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14일 한미정상회담에서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혹은 이양) 문제와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의 포괄적 접근방안 (common and broad approach)이라는 두 가지의 의제가 핵심의제로 부각되었다. 그러자 한국은 온통 이 두 가지 문제로 들끓기 시작했다. 한편 그 와중에 한국과 미국에서는 조용히, 그러나 매우 진지하게 이라크에 파병된 자이툰 부대의 파병 연장문제와 한국군의 레바논 파병 문제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의 유엔 사무총장 선출 가능성에 기대를 거는 언론 보도가 흘러나오고 있다.
이 세 가지 사안, 즉 한미정상회담과 한국의 해외 파병, 그리고 반기문 장관의 유엔 사무총장 선출은 한국의 언론과 식자층에서 상호 분절적인 개별 이슈로 따로 따로 다루어지는 듯한 느낌이지만 사실 상호간에 매우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이글은 이 세 가지 사안이 어떻게 상호 연결되면서 한국의 미래를 운명지을지를 분석하는 트렌드 분석이다.
작통권 환수문제가 미국과 세계의 변화 트렌드를 정확히 읽지 못한 한국 국민들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 온 것처럼, 위의 세 가지 사안의 연기(緣起)작용이 만들어 내는 또 하나의 커다란 파고를 미리 관측하지 못하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충격이 충격이 아닌 형태로 자연스럽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그럼 이제 반기문 장관이 유엔사무총장이 될 것이라는 가정 하에 도대체 위의 세 가지 사안이 왜 서로 연결되는지를 한번 알아보기로 한다.
(* 반 장관이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지 않을 가능성도 여전히 있다. 그 경우 여기서 예측하는 트렌드는 그 진행의 속도가 좀 늦어질 것이지만 차기 정부의 강한 의지가 작동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어떻게든 조만간 다가올 것이다.)
"동맹국으로서 공동의 노력"의 의미는?
한미정상회담에서 우리가 특별히 해석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발언이 하나 있다. 그것은 부시 대통령이 "세계적인 차원의 테러대응, 국제적 차원의 자유방어 및 신장을 위해 한국이 동맹국으로서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대한 사의 표명"이다. 한국의 대부분의 언론과 식자들은 이를 그냥 부시 대통령이 형식적으로 감사의 뜻을 보인 것으로 생각하였을 터이고, 반면에 정부는 우리가 한미 관계를 그나마 잘 유지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로 자부하는 정도의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사실 그러했을지도 모른다. 부시 대통령이 특별히 형식적 감사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후의 흐름을 보게 되면 그 문구의 내용이 마음에 걸린다. 뭔가 예언서의 한 구절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부시 대통령의 발언을 잘 뜯어보면 한국은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범세계적인 문제에 미국과 함께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식적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수정된 것도 아니고, 또 한미동맹의 지역적 범위를 새롭게 하는 미래비전이 수립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이미 미국의 세계전략 아젠다에 맞추어 동맹국으로서 범세계적 차원의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표현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하면 한미동맹이 대상으로 하는 공식적인 범위는 넓게 잡아야 태평양지역인데 한국은 이미 그 범위를 뛰어 넘어 미국의 요청에 의해 중동에 파병을 한 것이다. 물론 한국의 이라크 파병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거한 파병은 아니며 또 한미동맹으로써 공동의 작전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의 발언은 이상하게도 한미동맹이 태평양 이외의 지역에서 "공동"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기정사실화"하는 듯한 미묘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래서 "한국이 동맹국으로서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대한 사의를 표명"한 것으로 들린다.
레바논 파병이 실현된다면?
한미정상회담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의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가 한미 정상 간에 한국의 레바논 파병에 관한 논의를 했다는 발언을 해 약간의 물의가 빚어졌다. 이에 대한 사실관계 확인은 정확히 되고 있지 않으나 뭔가 한미간에 레바논 파병과 관련한 논의가 오고가고 있는 것은 틀림이 없어 보인다. 우리 군 일부에서는 이미 레바논 파병과 관련한 준비를 시작했다는 소문도 들린다.
