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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에는 칼이 필요한 법"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道'] 제6장 반정 모의 <31>

박원종과 성희안이 반정을 모의하고 헤어진 다음날 초저녁에도 신윤무는 박원종의 집을 다시 찾았다. 박원종의 집에는 이미 꾀주머니라 불리는 심정이 와 있었다. 심정은 반정의 냄새를 맡고 나서 성희안과 박원종의 집을 부지런히 들락거렸으나 거사에 대한 확실한 언질은 받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재주와 꾀는 쓸 만했지만 오지랖이 넓고 말이 많은 그였으므로 비밀이 발설될까 두려웠기 때문에 박원종과 성희안은 아직 그에게는 반정의 계책을 말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밤이 점점 깊어 가는데도 심정이 돌아갈 눈치를 보이지 않자, 박원종이 노골적으로 그에게 물리치는 말을 했다.
  "이보게, 정지(貞之; 심정의 자). 오늘은 밤이 깊었으니 어서 집으로 가야 되지 않겠는가. 손님을 많이 만나서 그런지 피곤하이."
  "대감, 설마 이 심정이를 따돌리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대감을 믿고 따른 이 심정이는 섭섭합니다."
  "허허. 정지는 말이 너무 많아. 말이 많으면 반드시 쓸데없는 말이 끼게 마련이지. 쌀에 뉘가 섞이듯 말이네. 그러니 아무리 친한 지인이라 하더라도 말이란 넘치지 않는 게 좋은 것이네."
  "반가운 군자부정 형님이 왔는데 저더러 먼저 가라고 하니 그러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형님."
  심정은 방금 들어온 신윤무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그러나 신윤무는 헛기침을 서너 번 하면서 말없이 앉아 그가 나가기를 기다렸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돌자 심정은 또 한 차례 너스레를 떨며 물러섰다.
  "불청객은 물러갑니다. 허나 불청객인지 참으로 귀한 진객(珍客)인지는 세월이 말해 줄 것입니다. 하하하."
  
