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주가 궁에서 내쫓겨 폐주가 될지 모른다는 소문이 초월이 운영하는 명경에 막연하게 퍼져 있을 무렵, 용인 심곡리 조광조의 초당은 도학의 열기가 한여름의 더위처럼 꺾일 줄 모르고 있었다. 방 안에서는 조광조의 동지들이 점심 후 짧은 휴식을 취한 뒤 <근사록>과 <소학> 중에서 각자 의심나는 대목을 가지고 토론에 열중해 있었고, 초당 뒤의 느티나무 가지에서는 제철을 만난 매미가 한껏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맴맴맴, 맴맴맴.
각자의 복장은 어디서나 몸과 마음이 한결같아야 한다는 조광조의 제안에 따라 비록 방 안이지만 외출할 때처럼 머리에는 초립을 쓰고 갓끈을 맸으며 무명 바지저고리를 정갈하게 입고 있었다.
조광조의 부인 한산 이씨가 가꾼 텃밭의 상추와 무 잎도 아침나절에 지나간 소나기를 맞아 더욱더 푸르게 자란 느낌이었다. 이씨는 텃밭에서 오줌을 누고 나와 초당 댓돌에 놓인 짚신들을 가지런히 했다. 그런 뒤에야 마을 앞의 샘터로 나가 밀린 설거지를 했다. 마침 마을의 늙은 아낙이 빨래를 하다가 말했다.
"또 손님 왔구먼요. 어디서 온 사람들인가요."
"팔도에서 온 사람들이지요."
"선비들 맞지요."
"그렇답니다."
"나이들도 다 찼던데 도대체 무슨 공부를 한답니까."
"고상한 공부랍니다."
"무슨 공부가 고상한 공부간요."
"과거공부도 아니고 도술공부도 아닌 하루 종일 꼼짝 않고 앉아서 책만 보는 공부지요."
이씨는 남편인 조광조가 연마하고 있는 것을 고상한 공부라고 얼버무렸다. 과거를 위한 공부도 아니고, 신통(神通)을 위한 공부도 아니니 이씨가 보기에는 목에 걸린 체증처럼 늘 답답하게 여겨지는 공부였던 것이다. 가끔 아버지 첨절제사 이윤형이 서신으로 사위인 조광조가 무엇을 하는지 묻지만 딱히 대답할 말이 없어 고상한 공부라고 답하곤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조광조에게는 뜬구름을 두고 논하는 고상한 공부가 아니라 군자의 길을 밝히는 지극히 현실적인 공부였다. 아침저녁으로 자신을 철저하게 돌아보고 닦는 유도(儒道)를 실천하는 공부이기 때문이었다. 유학을 공부하는 목적은 출세하여 이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실천하고 밝히는 군자가 되고 성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씨는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돌아가다 걸음을 멈추었다. 초당 앞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다가가 보니 남루한 옷차림의 손님이 초당의 말구종과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씨 눈에는 손님의 몰골이 비록 거지 행색이었지만 눈빛이 살아 있는 것으로 보아 공부하는 사람이 분명해 보였다. 손님은 허리를 꼿꼿이 펴고 뒷짐을 진 채 큰소리로 말구종을 나무라고 있었다.
"어서, 네 주인을 불러 오렷다."
"신분을 알려주셔야 말씀 드릴 것이 아니옵니까."
"쯧쯧. 공부하는 선비집의 문턱이 이리 높아서야. 네 주인의 인품을 욕되게 하지 말고 어서 말씀드리지 못하겠느냐."
말구종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조광조의 지시이기도 했다. 동지들이 사랑방에 모여 공부할 때에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엄명을 하였던 것이다. 이씨가 물동이를 내려놓고 난 뒤 말했다.
"어디서 온 뉘신지요."
"능주 고을에서 온 양팽손이라 합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이씨가 초당 마루로 안내했다. 그러나 양팽손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정암께서 나를 모를 것이오.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 허나 만나면 마음과 뜻이 즉시 통할 것이니 걱정 마시오."
