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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임금, 밝은 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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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임금, 밝은 임금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道'] 제7장 반정 전후 <38>

서울에서 장단 석벽으로 가는 중간 숲속에는 어영군 1천여 명이 군영을 설치하여 며칠째 대기하고 있었다. 연산주가 재상들을 대동하여 장단 석벽으로 유람을 가려다 급히 연기하는 바람에 경호하는 어영군도 임시로 주둔하게 된 것이었다.
왕실과 어영군 사이의 연락은 도승지가 어영대장에게 전령을 보내 취하고 있었다. 어영군은 왕실과 대궐을 지키는 것이 임무였으나 연산주의 주연 자리를 울타리처럼 시위하거나 사냥할 때는 일제히 작대기를 들고 나서 몰이꾼 역할을 했다.
어영군들은 연산주의 주연 자리에 차려질 음식과 술을 배불리 먹고는 보초 몇 명을 세워놓고는 자거나 삼삼오오 모여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어차피 하루 이틀이 지나면 변해서 버려야 할 음식과 술을 어영대장 최익선이 도승지의 허락을 받아 군영의 군졸에게 먹였던 것이다.
어영군이 성 밖 가까이 주둔하고 있다는 것은 반정을 하는 데 매우 위협적인 요소였다. 훈련이 잘된 어영군의 군사가 성 안으로 들어와 반정군을 포위하고 진압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신윤무가 박원종의 지시를 받아 어영군 군영을 찾은 것은 바로 그러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신윤무는 역사(力士)들을 숲속에 매복을 시킨 뒤 자신은 단기로 군영을 찾아 들어갔다. 신윤무는 꾸벅꾸벅 졸고 있는 보초에게 소리쳤다.
"어영대장은 어디에 계시느냐."
"뉘신데 소리를 치시오."
보초의 입에서는 술 냄새가 진동했다. 보초는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치뜨며 대꾸했다.
"군자부정 신윤무라고 일러라."
"잠깐 기다리시오."
보초는 비틀걸음으로 걸어가다가 오줌을 싸더니 군관막사 안의 군관을 깨웠다. 잠시 후 군관이 나와 신윤무를 알아보고는 안내를 했다.
"나으리, 이 밤중에 웬일이십니까. 어영대장께서는 저와 함께 있다가 방금 막사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가. 어서 가보세."
"임금님께서 유람을 취소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으리."
"주상 전하의 마음을 내 어찌 알겠는가."
"그래도 군자부정 나으리께서는 임금님의 총애를 받고 있는 분이 아닙니까."
"주상 전하의 총애야 어영대장께서 더 각별하게 받고 있지 않는가."
"어영대장 나으리께서 성 안에 반란의 소문이 돌고 있다고 경계를 철저히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임금님께서 그런 연유로 유람을 연기하신 것이 아닙니까."
"어영대장 말씀이라면 사실이겠지."
"군자부정 나으리께서는 모르셨다는 말씀입니까. 그러고도 임금님을 지근거리에서 시위하는 장수라 할 수 있습니까."
"자네는 언제 보아도 충직한 군관일세. 어영대장을 쏙 빼닮았어. 내 부장이 되어볼 생각이 없는가."
"어영대장 나으리와 생사고락을 같이 지 십여 년이 넘었습니다. 죽어서도 어영대장 나으리의 귀신이 될 것입니다."
"허허. 자네 같은 사람을 데리고 있는 어영대장은 행복한 장수일세."
어영군 깃발을 꽂은 어영대장 막사 주위는 횃불 불빛으로 밝았다. 말뚝에 매어둔 말이 죽은 듯이 가만히 있다가 신윤무를 보자 헛발질을 하며 히잉 하고 소리를 질렀다. 군관이 막사로 들어가며 말했다.
"대장의 군마이온데 낯선 사람이 오면 저렇게 소리를 지릅니다."
"어영대장은 군마까지도 충성을 다하는구먼."
어영대장 최익선은 잠을 잘 때도 무거운 갑옷을 벗지 않고 눕는 장수로 유명했다. 최익선이 갑옷 차림으로 신윤무를 막사 안에서 맞아들였다.
"군자부정, 어서 오시오."
