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하원의 다수당이 되었음이 확인된 직후 낸시 펠로시(66)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을 8일자 <LA타임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그는 미국 역사상 첫 여성 하원의장이 될 인물.
미국 내에서도 대통령 부재 시 부통령 다음으로 대통령 직을 대행하는 '3인자' 자리에 여성이 앉게 된 결과를 파격으로 받아들이며 2003년부터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를 맡아 온 펠로시를 새삼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고위 공직자 소환 청문회 예고
펠로시는 하원 435석 중 과반(218)을 훌쩍 넘는 232석이 민주당 몫으로 확정된 데 대해 "오늘은 미국인이 위대한 승리를 거둔 날"이라며 "미국인은 변화를 위해, 나라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도록 투표했다"고 평가했다.
내년 1월 하원의장에 오르게 될 펠로시에게 기대되는 역할은 크게 두 가지다. 부시 행정부를 '확실히' 견제하는 일과 12년 간 공화당의 독주에 밀려 활력을 잃은 민주당의 기강을 잡는 일이다.
펠로시는 하원의장으로 내정된 즉시 첫 번째 과제 해결에 나섰다. 8일 <CNN>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라크 전쟁 등 부시 행정부의 실정과 부정부패 사건에 대한 청문회를 할 수 있다"고 밝힌 것.
펠로시는 "견제와 균형, 행정부를 감독하는 것은 의회의 헌법상 책임"이라면서 "의회는 그러한 일을 하는 곳"이라고 강조했다.
청문회의 대상은 이라크 전쟁과 고유가 등 부시 행정부의 실정 전반이 될 것으로 보인다. 펠로시는 특히 "공직자들에 대한 소환장 제도도 이용해 공직자들을 청문회 증인으로 출석시킬 수 있다"고 말해 조지 부시 대통령, 딕 체니 부통령을 포함한 행정부 수뇌부들에 대한 강도 높은 공격을 예고했다.
"민주당은 집권할 준비가 돼 있다"
공화당이 의회 실권을 장악하면서 펼쳐 왔던 정책 방향에도 급선회가 예상된다.
펠로시는 '민주당 주도 하원의 첫 100시간 아젠다'를 발표하면서 "워싱턴의 '고인 물'을 빼내고 새로운 룰을 한 묶음 내 놓겠다"고 다짐했다. △9·11조사위원회 권고의 즉각적인 수용 △최저임금의 시간당 7.25달러(7250원)로의 증액 △연방기금을 통한 줄기세포 연구 확대 △석유기업들의 감세 철폐 등이 펠로시가 내년 회기 시작 100시간 내에 입법화 하겠다고 공언한 과제들이다.
펠로시는 도널드 럼스펠드 장관의 경질 소식에 대해서도 "이라크 문제의 해법을 찾기 위한 산뜻한 출발이다. 기존 방향을 고수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반응한 만큼, 철군 등 이라크 전과 관련한 전략 수정도 즉각 검토할 것으로 보인다.
공화당은 선거 과정에서 펠로시에 대해 세금을 올리고 동성결혼, 낙태 등을 합법화할 '정신 나간 리버럴'이라고 공격해 왔지만 유권자들은, 공화당의 표현에 따르자면, 이 '아르마니를 입은 좌파'를 선택한 것이다.
펠로시는 당선사례를 통해 "민주당은 이미 집권할 준비가 돼 있다. 민주당은 공화당과 함께, 그리고 미합중국의 대통령과 함께 초당적으로 일해 나갈 날 만을 손꼽아 기다려 왔다"며 미 정가를 이끌어갈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확인했고, 당장 9일에는 백악관에서 부시 대통령과 오찬을 하며 향후 정국 구상을 나눌 예정이다.
부동산 재벌 남편 덕, '아르마니 입은 좌파' 비아냥도 남편의 유명세에 편승한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이나 부시 대통령의 오른팔에 충실한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에 비해 '남성의 후광 없이' 워싱턴 수뇌부에 올랐다는 면에서 펠로시는 '여성 정치인의 새 롤 모델'로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미국 언론들은 펠로시가 볼티모어 시장과 5선 하원의원을 역임한 아버지와 역시 볼티모어 시장을 지낸 오빠를 둔 지역 내 정치 명가 출신이고, 백만장자 부동산 투자가 남편을 둔 재력가이기도 하지만 이보다는 다섯 아이의 어머니로 막내딸이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46살이 돼서야 정치에 뛰어든 가정적인 면모에 주목하는 모습이다. 한 예로, <AP> 통신은 민주당 하원 장악이 확실시 된 8일 '펠로시 댁'의 아침풍경을 흥미롭게 전했다. 이날 아침(7시 15분께) 펠로시의 전화벨이 울렸다. 펠로시는 '전화를 하기엔 너무 이른 아침'이란 생각에 당연히 만삭인 막내딸 알렉산드리아가 아이를 낳았다는 전화인 줄로만 알았다. 전화를 받은 펠로시의 첫 마디는 "아기가 나왔니?"였다. 그러나 상대편에서는 "펠로시 하원의원이십니까?"하는 정중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하원의장 당선을 축하하기 위한 부시 대통령의 전화였던 것이다. 이 해프닝에 대해 펠로시 의원은 "너무 너무 이른 아침에 온 전화라 오해를 샀다"고 변명하며 "부시 대통령은 나를 '의장 내정자 (Madam speaker-elect)'라고 불렀고 나는 그를 그냥 대통령이라고 불렀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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