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진영 안에서는 반정의 3대장 박원종과 성희안, 그리고 유순정이 살생부를 만들고 있었다. 가장 먼저 살생부에 오른 이는 연산주의 처남이자 좌의정인 신수근과 좌참찬 임사홍이었다. 그리고 신수근의 친동생이자 개성유수로 나가 있는 신수겸(愼守謙)이었다.
이 세 사람의 큰 죄는 음란한 연산주에게 아부하여 하늘의 도를 무너뜨려 나라의 근본을 기울게 한 것이었고, 그 다음 죄는 신하의 도리를 버리고 임금의 총애와 권세를 빙자하여 치부를 일삼고 사치하고 방자함이었다.
국법에 의하여 국문하지 않고 바로 처단하는 것은 그들의 세력이 오래 되고 강하여 조그만 지체하여도 반정이 실패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살생부는 박원종이 주도하여 작성하였는데, 그 명단에는 장녹수와 도승지 강혼(姜渾), 한성판윤 구수영, 연산주에게 총애를 받아 폐인(嬖人)이라 불리던 내시 전동(田同), 장녹수의 입김으로 당상관이 된 김효손(金孝孫), 강응(姜凝), 심금손(沈今孫) 등의 이름도 올랐다.
또한 살생부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조정의 대신 중에서 반정 가담에 머뭇거리거나 숨을 경우에는 즉시 죽이라는 명을 무장들에게 내렸다. 그러나 대신들 대부분은 양다리를 걸치거나 대세를 극도로 관망하고 있었으므로 뒤늦게나마 광화문이나 훈련원으로 나와 반정 후에도 목숨은 물론 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신윤무는 자객과 역사(力士)의 우두머리가 되어 그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살생부 명단에 오른 인물들을 제거하는 임무를 맡았다. 반정을 하는 데 악역을 자처하고 나선 셈이었다. 반면에 박영문과 홍경주는 광화문 진영에 머물렀고, 장정과 심순경은 군사를 거느리고 가 진성대군의 사저를 호위했고, 변수와 최한홍(崔漢洪), 심형(沈亨) 등은 내성의 성문을 장악하여 외부인의 통행을 금지시켰다.
이로써 연산주가 있는 궁은 고립무원의 섬이 돼버렸다. 반정의 3대장이 지휘하는 군사가 의정부를 접수한 후 언제든지 대궐로 쳐들어가 연산주의 항복을 받아내는 일만 남은 셈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급변하자 벼슬아치들이 밤사이에 속속 광화문으로 모여들어 반정의 말석이라도 한 자리 차지하려고 애를 썼다.
김수동도 마지못해 말을 타고 와 진영 안의 윗자리에 앉았다. 반정의 3대장이 자리를 양보하여 김수동을 상석에 앉도록 예우했던 것이다. 김수동이 가장 먼저 한 말은 진성대군의 사저를 호위하라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이미 장정이 칼을 뽑아 들고 3대장에게 "진성대군의 사저가 매우 허술한데 어찌 시위하지 않습니까" 하고 우려하자, 장정으로 하여금 심순경과 위사(衛士)를 거느리고 가 호위케 조치한 일이었다.
살생부에 오른 도승지 강혼은 유순이 극적으로 살렸다. 유순은 광화문 진영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서둘러 나가는 길이었는데, 평소처럼 입궐하기 위해 앞서 가는 강혼을 본 것이었다. 강혼은 삼경이 되기 전에 근무를 하려고 대궐로 나가던 중이었다. 유순은 강혼을 보고서는 은근히 말했다.
"도승지 영감, 오늘은 너무 이르지 않소."
"아닙니다. 삼경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대는 분명 경고(更鼓; 시간을 알리는 북소리) 소리를 잘못 들었을 것이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강혼은 세상이 바뀌어가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연산주의 왕권에 가위 눌려 있기 때문이었다. 의관을 정제한 그는 평소에 하던 대로 삼경이 되기 전에 대궐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유순은 그런 그가 딱했다.
"내가 가는 대로 따라 오시오. 그렇지 않으면 말 못할 일이 생길 것이오."
"영상 대감, 도대체 말 못할 일이라니 무슨 말씀이시오."
