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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리석음을 따를 수 없다"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道'] 제5장 폭군의 몰락 <27>

입춘 날.
초설은 혜화문 밖에다 심정의 소개로 사두었던 폐가를 개조하여 다장을 차렸다. 이삿짐을 정리하는 데 심정의 하인들이 이른 아침부터 찾아와서 도와주었다. 초설은 용인에서 일꾼을 대여섯 명 데려왔으므로 심정의 하인까지는 필요가 없었으나 심정의 호의를 뿌리치지는 못했다.
십여 명의 힘센 하인들이 추녀 밑에 처진 거미줄을 거두고 집 안팎을 쓸고 닦으니 저녁나절 무렵에는 먼지가 부옇던 폐가가 번드르르한 다장으로 변했다. 방안의 병풍과 그림, 그리고 기둥에 내건 주련(柱聯)의 글은 초설이 고르고 지시하여 배치하였다.
마지막으로 대문 서까래 끝에 둥그런 등롱을 달고 불을 켜니 오가는 행인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심정이 퇴궐하여 말을 타고 왔다. 초설과 심정의 하인들이 달려와 심정을 맞았다.
"나으리, 아직 정돈하지 못하여 누추합니다. 이렇게 빨리 오셔서 격려해주시니 고맙사옵니다."
심정은 뒷짐을 진 채 공자의 말로 여겨지는 주련의 글을 보더니,

밝은 거울은 얼굴을 살펴보는 수단이고,
지난 일은 지금을 아는 수단이다.
明鏡所以察形
往者所以知今

하고 소리를 내어 읊조렸다. 그런 다음 초월을 돌아보며 말했다.
"부탁이 있으면 언제든 망설이지 말고 말하시오. 그래도 관복을 입고 대궐을 출입하니 세상 사람들이 내 말을 듣는 척이라도 하지 않습니까. 이 관복을 벗고 하루만 지난다 해도 우리 집 앞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을 것입니다. 변화무쌍한 것이 세상 인심이라니까. 하하하."
심정은 두 손을 들어 자신의 관복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말했다.
"나으리, 입춘이라지만 춥습니다. 어서 드십시오."
"집에서 보낸 아랫것들이 시키는 말은 잘 듣습니까. 일손이 더 필요하다면 내일 다시 보내드리겠습니다."
"이제 손 볼 데는 다 보았사옵니다. 오늘 하루 도와주신 것만도 감사하고 부담스럽사옵니다."
"허허. 초월이는 이래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니까. 내 도와주고 싶어서 기꺼이 마음을 내어 그런 것인데 부담스럽다니, 다시는 그런 말하지 마시오. 섭섭하오."
"나으리, 죄송합니다."
"그렇다고 죄송할 것까지야 있겠소."
심정은 자신의 집에서 온 하인들을 보더니 냅다 소리를 지르며 마루로 올라섰다.
"피죽도 못 먹은 가난한 집 아랫것들같이 비실비실 해서는 안 될 것이야! 마당이 패이도록 쓸고 마루에 얼굴이 비치도록 닦거라. 알겠느냐."
심정이 소리치는 것은 초월에게 자신의 호의를 더 드러내기 위한 수작이었다. 하인들은 이미 집안일을 끝내고 잠시 쉬고 있는 중이었다.
"나으리, 종일 쉬지 않고 일했사옵니다. 이제 돌아가 쉬어야 할 것이옵니다."
"일을 더 시키다 달이 뜨면 보내지 그러오. 아랫것들의 버릇을 잘 알지요. 주인이 없으면 너구리처럼 꼼짝 않고 죽은 체하고 있는 놈들이오."
방으로 들어와 앉아서도 심정은 자신의 관복을 이리저리 건드려보며 만족해했다. 연산주 8년에야 별시문과를 급제하여 품계는 높지 않았지만 명망 있는 선비들이 모두 사화를 당하거나 초야에 숨어드는 바람에 홍문관 수찬(修撰; 정6품)에 올라 조정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30대 초반의 심정이었다. 그러니까 심정은 20대의 조광조와는 10여 살의 나이 차이가 났고, 나라의 녹을 먹은 지 몇 년밖에 안된 신진 벼슬아치였다.