  심정의 발자국 소리가 사라지고 나서야 신윤무가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감, 심정이 냄새를 맡은 것 같습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진즉 냄새야 맡았겠지. 허나 그뿐일세. 정지는 알맹이를 모르니 안심해도 좋아. 심정의 재주는 언젠가 긴히 쓸데가 있을 것이니 내치지는 마세."
  "명심하겠습니다. 대감 말씀대로 성격이 좋은 심정을 싫어하는 이는 별로 없습니다. 다만 두루두루 사귀는 사람이 많고 잡스러우니 조심하고 있을 뿐입니다."
  "천기가 우리 세 사람의 울타리를 넘어서서는 안 될 것이네."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했습니다. 천기라 하더라도 어느 날엔가는 누군가에 의해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그러겠지. 허나 이제 우리는 겨우 씨앗을 묻어둔 셈이지. 씨앗을 싹 틔우지 않고 열매를 따려 해서 되겠는가. 조금 더 엎드려 참고 기다려야 하네. 자네는 궁 안의 정세를 잘 살펴야 하네."
  "알겠습니다."
  "연산이 궁에 있을 때보다는 없을 때가 호기이고, 가까운 곳에 유람할 때보다는 먼 곳에 유람할 때가 호기라는 것을 잊지 말게."
  "명심하고 있습니다."
  신윤무는 내금위나 어영청의 장수가 아닌 군수물자를 관리하는 군자시의 장수였지만 연산주의 신임이 워낙 두터워 늘 연산주를 호위하였으므로 어떤 벼슬아치보다도 궁 안의 왕실 소식을 빨리 알아냈던 것이다.
  "요즘에는 경기도를 넘어 황해도까지 사냥 가는 날이 있습니다."
  "멀리 가더라도 군사를 거느리고 매사냥하는 날은 피해야 할 것이네. 매사냥에 동원되는 군사가 많기 때문이네. 그렇잖은가."
  "서울을 수비하는 갑병 4백 명에다 군역을 하는 정병(正兵) 4백 명, 내금위병 70명, 사복시의 힘센 군사 10명이니 총 9백여 명 정도가 매사냥에 동원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군사를 움직여 매사냥을 나간 날은 피해야 할 걸세."
  매사냥에 동원된 군사가 연산주를 따르고 있는데, 그런 상황을 무시하고 거사를 일으킨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전투를 치러본 박원종이 우려하는 것은 무인으로서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내금위병은 충성심이 높고 갑병은 잘 훈련된 군사가 아닙니까."
  "사냥을 잘못 나섰다가 우리가 사냥감이 될 수도 있음일세."
  "대감, 결코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작전에 능한 무부들을 하나하나 포섭하고 있으니 결코 실패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자네가 요즘 만나고 있는 무부들이란 누구인가."
  "장정을 가끔 만나고 있습니다."
  "그 자는 수원부사를 지내다 파직당한 사람이 아닌가."
  "며칠 전에 다시 복관되었다고 합니다. 수원의 포교나 포졸들이 훈련도 잘되어 있고 장정을 따르고 있습니다. 인심을 얻고 있는 명관(名官)입니다. 언제든지 수원에서 상당한 군사를 움직여 한강을 넘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장정의 인품이 그러하니 군사들의 충성도가 높겠구먼. 그렇다면 장정의 군사에게 가장 중요한 임무를 맡겨야겠어."
  "연산을 포위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움직일 때는 이미 연산은 폐주가 되는 것이네. 그렇다면 우리가 옹립할 새 전하는 누구시겠는가."
  "진성대군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맞아. 진성대군의 사저를 보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될 것이네."
  진성대군이란 성종의 둘째아들 역(懌)을 말했다. 역은 군주로서 자질과 능력은 뛰어나지 않은 반면에 효성스럽고 온화한 성품이 돋보이는 대군이었다. 연산의 패악함이 인륜을 내팽개친 것이었으므로 자질과 능력보다는 상대적으로 모나지 않은 그의 부드러운 성품이 조정의 대신들에게는 무엇보다 장점으로 보였던 것이다.
  박원종이 다시 물었다.
  "또 누구를 만나고 있는가."
  "군기시 첨정 박영문을 만나고 있습니다."
  "박영문이라면 문무를 겸비한 자가 아닌가."
  "잘 보셨습니다. 원래는 생원시를 합격하였으나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이 된 자입니다. 글을 잘 하므로 무관이라 하더라도 말이 통하는 자일 것입니다."
  박원종은 자신처럼 문무를 겸비한 무관을 더 선호했다. 그래야만 조정에서 논쟁이 붙었을 때 문관에게 밀리지 않고 무관의 주장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반란이 일어나 토벌군을 보낼 때도 무관은 전투 경험을 중시하고 문관은 전술 이론을 중시하여 사사건건 부딪칠 때가 많았다.
  "박영문 정도라면 군사를 동원할 힘이 있겠군."
  "대감, 박영문도 큰 공을 세울 수 있는 장수입니다."
  "또 누구를 만나고 있는가."
  "사복시 첨정 홍경주입니다."
  "사복시 군사라면 연산이 사냥을 나갈 때 매번 데리고 나가는 궁중의 군사가 아닌가."
  "사복시 군사들은 원래 가마꾼 출신이거나 힘 좀 쓰는 축들이어서 몸이 장사처럼 건장합니다."
  "사복시 군사들을 홍경주가 동원할 수 있다는 말인가."
  "평소에도 홍경주는 사복시 부하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고기와 술로 회식을 자주 시켜주고 있다고 합니다."
  "으음. 부하들을 짐승처럼 사육시키고 있구먼, 그래. 좋은 일이야."
  
  홍경주.
  연산주 7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를 거쳐 사헌부 지평에 오른 문인으로 무인들과 가깝게 지내고 있으며 비위가 좋아 아부에 능한 자였다. 그가 임금이 행차할 때 동행하는 사복시의 벼슬아치가 된 것도 연산주의 눈에 들어서였다.
  
  "또 누구인가."
  "유자광 대감입니다."
  그러나 박원종은 단번에 도리질을 했다.
  "무령군은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네."
  "힘 있는 대감을 한 사람이라도 더 불려야 좋지 않겠습니까."
  "그 자는 자신의 영달과 출세를 위해 동지조차 인정사정없이 짓밟았어. 그의 손에 너무 많은 피를 묻혔단 말일세. 지난 무오년에 연산을 움직여 얼마나 많은 선비들을 죽였는가."
  "대감. 유자광 대감이 욕을 먹고 있다 해도 그의 힘을 이용하십시오. 유 대감과 적이 되어서는 좋을 일이 하나 없을 것입니다."
  "자네 말뜻을 모르는 바가 아니네. 유자광이 제 발로 걸어온다면 몰라도 애써 반정에 끌어들이지는 않을 걸세."
  
  박원종의 말대로 유자광은 양날의 칼이었다. 세력을 불리는 데는 유용할지 모르나 그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 많았음으로 반정하는 데 있어서 정국(靖國; 나라는 평안하게 진정시킴)의 명분이 희석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결국 박원종이 신윤무를 통해 알아보고자 하는 것은 군사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였다. 박원종의 생각은 분명했다.
  "혁명은 개혁과 달라. 혁명에는 칼이, 개혁에는 붓이 필요한 법이네."
  "그래서 대감께서는 무부들의 규합을 먼저 생각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네. 칼이 없으면 혁명을 이룰 수가 없어. 그것이 바로 피를 묻혀야 하는 혁명의 숙명이지 않겠는가."
  
