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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숨어 있게 내버려두라"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道'] 제5장 폭군의 몰락 <28>

초월은 뒤늦게 다장의 상호를 명경(明鏡)이라 짓고 간판을 내어걸었다. 무엇이라고 지을까 고심하다가 주련의 첫 자가 마음에 들어 명경이라 했던 것이다. 다장의 이름이 없으니 손님들이 찾아오는 데 불편해 했던 이유도 있었다.
명경은 날로 벼슬아치들에게 알려져 번창할 조짐을 보였다. 처음에는 심정의 지인들이 드나들더니 차츰 조광조의 동지들이 모여들어 휴식의 장소로 활용하였다. 손님이 늘어나면서 명경의 건물도 한 채 두 채 늘었다. 이웃의 민가를 사들여 다실을 한 채 더 마련했고, 연못가에 조그만 정자도 지었다.
명경에서 벌어지는 술자리의 모양새도 다양했다. 벼슬아치들이 관직을 얻거나 품계가 높아져 벌이는 축하연, 지방 외직으로 나가거나 좌천을 당하여 모이는 위로연, 삭탈관작 당하여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어 모이는 전별연, 귀양을 가게 되어 눈물바다를 이루는 술자리, 조정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울분을 토해내는 술자리 등등 명경의 등롱불은 날마다 밤늦도록 꺼질 줄 몰랐다.
명경을 찾아온 손님 중에는 초월이 보기에 기개 있고 은근히 무게를 잡는 성희안(成希顔)이란 벼슬아치도 있었다. 심정이 그를 위로하기 위해 마련한 술자리에서 처음 보았는데, 연산주에 대한 배신감이 목에까지 찼는지 연산주의 얘기만 나와도 얼굴이 일그러지곤 하여 뭔가 큰일을 벌일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인물이었다.
심정은 자신의 탁월한 기억력을 자랑하곤 하는 버릇이 있었다. 새 손님을 데리고 올 때마다 반드시 그의 자와 호, 가족 사항까지 세세하게 말했다.
"자는 우옹(愚翁)이시고 호는 인재(仁齋), 본관은 창녕이요, 세조 7년(1467)에 태어나셨으며, 성종 11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시고 성종 15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신 분으로 홍문관에 계실 때 선왕(성종)의 총애를 받아 선왕의 정사에 많은 자문을 드린 분이지요. 바뀐 왕조에서도 군기시부정으로 서정도원수(西征都元帥) 이계전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셨으며 동지중추부사로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오셨고, 형조참판에 이어 이조참판으로서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고 계셨던 분입니다. 뿐만 아니지요. 선친께서는 돈녕부판관을 지내셨으며 모친은 종실인 덕천군의 따님이십니다."
▲ 삼인대 전경. 순창군 팔덕면에 있다. ⓒ프레시안

그때 성희안이 분을 삭이지 못했던 것은 하루아침에 종2품의 이조참판에서 무관의 말단직인 종9품의 부사용으로 강등된 처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어서였다. 초월은 눈을 내리깔고 눈치를 살피며 성희안의 술잔에 조심조심 술을 따르곤 했다. 심정이 방에 들기 전 다가와서, '잘 모셔야 할 분이네. 분기탱천하여 화풀이를 어디다 할지 모르거든' 하고 귀띔을 해주었던 것이다.
심정은 술자리 내내 성희안의 분을 누그러뜨리려고 애를 썼다.
"전하께서 대감의 뜻을 알지 못하고 사홍의 손에 놀아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사옵니까."
"이런 치욕이 어디 있겠는가.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겠네. 칭병하고 양화도 망원정(望遠亭)에를 따라가지 말걸 그랬어."
"대감, 거기서 무슨 시를 지어 올려 전하의 노여움을 사셨습니까."
"이 늙은이가 충심에서 유락에 빠진 전하를 좀 훈계하는 시를 지었지."
망원정의 주연 자리에서 성희안이 올린 시 가운데 '성주(聖主)의 마음은 원래 청류(淸流)를 사랑하지 않는도다'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술에 취한 연산주는 시를 보자마자 자신을 비방한다고 크게 노했고, 다음 날로 성희안은 참판에서 종9품인 부사용으로 좌천되고 말았던 것이다.
"대감이 아니고서 그 자리에서 누가 전하를 훈계할 수 있겠습니까."
"이보게, 더 이상 그 얘기를 끄집어내지 말게. 대감이란 자가 하루아침에 부사용이라니 이런 능멸이 어디 있겠는가."
눈치 빠른 심정은 성희안을 위로하는 말을 꺼냈다.