양팽손은 하인의 융통성 없는 접대에 기분이 나빠 있었다. 그런 그의 태도는 오만할 정도로 당당했다. 누더기를 입은 차림새와는 딴판이었다. 이씨에게도 말투가 자못 권면하는 식이었다. 이처럼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들의 태도는 각양각색이었다. 이씨가 사랑방 앞에서 조심스럽게 조광조를 불렀다.
"손님이 왔습니다."
"뉘라고 하던가요."
"능주에서 온 양팽손이라 합니다."
조광조는 처음 듣는 이름이어선지 방으로 들라 하지 않고 자신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누가 보아도 양팽손은 제법 양반 흉내는 내고 있었으나 다분히 촌티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머리에 얹힌 낡은 초립은 삐딱했고, 누더기 바지저고리는 땀과 먼지에 절어 냄새가 나고 지저분해 보였다. 홀쭉한 개나리봇짐도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조광조를 대면한 양팽손이 고개를 먼저 숙였다. 대여섯 살 정도 어리게 보이는 양팽손이었다. 조광조가 예를 갖추어 서울 말씨로 물었다.
"저를 찾아온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정암 선배를 찾아 천 리 길을 걸어왔습니다."
"능주라면 천 리 밖에 있는 고을이니 그리 될 것입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무슨 일로 먼 길을 나선 것입니까."
"유도를 바로 세우고자 힘쓰는 분이 이 나라에 정암 선배 말고 또 누가 있습니까. 고견을 듣고자 찾아왔습니다."
조광조는 양팽손에게 친근감을 느꼈다. 누더기 옷에서는 쉰 땀 냄새가 진동했으나 그의 생각에서는 난초의 향기가 나는 듯하였다. 조광조는 양팽손을 방으로 불러들였다.
"어서 드시지요."
방 안에는 김식과 김구, 박훈 등이 있었다. 양팽손이 방에 들자마자 김식이 코를 막고 고개를 돌렸다. 조광조가 말했다.
"능주에서 온 양팽손 동지를 소개하겠네."
김구가 의외로 반갑게 양팽손을 반갑게 맞이했다.
"김구라 하오. 선대가 광주(光州)에서 살았소. 능주라 하면 광주의 무등산을 사이에 두고 있는 고을이 아니오."
"그렇습니다. 광주의 무등산 남쪽에 있습니다. 능주에서 대유(大柔; 김구의 호) 형의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김구는 양팽손과 동갑이었으나 이미 16세에 한성시에 장원을 했고 이어서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장원을 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재원이었다. 그런데 천재는 천재가 알아주는 법이었다.
김안국은 7세 때 독서할 줄을 알았고, <소학>의 '효자로다. 민자건(閔子騫)이여'라는 장에 이르러 "내 마땅히 이것을 본받겠다"고 다짐했으며 12세에 유학의 대의를 깨닫고 무슨 글이든 세 번을 넘지 않아서 능히 외운 천재로 소문 난 사람이었다. 바로 그 김안국이 일찍이 생원시, 진사시에 모두 장원한 적이 있으나 방(榜)을 낼 때 한 사람을 두 장원으로 낼 수 없다 하여 진사시는 2등이 되었는데, 이를 평생 한으로 여기던 김안국이 자신보다 어린 김구가 생진사시에 모두 장원이 됐을 때 시관들이 또 전례를 들자, "왕희지의 필법과 한퇴지의 문장으로 무엇이 불가하겠는가" 하고 분연히 말하여 김구를 두 장원으로 뽑았던 것이다.
김구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내가 능주까지 소문이 나 있다니 부끄럽습니다. 재주는 자랑할 것이 못된다고 했습니다. 도와 덕이 우리보다 앞선 정암 형이 으뜸이지요."
김구는 팔도의 젊은이들에게 천재로 소문 난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김식도 재주에 있어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사람이었다. 비로소 김식이 찡그렸던 얼굴을 펴며 말했다.