"잠을 깨워 미안하이."
"이 밤중에 달려온 것을 보면 중한 일이 있겠지. 그렇지 아니한가."
"이 사람아. 숨이나 돌리고 말하세."
"허허."
"보초를 보니 자네 부하답지 않아. 보초의 입에서 술 냄새가 풀풀 나더군."
"주상전하께서 하사하신 술이네. 사기진작에는 그만일세."
"하사는 무슨 하산가. 상해서 버리느니 군졸들에게 마시게 한 것이겠지."
"낮에 힘들게 훈련한 뒤라 회식을 시켜준 것이네. 군졸들은 사기를 먹고 살지 않는가."
"주상전하가 사냥할 때 몰이꾼으로 동원되는데 그것도 훈련인가."
"몰이꾼이 됐건 주연 자리의 시위군이 됐건 나는 주상전하의 명을 받아 죽고 사는 장수일 뿐이네."
"명분 없는 명인데도 죽고 살 텐가. 그것은 어리석음이 아닌가."
"명분 없는 명이라도 장수는 명을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주상전하에게 바치는 충(忠)이 아니겠는가."
신윤무는 장수로서 강직한 최익선의 태도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충직하기로만 따진다면 최익선은 최고의 명장일 터였다. 신윤무는 최익선을 회유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충직함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아참, 용건이 무엇인가."
"교지를 전하러 왔네. 어영군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말고 군영을 지키라는 교지네."
신윤무가 교지를 품에서 꺼내주자, 최익선은 무릎을 꿇고 교지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곧 일그러졌다.
"아니, 이 교지에는 수결이 없지 않은가."
"나는 도승지에게 받아 자네에게 전해준 것뿐이네."
"승지나 도승지가 직접 전하지 않고 왜 자네가 가져왔는가."
순간 신윤무는 당황했다. 충직한 장수이므로 교지를 받는 즉시 명을 따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최익선의 신중한 태도는 뜻밖이었다. 최익선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의혹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었다. 신윤무는 거짓말로 둘러대었다.
"입직승지가 몸이 아파 입궐하지 않았다네. 도승지는 대비마마를 위한 주연 자리에서 술을 너무 마셔 정신이 혼몽해 있고."
박원종에게 건네받은 교지였으나 신윤무는 그럴 듯하게 꾸며댔다. 신윤무는 교지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반신반의하고 있는 최익선을 다그쳤다.
"자네가 날 의심하는가. 말을 달려 교지를 가져온 나를 의심하다니 섭섭하이."
"세상이 어수선해서 그런다네. 가짜가 진짜처럼 판을 치는 세상이니 말이네."
"그렇다면 지금 도승지를 만나 확인해 보면 될 일이 아닌가."
"아, 미처 생각지 못했네. 어서 함께 가보세."
신윤무는 이제 최익선을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최익선은 막사 앞에 선 군관 하나만 데리고 신윤무를 따라나섰다. 군영을 나서면서 보초에게 소리를 쳤다.
"내 지시가 있기 전에는 군영을 단 한 발짝도 움직여서 안 된다. 알겠느냐."
"네, 나으리."
신윤무와 최익선, 그리고 군관은 군영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천천히 말을 타고 산길을 빠져나왔다. 신윤무는 최익선을 회유할 마음이 다시 생겨 말했다.
"이보게. 자네와 나는 장수로서 고생을 참 많이 했어. 변방에 나가 있느라고 가족과 함께 살아본 적도 그리 많지 않지. 그래도 묵묵히 무반의 길을 걸어온 동지가 아닌가. 자네의 인품으로 보아 성군을 만났으면 병조판서가 되고도 남았을 사람이네."
"무슨 소리인가. 성군을 만나다니."
"그렇다면 자네는 주상전하를 성군으로 보는가."
"장수는 오직 명을 따를 뿐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성군의 명이건 폭군의 명이건 나는 그것을 상관하지 않는다네."
"자네의 얘기를 듣다 보면 장수는 입도 없고 귀도 없고 눈도 없는 사람 같으이. 어찌 그럴 수 있는가."