다시 얼마 전 (9월 26일)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는 국회에서 열린우리당 의원과의 간담회에 참석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파병문제를 언급하면서 "미국은 한미동맹이 한반도 안보라는 기본 임무를 넘어서 더 큰 중요성을 띄고 있다고 본다"고 발언했다.
이 발언 역시 한미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에 사의를 표한 내용과 동일한 내용으로서 미국은 한미동맹을 이미 글로벌 대(對) 테러 동맹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더욱 눈길을 끄는 부분은 이러한 버시바우 대사의 언급이 한국군으로의 전시 작통권 이양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나온 것인데, 역설적으로 한국군이 전시 작통권을 이양받으면서 마치 미국이라는 "자석"에 오히려 더욱 강하게 끌려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만약 참여정부가 레바논 파병을 실제로 결정하게 되면 이는 명실상부하게 한미동맹을 한반도 및 태평양지역을 넘어서는 글로벌 동맹으로 자연스럽게 전환시키는 튼튼한 징검다리를 놓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한미동맹 및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대한 국민과 국회의 충분한 검토 및 의견수렴 없이 부지불식간 한미동맹의 성격을 바꾸어 나가는 문제이므로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과연 정부가 이러한 의미를 이해하고 또 하나의 파병을 결정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참여정부는 북핵문제를 제외하고는 미국이 원하는 요청에 가장 순응하는 정부가 될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래서 참여정부가 한미관계가 매우 좋다고 주장하는지도 모르겠지만 북핵문제 역시 어차피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될 수 없는 문제이고, 따라서 북핵문제 때문에 다른 사안에서 미국의 요청에 순응한다면 이는 국익계산을 매우 잘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한미동맹의 글로벌 동맹으로의 자연스러운 변환에 또 하나의 튼튼한 징검다리 역할을 하게 될 것이 바로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낮지 않은 반기문 장관의 유엔사무총장 선출이다.
한국인 유엔사무총장과 한국의 국익과의 관계는?
반기문 장관의 유엔 사무총장 (미래의) 선출은 국가적인 "경사"로서 생각해야 할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아직도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해 국사교과서에서 배웠던 신라의 최치원이 당나라 과거에 급제한 영광을 반기문 장관이 지금 세계의 무대에서 재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우리 고장 출신 아무개가 서울에 올라가 장원급제를 한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과연 반기문 장관의 유엔 사무총장 선출이 그러한 국가적 영광의 재현인가?
이론적으로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될지 모르는 반기문 장관은 한국을 대표해서는 안 된다. 국제기구의 수장은 자기 출신국을 넘어서서 중립적인 국제인이 되는 것이 원칙이다. 그래서 훌륭한 국제기구의 수장이 되기 위해서는 국제문제와 관련한 확고한 철학과 소신이 필요한 것이고, 그 철학과 소신에 입각해 유엔이라는 국제기구를 운영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그런데 현실은 반대로 그러한 이상적인 인물을 배출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유엔 사무총장이 그렇게 소신이나 철학이 강하면 오히려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반대에 부딪쳐 사무총장 선출가능성이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코피 아난 현 사무총장과의 불편한 관계를 가졌던 미국의 경험으로 볼 때 미국은 특히 소신이 강한 미래의 사무총장을 지지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미국의 지원 없이 유엔 사무총장이 가능할 것인가?
그렇다면 결론은 이렇다. 반 장관이 유엔 사무총장이 된다면 미국의 지원이 컸을 것이고, 미국의 지원이 컸다면 반 장관은 본인 특유의 철학과 소신을 발휘하기 매우 어려운 구조 속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아직까지 반 장관이 국제문제에 대해 어떠한 강력한 철학과 소신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에게는 한번도 정확히 표명된 적이 없고, 검증된 적도 없다. 불안하게도 참여정부는 영웅만들기라는 국정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황우석 이후 또 하나의 이벤트를 추진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다.
여하튼 반 장관이 유엔 사무총장에 선출된다면 본인의 소신에 입각한 강한 의지가 작동하지 않는 한 유엔의 아젠다는 미국의 아젠다에 매우 유사하게 설정될 가능성이 커진다. 즉 글로벌 대 테러전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확산이 매우 중요한 유엔의 아젠다가 될 것이다. (공교롭게도 미국의 유엔 대사는 철저한 네오콘으로 잘 알려진 존 볼튼이다.)