"과거로 임금을 뽑는다면 이 김식이도 빠지지 않을 것이오. 하하하."
농담으로 말했지만 사실이었다. 김식은 도학뿐만 아니라 음양(陰陽), 이수(理數), 문장 등등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니 시험으로써 임금을 뽑는다면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농담을 했던 것이다. 그제야 양팽손이 좌중을 둘러보며 자신을 소개했다.
"저야 한미한 집안의 서생이오만 스승은 송흠이라 하오."
"송흠이라, 송흠이 누구시더라."
박훈이 송흠을 떠올리지 못하자 인물백과사전으로 불리는 김식이 말했다.
"송흠 선생이라 하면 세조 5년에 영광에서 태어나시고 성종 24년에 홍문관 정자(正字; 정 9품)가 되신 분이오. 이후 낙향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어찌 되었소."
"찾아온 제자들을 가르치다 선친의 상을 당하여 상기(喪期)를 마친 뒤 남원교수(南原敎授; 종 6품)로 제수되었습니다."
그러나 조광조는 그런 의례적인 인사보다는 스승 김굉필과 송흠 간에 교유가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생각해 내고는 다시 한 번 더 양팽손의 손을 잡았다. 당시에도 초면에 통성명할 때 스승을 묻고 선친을 소개하는 풍습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 선생의 지인이 송흠 선생이고, 송흠 선생의 제자가 학포(學圃; 양팽손의 호)인데 어찌 반갑지 않겠소. 동지들 아니 그렇습니까."
조광조는 양팽손에게 정여해의 안부도 물었다.
"능주 해망산의 돈재 선생도 안녕하신지요."
"한훤당 선생의 부음을 듣고 몸이 더욱 상하셨으나 지금은 많이 회복되어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돈재 선생도 우리 한훤당 선생과 지음의 동지였지요. 더욱이 점필재 선생께서 돈재 선생을 일러 상례가 으뜸인 제자라고 하셨습니다. 돈재 선생이 계시는 것만으로도 능주의 유도(儒道)가 융성할 것이니 그곳의 풍속이 아름답겠습니다."
조광조는 세조 때 능주 교생들이 혁명군처럼 과격한 행동으로 양인들을 선동한 사건을 잘 알고 있었다. 향교의 교생들이 유도를 현창한다 하여 능주 현령의 비호 아래 절과 암자를 불태운 사건이 발생하여 조정을 떠들썩하게 했던 것이다.
"능주의 유도는 아직 미미합니다. 돈재 선생이 해망산에 독서당을 짓고 고군분투하시고 있으나 건강상 많은 학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어서 저는 장성으로 가 송흠 선생 문하에서 배움을 구하고 있는 처지입니다. 능주 교생들의 열기를 감안할 때 제자들을 가르칠 선생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때도 지역정서라는 것이 있었다. 정여해는 길재에서 비롯하여 김숙자, 김종직으로 이어져 온 영남도학의 문인이었으므로 호남도학을 추종하는 교생들과는 거리감이 자못 있었다. 호남출신의 교생들은 선대가 영남에 뿌리를 둔 정여해보다는 호남에서 태어나 공부하여 선비가 된 최부와 송흠을 따르는 경향이 있었다.
땀을 연신 닦던 박훈이 세족(洗足)을 나가자고 제안했다. 날이 사뭇 더울 때는 토론하는 것을 멈추고 피서를 하게 마련인데, 계곡으로 나가 찬물에 발을 담그고 쉬는 것을 세족이라 했다.
"여보게들, 멀리서 손님이 왔으니 오늘은 그만 토론하는 것을 접고 세족을 나가면 어떻겠소."
방 안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찬성을 표시했다. 조광조가 하인에게 미숫가루를 준비하라고 일렀다.
"항아리에 미숫가루를 담아 가져오너라."
이에 술을 좋아하는 김식이 말했다.
"정암, 세족에 술이 한 잔 들어가야 신선이 되지 않겠는가."