"백성들의 민심이 어떤지 나도 알고는 있네. 허나 나는 주상전하의 하명만 기다릴 뿐이네. 설령 주상전하가 폭주라 하더라도 말이네. 그런 주군 밑에 있는 내가 운이 나쁠 따름이지. 나는 그렇게 살아 왔네.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네."
"허허허."
신윤무는 참으로 아쉽다는 듯이 허공에 웃음을 날렸다. 세 사람은 더 이상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군영을 벗어난 뒤 산모퉁이를 돌아서는 비호처럼 내달렸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멀리서 말 한 마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근접해서 보니 말 등에는 전령이 피를 흘린 채 쓰려져 있었다. 전령은 가까스로 눈을 떠 어영대장을 보더니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대장 나으리. 성 안에 역모가, 반란이."
"뭐라고 했느냐. 다시 말해 보아라."
그러나 전령은 말 등에서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조금 후에는 숨이 끊어져 사지가 축 늘어져 버렸다. 그제야 군관이 칼을 빼어들고 신윤무에게 달려들었다.
"대장, 몸을 피하시오. 이놈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음, 너희들과는 가는 길이 다르구나."
신윤무가 군관이 휘두른 칼을 피하자 숲속에 숨어 있던 역사가 군관의 말을 향해 단도를 던져 거꾸러뜨렸다. 말과 함께 넘어졌던 군관이 재빨리 일어섰지만 역사가 달려들어 쇠몽둥이를 휘둘렀다. 군관은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그대로 숨이 끊어져 버렸다. 최익선이 칼을 빼들고 신윤무에게 다가서며 소리쳤다.
"네놈이 주상전하를 배신하다니, 참으로 분하다."
"아직도 늦지 않았네. 반정에 가담하지 않겠는가. 백성들의 마음은 주상전하를 떠난 지 오래 되었어. 그래서 박원종 대감은 진성대군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것이네. 주상전하는 곧 폐주가 될 것이야. 그래도 주상전하에게 충성을 하겠는가."
"군자부정, 뒷사람들은 자네를 장수로 인정하지 않을 것일세. 권력을 탐한 무리로 기록할 것이야. 알겠는가, 내 칼을 받으시게."
그러나 최익선도 역사가 휘두른 철퇴를 맡고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진 시신을 숲속으로 치우는 동안 신윤무는 교지를 챙겨 광화문으로 내달렸다. 박원종에게 어영군의 동태를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어영군의 발을 묶어놓았으니 반정군의 대궐 진입은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신윤무는 광화문 진영으로 가는 동안 세상이 바뀌었음을 실감했다. 거리마다 횃불을 든 백성들이 몰려나와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등등 궁궐마다 백성들이 죽창을 든 사내의 선창에 따라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신윤무는 광화문 진영에 도착하여 소리치며 들어갔다.
"물러서시오. 물러들 서시오."
조정의 벼슬아치들도 진영 밖으로 몰려와 박원종과 눈이라도 한 번 마주치려고 웅성대고 있었다. 어느 늙은 벼슬아치는 신윤무의 군복 자락을 붙들기도 했다.
"이보게, 날 모르시겠는가. 나도 좀 들어가세."
그러나 신윤무의 역사들이 우악스럽게 밀쳐내는 바람에 늙은 벼슬아치는 흙바닥에 나가떨어졌다. 다른 벼슬아치들도 막무가내였다. 신윤무를 따라 진영 안으로 들려고 아우성을 쳤다.
"군자부정, 박원종 대감에게 꼭 할 말이 있다네. 다리 좀 놔주게나. 날 만나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걸세."
역사들과 군졸들이 인의 장막을 치자 벼슬아치들은 더 이상 다가서지 못했다. 그러나 선선이 돌아가는 벼슬아치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광화문 진영 안은 영의정 유순을 중심으로 우의정 김수동, 성희안, 유순정, 박원종, 홍경주 등이 앉아 있고, 진영 한쪽에서는 도승지 강혼이 명령과 보고 내용을 기록하는 서기를 보고 있었다. 신윤무가 들어섰을 때 사복시 첨정 홍경주가 반정의 3대장에게 보고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무령군 대감과 군기시 박영문 첨정은 창덕궁 어귀 하마비동에 군사를 집결하여 대궐로 진군할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부족한 군졸은 의금부 죄수들을 풀어 보탰습니다."