"용인에서 서울로 올라온 특별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구려."
"스승님이 서울에 살고 있어서입니다."
"스승이라니, 어디 사는 누구시오."
"낙산에 계신 도인이옵니다."
"낙산 도인이라면 금강산 중이었던 갖바치가 아니오."
"맞습니다. 그 어른이옵니다."
"낙산에 도인이 있다는 말은 나도 들어보았소. 헌데 그 자에게 무얼 배울 것이 있다는 말이오. 차라리 용인의 조광조를 만나는 것이 더 도움이 되지 않겠소."
초설은 심정이 조광조를 알고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나으리, 그 말씀이 진정이옵니까."
"그렇소. 조광조는 비록 나이는 나보다 10여 살 아래지만 학문으로 치자면 나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할 것이 없는 사람이오."
"정말이옵니까."
"내가 용인에 갔을 때 조광조를 만난 적이 있소. 그때 주자(朱子)가 남긴 <근사록>을 가지고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의 그릇을 알아볼 수 있었소."
"그분의 공부가 그리 깊사옵니까. 나으리 안목으로 보셨다면 틀림없을 것이옵니다."
초설은 심정이 조광조를 추켜세우는 것이 싫지 않았다. 초설은 심정이 자신을 칭찬하는 것처럼 미소를 지었다. 심정은 표정이 환해진 초설을 의아하게 쳐다보면서 말했다.
"조광조를 알고 있는 것 같구려."
"사실은 그렇사옵니다."
"평안도 희천에서 한훤당 어른의 잔심부름을 하고 있을 때부터 알고 있었사옵니다."
"잘 사귀어 두면 좋을 것이오. 세상이 어수선하여 과거에 뜻이 없어 그렇지, 만약에 벼슬을 한다면 나라의 큰일을 할 사람이오. 용인에 있는데도 그의 사람됨이 소문이 나 팔도의 젊은이들이 그의 초당으로 몰려들 정도니까 말이오."
"나으리께서도 그분의 명성을 듣고 찾아간 것이옵니까."
"그렇소. 세상이 바뀌어 내 뜻을 펼치려면 조광조와 같은 유능한 후배들이 반드시 필요할 터이기에 만나보았던 것이오."
"나으리,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나으리, 그분을 도와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정암을 만났을 때, 세상이 갑자기 바뀔지 모르니 항상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으라고 조언해 주었소. 그랬더니 정암이 나를 잊지 않고 안부를 묻는 서신을 몇 번 보내기도 했소."
심정은 문과를 급제한 문반이면서도 무과 출신의 무반의 벼슬아치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무과 출신들은 성격이 직선적이고 배포가 세서 심중의 말을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뱉는 경향이 있었는데, 심정은 그러한 무과 출신들을 좋아했다. 생각이 단순하여 의심하는 마음이 적고 늘 솔직하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무과 출신들은 심정의 계책이나 빠른 머리회전을 부러워했다. 심정을 '꾀주머니'라고 부르며 친분을 유지하려 했던 것도 심정에게 바로 그런 재주가 있어서였다.
무반의 벼슬아치들은 심정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하지 않고 조정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곤 했다. 특히 채홍사가 되어 연산주의 신임을 얻은 임사홍이나 벼슬아치 장사를 하여 갑부가 된 윤필상은 그들의 주된 표적이 되었다.
어떤 술자리에서는 임사홍을 비호하는 연산주가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저수지의 둑이 터질 때는 조그만 들쥐 구멍에서 시작하듯 모반이란 것도 같은 이치였다. 불만이 지속되다 보면 동조자들이 모이게 되고 마침내 역모로 변하기 마련이었다. 머리회전이 빠른 심정은 벌써 무인들에게서 모반의 냄새를 맡고는 머잖아 세상이 바뀔 것이라고 믿었다.