"그저 나만 따라오라니까요."
강혼은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유순을 뒤따라갔다. 한강 나루터로 가는 지름길이라 하여 세조 3년 동대문과 남대문 사이에 지은 남소문(南小門)을 들어서서야 강혼은 뜻밖의 사태에 놀랐다. 멀리 훈련원 쪽 앞마당에 불빛이 밝았다.
"영상 대감, 저 불빛이 무엇이옵니까."
"훈련원 주위에 모인 사람들이 횃불을 켜들고 있는 것입니다."
"말을 타고 있는 군사도 나와 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왜 삼경이 다가오는 이 시각에 사람들이 훈련원 주위에 모여 있는 것입니까."
강혼은 마음이 급해져 눈을 휘둥그레 치뜨고 물었다. 그제야 유순은 강혼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큰일이 닥쳐왔소. 그러니 오늘은 나를 잠시도 떠나지 마시오."
"큰일이라니요."
"반정이 일어났소."
"누가 반정을 일으켰단 말입니까."
"가보면 알게 될 것이오. 나와 헤어지면 목숨이 위험하니 잠시도 나를 떠나지 마시오."
"영상 대감,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입니까."
강혼은 두려운지 비로소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광화문으로 가고 있소."
"영상 대감의 호의는 고마우나 저는 지금 대궐로 가야 합니다."
"허허. 대궐로 가시면 죽습니다. 살고 싶다면 나를 따라야 합니다."
강혼은 놀란 채 유순을 따라가다가도 자신이 도승지라는 직분을 생각하고는 실랑이를 벌였지만 유순의 강권에 못 이겨 광화문으로 갔다. 광화문 진영 안으로 들어가자, 반정의 3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유순을 맞아들였다.
"영상 대감, 어서 오시오."
"고맙소."
그러나 진영의 분위기는 곧 싸늘해지고 말았다. 살생부 명단에 오른 강혼을 보자마자 박원종이 눈을 부릅떴다. 박원종은 강혼을 알면서도 모른 체했다.
"저 자는 누구요."
"도승지를 모르시오. 내가 안내하여 왔소이다."
유순은 박원종의 기에 눌려 움찔하면서 말했다. 강혼을 바라보는 박원종은 눈은 날카롭기 짝이 없었다. 잠시 후 박원종이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죽이기로 한 자이니 예외가 있을 수 없소이다."
유순은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강혼은 그제야 반정이 일어났음을 실감하고는 이제 자신은 죽었구나 하고 자포자기했다. 유순이 잠깐 동안의 침묵을 깨고 가까스로 다시 말했다. 박원종에게 사정을 해도 통하지 않았으므로 성희안과 유순정에게 강혼의 목숨을 더듬거리며 부탁했다.
"성 영감이 할 것입니까, 유 영감이 할 것입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누가 하든 도승지를 살려준다면 나도 힘을 보태겠소이다."
유순이 황급하게 꺼낸 말이었으나 그것은 상황을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내뱉은 말이었다. 반정을 성공시키어 진성대군을 새 임금으로 옹립할 계획으로 있는데, 유순은 성희안이나 유순정이 새 임금이 되기 위해 반정을 하고 있는 줄 잘못 알고 있었다.
성희안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는지 웃으며 말했다.
"새 임금으로 추대할 분은 진성대군이오. 우리가 어찌 임금이 된단 말이오. 유 대감, 아니 그렇습니까. 하하."
"영상 대감이 놀라서 내뱉은 말씀일 것이오. 그건 그렇고 영상 대감께서는 도승지를 살리려고 애쓰시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유순은 숨소리가 들릴 만큼 크게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겠습니까. 광화문으로 오는 길에 도승지를 우연히 만나 인정이 동하여 살리고 싶었을 뿐이오."
인정이란 말에 박원종은 시큰둥했으나 성희안과 유순정은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그러자 유순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지금 진영 안은 충의로 가득한데 그것을 기록하여 후세에 남길 서기(書記)가 없소이다. 도승지에게 서기를 맡겼다가 뒤에 죽여도 늦지 않을 것이오."
이 말에 박원종은 겨우 불만을 자제했고 성희안은 반색을 하며 좋아했다.