박원종은 어영군의 발을 묶어놓은 뒤 어영대장 최익선을 죽이고 왔다는 신윤무의 보고를 받고서도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교지를 돌려주게나."
"대감, 여기 있습니다."
교지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최익선이 흘린 피 자국이었다. 박원종은 교지를 받더니 미련 없이 찢어버렸다.
"아니, 대감. 교지를 찢다니요."
"이 사람아, 이것은 가짜 교지라네. 어영군을 묶어둘 계책이 이것 말고 또 있겠는가."
신윤무는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대감께서는 심복인 저마저 감쪽같이 속이신 것입니다."
"원래 계책이란 심복도 속이는 법일세. 어쨌든 자네의 공이 커. 1등공신감이지. 내 자네의 공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네."
신윤무는 자신의 공을 잊지 않겠다는 박원종에게 허리를 굽신거렸다.
"대감의 깊은 뜻을 잠시 잊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자네는 지금부터 광화문 진영을 지키게. 난 영상대감과 함께 진짜 교지를 받으러 대비전을 다녀오겠네."

진영 밖에는 유순과 김수동, 유순정, 박원종, 홍경주가 탈 교자와 말이 마련되어 있었다. 가마꾼과 말구종도 넘쳐났다. 서로가 교자를 매겠다고 하고, 말구종이 되겠다며 밀치고 나섰다. 성종의 계비이자 진성대군의 어머니인 자순대비(慈順大妃)를 만나 연산주를 폐위시키고 진성대군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여 보위를 잇게 한다는 교지만 받으면 반정은 막을 내릴 것이었다.
대비전에 도착하여 유순이 교자에서 먼저 내렸다. 면담은 내인을 통하여 지밀상궁이 자순대비에게 허락을 받도록 돼 있었다. 법도대로 내인이 지밀상궁에게 알렸다.
"마마, 밖에 영상대감께서 듭셔계시옵니다."
그러자 지밀상궁이 다시 자순대비에게 물었다.
"마마, 영상대감이옵니다. 대감을 들라 이를까요."
그러나 자순대비는 대답을 하지 않고 짜증을 먼저 내고 있었다.
"지금 들리는 함성 말입니다, 무슨 함성 소린가요. 요즘은 밤이 돼도 조용하지가 않아요. 며칠 전에는 기생들이 싸우는 소리가 나더니만."
소심하고 겁이 많은 유순은 벌써부터 몸을 떨었다.
"영상대감을 들라 이를까요. 마마."
지밀상궁이 다시 묻자 자순대비가 겨우 허락을 했다.
"그러세요."
유순이 먼저 들고 뒤따라 김수동과 유순정, 박원종이 들어섰다. 홍경주는 박원종의 지시대로 밖에서 감시를 하면서 시위했다. 유순이 먼저 부복하여 말했다.
"대비마마. 밖이 소란스러워 마음이 불편하시겠사옵니다."
"영상, 저 소리가 무슨 소리입니까."
"백성의 소리이옵니다."
"밑도 끝도 없이 백성의 소리라니, 영상의 말씀을 나는 알아듣지 못하겠소. 한 밤중에 백성들이 무슨 일로 소리를 지르고 다닌단 말이오."
유순은 더 이상 말을 못하고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그렇다고 김수동도 입을 열 것 같지 않았다. 김수동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돌부처처럼 허리를 구부리고 서 있기만 했다. 박원종이 유순을 쳐다보며 눈을 부라렸지만 유순은 고개를 쳐들지 못하고 있었다.
"우상, 말을 해 보세요. 저 소리가 무슨 소리입니까."
"마마."
"우상대감이야말로 백성들에게 신망이 두터운 중신이 아닙니까. 나는 우상대감의 말씀이라면 믿겠어요. 어서 말해 보세요."
김수동은 무릎을 꿇자마자 울음 섞인 말을 뱉어냈다.
"대비마마, 저 소리는 주상 전하를 폐위시키라는...."
"우상, 지금 뭐라 했습니까. 폐위라 했습니까."