"세상만사 새옹지마라고 했습니다. 더욱이 대감의 태몽을 보면 가문에 복록이 머잖아 일어날 것이니 너무 심려 마십시오."
"자네가 내 태몽을 알고 있다니 자네는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일세."
성희안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어리었다. 지금은 비록 곤경에 처했지만 앞으로 복록이 있을 것이라니 듣기에 기분 좋은 말이었다. 심정은 성희안이 태어날 때 그의 어머니가 꾼 태몽을 사람들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성희안의 어머니가 태몽을 꿀 적에 한 신선이 다가와 지팡이 하나를 주면서 '이 지팡이를 짚으면 네 집안에 복록이 일어나게 되리라' 고 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성희안에게는 길할 징조로 여겨지는 얘기 하나가 더 전해지고 있었다. 성희안 역시도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상을 당하여 묘 앞에 여막을 짓고 사는데, 하루는 아우와 함께 마를 캐다가 피곤하여 바위에 누워 자게 되었던 바 꿈에 아버지가 나타나 도적이 온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놀라 깨어 보니 과연 큰 범 한 마리가 앞에 와 어슬렁거렸다. 형제가 돌을 던지니 범은 곧 사라져버렸다. 아버지의 혼령이 나타나 호식(虎食)을 면한 이를 두고 사람들은 형제의 효성에 범이 감동한 것이라고들 말하였다.
"성균관 유생들이 대감을 흠모하고 있으니 그들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것입니다. 하오니 작금의 치욕에 너무 연연해 마십시오. 공연히 마음과 몸을 상할 뿐입니다."
심정의 말은 위로할 목적의 아부가 아니었다. 세간을 한때 시끄럽게 했던 사실이었다. 성균관 유생들이 정승의 종에게 길거리에서 폭행을 당한 일이 있었다. 발단은 유생들이 먼저 주인의 세도를 믿고 거드름을 피우며 갈지자로 걸어가는 종에게 '아랫것이 버르장머리가 없다'고 삿대질을 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그 종이 갑자기 유생들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휘둘렀던 것이다. 사건은 크게 확대되어 유생들이 연명으로 국법에 의해 폭력을 휘두른 종을 죽여야 된다고 상소를 올리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무도 선뜻 유생들의 상소에 동조하지 못했다. 종은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이 총애하는 아랫것들의 우두머리였고, 좌의정 이극균이 데리고 있는 여종의 남편이었기 때문이었다.
형조판서 한치형은 사건을 판결하기가 부담스러워 칭병하고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이에 이극균의 동생 이극돈이 형조참판 성희안을 찾아가 잘 봐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성희안도 역시 병을 핑계 삼아 사건의 판결을 미루어버렸다. 그러자 신승선과 이극균이 성희안을 벼르고 있다가 성희안이 조정에 나오자, 헛기침을 해대며 유감의 말을 하였다.
"흠흠, 엄밀하게 따지자면 국법에 따라 종이 죽어 마땅하나 사건의 단초가 된 유생들도 잘한 것이 없으니 적당하게 얼버무리면 어떻겠소."
"어떻게 말입니까."
"종에게 곤장을 살살 치게 명하여 유생들의 체면도 세워주고 종도 살리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 짓자 이겁니다. 새파란 유생들에게 끌려 판결하다 보면 전례가 세워져 앞으로 난감한 일이 더 많아질 것이다, 이 말입니다."
"대감, 저는 그리 못합니다."
"어허. 인재(성희안의 호)가 기개 있는 줄 알고 있소만 이번에는 내 얼굴을 봐서 한 번 봐달라는 데도 그리 고집을 피우십니까."
"천한 종이 여러 유생들을 폭행했으니 마땅히 죽여야 될 것입니다. 국법으로 정해진 일인데 어찌 대감들을 위해 고친단 말입니까."
"어허, 누가 국법을 몰라서 한 말입니까. 법이란 사람을 살리고자 있는 것이 아니겠소. 그러니 이번에는 공이 융통을 부려 달라는 것이지요."
"아니 됩니다. 국법대로 하지 않고서는 임금님께 아뢰고 제가 물러나겠습니다."
성희안이 단호하게 나오자 두 정승은 헛기침만 하면서 아무 말도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도열해 있던 신하들도 모두 도리질을 하며 송구해 했다. 다음 날 성희안은 형조판서 한치형이 끝내 나타나지 않자 자신이 집행관이 되어 이극돈의 종을 문초한 다음 나장에게 명하여 곤장을 거칠게 쳐 죽게 하였다.