"진영 안이 요란하니 누군가 차분하게 이쪽저쪽의 얘기를 잘 기록해 두면 좋겠소."
이로써 강혼은 유순이 베푼 인정 때문에 지옥과 극락을 넘나들었고, 훗날 3등 정국공신으로 책봉되어 진천군(晋川君)이란 군호를 받았다. 이후 강혼은 유순을 친아버지처럼 받들어 아침저녁으로 가서 뵙고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반드시 보냈으며 유순이 죽은 후에는 그 부인을 친어머니처럼 섬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살생부에 오른 또 한 사람인 구수영.
그가 살아난 것은 그와 족질인 서얼 구현휘(具賢暉)의 언질 때문이었다. 이미 반정에 가담하고 있는 구현휘가 구수영을 찾아가 다음과 같이 충고했던 것이다.
"대궐 밖의 모든 군사를 박원종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박원종과 성희안, 유순정이 광화문 밖에 이미 진을 치고 지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서 광화문으로 나가 가담하십시오. 반정이 성공한 후에 찾아가는 것과 지금 찾아가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 나는 일입니다."
"무슨 명분으로 찾아가겠나."
"지금 명분을 따질 때입니까. 죽을 목숨을 살려놓고 보아야 할 일이 아닙니까."
"고마우이."
"그럼, 저는 먼저 훈련원으로 가 있겠습니다."
구현휘가 하는 얘기를 엿들은 가족들이 그가 총총히 사라지고 나자 구수영이 반정군에게 잡혀가 죽기라도 한 듯 통곡을 했다. 구수영도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집종들을 부리는 사인이 나서 위로의 말을 하기에 이르렀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천명(天命)에 달려 있으니 어찌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고만 있겠습니까."
"자네에게 살아날 계책이라도 있단 말인가."
"방금 나가신 나으리께서 반정이 성공한 후에 가는 것과 그 전에 가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난다고 했습니다. 그렇사옵니다. 지금 서두르지 않는다면 더 큰 화를 면치 못할 것이옵니다."
"계책이 뭔가."
"술과 안주를 들고 찾아가십시오. 대의명분만 생각하느라 아무도 이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옵니다. 진영 안에서 밤을 새고 있을 것이므로 몹시 출출할 터이니 술과 안주를 마련해 간다면 반드시 환영받을 것이옵니다."
"그래, 자네 말이 그럴듯하구먼. 어서 닭을 잡고 좋은 술을 마련하게나."
"어른께서는 먼저 광화문으로 떠나십시오. 한시가 급하옵니다. 쇤네가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비호처럼 달려가겠사옵니다."
"알겠네."
사인은 장담한대로 구수영이 훈련원에 닿기도 전에 뒤따라왔다. 과연 훈련원에는 구현휘가 말에서 탄 채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성 안은 반정군의 비상령이 떨어진 상황이었으므로 구현휘가 안전하게 앞장서서 갔다.
광화문 진영에 도착하자마자 구현휘가 허리를 구부려 박원종에게 구수영을 소개했다. 그러자 구수영이 그동안 오만방자하던 태도를 바꾸어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지적하며 용서해주기를 빌었다.
"일찍이 궁궐에 드나들면서도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직언 한 마디 못했으니 허물이 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오나 임금의 뜻을 감히 거스리지 못하고 명대로 거행한 일이 자못 많았습니다. 척당(戚黨)이 되어 처지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사위(안양군 항과 임희재)가 화를 입고 난 뒤에는 더욱 감히 임금의 뜻을 거스릴 수 없었습니다. 척당의 연줄을 타고 있다 하여 남에게 해준 일은 결코 없으니 나를 용서해 주든지 죄를 주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구수영이 척당이라 한 것은 자신이 세종의 8째 아들인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사위이기 때문이었다. 구수영은 비겁한 자신이 애처로웠지만 그래도 살기 위해서는 별 수 없다고 자위했다. 그런 마음이었으므로 박원종에게 용서를 빌 수 있었다.