  박원종과 신윤무는 삼경 전까지 밀담을 나누다 헤어졌다. 그런데 신윤무는 박원종의 집을 나서려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솟을대문 앞에 사내를 태운 말 한 마리가 달빛을 받으며 들어서고 있었다.
  말구종이 말의 머리를 가볍게 탁탁 때리자, 말이 얌전하게 멈추었고 말 등에 타고 있던 한 사내가 재빠르게 내려서고 있었다. 신윤무는 단번에 그가 유자광인 것을 알아보았다. 신윤무가 달려가서 고개를 숙였다.
  "무령군 대감, 야심한 시각에 어인 일이십니까."
  "박 대감을 만나러 왔네."
  신윤무는 거짓말로 유자광을 돌려세우려 했다. 박원종이 유자광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유자광은 최근 몇 달 사이에 박원종을 대면하고자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고 있었다.
  "대감께서는 몹시 피곤하여 오늘 밤에는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군자부정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는 길인가."
  "그렇습니다."
  "어서 말이나 한번 전해주게나."
  "누구도 만나지 않겠다는 아랫것들의 전언입니다."
  유자광은 헛기침을 연달아 했다. 당하관인 신윤무에게 박원종을 만나게 해달고 사정하는 듯한 자신이 우스워졌고, 그렇다고 언짢은 기색을 내보일 수도 없어서였다. 유자광은 속으로는 '고얀 것들' 하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다.
  "대감께 전해 주시게. 무령이가 왔다 갔다고."
  "그 말씀만 전하시면 되겠습니까."
  "무슨 특별한 일이 있어 온 것은 아니네. 좋은 날을 잡아 술을 한 잔 하자고 꼭 전해주시게나."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유자광은 신윤무에게 오랜 지기라도 된 듯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우리도 만나 술 한 잔 하는 것이 어떤가. 군자부정의 세상사는 이야기에도 이 무령이는 귀를 기울일 걸세. 나는 요즘 머릿속이 근질근질해서 못 견디겠어. 무슨 신명 날 일이 없겠는가. 그런 일이 있으면 날 좀 불러주게나."
  "어찌 감히 제가 대감을 오라 가라 하겠습니까. 무령군 대감께서 좋은 일이 있으시면 저를 불러주셔야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신윤무는 유자광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면서도 머리카락이 쭈뼛거림을 느꼈다. 유자광이 이미 반정 모의를 간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유자광이 박원종의 집 부근을 사냥개처럼 킁킁대고 다니는 것은 분명 무언가를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서울의 양인들 사이에서는 유자광이 서는 자리에 함께 서면 언젠가 이득을 볼 것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유자광은 권력의 양지쪽에 늘 서 왔던 것이다. 신윤무는 유자광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말에 올라탔다.
  그러나 신윤무는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주막거리에서 깜짝 놀랐다. 되돌아간 줄 알았던 유자광이 뜻밖에 신윤무를 기다리고 있었다.
  "출출해서 그냥 집에 들어가기도 뭐해 자네를 기다렸네."
  "대감, 고맙습니다."
  신윤무는 거절할 입장도 아니었으므로 말에서 내렸다. 주막은 술장사를 파했는지 술꾼들은 하나도 없었다. 유자광의 말구종이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하고 소리치자, 방안에서 술청어멈이 입에 하품을 물고 나왔다.
  "밤중에 웬 술이우."
  "어허, 무령군 대감 나으리를 볼라 보는가. 어서 대감을 뫼시지 않고."
  그제야 술청어멈이 호들갑을 떨었다. 처마 밑에 내어 건 등롱불을 다시 켜고 큰소리로 말했다.
  "에구머니나. 쇤네가 무식해서 몰라 뵙구만요. 어서 드십죠, 나으리."
  유자광은 신윤무가 자신보다 품계도 낮고 나이가 어린데도 먼저 방으로 들도록 손을 내밀었다.
  "어서 드시게."
  "대감께서 먼저 드시지요."
  "아니, 내가 초대했으니 자네는 내 손님일세. 무령이도 손님을 맞이하는 법도쯤은 알고 있다네. 날 무식한 사람으로 만들지 말고 어서 자네가 먼저 드시게."
  유자광은 신윤무에게 읍소하듯 재촉했다. 신윤무는 유자광의 그런 태도가 민망하게 보였으므로 못 이기는 체하고 들어섰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유자광은 신윤무에게 아랫목을 권했다.
  "자, 손님이 아랫목에 앉으시게."
  "어,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품계도 있고 나이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어찌 무령군 대감께서는 저를 곤혹스럽게 하시는 것입니까."
  "어허. 오늘밤만큼은 자네가 나의 귀한 손님이라니까. 손님 대접을 하고 싶으니 내 시키는 대로 하게나. 제발."