무반의 벼슬아치들 가운데 박원종은 연산주에 대해서 유독 한을 품고 있는 사람 중에 하나였다. 박원종이 마련한 술자리에 심정도 초대를 받아 갔을 때, 술에 취한 박원종이 피를 토하듯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나에게 원한이 하나 있다네. 내 누이가 월산대군의 부인이 아니었는가. 왕족의 부인을 대궐 안으로 불러들여 몹쓸 짓을 한 군주를 무어라 불러야 하겠는가. 삼강오륜이 뭔지도 모르는 시정의 잡배만도 못하지 않는가 말이야. 나는 반드시 자살한 누이의 한을 풀어주고 말 것이네. 억울한 여인들이 어찌 내 누이뿐이겠는가. 이런 패악질을 충동한 놈이 바로 임사홍이란 똥걸레가 아닌가. 지난해 임사홍이란 놈이 각 고을에서 3백 명의 처녀를 운평(運平; 기생)이라 하여 서울로 뽑아 올려 연산에게 바치지 않았는가. 간을 빼내어 씹어 먹어도 이 박원종이의 분은 풀리지 않을 것이네. 이보게 심정, 말 좀 해보게. 나라를 말아먹고 있는 놈이 임사홍 일당이 아닌가. 어찌 임사홍 일당에게 나라를 맡길 것인가. 우리가 나서 임사홍 같은 천하의 간신들을 처단하고 나라를 바로잡아야 할 것이 아닌가."
겉으로는 임사홍을 욕하고 있으나 사실은 역모에 동조하라는 얘기였으므로 아무도 대답을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는 시늉을 했다. 심정도 이미 박원종의 배포는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로 대범한지는 알지 못하였으므로 입을 꾹 다물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심정이 조광조를 만나 그런 낌새를 슬쩍 띄운 것은 훗날 조광조가 반드시 필요하리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벌써 조광조의 학문은 소리 소문 없이 팔도로 퍼져 젊은 사림 중에서 단연 앞서가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심정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 중에는 동갑지기 남곤(南袞)도 있었다. 남곤은 성종 20년에 생진사시를 동시에 합격한 문장가로 제법 명망이 높아 연산주 초기까지만 해도 홍언충, 박은, 이행 등 소위 일류 선비들과 어울렸다. 그러나 김종직의 문인인 남곤은 자신의 능력과 재주를 출세의 도구로만 삼았기에 벼슬하기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청류 사림들에게 은근히 따돌림을 받곤 했다. 더욱이 그의 눈동자는 겹(重瞳)이어서 어디를 쳐다보는지 애매하여 첫인상부터 상대에게 신뢰감을 주지 못했다.
남곤은 타고난 재주에 비해 관운도 따르지 않는 편이었다. 김종직의 문인들에게 늘 따돌림을 당하는 처지인데도 김종직의 문인이란 이유로 갑자년에 서변(西邊)으로 유배를 갔던 것이다. 유배 중인 그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낸 사람은 김종직의 문인들이 아닌 심정이었으므로 그들은 이심전심으로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참 재수 없는 사람이지."
"나으리, 누가 재수 없다는 말씀인지요."
"초월이, 남곤을 아시는가. 자가 사화(士華), 호는 지족당(知足堂)이고."
"그 어른께서 왜 재수가 없다는 것입니까."
"임사홍을 찾아가 엽전꾸러미를 던져주고 조금만 사정을 했어도 갑자년의 고비를 잘 넘겼을 텐데 유배를 가 지금 생고생을 하고 있으니 말이오."
"형벌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옵니까."
"돈으로 안 되는 것이 무에 있겠소. 어서 술이나 한 잔 따르시오."
심정은 초월이 묻는 말을 피해갔다. 세 치의 혀 때문에 몸을 망칠 수도 있으므로 세상의 말을 함부로 전할 수 없었다. 심정은 엉뚱한 말을 꺼내 화제를 돌렸다.
"정암은 행복한 사람이오."
"왜 그러하옵니까."
"초월이가 사모하고 있으니까."
"나으리."
초월은 얼굴이 붉어지면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심정은 별 생각 없이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으나 초월은 무엇을 들킨 사람처럼 허둥대었다.