그때였다. 사인이 술과 안주를 가져와 진영 안을 화기애애하게 만들었다. 반정을 지휘하는 3대장은 누가 술과 안주를 보냈는지 묻지도 않고 요기를 하느라고 서로 술잔을 돌리며 네댓 잔을 거푸 마시며 안주를 먹어댔다. 그러고 나서야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있는 사인을 향해 물었다.
"이 술과 안주는 뉘 집에서 보내온 것이냐."
사인이 구수영을 한 번 힐끔 쳐다보고는 말했다.
"구 대감께서 가져온 것이옵니다."
살기 위해 체면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곁눈질로 박원종을 살피고 있던 구수영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요기를 한 반정의 3대장은 술기운까지 올라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사인이 다시 말했다.
"이 술과 안주도 큰 공을 세운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옳다. 네 말이 옳다."
박원종의 칭찬에 고무된 사인이 말을 마저 했다.
"이 술과 안주가 아니라면 시장하신 대감들께서 어찌 큰일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겠사옵니까."
"그렇고 말고. 이 술과 안주는 구 대감으로부터 비롯되었으니 구 대감의 공도 크지 않을 수 없다 할 것이야."
살생부에 오르고도 철퇴를 면한 구수영은 반정의 3대장에게 술과 안주를 제공한 까닭으로 훗날 2등 공신에 책봉되는 영광을 누렸다.
반면에 꾀가 많은 유자광은 소장하고 있던 기름종이(油紙) 비옷 한 벌을 광화문 진영으로 가지고 나가 1등 공신에 올랐다. 박원종은 그의 출현을 달갑지 않게 받아들였으나 성희안이나 유순정이 반정의 성공을 위해서는 큰일을 많이 경험해 본 그의 지략을 빌려야 한다고 우겼고, 그의 꾀는 아무도 생각해 내지 못한 기름종이 비옷 한 벌로 드러났다. 실로 기상천외한 꾀였다.
유자광의 종이 진영 안까지 따라와 큰 보따리를 내밀자 성희안이 물었던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냐."
"기름종이 비옷이옵니다."
"이놈, 지금이 어느 때인데 나를 농락하려 드느냐."
그제야 유자광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진영 안에 부신(符信)을 만들 만한 것이 없을 줄 알고 소장하고 있던 기름종이 비옷 한 벌을 준비해 가지고 왔소이다."
부신이란 밖에서 작전하고 있는 장수와 군사에게 내리는 명령서의 일종이었다. 이에 박원종도 유자광의 꾀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시로 돌변하는 상황에 따라 명령을 내리고 있는데, 진영 안에는 부신을 만들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궐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유자광은 반정의 중책을 맡았다. 명이 떨어지면 군사를 이끌고 대궐로 진군하라는 중책이었다. 유자광이 펼치는 작전에 보조를 맞춘 사람은 호조판서 이계남(李季男)이었다.
악역을 자처하고 나선 신윤무는 쇠몽둥이를 든 역사 이심과 용사 10여 명을 거느리고 가 맨 먼저 신수근을 살해했다. 살해할 때는 반드시 별감을 시켜 대궐에 입궐하라는 명패를 보이게 한 후, 대문을 나오면 길가에 숨어 있다가 쇠몽둥이를 휘둘러 숨통을 끊었다.
신윤무가 두 번째로 살해할 사람은 임사홍이었다. 임사홍 집에 별감을 보냈을 때는 벌써 반정의 소문이 성안을 돌아 백성들이 임사홍의 집 앞에 몰려가 웅성대고 있었다. 사람들 몇몇이 횃불을 들고 있어 임사홍 짚 앞도 대낮처럼 밝았다.
별감이 솟을대문 앞에서 소리쳤다.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뉘신지요."
행랑채 아랫것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입궐하라는 명패를 가져왔으니 대감께 전하라."
"대감께서는 몸이 불편하십니다요."
"어명을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쇤네는 대감 나으리께서 하신 말씀만 전하고 있습니다요."
"별감이 왔다고 일러라. 그러면 나오실 것이다."
임사홍은 별감이 왔다는 말에 입궐하려고 의관을 정제하고 나왔다. 아랫것 말대로 횃불 속에 드러난 임사홍의 얼굴은 맥이 풀려 있었다. 간밤에도 연산주의 연회에 불려나가 술잔을 거절할 수 없어 토악질을 할 만큼 시달렸던 것이다. 임사홍은 말을 타더니 자꾸 고개를 돌려 집을 보곤 했다. 그때까지도 그는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었다.
