순환이 지속되는 상황입니다. 이는 한반도의 통일과정을 훨씬 험난하고 위태로운 과정으로 만들지만 분단체제를 안정시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반대로 6자회담이 비교적 순항해 9.19공동성명의 이행과정으로 들어간다면 한반도식 통일과 분단체제 극복이 가속화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장 바라는 바이지만 쉽게 될 것이라는 안이한 태도로 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도 저도 아니고 지루한 협상이 계속되는 경우도 가능합니다. 이제껏 미국과 북은 서로 시간이 자기편이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저는 만일 이런 지루한 교착이 계속된다면 우선 상황에 대한 각 국가들의 통제력이 점점 약화되고, 동아시아 전반에 대한 미국의 통제력도 약화될 것이라고 봅니다. 이 경우, 시간은 결코 북한의 편도, 미국의 편도 아니게 됩니다. 두 정부 모두 현지 주민이나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통제력과 영향력이 줄어드는 사태가 예상됩니다.
북측의 핵군축 주장과 미국의 '핵물질 확산억지' 방침이 맞아떨어져 북의 핵 보유를 명시적 또는 암묵적으로 시인하는 '4 대 2' 협상구도가 마련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저 자신 핵보유국들끼리의 4자회담은 어렵다고 봅니다. '4 대 2' 구도에서는 일본이 빠지게 되는데 미일관계에서 미국이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 일본이 핵무장을 할 텐데 미국이 일본의 우경화는 지지해도 핵무장은 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중국대로 6자회담 구도를 깨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아무튼 핵 폐기가 전제되지 않은 조건에서 미국이 북측이 원하는 만큼의 지원과 보상을 할 수가 없을 겁니다. 그러다보면 교착상태가 계속될 텐데, 불안정 요소는 점점 커지고, 불안정해진 분단체제가 다시 안정되는 일은 없으리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남한 시민은 북핵 문제 해결 및 한반도 통일의 '제7의 당사자'
여기서 네 번째 테제로 넘어갑니다.
결국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한반도식 통일을 막을 길은 없으며, 그 통일이 얼마나 고비용의 과정, 비싼 비용을 치르는 과정이 될 것인가 하는 것만이 문제입니다. 이때의 비용은 군사비를 포함한 금전상의 지출만이 아닙니다. 북녘의 민중이 한 번 겪었고, 어쩌면 벌써 다시 겪고 있을지도 모르는 '고난의 행군'도 포함되는 것이고, 남쪽에서 일어나는 온갖 후진적이고 병리적인 현상도 심화될 것입니다. 또 한반도 경제권과 동아시아 지역협력 체제의 지연에서 오는 '기회비용'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 비용을 줄이는 데 6자회담의 당사국들이 모두 나름의 역할이 있을 것이지만, 저는 '제7의 당사자'로서 남한 시민의 존재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노무현 정부가 한반도 문제에 대한 3대원칙을 세우면서 한반도에서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명시했습니다. 이 주도적 역할이란 것은 그 취지는 좋은데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주도적 역할'이란 영어로 '액티브 롤(active role)', 즉 능동적 역할이라는 뜻인데, 문자 그대로 '주도'하는 것과는 거리가 좀 있지요. 가령 핵문제는 우리가 주도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 마치 이것도 미국을 제쳐놓고 우리가 주도하겠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니 북에서 핵을 만들자 보수 쪽으로부터 "너희들이 주도한다더니 어떻게 된 거냐, 북핵의 책임은 포용정책에 있지 않느냐"고 공격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한국의 능동적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정부뿐 아니라 민간의 능동성이 극대화되어야 한다는 점인데 여기에 대한 정부의 인식이 부족했습니다.
'제7의 당사자'라고 하는 것은 제8, 제9의 당사자도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가령 국가 차원에서 유럽연합이라든가, 민간 차원에서 북측의 시민사회를 거론하기에는 이르다고 봐야겠지요.
북측의 민간사회의 경우에는 가령 남한의 기업이나 시민사회에 필적할 실력과 정부당국으로부터의 독자성을 갖춘 별도의 주체가 안 보이는 만큼 현재로서는 6개국을 제외하고 또 하나의 중요한 당사자가 있다면 바로 남쪽의 민간사회입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도 '제7의 당사자'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에 와 있느냐 하는 것이겠습니다.