"아니, 무얼 그리 당황해하는 것이오."
"나으리, 아무리 농담이라도 과하시옵니다."
"당황해하는 것을 보니 사실인 것 같소. 같은 남자로서 마음에 질투가 나는 것 같구려. 하하하."
심정은 농담으로 얼버무렸지만 진심이었다. 호탕하게 웃었지만 마음속으로 10여 살 아래의 조광조에게 질투의 감정이 솟구침을 느꼈다. 그러나 심정은 졸장부가 아니라는 것을 초월에게 과시하고 싶었다.
"나에게 정암을 도와주라고 했는데, 어떻게 도와주면 좋겠소."
"특별하게 생각해 두었던 것은 없사옵니다. 다만 도와줄 기회가 온다면…."
"초설이 부탁한 것인데 여부가 있겠소. 걱정 마시오. 부탁을 잊지 않고 그리하겠소."
"나으리, 약조하셨으니 술 한 잔을 또 받으셔야 하옵니다."
"술 한 잔뿐이겠소. 초설이가 주는 술이라면 밤새라도 마시겠소. 다만."
"다만 무엇이옵니까."
"내 진심도 잊지 말아주었으면 좋겠소."
"호호호. 나으리 은혜를 어찌 잊겠사옵니까. 이 다장도 나으리께서 소개해 주지 않았더라면 결코 얻지 못하였을 것이옵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초설이 하는 일이라면 무슨 부탁인들 들어주지 못하겠소."
"나으리, 감사하옵니다."
"헌데 초설이는 무엇을 하려고 다장을 하는 것이오. 혼인을 하면 이런 장사를 하지 않고도 편히 살 수 있는 것 아니겠소."
"첩으로 오라는 데가 더러 있었사옵니다. 허나 저의 팔자는 남자 복은 많으나 혼자 살아갈 운명이라 하옵니다."
"남자 복이 많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일편단심 한 남자에게 지조를 지키며 살아갈 얼굴이오."
"나으리, 관상을 볼 줄 아시옵니까."
"관상 공부를 한 적은 없지만 그런 느낌이 들어 해본 말이오."
초월이 짓궂게 물었다.
"나으리, 제가 지조를 지켜야 할 남자는 누구이겠습니까."
"내가 묻고 싶었던 말이오. 그 자가 누구인 것이오."
"호호호."
초월은 대답을 웃음으로 대신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답인 셈이었다. 그러나 심정은 초월이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이를 조광조라고 생각했다. 심정은 취기를 빌어 말했다.
"초월이의 사랑이 누구인 줄 나는 알고 있소. 바로 정암이 아니오."
"틀렸사옵니다."
"그렇다면 누구란 말이오."
"나으리,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지 않습니까. 설령 제가 그분을 좋아한들 그분이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데 어찌 그것을 사랑이라 할 수 있사옵니까."
"하하하."
"나으리, 웃지 마십시오. 초월이는 슬픈 소녀이옵니다. 저더러 사모하는 감정마저 거둬달라고 하는 분이 바로 그분입니다."
"무심한 사람 같으니라고. 짝사랑마저 가져가라고 하니 말이오."
"나으리, 그래서 초월이는 외롭고 고독합니다."
초월이의 고백을 들은 심정은 술을 한 잔 더 자작으로 따라 마셨다. 오랜만에 마셔보는 참으로 기분 좋은 술이었다. 초월이와 조광조는 사랑을 나누는 사이가 아닌 초월이 짝사랑하는 관계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짝사랑이란 세월이 흐르거나 더 끌리는 상대가 나타나면 불길처럼 뜨겁다가도 차가운 재처럼 식어버리는 법이었다. 심정은 초월이 듣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승사자 같은 연산에게 허리를 굽혀 무오, 갑자사화에도 살아남은 위인이 누구인가. 천길 낭떠러지 길을 한 걸음도 조심, 두 걸음도 조심하며 목숨을 부지해 온 심정이 아닌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여기까지 살아 온 심정이 아닌가. 초월이가 나를 좋아할 때까지 기다리는 일쯤이야 식은 죽 먹기가 아닌가. 땅 짚고 헤엄치기가 아닌가 말이야.'
