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왜 용인으로 달려갔던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왜 용인으로 달려갔던가?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道'] 제6장 반정 모의 <33>

용인으로 내려온 초월은 곧장 예전에 운영하던 다장으로 갔다. 팔려고 내놓았지만 아직까지 매수자가 없어 빈 집으로 놔둔 다장이었다. 연산주의 폭정으로 살기가 힘들어지면서 용인의 다른 술집이나 여관 등도 폐업한 상태였다. 그런데 두 철을 비워둔 집이었지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장 안팎은 깨끗했다. 초월에게 품삯을 받아 연명하는 부근의 가난한 양인들이 달포마다 와서 청소를 하고 갔기 때문이었다.
초월은 서울에서 바삐 오느라 이마에 땀이 났고 숨이 찼다. 그러나 다행히 만나기로 한 조광조의 초당 선비들이 아직 아무도 와 있지 않았다. 초월은 아랫것이 표주박에 떠온 찬물을 들이키며 안도했다. 서울에서 초월이보다 먼저 내려온 아랫것이었다.
"초가을이라고는 하지만 햇볕이 따갑구나. 손님들이 올 터이니 어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어야겠다."
"대문을 닫고 지키고 있겠사오니 어서 우물로 가 씻으십시오."
"아 참, 노천(김식의 호) 나으리께 서신은 잘 전했느냐."
"네, 나으리께서는 오늘 중에 다장을 들리겠다고 말씀하셨사옵니다."
"먼저 내려와 수고했다."
"다시는 용인에 갈 일이 없다 하시고선 서둘러 내려오신 까닭이 무엇이옵니까."
"화급한 일이 있어 왔다."
"나으리는 몇 분이나 오십니까. 별채에 소반과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대여섯 분이니 그리 맞추어 해라."
초월은 아랫것이 물러간 뒤 한숨을 길게 쉬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명경을 찾아오는 벼슬아치들에게서 들은 대로라면 곧 세상이 바뀔 것이 틀림없는데, 용인 땅의 조광조 초당에 모인 선비들은 무사태평인 것이었다.
그래서 초월은 명경에서 들은 서울의 사정을 대강 써서 아랫것을 통해 김식에게 보냈던 것이다. 그러고도 자신이 굳이 용인으로 내려온 것은 서신에 쓰지 못한 얘기를 조광조 초당의 선비들에게 더 상세하게 들려주기 위해서였다.
초월은 우물가로 가 옷을 벗었다. 우물이 다장 뒤편에 있고, 대문을 닫아걸었으니 옷을 벗어도 초월의 몸을 훔쳐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초월은 몇 번이나 찬물을 온몸에 끼얹었다. 그런 뒤 아랫것을 불러 마른 수건으로 등을 닦게 했다.
초월의 젖무덤도 다시 생기를 얻어 탱탱하게 부풀어 오른 듯했다. 아랫것이 보기에도 그렇게 느껴졌다. 아랫것의 눈에도 잘 익은 사과처럼 탐스럽게 보였던 것이다.
"젖꼭지가 막 터질 듯한 꽃망울 같사옵니다. 호호호."
"망측하구나."
"사내들은 젖무덤이 큰 여자를 좋아한다고 하옵니다."
"실없는 소리 말고 어서 저고리나 가져오너라."
초월은 자신의 몸을 한번 훑어보고는 스스로 놀랐다. 작아져 있던 젖무덤이 아랫것의 말대로 한껏 부풀어 있는 것이었다. 달거리 전마다 나타나는 은밀한 변화였다. 부풀어 오른 젖무덤에서 향긋한 아기 살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초월은 코를 벌름거렸다.
그러나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나자 엉큼하게 다가온 생각들이 저만큼 멀어졌다. 심정이 밤늦게 명경을 찾아와 비밀을 털어놓듯 자신에게 한 얘기들이 다시 떠올랐다. 초월은 자신에게 늘 호의를 베풀곤 하는 심정에게 거사에 관한 무시무시한 얘기를 들었으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심정은 문반과 무반의 벼슬아치들과 두루두루 교유하고 있는 마당발이었기에 누구보다 정보가 정확한 선비였던 것이다.
▲ 심곡서원. 용인시에 있으며 조광조를 배향하고 있다. 대원군훼철령 때도 온전하게 유지되었던 서원이다. ⓒ프레시안

심정의 얘기로는 박원종이 반정을 총지휘하는 우두머리가 되고, 성희안이 인망이 높은 김수동과 유순정을 포섭한 뒤 장정, 신윤무, 박영문, 유자광 등이 군사를 이끌고 경복궁과 진성대군의 사저로 쳐들어가 연산주를 폐위시키고, 진성대군을 새 왕으로 옹립한다는 것이었다.
초월은 머리를 손질하고 얼굴에 가벼운 화장을 하고 나서 아랫것을 다시 불렀다.