이런 '당사자'로 성립하려면 기존의 통일운동가들뿐 아니라 한반도식 통일의 독특한 형식에 따라 '어깨에 힘 빼고' 자기의 일상에 충실하면서도 한반도식 통일과정에 참여하는 일반시민이 많아야 합니다. 또 시민사회라고 할 때는 흔히는 경제계를 빼고 이야기하는데, 기업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미 정주영 회장 같은 사람이 역할을 한 것처럼 기업들도 포함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광범위하게 포괄된 주체들이 시민참여형 통일의 비전을 얼마나 공유하며 그 실현을 위한 창의적 행동을 얼마나 개발하느냐가 관건이 될 것입니다.
일사불란한 행동을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허황된 생각이고 그런 게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한반도식의 통일은 일사불란한 것이 아닙니다. 각자 나아가는 것이지만, 큰 뜻을 공유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민간사회라면 6개국에 더해 '제7의 당사자'로 불릴 수 있는 자격이 생기리라고 봅니다.
이를 위해서는 관성적인 통일운동이나 교류협력사업을 통해 분단이 극복되리라거나, 아니면 분단을 그대로 둔 채 대한민국만이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민주주의의 심화 등 '선진화'를 달성할 수 있다는 환상을 접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북의 핵실험이 이러한 담론쇄신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도 불행 중 다행일 것입니다.
'접근을 통한 변화' - 내 마음 속의 '분단괴물'까지 퇴치해야
이제 '접근을 통한 변화'라는 명제를 좀더 적극적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 말은 원래 구 서독 사람들이 동방정책을 펼치며 통일이 아니라 평화공존의 구호로서 내걸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론 접근을 통해 동독이 변화했고, 또 통일이 됐습니다. 이 과정의 문제는 아까 말한 것처럼 일방적 흡수였다는 점입니다. 접근을 통해 변한다면 너도 나도 변하는 것이 진정한 변화인데 독일의 경우 서독은 별로 안 변했습니다. 구 서독 민주주의와 현재 독일 민주주의를 비교하면 오히려 후퇴한 측면이 있습니다. 서독은 별로 안 변했는데 동독만 급격히 변화했습니다. 그래서 흡수통일이란 것입니다. 그런 것이라면 당연히 북에서 받아들일 리가 없습니다.
남한에서도 그런 용어를 쓰면서 내용상으론 북의 변화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럴 때 북측이 최소한의 변화만 하면서 접근을 통해 경제적 실리만 챙기겠다고 나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적어도 한반도 문제 해결에 있어 남측 민간사회가 '제7의 당사자'가 되고자 한다면 남북의 접근을 통해 분단체제 속에서 일그러진 자신의 사고와 감정의 쇄신을 포함한 총체적 남쪽 사회의 변화를 감내할 각오까지 해야 합니다.
분단체제가 괴물이란 말을 더러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분단체제가 괴물이라면 분단체제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 온 우리 모두가 마음속에 괴물 하나씩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점을 성찰하면서, 바깥의 괴물을 이겨내는 일과, 내 마음 속 괴물의 퇴치를 어떻게 동시에 수행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훨씬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공부에서 아직 갈 길이 멉니다. 그래서 남북 간의 관계가 금방 안 풀리는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통일의 과정에 중요하게 참여해야 할 당사자로서 필요한 공부를 하고, 준비하고, 사업을 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니, 물론 너무 오래 걸린다면 곤란하지만 약간의 시간을 버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열심히 한다면 시간은 오히려 우리의 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북한은 물론 미국에 대해서도 '핵무기 폐기' 철저히 요구해야
마지막으로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의 몇 가지 현안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첫째, 핵문제인데요, 핵무기에 대한 반대는 대원칙이며 당연히 북핵에 대해서도 끝까지 폐기를 주장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원칙적인 반대는 미국 등 기존 핵보유국을 동시에 겨냥하는 철저함을 보여야 합니다.
현실적으로는 한국의 시민사회든 정부당국이든 북의 핵보유를 방지하거나 철회시킬 수 있는 실력이 없다는 점을 냉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정부가 '북핵 불용'을 대원칙으로 내세울 때 북의 핵보유를 끝까지 반대하고 폐기를 주장하겠다는 뜻이지, 핵보유를 했을 때 쳐들어가겠다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미국도 못한 일을 대한민국 포용정책의 실패인 것처럼 떠드는 사태가 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끝까지 반대하지만 핵문제는 북측과 미국이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원리에 따라 풀어가도록 내버려두고 우리는 우리가 잘 하는 일에 치중하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원칙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거기에 입각한 시민운동을 벌이고 이를 전 세계적으로 확대해나가되, 핵문제에 너무 애면글면 매달릴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북핵문제를 너무 심각하게 보지 말자는 주장에 동의하는 면도 있다고 서두에 말씀드렸는데, 북의 핵실험으로 도래한 새로운 국면을 가볍게 봐서는 안 되지만, 우리 힘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 게 뻔한데 마치 인도적 지원이나 경협을 끊으면 북이 핵을 포기할 것처럼 나대는 것은 허장성세요, 경거망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북미 간 타결이 빠르건 늦건, 계속 진행되기 마련인 한반도식 통일의 현장작업을 추진할 일입니다.