"노천, 맑은 계곡 물에 발을 담그는 것도 미안한 일인데 술 냄새까지 묻혀야 하겠는가."
"정암, 나는 때로 군자가 되기보다는 신선이 되고 싶으이. 이처럼 더운 날에도 초립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채 나들이를 해야 하는 군자의 고지식함 나는 참을 수 없단 말이네. 허리에 술이 든 호리병을 차고 벌거숭이가 되어 바람처럼 훠이훠이 거니는 신선의 자유로움이 부럽지 않은가."
김구가 하인을 시켜 거문고를 챙겨 오느라 뒤늦게 합류하여 물었다.
"정암 선배님, 어디로 갑니까."
"오 리쯤 가면 함제봉 계곡이 있지요. 심곡리에서 가장 가까운 계곡이라오. 서울에서는 무엇을 하며 피서를 하오."
"요즘엔 봉희(棒戱)라는 것이 유행입니다."
"봉희라구요."
조광조로서는 처음 듣는 놀이 이름이었다.
"세조 임금이 즐겨 보던 왕실 놀이로서 타구(打毬) 혹은 격봉(擊棒)이라 하는데, 요즘에는 서울의 양반들까지 즐기는 놀이가 됐습니다."
중국에서 들어온 봉희는 숟가락(匙)처럼 생긴 기다란 봉으로 계란 크기만한 공을 때려 사발 모양의 와아(窩兒; 움집)에 넣는데, 한 번에 공이 들어가면 산가지 2개를, 두세 번 쳐서 들어가면 산가지 1개를 얻는 놀이였다. 산가지를 많이 얻기 위해 서서 치기도 하고 무릎을 꿇고 치는 등 여러 방법으로 공을 요령껏 넣지만 타수가 적은 사람이 이기는 규칙의 놀이였다. 공이 멀리 날아가므로 넓은 장소가 필요한 봉희는 왕실이나 높은 벼슬아치들만 즐겼는데 최근에는 차츰 퍼져 서울의 양반이나 돈 많은 장사치들까지 하게 된 모양이었다.
"대유(김구의 자)도 봉희를 해보았소."
"어찌 제가 봉희를 하겠습니까. 양인들의 논밭을 사들여 벼슬아치들이 즐기는 놀이가 봉희가 아닙니까. 헌데 어찌 제가 그것을 즐기겠습니까. 저는 평생 봉희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논밭이 부족한 우리나라에서는 봉희가 적당하지 않습니다."
김구가 봉희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자 김식도 한 마디 거들었다.
"대유의 생각에 나도 동감이오. 논밭이 부족하여 흉년이 들면 양인들이 굶는 세상에 멀쩡한 논밭을 봉희장(棒戱場)으로 만들어 봉희를 즐기다니 그것을 즐기는 벼슬아치는 어느 나라 백성입니까. 내가 조정에 나가는 일이 있다면 전하께 모든 벼슬아치들이 봉희를 금하도록 주청을 드리겠소. 내가 알기로는 세조께서도 비가 오는 날 봉희를 구경하다가 환관 백충신(白忠信)이 벼락을 맞고 쓰러지자 하늘의 꾸짖음이 이와 같으니 피거(避居)하여 스스로 경계하겠다고 한 적이 있소."
그러나 박훈은 온건하게 반대했다.
"봉희 자체에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때와 장소를 못 가리고 치는 벼슬아치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조광조가 웃으며 말했다.
"형지(馨之; 박훈의 자)의 말이 옳습니다. 때를 모르는 것을 철부지라 하지 않습니까.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봉희를 즐기는 철부지, 즉 소인배들이 문제지요."
"정암, 봉희란 놀이를 국법으로 금하지 않는 한 먼 훗날에도 소인배들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봉희만을 즐길 것이오. 그것도 가보나 금전을 걸어놓고 내기를 하면서 말입니다. 백성들 생활이야 어찌 됐든 소인배 벼슬아치들은 자신들만 배부르고 즐거우면 그만이니까."