"정암님의 초당에는 몇 분이나 계시더냐,"
"토방 댓돌에 너댓 켤레의 짚신이 있었사옵니다."
"그분들은 정암님과 함께 도학을 공부하는 동지들일 것이다."
초월은 김식에게 서신을 보낸 순간에도 마음속으로는 조광조를 잊지 못했다. 조광조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정암 어른도 오신다고 하더냐."
"노천 나으리께서 그 말씀은 하지 않으셨사옵니다."
"정암님도 이 화급한 일을 아셔야 할 텐데 걱정이 앞서는구나."
"쇤네가 다시 초당을 다녀올까요."
"그러겠느냐."
그러나 초월은 아랫것을 다시 조광조 초당으로 보내려다가 참았다.
"아니다. 노천 나으리께서 잘 말씀드렸을 것이다. 오직 급했으면 내가 용인으로 내려왔겠느냐."
"그리 급하게 전해야 할 일이 무엇이옵니까."
"좀 전에 내가 말했지 않느냐. 화급한 일이라고."
아랫것은 초월이 조광조를 사모하고 있는 것을 이미 눈치 채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입술을 실룩이며 물러섰다. 초월이 조광조를 만나리라는 생각에 마음이 몹시 들떠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아랫것이 나간 뒤 초월은 방에 앉아 있지 못하고 마당으로 나가 이리 저리 서성거렸다.

잠시 후.
초월의 서신을 전해 받았던 김식이 먼저 다장으로 들어섰다. 마당에 서 있던 초월이 김식을 공손하게 방으로 안내했다. 김식은 용문사 옆에 움막을 짓고서 공부하다가 조광조의 간곡한 요청으로 한동안 용인으로 내려와 있었던 것이다.
"나으리, 소첩이 생각하기에 화급한 일인 듯 싶어서 서신을 보냈사옵니다. 소첩의 짧은 생각이 아니었는지 걱정이옵니다."
"서신만 가지고는 동지들에게 무어라 말할 수 없어서 초당의 동지들을 모두 이곳으로 오게 했소. 그러니 그때 소상하게 말해주시오."
"그리 하겠사옵니다."
김식이 갑자기 양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때 내가 명경에서 무어라 했소."
그러나 김식은 초월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급류가 소리쳐 흐르듯 빠르게 말했다.
"반정을 도모하고 있는 그 자들을 가리켜 임금님의 은혜를 누구보다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불만이 하늘을 찌르는 위인들이라 하지 않았소. 결국 그 자들이 반정을 모의하다니 기가 막혀 땅을 치고 통곡할 노릇이오."
김식은 고개를 젖히고 헛웃음을 짓더니 입을 다물었다. 그때 늘 미소를 머금고 다니는 박훈이 들어왔다. 박훈은 초월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조광조가 오지 않는 이유를 미리 말했다.
"오랜 만이오. 정암은 몸이 무겁다고 오지 않았소."
"갑자기 아픈 것입니까."
초월이 실망하여 물었다.
"오전까지만 해도 초당에서 동지들과 공부를 함께 했는데, 갑자기 몸이 무겁다고 좀 쉬겠다는 것이오. 하긴 며칠 전부터 몸살기가 있었소."
"그렇사옵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초월은 밖으로 나와 아랫것을 불러 말했다.
"너는 지금 의원 집으로 가서 약을 지어오너라."
"누가 아프시옵니까."
"내가 아픈 것이 아니다. 몸이 무겁고 몸살기가 있다고 하면 잘 지어줄 것이다."
초월이 다시 방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김정과 김구가 함께 도착하여 말했다.
"오래 만이오."
"나으리, 그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과묵한 김정은 고개만 끄덕였고, 애늙은이 같은 김구가 대답했다.
"서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려 하는지 궁금해서 찾아왔소."
"소첩이 공연히 나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사옵니다."
"아니오. 초당의 동지들 모두가 깜짝 놀랐소."
초월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김정을 쳐다보며 말했다.
"나으리께서 그려주신 화조도를 잘 보관하고 있사옵니다. 명경에 오셨을 때 그려주신 짝을 그리워하는 작은 새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옵니다."
▲ 조광조 묘. 심곡서원 인근 양지바른 곳에 있다. ⓒ프레시안

"가슴이 아프다고요, 그 새가 구슬프게 울던가요."
김정은 그림 속의 새가 운다는 초월의 말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초월을 무시해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몹시 과묵하여 상대를 얕보는 듯한 느낌도 들지만 그의 눈에는 반가움 같은 것이 돌고 있었다. 그것도 김정의 매력이라면 매력이었다.
"나으리께서 그날 하신 말씀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사옵니다."
"허허."
"충암(김정의 호)이 무슨 말을 했다는 것이오."
김식이 부러워하며 끼어들어 물었다.