기업까지 참여하는, 국민들의 상상력을 사로잡는 창의적 협력사업 개발해야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경제협력입니다. 기존의 사업을 지속함은 물론 이들처럼 남북 서로에 이득이 되고 국민의 상상력에 호소할 수 있는 창의적 협력사업을 개발해야 합니다. 처음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이 시작됐을 때 얼마나 국민의 상상력을 사로잡았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그보다 한 걸음 더 나가야 할 때입니다.
가령 개성공단에서는 주로 중소기업 위주로 하고 있습니다. 북측에서는 성에 안 찹니다. 금강산 관광도 정주영 회장 때는 그래도 현대 '그룹'이 감당했습니다만, 지금은 현대아산이라는 특정한 기업의 사업입니다. 중공업, 자동차 등이 떨어져 나가고 현대아산의, 팍 줄어든 현대그룹의 사업이 된 것이지요. 더 많은 기업들이 함께 참여하는 새로운 사업들도 개발해야 합니다.
'북한 퍼주기'라는 비판도 수구세력의 악의적인 왜곡도 있지만 여기에는 인도적 지원과, 남한의 경제에 직접적인 이득을 가져오는 경제협력을 구분해줄 우리의 논리가 부족했던 점도 작용합니다.
각종 사회문화교류의 진행도 필수적입니다. 이 경우 남측은 사회문화교류를 독자적인 영역으로 설정하고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온 데 비해 북측은 정치사업의 일환으로 보는 발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 때문에 핵문제가 아니더라도 순항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분야인 것이 사실입니다. 북측은 정치사업의 일환으로서 당장의 어떤 정치적 목표에 부합하든가, 아니면 경제적 이득이 따라오는 사업이 아니면 소극적으로 나오곤 하지요.
이러한 어려움을 감내하면서도 꾸준히 확대해갈 필요가 절실한데, 특히 강조할 점은 이 사회문화 교류사업이 남북의 연합 혹은 낮은 단계 연방제의 실질적 기반을 하나씩 만든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입니다. 이러한 목적의식 속에서 사회문화교류를 끈덕지게 추진한다면 '제7의 당사자'로서 남한의 시민운동은 여타 6개의 당사자들보다 비교우위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인도적 사업 또한 당연히 지속, 강화되어야 하지만 이를 인권담론과 적절히 결합하는 지혜가 요구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한국은 이번에 유엔 인권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그 명분으로 유엔 사무총장 배출국의 위상과 북핵실험에 따른 여론악화를 내세웠는데 둘 다 본질에서 벗어난 논거지요. 북한 인권개선에 대한 관심의 진정성을 보이려면 중단된 인도적 지원사업을 재개하면서 미국 등 국제사회에 대해서도 북녘 인민의 '인간안보'를 위한 획기적인 조치들을 취하도록 촉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밖에도 현안은 많지만 이만 마칠까 합니다.
끝으로 제가 '제7의 당사자'라는 표현을 쓴 것은 6자회담의 당사국들을 빗대고 한 말인데, 남북의 양자관계로 말하자면 남한의 민간부문은 '제3의 당사자'가 됩니다. 우리가 '제7의 당사자'로서 한반도와 동아시아 문제해결에 기여하고 또 '제3의 당사자'로서 남북관계 발전에 이바지해서 성취되는 한반도문제 해결은 그야말로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사태가 될 것입니다. 또 이를 통해 구축될 동아시아 평화체제는 동아시아와 인류 문제의 해결에도 새로운 계기를 제공할 것입니다.
북의 핵실험 이후 남북관계가 많이 어려워졌지만 한반도식 통일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다른 대안이라는 것은 전쟁 외엔 없다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한반도식 통일의 실질적 특징이자 세계사적으로 의미 있는 것은 시민참여, 민중주도가 가능해진 과정이란 점을 강조하면서, 제가 관여하고 있는 6.15남측위원회도 그 과정에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도록 많은 성원과 편달을 부탁드리면서 제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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