명경에 자주 나타나는 사람 중에는 장정(張珽)이란 무과급제 출신도 있었다. 몸이 근육질로 차돌멩이처럼 단단하게 보이고 키가 작달막한 사람이었다. 수원부사로 있을 때 장녹수에게 밉보여 파직을 당한 그는 오갈 데가 없어져 최근에는 심정과 명경에서 술친구를 하고 있는 처지였다. 그에 대한 세간의 평판은 성희안처럼 좋은 편이었다. 변방에서 수원부사가 되어 올라온 후, 장녹수에게 빼앗기다시피 한 수원 땅의 농토를 양인들에게 돌려주어 명관으로 소문이 났던 것이다.
"너무 상심 마십시오. 인재에게 유생들이 있다면 부사께는 수원 땅의 농민들이 있잖습니까. 언젠가 그들이 힘이 되어줄 것입니다. 그래도 궁궐을 지키는 어영청(御營廳)의 장관(將官)보다는 수모가 덜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심정이 궁에서 장녹수를 호위하는 어영청의 부장(部將)을 들먹이자, 장정은 심한 욕설을 해댔다.
"천하에 요망한 장녹수 년을 호위하다니 사타구니에 달린 남근을 떼어버릴 일이지. 아니 그렇습니까. 사내놈들이 할 짓이 없어 종 출신인 장녹수의 호위 장교가 된단 말입니까. 이건 의리에 죽고 사는 무반들의 치욕입니다."
"어영청의 그 자들인들 좋아서 하는 일이겠습니까. 전하의 전교가 있으니 사가에서 궁으로 들어오는 장녹수를 경호하고 있겠지요. 보세요, 그런 그 자들에 비해 비록 파직되었다고는 하지만 부사께서는 얼마나 다행입니까."
"음, 그건 정지(貞之; 심정의 자)의 말이 옳습니다."
"더구나 부사께서는 수원 농민들에게 명관이란 칭송을 듣지 있지 않습니까. 아마도 그것이 언젠가 큰 자산이 될 것입니다."
"난 그 장녹수 년이 전하를 꼬드겨 사가의 이웃에 있는 민가들을 헐더니 간덩이가 커질 대로 커져 수원 땅까지 욕심을 내 사들였다고 믿소. 이 장정이 수원부사로 부임하기 전에 말입니다. 그것도 공짜나 다름없는 헐값에 말입니다. 힘없는 농민들이 겁을 먹고 판 것이지요. 이 장정이는 부사를 못할 망정 그런 꼴을 보고 참지 못하는 성미지요."

누구라도 꾀주머니라 불리는 심정을 만나고서는 분기를 풀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심정은 사람을 교묘하게 요리하는 재주가 있었다. 장정이 명경을 자주 찾는 이유도 바로 심정이 자신의 울분을 달래주기 때문이었다. 심정은 사람들의 장점을 살리는 데 특별한 재주가 있었으므로 한약재의 감초 같은 인물이 되었다.
그렇다고 심정이 모든 사람들을 명경으로 부른 것은 아니었다. 연산주에게 총애를 받는 인물들은 철저하게 배제하였다. 군기시부정 신윤무(辛允武)나 군자시첨정 박영문(朴永文)과는 술 한 잔 나눈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의 행동에는 어딘지 의심스러운 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신윤무가 연산주에게 불만이 큰 박원종과 성희안의 집을 드나드는 것은 매우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심정은 신윤무의 수상쩍은 행동을 두 가지로 추측했다. 그 하나는 연산주의 첩자 노릇일 수도 있고, 또 하나는 연산주의 몰락을 냄새 맡고 미리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러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이 편 저 편에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양다리를 걸쳐둔 식이었다. 어느 시대이건 양다리를 걸쳐두고 세력을 좇는 사람은 반드시 있게 마련인 것이었다.
▲ 조선 연산군 12년(1506) 훈구세력인 성희안과 박원종이 임사홍, 신수근 등과 결합하여 중종반정이 성공하자 공신들은 중종의 부인인 신씨를 역적의 딸이라 하여 왕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장경왕후 윤씨를 왕비로 맞이하였다. 이에 순창군수인 김정과 담양부사 박상, 문안현감 유옥 등이 죽음을 각오하고 관직을 표시하는 도장을 소나무에 걸어놓고 상소를 올렸는데 그 후 이곳에 비각을 세워 삼인대라 했다. ⓒ프레시안

반면에 김식의 동지들은 아직 권력의 맛을 모르는 순수한 청년들이었다. 명경에서 만나는 그들은 도학이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느껴지는 괴리감 같은 것을 화제로 삼았다. 아직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므로 구체적인 불만은 없었으나 현실에 안주하는 벼슬아치들에 대한 비판은 컸다. 그래서 김식 등은 심정과 함께 오는 무리들과 한 자리에서 마주치는 것을 꺼려했다. 특히 얼굴이 황소처럼 우락부락한 박원종이나 눈빛이 비수처럼 날카로운 장정을 만나면 자리를 급히 피하거나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루는 김식이 초월에게 심하게 불만을 터뜨린 적도 있었다.