물론 글로벌 대 테러전과 세계화는 매우 중요한 의제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두 가지 의제를 수행하는 방법론에 있는데 그 방법론이 매우 미국적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빈국의 시각보다는 미국의 시각에서 테러를 소탕하고 세계화를 촉진하게 된다면 세상은 매우 불안정하고 시끄러워질 공산이 커진다.
여기서 반 장관의 유엔 사무총장 선출과 한국과의 관계를 매우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간단한 연결관계가 도출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한국은 아직도 전근대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반 장관이 국제기구의 수장으로 선출될 경우 한국은 반 장관과의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고, 반 장관 역시 한국이 본인의 아젠다 추진에 적극적으로 도와줄 것을 기대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한국은 글로벌 대 테러전에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할 가능성이 커지고 여기에 앞에서 분석한 한미동맹의 역할변화가 역시 자연스럽게 중첩된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군의 역할과 한미동맹은 보다 글로벌해질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한편 한미 FTA마저 미국이 원하는 수준에서 체결이 된다면 한국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확산에도 크게 기여하게 될 공산이 크다.
여기까지가 한미정상회담, 한국군 레바논 파병, 그리고 반 장관의 유엔 사무총장 선출의 연기(緣起)작용이다. 연기작용의 결과는 부지불식간 한미동맹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실질적 내용변환이다. 미국의 변환외교(transformational diplomacy)는 한국에도 작동하는 것일까?
미래외교 청사진 부재의 문제
참여정부는 정말 생각할 수로 기묘한 정부다. 겉으로는 자주적인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보면 미국이라는 자석에 가장 강하게 끌려가는 정부가 되고 있다. 북핵문제 해결 때문에 그렇다고 해석하고 싶지만 북핵문제 역시 속 시원하게 뭘 얻어내는 것도 없지 않은가?
이라크 파병,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확보, 작통권 환수, 레바논 파병, 유엔 사무총장 선출 지원, 그리고 여기에 4대 선결조건 충족과 함께 추진하고 있는 한미 FTA 등 이 모든 사안을 한번 통합적으로 연결해 보라. 과연 어떠한 그림이 나오는지. 한국은 매우 빠른 속도로 또 영국보다 더욱 강한 수준으로 미국과 절대적인 공동운명체가 되어 가고 있다.
결론적으로 한국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미국이라는 자석에 매우 쉽게 끌려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보다 객관적이고 현실적으로 세상의 흐름을 읽고 한국의 미래를 준비하는 미래 외교의 청사진을 시급하게, 그리고 우수하게 만들어야 할 때이다.
세계 11위 수준이라는 한국의 국제적인 위상을 고려할 때 한국군이 한반도 지역에서만 제한적으로 활동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가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떠한 원칙과 철학, 그리고 기준에 의해 글로벌한 역할을 할 것인지, 그리고 그 역할을 통해 세계와 한국에 어떠한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인지를 정확하고, 냉철하게 따져서 미래의 그림을 그려야 할 것이다.
그저 부지불식간 미국이라는 자석에 끌려가는 외교를 한다면 미국과의 공동운명체가 아니라 미국의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위치로 전락할지 모른다. 우리는 영국 정도로 미국과 공통의 정체성과 이해그룹(초국경 자본을 포함하여)의 초국경적인 연결을 가지고 있는가? 한미관계가 중요하다면 우리에게 어떻게 중요하고 또 어떠한 방식으로 외교를 해야 할 것인지 이제 엄밀하게 따져본 후, 보다 전향적이고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미래의 청사진을 그려야 한다.
한국과 한미동맹의 미래는 차기 한국정부와 그리고 차기 미국정부의 성격과 전략에 의해서 또 한번 크게 영향을 받을 것이다. 미국 차기정부의 미래는 우리가 아닌 미국민들이 스스로 결정할 문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도 잘 해야 한다.
부디 미래의 한국정부와 미래의 유엔 사무총장은 철학과 소신과 확고한 원칙에 의거하여 한국과 유엔이라는 배를 잘 운항해 주시길 간절히 부탁드린다. 혹 한국과 한국민이 불필요한 위협에 노출되지 않도록 노를 잘 저어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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