심정이 술에 취해 벽을 쳐다보며 혼잣말을 계속하자 초월이 심정에게 다가가 말했다.
"나으리, 무슨 사연이 그리 깊사옵니까. 저에게 무엇을 숨길 것이 있어 혼자 말씀을 하시는 것이옵니까."
"초월이."
"나으리, 말씀하십시오."
"내가 살아 온 얘기를 좀 해야겠소. 사람들은 나보고 비겁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옳지 않은 말이오. 늪에 빠졌을 때 어찌 해야 살아남겠소. 빠져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더 빠지는 늪에 서 있다면 말이오. 그때는 빠진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야 그나마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것 아니겠소. 무슨 말인지 초월이는 이해하리라 믿소. 나는 그리 살아 왔소. 나에게 재주가 하나 있다면 끝없이 기다리는 것이라오. 그것을 함부로 비겁하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오."
"늪에 빠져 죽어 가는 사람이 있는데도 자신의 목숨만을 지키고자 보고만 말 것이옵니까."
"내 그릇은 크지 않소. 군자가 될 수 없는 내 운명을 어찌 하겠소. 살아남아서 내 가족이라도 굶지 않게 하고 내 가문을 책임져야 하지 않겠소."
"형제분이 없사옵니까."
"과거에 급제한 의(義)라는 동생이 있지만 의는 벼슬을 버리고 어리석은 자로 자처하며 숨어 살뿐이오."
실제로 심정의 동생 심의는 선비들이 왕담(王湛) 같은 사람이라고 여겼다. 진나라 왕제(王濟)의 숙부 왕담이 젊었을 때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재주를 감추고 세상일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살았는데, 바로 그 고사(古事)를 들추며 심의를 조선의 왕담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실제로 심의가 벼슬을 버리고 바보처럼 행세하여 사화를 면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의 어리석음을 따를 수 없다'고 말하였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심정은 동생을 만나면 너야말로 참으로 어리석은 자라고 면박을 주었다. 자신처럼 벼슬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굳이 왜 벼슬을 버리고 숨느냐는 꾸중이었다. 그래도 심의는 끝까지 형인 심정이 참으로 어리석다고 믿었다. 어느 날인가 심의가 심정의 집에 들러 쥐구멍을 가리키며 '이것은 형이 다음날에 나가고 싶어도 찾지 못할 것이니, 오늘 시험 삼아 한번 나가보는 게 어떠시오' 하고 말한 적도 있었다.
심의가 말한 쥐구멍이란 사지에 이르러서도 살아날 구멍, 즉 지금은 폭군의 시대이니 벼슬을 버리고 숨어살라는 말이었으나 심정이 동생의 말을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심정 나름대로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가는 요령을 터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처럼 그렇게 훌훌 털어 버리고 사는 것이 편하기야 하겠지만 나는 지금도 의를 어리석다고 생각하고 있소."
"나으리, 동생 분은 결코 어리석지 않사옵니다. 좋은 시대를 만나지 못해 어리석은 체할 뿐이옵니다. 좋은 시대가 오면 반드시 동생 분에게 살아갈 지혜를 구할 것이옵니다."
"초월이의 생각이 정녕 그러한 것이오."
"제 생각이 아니옵니다. 낙산 선생님께서 선비가 세상에 나가지 않을 때가 있고 나서야 할 때가 있다고 했사옵니다. 동생 분께서는 지금은 숨어야 할 때라고 여기고 계신 것이옵니다."
"듣고 보니 초월이의 말이 옳은 것도 같소."
심의와 친하게 지내는 성세창, 서경덕, 홍사부 등을 결코 어리석다고 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들 모두 벼슬하기를 꺼리어 세상에 나서지 않을 뿐 재주가 비범하고 학문에 능한 인물들인 것이었다.<계속>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는 화순군 홈페이지와 동시에 연재됩니다.
☞ 화순군 홈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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