집 앞에 몰려 와 있던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들자 신윤무가 소리쳤다.
"물러서시오. 그렇지 않으면 국법으로 다스릴 것이오."
신윤무가 칼을 빼어들고 엄하게 경고하자 사람들은 더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가 탄 말을 뒤따랐다. 틈만 보이면 임사홍을 덮칠 기세였다. 임사홍은 신윤무를 보더니 조금 안심하며 말했다.
"군자부정, 이 무슨 해괴한 일이오."
"보시면 모르겠소이까. 백성들이 좌참찬을 처단하라고 아우성입니다."
"나를 처단하라니 누구의 명을 받고 저리 날뛴단 말이오."
"오죽하면 저러겠소이까."
"임금님이 국법이거늘 누구의 명을 받고 감히 임사홍을 처단한단 말이오."
아직도 임사홍은 반정이 일어난 줄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집 앞으로 모여든 사람들을 식객쯤으로 치부하고 사인에게 "웬 거지 떼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몰려다니느냐"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것이다.
"쯧쯧. 헛것을 배웠구나. 아직도 민심이 천심이라는 것을 모르다니."
"군자부정,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신윤무를 뒤따르던 이심이 항의하는 임사홍을 말에서 끌어내렸다. 그리고는 임사홍의 멱살을 잡은 채 호통을 쳤다.
"이놈! 아직도 네 죄를 몰라 아무렇게나 입을 놀리고 있느냐!"
임사홍이 겁에 질려 말을 못하자 이심은 임사홍에게 욕을 하고는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더러운 놈 같으니라고!"
그제야 임사홍은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닫고는 신윤무의 두 팔을 붙들고 사정했다.
"이보시오. 무엇을 원하는 것이오. 죄는 달게 받겠으니 목숨만 살려준다면 군자부정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주겠소."
이심이 다시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신윤무에게만 매달렸다.
"기생을 원하는 것이오."
"아니오."
"높은 자리를 원하는 것이오."
"아니오."
"재산을 원하는 것이오."
"아니오."
"그렇다면 무엇을 원한단 말이오. 말씀만 해보시오. 내 모든 것을 다 드리겠소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기생도 자리도 재산도 아니오. 아직도 들어보지 못했소. 장안 백성들이 '간신 같다'라는 말을 '사홍스럽다' 하고 있소."
임사홍은 신윤무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
"군자부정, 어찌 이럴 수 있소. 임금에게 총애를 받도록 주선해 준 사람이 바로 내가 아니오. 헌데 지금에 와서 어찌 나에게 이리 무정할 수 있단 말이오."
"안됐소. 연산은 이제 폐주가 될 것이고, 그대는 이제 천하에 둘도 없는 간신일 뿐이오."
임사홍의 목소리는 울음소리에 가까웠다.
"나에게 침을 뱉어도 좋으니 목숨만 살려주시오. 참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그대의 목숨을 원하거늘 선비라고 자처하는 자가 어찌 살아남겠다고 구차하게 구는가."
"너무 하오. 하필이면 내 목숨을 원하다니 말이오."
"폐주와 함께 죽는 것이 그나마 그대의 도리가 아니겠소!"
신윤무가 이심에게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자 이심이 "혼자 살겠다니 의리도 없는 놈!" 하고는 임사홍 뒤에서 쇠몽둥이를 휘둘렀다. 쇠몽둥이는 단 한 번으로 족했다. 임사홍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졌고, 뒤따르던 백성들이 너도나도 임사홍의 시신을 향해 돌멩이를 던졌다.
돌팔매질한 돌멩이는 순식간에 쓰러진 임사홍 주위에 수북이 쌓였고, 임사홍의 얼굴과 사지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으깨어져버렸다. 지나던 누군가가 똥물을 부어 늘어진 시신에서는 똥냄새가 진동하여 이후 그곳을 지나치는 사람들 모두 코를 틀어막았다.<계속>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는 화순군 홈페이지와 동시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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