김수동이 끝내 통곡을 하고 나자, 자순대비도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듯 말했다.
"그대는 누구시오. 서 있지만 말고 말해 보시오. 어서요."
자순대비의 재촉을 받은 유순정이 비정하게 말했다.
"이조에서 일하고 있는 참판 유순정이옵니다. 지금 임금이 임금의 도리를 잃고 정사가 어지러워져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사옵니다. 임금은 있으나 임금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지라 모든 관원과 백성들은 진성대군을 추대하여 새 임금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저 함성 소리는 임금을 폐위시키고 새 임금을 보위하라는 아우성이옵니다."
"폐위, 난 그리 못합니다. 그 일이라면 어서 물러들 가세요."
박원종이 작심한 듯 무릎을 꿇고 말했다.
"대비마마, 임금이 백성을 돌보지 않아 숭례문 밖과 노량진 사이에는 굶어 죽은 송장이 산더미처럼 쌓이고 있습니다. 하오나 임금은 날마다 패란함이 날로 심하여 종사가 매우 위태로울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폐위시키라 함은 백성들의 뜻이자 하늘의 명이옵니다. 신들은 진성대군을 추대하여 새 임금으로 삼으려 하오니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어서들 물러가세요. 물러가라 하지 않았습니까."
"신들은 진성대군을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로 반정에 가담하였사옵니다. 대비마마, 명을 내려주시옵소서."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홍경주는 칼을 빼어들었다가는 지밀상궁이 깜짝 놀라자 다시 칼집에 넣었다. 박원종이 다시 자순대비에게 말하고 있었다.
"진성대군이 보위를 잇게 하소서. 마마."
"아니 됩니다."
드디어 박원종이 참지 못하고 협박을 했다. 자순대비의 교지가 없이는 설령 대궐에 진군하여 연산주를 폐위시킨다 해도 그것은 불법인 것이었다. 교지가 있어야만 반정이 정당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진성대군 대신에 제안대군을 추대하리까."
"평성군, 제안대군이라 했습니까."
자순대비의 목소리는 갑자기 꺾이어 작아졌다. 박원종의 협박이 주요한 셈이었다. 유순이 통곡을 하면서 간청하자 완강한 태도를 굽혔다.
"대비마마, 조선 왕조의 천세(千歲)를 위해 명을 내려주시옵소서."
"그대들의 충심을 이해하지 못한 바 아니나 우리 아이가 어찌 중한 책임을 감당하겠소."
"신들이 목숨을 바쳐 보필하겠사오니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마침내 자순대비는 대비전을 찾아간 반정의 무리에게 허락할 뜻을 비쳤다.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교지를 내리 터이니 잠시 물러가 계시오."
"마마의 명을 목숨 바쳐 지키겠사옵니다."
박원종이 일어서는 순간 관복 속의 갑옷이 차갑게 쇳소리를 냈다. 밖에서 헛기침을 하며 서성거리던 홍경주가 방을 향해 비아냥거렸다.
'늙은 할망구 같으니라고! 자기 아들 대신에 제안대군을 내세운다고 하니 별 수 없이 허락을 하는구먼. 쳇!'
반정의 무리가 물러가고 난 뒤 지밀상궁이 보는 앞에서 작성한 자순대비의 교지를 이러했다.

<우리나라가 백년 동안이나 덕을 쌓아 백성의 마음에 흡족하여 만년토록 튼튼한 왕업(王業)이 마련되었는데, 불행히도 사군(嗣君; 연산주)이 임금된 도리를 잃어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 모든 신하들이 말하기를, '임금보다도 종자가 중하고 진성대군은 일찍부터 인덕(仁德)이 있어 백성들의 마음이 모두 쏠리었다.' 하여 세우기로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어두운 임금을 폐하고 밝은 임금을 세우는 것은 고금에 통하는 의리(義理)이니 이에 여러 사람의 소원에 따라 진성대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임금은 폐하여 연산군으로 삼는다. 백성의 생명이 장차 끊어지려다가 다시 이어졌으며, 종묘와 사직이 이미 위태했다가 다시 편안하게 되었다.>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는 화순군 홈페이지와 동시에 연재됩니다.
☞ 화순군 홈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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