  신윤무는 유자광이 아랫목에 주저앉히는 바람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앉고 말았다. 그러자 유자광은 속으로 '이놈아, 네놈이 박원종을 만나게만 해준다면 네놈의 가랑이 사이라도 기어가겠다' 하고 소리를 죽여 중얼거렸다.
  술상이 들어오고 술이 빠르게 몇 순배 돌았다. 밤이 늦었으므로 두 사람은 일부러 빨리 취하기 위해 술잔을 상에 내려놓지 않고 주거니 받거니 했다. 술이 오른 유자광이 눈을 익살스럽게 크게 뜨고는 말했다.
  "군자부정, 나에게 답답한 문제가 하나 있네. 목에 걸린 가시 같아. 나를 답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걸 알아맞혀 보게나."
  "말씀하시지요."
  "나는 요즘 외롭다네. 무슨 일인지 나와 속마음을 터놓고 지내던 인재 대감마저 나를 멀리하는 것 같으이."
  "인재 대감이라 하오면 성희안 대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인재 하면 성희안이지 그이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나를 부러 피하는 것 같아. 박원종 대감도 예전부터 날 만나주지 않는 것 같고. 그게 무슨 까닭인지 내게 말해주겠는가."
  "대감들에게 직접 물어보시지 않고 왜 저한데 알려고 하십니까."
  "하도 답답해서 묻는 것이라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나한테 귀띔이라도 해줄 수 없겠는가."
  "사람 마음속을 어찌 알겠습니까."
  "자네야말로 두 대감과 가까운 사람이 아닌가. 그래서 물어보는 것이라네."
  유자광은 술에 취한 척하며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러나 신윤무는 정신을 바짝 차리면서 발설하지 않았다. 박원종과 성희안 집을 오가는 이유를 엉뚱하게 둘러댈 뿐이었다.
  "제가 두 대감 집을 오가는 것은 두 대감으로 받은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함입니다. 두 대감이 저의 뒤를 돌보아 군자부정에 오른 것이 아닙니까. 비록 두 대감께서 임금님의 미움을 사 지금은 입궐을 못하고 있지만 저는 예전과 같이 두 대감을 모시듯 찾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그런가."
  "두 대감이 저를 돌보아주셨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유자광은 신윤무가 끝내 말해주지 않자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의 입도 자물통이구만 그래. 두 대감이 그런 자네를 좋아하겠어. 나라도 의리를 지키는 자네를 좋아하겠어. 더 묻지는 않겠네만 나를 외롭지 않게 해줄 수 없겠는가."
  "이 나라에 대감만큼 영화를 누린 분이 또 어디 있습니까. 세조에서 성종을 거쳐 지금의 임금님까지 삼대에 걸쳐 낙마하지 않고 벼슬 하신 분이 또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대감께서는 자꾸 외롭다고 하시니 욕심이 과하신 듯합니다. 하하."
  "이보게. 누가 날 인정해서 자리에 앉혀준 줄 아는가. 광대가 허공에서 외줄타기 하듯 벼슬길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자나 깨나 온몸으로 버텨 온 거라네. 사람들은 가만히 있어도 승승장구 출세한 줄 알지만 그게 아니라네."
  "대감, 그리 사실 필요가 있습니까. 꼭 그래야만 복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럴까. 허나 처음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달려 왔어. 주어진 자리도 늘 위험천만하지. 비를 막아주는 바윗돌 밑이 가장 위험하다는 말 들어보지 못했는가. 버텨낼 힘이 사라지면 그 다음은 죽임을 당하는 일밖에 또 무엇이 있겠나. 허나 이 무령이는 아직 죽임을 당하고 싶지 않다네."
  유자광은 술에 취해 마음이 약해진 듯 말수가 많아졌고, 눈가에 물기를 조금 보였다. 그러나 그의 큰 눈은 주막을 나서면서 광기 같은 것으로 바뀌어 번들거렸다.
  "나는 이 나라의 누구보다도 권력의 냄새를 잘 맡거든. 결코 무령이는 쉽게 밀려나 죽지 않을 걸세. 허헛헛."
  신윤무는 등골을 타고 흐르는 전율을 느꼈다. 유자광이 검은 숲 저편으로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지만 그의 헛웃음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는 듯했다.
  
  - 허헛헛. 허헛헛.
  
  신윤무는 주막 앞으로 흐르는 개울물에 두 손을 뻗쳐 물을 떠 얼굴에 흩뿌렸다. 그러자 술기운으로 몽롱해진 정신이 조금 뜨였고, 개울물에 비친 달이 어렴풋이 보였다. 어둔 하늘에서는 보름달이 신윤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계속>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는 화순군 홈페이지와 동시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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