"노천 나으리께서 탁한 물과 맑은 물이 섞이는 드넓은 바다가 되라고 권면하자, 이렇게 말씀하셨사옵니다. 바다가 썩지 않는 것은 맑은 강이 흘러가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날 이후 소첩은 늘 맑은 강을 그리워하게 되었사옵니다."
김정이 대꾸하지 않자, 박훈이 말했다.
"자자, 사담은 그만 나누시고 초월에게 서울 얘기를 들어봅시다."
"그렇습니다. 저도 형님과 동감입니다."
김구는 어린 나이답지 않게 의젓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얼굴은 해맑은 소년티를 냈지만 꼿꼿한 허리와 힘이 들어간 어깨는 선비의 기개 같은 것을 느끼게 했다.
"무슨 얘기부터 해야 좋겠사옵니까."
"초월의 서신을 받은 사람이 나이니까 내가 궁금한 것을 하나하나 묻겠소."
김식의 제안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러자 김식이 초월에게 말했다.
"얘기를 묻기 전에 먼저 이 자리가 서울 얘기를 해도 안전한 곳인지 살펴야 할 것 같소."
"나으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아이를 하나 문밖에 세워 두었사옵니다. 제가 서울에서 데려온 명민한 아이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지금은 잠시 정암 나으리의 약을 지으러 자리를 떴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안심하고 묻겠소."
"네, 나으리."
"반정의 기미를 언제 알았던 것이오."
"다장을 연 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이옵니다. 심정 나으리께서 모시고 오는 손님들이 주고받는 얘기를 자연스럽게 들었사옵니다."
"손님들이란 누구누구를 말하는 것이오."
"많사옵니다. 박원종 대감도 있고, 성희안 대감도 있고, 장정 부사도 있고, 신윤무 군자부정 나으리도 있사옵니다. 또 이분들과 함께 온 나으리들도 있었사옵니다."
"대개 의리를 강조하는 무부들로 큰일을 낼 사람들이구먼. 아니 그렇습니까."
박훈이 걱정스럽게 말하자 애늙이로 불리는 김구가 받았다.
"맹자님 말씀에 백성(丘民)이 가장 귀하고 사직(社稷)은 그 다음이며 임금은 가장 가볍다고 했습니다. 또한 백성들의 민심을 얻어야 천자가 될 수 있고 천자의 신임을 얻어야 제후가 될 수 있으며 제후의 신임을 얻어야 대부(大夫)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맹자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인지 여러 형님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연산주를 간접적으로 비난하는 김구의 말에 박훈이 한 마디 했다.
"아우님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고 있소. 충암(김정의 호)이 말했듯 그들이 대개 무부들이어서 우리 모두 꺼림칙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오."
"백성들이 심복(心服)하지 않으니 명분이 있는 반정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명분이 있으니 문반과 무반이 힘을 합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박훈이 김정의 편에 서서 말했다.
"왕도(王道)는 인의(仁義)의 도덕으로 인정(仁政)을 행하는 것이라 했고, 패도(覇道)는 인정을 가장하여 힘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라고 했소. 아마도 지금 거론되는 무부들이 반정에 성공한다면 왕을 허수아비로 세워놓고 왕도보다는 패도를 추구할 것이 틀림없소."
"형님께서 그렇게 단정을 내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 모두 이미 권력의 단맛에 길들여졌기 때문이오. 아마도 그들은 왕도에는 관심이 없고 전리품을 챙기듯 공신다툼으로 반드시 분열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오. 옛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소."
김식이 논쟁에 불을 붙인 김구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자, 초월에게 얘기를 듣기 위해 모인 자리입니다. 그러니 논쟁은 초당으로 돌아가 하기로 하고 초월의 얘기를 들어봅시다. 심정에게 무슨 말을 들었다는 것인지 자세하게 말해 보시오."
"소첩 생각으로는 심정 나으리의 말씀이 사실인 듯하옵니다. 머잖아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사옵니다. 박원종 대감님은 날마다 왕실의 종친 분들을 만나 거사를 모의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박 대감이 만난 왕실의 종친들이 누구라고 하던가요."
"소첩이 뵙지는 못했습니다만 종친부에 계시는 정종 임금님의 손자이신 운수군 마마와 세종대왕님의 손자이신 이계 대감님이라 하옵니다."
▲ 조광조 영정. ⓒ프레시안

"박 대감이 종친들을 만나는 것은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하 것이겠지요. 또한 종친들이 박 대감에게 줄을 선다는 것은 왕실도 이미 연산주에게 등을 돌렸다는 증거가 아니겠소."
"왕실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마찬가지겠지요. 연산주를 왕이라고 생각하는 백성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맹자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백성을 배반하고 잔적(殘賊)을 일삼는 자는 그가 왕일지라도 이미 왕이라고 할 수 없는 일개 필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오."