"저 자들이 명경을 찾는 한 우리는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오."
"왜 그렇사옵니까."
"그 자들은 임금님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불만이 하늘을 찌르는 위인들이오. 임금님께 직언을 할 것이지 왜 이 명경에서 소인배처럼 뒷소리를 하느냐는 것이오."
"박원종 대감이나 장정 부사님이 임금님께 직언을 한 적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좌천 당하고 파직 당한 것이 아닙니까."
"난 그 자들하고 마주치는 것이 싫소. 그 자들의 어두운 얼굴을 보면 무언가 큰일을 저지르고 말 것 같은 예감이 든단 말이오."
할 수 없이 초월은 후문을 내어 김식의 지인들이 오면 별채를 내어주었다. 그런 후부터는 서로 마주칠 일이 없었다. 정문은 혜화문 쪽으로 길이 나 있고, 후문은 청계천 쪽으로 길이 나 있기 때문이었다.
후문을 만들어 낸 날, 김식보다 두세 살 아래로 보이는 김정(金淨)이 처음으로 명경에 들었다. 초월은 김정의 첫인상이 나이에 비해 석상처럼 무뚝뚝하다고 느꼈다. 말과 웃음이 지나칠 정도로 적었던 것이다. 그런 탓에 말을 붙이기가 힘들었고, 김식이 옆에서 과묵한 그를 소개하였기 때문에 그의 신상을 알 수 있었다.
"충암(沖庵; 김정의 호)을 소개하겠소. 본관은 경주이고 경순왕의 후손이지요. 3세 때 할머니에게 공부를 시작하였고, 소싯적에 이미 <대학>을 능히 외웠고 14세에 초시에 수석 합격하였으나 복시에는 응시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과거(科擧)의 문장은 족히 배울 것이 못 된다'는 것이었다고 하오. 이후 경(敬)과 정(靜)을 익히는 공부를 주로 하였으며 노장 사상에도 깊이 심취하여 식견이 실로 남보다 한 등 높은 분이라오."
이처럼 과찬을 했는데도 김정은 별 다른 표정 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거렸을 뿐이었다. 보기에 따라 상대를 무시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었으나 초월은 김정의 그런 무뚝뚝함이 매력으로 보였다.
김정은 초월이 술을 따라 올렸을 때도 말없이 받아 마시기만 했다. 김식이 농을 걸어와도 마찬가지였다.
"자네의 언행은 성인 같이 너무 맑단 말씀이야. 맑은 곳에 고기가 모일까. 좀 탁해지면 어떻겠나."
"형께서는 탁한 물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까. 맑은 물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까."
"노장(老莊)을 읽었다는 사람이 왜 그리 고지식한가. 탁한 물, 맑은 물이 섞이는 드넓은 바다가 되라는 것이지. 아니 그런가."
"바다가 썩지 않는 것은 맑은 강이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자네 말도 맞고 내 말도 틀린 것 같지는 않네."
"지금은 맑은 강물이 필요한 세상입니다. 세상이 너무 썩어 냄새가 진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는 나도 전적으로 동감이네. 우리가 이렇게 만나는 까닭도 바로 그런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해 보자는 것이 아닌가."

조광조의 동지들이 명경에 모이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잃어버린 하늘의 도를 되찾자는, 즉 과거 급제하여 벼슬아치가 되기보다는 마음속에 숨어 있는 사단(四端; 仁義禮智)을 실천하는 도학자가 되는 것이 그들의 공감대였다. 그런 신념 때문에 김식 등은 혁명을 하여 세상을 바꿔보자는 것은 조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세상을 혁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부터 개혁하는 것이었다.
세상을 새롭게 바꾸는 것은 무인이 앞장 서는 것이 쉽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문인이 나서 주도하는 것이 쉬운 일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인에게는 변화를 담아 낼 이념과 준비가 부족하고, 문인에게는 새롭게 바꾸어갈 추동력과 일사불란한 결집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그날 김정은 초월이 술값을 받지 않겠다고 하자, 명경을 나서기 전에 붓과 벼루를 가져오게 한 뒤 두 마리의 새가 나뭇가지에 앉아 울고 있는 그림을 즉석에서 그려 초월에게 주었다. 초월은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들어 표구를 하여 침실에 걸어두고 매일 쳐다보다가 어느 날 그림을 떼고 말았다.