이윽고 함제봉 계곡 어귀에 도착하니 산의 청랭한 기운이 다가왔다. 한여름의 불볕더위도 찬 계곡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조광조와 김구, 그리고 양팽손은 반석을 찾아가 앉았고, 박훈과 김식은 웃옷을 훌러덩 벗고 천진한 아이처럼 자맥질을 해댔다.
김식은 박훈에게 장난을 걸곤 했다. 물속에서 박훈의 남근을 슬쩍 잡아당기고는 박훈이 아야! 하고 비명을 지르자, 천연덕스럽게 딴청을 피웠다.
"미안하이. 내 다리인 줄 알고 잡았다네."
이번에는 박훈이 능청맞게 보복을 했다. 김식이 숨넘어가듯 소리치자 박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 것이 맞는가. 갑자기 오그라든 내 다리가 걱정되어 잡아당겨 보았다네."
김식과 박훈이 어깨동무를 하고 물속에서 나오자 양팽손이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두 분의 우정이 부럽습니다."
사실 그들의 모습에서 십수 년 후에 불어 닥칠 살생의 그림자는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그들뿐 아니라 반석에 정좌하고 앉아 있는 조광조도 마찬가지였다. 조광조의 풍채는 이미 도학으로 갈고 닦여져 한 마리의 학처럼 고고했고, 그의 태도에는 한 점의 위선이나 위악이 없었다. 음률에 달통한 김구가 두 손으로 거문고 줄을 뜯으며 시를 읊조렸다.
홀로 한가한 곳에 있으니 오가는 이 드물고
오직 달을 부르니 가난하고 외로운 나를 비추네
그대 생각으로 나를 묻지 말게
넓은 바다 안개 물결, 첩첩 산들이 가득하다네.
處獨居閒絶往還
只呼明月照孤寒
憑君莫問生涯事
萬頃煙派數疊山
김굉필의 <書懷>, 즉 '회포를 적다'라는 시였다. 김굉필은 조광조의 스승이었으므로 조광조는 김구가 거문고를 뜯는 동안 시종 눈을 지그시 감고 감상하였다. 일찍이 김일손이 신금(神琴)이라 하여 거문고를 잘 탔으나 김구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반석에 앉은 일행들이 재청을 하자 김구는 다시 거문고를 잡았다. 이번에는 남효온의 시를 읊조렸다.
북쪽 대궐에 일찍이 글을 올리니
뭇 사람의 평판이 자못 시끄럽구나
부질없이 손자(孫子; 당나라 손창윤)의 호를 얻었고
짤막한 도롱이 걸치고 추강(秋江)에 왔도다.
소릉 복위를 청하는 소를 올렸으나 사람들이 당나라 손창윤과 같다 하고 미치광이라 불렀던 바 이에 남효온은 굴하지 않고 시를 한 수 지어 남겼던 것이다. 함제봉 계곡으로 피서를 나온 조광조 일행은 세족의 시간을 스스럼없이 보내고 있었는데, 능주에서 올라온 양팽손도 어느새 그들과 쉽게 어울렸다.
"정암 형이 허락한다면 초당에서 며칠 간 머물다 가구려."
"모두 만나고 싶었던 분들이오. 정말 그러고 싶소."
"도학 하는 사람들의 즐거움 중에 무엇이 가장 크겠소. 권력을 쥐는 것도 아니고, 명예를 쥐는 것도 아니고, 부를 얻는 것도 아니지요. 다만 뜻이 맞는 동지들과 함께 어울려 공부하는 일이 아니겠소."
그 이후 양팽손은 나이가 같은 김구와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동지가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함제봉 계곡을 더 거슬러 오르지 못하고 세족의 즐거움을 접어야 했다. 서울 쪽의 하늘에서 먹구름장이 몰려오고 있었다. 장대비를 쏟아 부으려는 듯 번쩍번쩍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렸다.<계속>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는 화순군 홈페이지와 동시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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