일찍이 맹자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폭군인 주왕을 정벌한 예를 들어 '인도(人道)를 어긴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리를 어긴 자를 잔(殘)이라 한다. 잔적을 일삼는 자를 일부(一夫)라고 한다. 일부에 불과한 주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살해했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하였다'고 말했던 것이다.
"또한 성희안 대감께서는 유순정, 김수동, 유순 대감 같은 조정의 높은 분들을 만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야 인망이 높은 정승을 확보하는 것도 왕실의 종친들을 확보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겠지요."
"군자부정 나으리께서는 박영문, 유자광 나으리 등을 만나고 있는데 이 분들은 명경에 자주 오는 분이옵니다."
"하나 같이 연산주에게 총애를 받는 벼슬아치들이군, 그래."
김정이 다시 무겁게 입을 열었다.
"가관입니다. 이 자들이 무슨 권리로 반정을 도모한다는 것입니까. 임금이 하늘의 도(道)를 행하지 못하면 천심(天心)을 잃는다고 하는 말이 있지만 이 말은 이 자들을 위해 있는 말이 아닐 것입니다. 이 자들은 패도의 무리입니다."
"박원종 대감이 연산주를 배반한 무부들을 움직여 거사를 하겠다는 것인데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그려."
초월이 차를 우린 뒤 각자의 소반에 놓인 찻잔에 찻물을 따랐다. 차를 마시다 말고 박훈이 탄식했다.
"공자님께 70분의 제자들이 진심으로 복종했듯이 덕으로 다스리는 왕도의 세월은 어느 시기에나 올 것인지 막막하구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고 했는데 이 자들의 말로가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렇다고 수수방관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도 가련합니다."
"때를 기다려야지요. 때가 되면 목숨을 던져서라도 왕도를 지켜내야지요. 이것이 도학의 근본이 아닙니까."
초월의 얘기를 다 듣고 난 김식 등은 하나같이 우울해 했다. 말없이 차를 마시다 말고 한숨을 쉬거나 탄식의 말을 뱉어냈다.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자신들에게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한참 후 박훈이 맥이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차라리 이 자들보다는 전라도로 귀양 가 있는 대사성 이과(李顆) 등이 먼저 거사를 일으켰으면 좋겠습니다. 홍문과 부제학으로 계실 때 연산주의 후원관사(後苑觀射)를 논한 것이 화가 되어 갑자년 사화 때 귀양 가신 분이 이 대사성이 아닙니까."
이과가 대간으로 있을 때 연산주가 정사에 힘쓰지 않고 후원에서 활만 쏘는 것을 두고 논박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귀양 간 선비가 무슨 힘으로 거사를 일으킨단 말이오."
"제가 선대의 고향인 광주에 갔을 때 이 대사성과 귀양 온 유 참판이 거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은밀하게 돌고 있었습니다."
"유 참판이라면 형조참판을 지낸 유빈(柳濱)을 얘기하는 것입니까."
"맞습니다. 문관이면서도 무관처럼 활을 잘 쏜 명관이지요."
"유배지에 귀양 간 죄인이 무슨 방법으로 군사를 모은단 말이오."
"전라도 변방의 민심은 최악입니다. 왕을 왕으로, 신하를 신하로 여기지 않는 분위가가 팽배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민심의 눈치를 보는 몇몇 부사나 현감들의 묵인 하에 얼마든지 거병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분들이라면 왕도정치를 펴는 데 밑거름이 될 만한 분들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초월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으리, 그분들은 아직 소문에 불과하고 박원종 대감께서는 이미 거사 준비를 다 해둔 듯하옵니다. 그러니 나으리들께서도 마음의 준비라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소첩이 용인으로 달려온 것입니다."
"고맙소. 하지만 아무런 힘이 없는 우리로서는 세상이 바뀌더라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일이오. 좀 전에 얘기한 대로 세상에 나아갈 때까지 두 눈을 부릅뜨고 기다릴 뿐 그밖에 무슨 방법이 있겠소."
김식은 초당의 연장자로서 때를 기다리자는 쪽으로 서둘러 결론을 내렸다. 초월이 아는 벼슬아치를 통하여 박원종에게 줄을 댈 수도 있으나 그것은 도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도리에 맞지 않는 처신이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초월은 감히 자신보다 몇 천 배나 더 유식한 조광조 초당의 이들에게 무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초월은 용인으로 달려온 것을 후회했다. 조광조도 만나지 못할 바에야 김식에게 서신만 보냈어도 될 일인데 급하게 서둘러 온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초월은 아랫것을 시켜 조광조의 초당으로 약을 보낸 뒤 바로 용인을 떠났다. 손님이 부쩍 많아진 서울의 명경을 비워둘 수는 없었다.<계속>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는 화순군 홈페이지와 동시에 연재됩니다.
☞ 화순군 홈페이지 바로가기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