두 마리의 다정한 새를 보고 있으려니 조광조를 사모하는 자신이 문득 초라하고 외롭게 느껴졌던 것이다. 조광조는 여전히 명경을 찾지 않고 있었다. 그를 위해 명경을 내었건만 정작 그는 단 한 번도 들르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초월은 짝을 찾는 한 마리의 새처럼 사모하는 마음을 거두지 못했다. 조광조의 동지들이 명경에 들를 때마다 조광조의 소식을 기다리곤 했다.
조광조의 동지 중에서 김식과 김정, 그리고 박훈(朴薰)이 명경을 자주 찾아주었는데, 박훈은 김정과 정반대의 성격이었다. 말수는 적었으나 얼굴에는 늘 온화한 화기가 돌아 모든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다. 그도 역시 과거 공부보다는 행실을 닦아 의리와 지조를 지키는 데 관심이 컸기에 조광조와 통하는 바가 많았다.
초월은 마음이 너그럽고 덕스러운 박훈에게 마음속의 말을 꺼내기도 했다.
"정암님은 서울에 언제 오십니까."
"정암은 서울에 오지 않을 것이오. 정암은 아직도 자신의 공부가 깊지 않다고 여기고 있는 사람이오."
"낙산 도인께서는 정암님이 세상의 중심에 서게 될 운명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중심이라면 서울이 아니겠습니까."
"초월이 정암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구려."
"맞습니다. 정암님을 그림자처럼 뒤에서 돕고 싶어 그렇습니다. 한훤당 어른의 적소에서 쫓겨날 뻔했던 나를 구해준 은인이기 때문입니다."
"편지를 써주면 내가 전해주겠소."
"소용없는 일입니다. 정암님은 저를 대할 때 얼음처럼 냉정하십니다."
"공부하는 데 지장이 있으니 그럴 겁니다."
"서울에 들러 문인들과 탁마하는 것도 공부가 아니겠습니까. 명경을 차린 이유 중에 하나도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헌데 정작 명경의 주인공인 정암님이 오시지 않으니 문득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편지를 하지 않겠다면 방금 얘기한 말을 반드시 정암에게 전해주겠소. 아니, 전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초월이의 맑은 마음이 어찌 전해지지 않겠소. 반드시 응답이 있을 터이니 너무 성급해하지 말구려."
박훈의 말은 하나도 거슬리는 데가 없었다. 말씨의 부드러움은 봄바람 같았고, 언행은 법도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초월은 박훈에게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그러자 박훈은 초월에게 자신의 손수건을 내주며 타일렀다.
"정암을 이해하시구려. 정암이 우리처럼 나서지 않는 것은 하늘의 뜻인 줄도 모르겠소. 세상에 더 크게 쓰이기 위해 하늘이 그를 더 숨어 있게 하는 것이 틀림없소. 그렇게 밖에 생각이 안 드오. 그러니 정암을 돕는 것은 그가 더 숨어 있게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겠소."
그날 이후 초월은 자신의 마음을 누구에게도 내비친 적이 없었다. 박훈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냈고, 또한 박훈의 말이 옳았던 것이다.
훗날 조광조의 동지가 된 사람들 중에서 서울 인수방(人壽坊)에 살면서도 명경에 가장 늦게 출입한 사람은 김구(金絿)였다. 그는 조광조보다 6살 아래였으나 16세에 한성시에 장원으로 뽑힐 만큼 천재였으므로 장안에 소문이 자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명경에 늦게 나타난 것은 왕희지의 필법과 문장에 대한 자존심이 누구보다 컸기 때문이었다. 명경에 드나드는 김식이나 박훈을 만나지 않고도 스스로 도학을 일구어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초월은 자신보다 어린 김구였으나 예를 다 갖추어 대했다. 그러자 김구는 초월이 마음에 들었던지 즉석에서 왕희지의 필법을 본받은 서체로 글을 한 점 써내려갔다.

順天者存 逆天者亡
하늘에 순종하는 사람은 살고
하늘에 거역하는 사람은 망한다.

김구는 하늘을 '하늘의 도'라고 생각하며 글을 쓰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는 도학의 입장에서 그렇게 해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붓을 벼루에 천천히 내려놓으며 김구는 방금 쓴 글의 뜻을 자신의 방식대로 중얼거렸다.
'하늘의 도에 순종하는 자는 살고, 하늘의 도에 거역하는 자는 망하도다.'<계속>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는 화순군 홈페이지와 동시에 연재됩니다.
☞ 화순군 홈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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