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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악들을 베어버리는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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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구악들을 베어버리는 칼'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道'] 제5장 폭군의 몰락 <26>

사위가 캄캄해지면서 바람은 그치었지만 이따금 눈송이가 나붓나붓 내리었다. 낮처럼 눈발이 거세게 흩뿌릴 기미는 아니었다. 초설은 방문 밖에 서서 갖바치와 조광조가 나누는 얘기를 엿듣곤 했다. 그러한 그녀의 머리와 어깨에 눈송이가 점점이 얹혀졌다가 스러지곤 했다.
술에 취한 두 사람의 목소리는 방문 밖까지 또렷하게 들려왔다. 조광조는 천민인 갖바치에게 시종 예를 갖추어 말하고 있었다. 조광조의 공손한 말투 속에는 갖바치에 대한 존경의 마음까지 담겨 있었다.
"대사께 양반들이 가끔 찾는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사람들은 자신의 앞날을 불안해하지요. 너나없이 앞날을 알고 싶어 그러합니다."
"그럼, 대사께서는 사람의 앞날을 알 수 있다는 말입니까."
조광조가 취기를 가라앉히려는 듯 고개를 흔들며 흥미 있어 하자, 갖바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신통(神通)을 얻지 않은 선남선녀라도 누구나 알 수 있지요.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입니까."
갖바치는 조광조에게 술 한 잔을 더 강권하며 크게 웃었다.
"하하하."
조광조는 단숨에 술잔을 비우며 말했다.
▲ 정암선생 적려유허비. ⓒ프레시안

"벌주를 마셨으니 대사께서는 숨김없이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제가 술잔이 아닌 큰 막사발에다 벌주를 내리겠습니다."
"허허, 무슨 비법이 있어서 앞날을 아는 것이 아니지요. 맑은 물 밑의 돌멩이가 보이듯 사람의 숨은 운명이 보이는 법입니다."
조광조는 서투르게 합장하며 말했다.
"대사께서는 누구나 알 수 있다고 하면서 왜 저에게는 말씀해 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어렵지 않다니까요. 오늘의 내 운명을 알고 싶으면 어제의 나를 돌아보면 보일 것이요, 내일의 내 운명을 알고 싶으면 오늘의 나를 들여다보면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이것을 불가에서는 인과(因果)라고 합니다."
"인과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씨앗을 심었으니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좋은 씨앗을 심으면 좋은 열매를 맺는 법이지요."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고작 이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허나 손님들은 자신이 자기의 운명을 만드는 줄 모르고 자신의 운명을 알고자 합니다. 답답하지요."
"그럴 때는 어떻게 말합니까."
"할 수 없이 사주(四柱)라는 방편을 쓰지요. 태어난 시(時)와 일(日), 월(月), 연(年)을 사주라 하지 않습니까."
"사주는 정해진 운명입니까."
"태어난 사주를 어떻게 바꾸겠습니까.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이 사주입니다."
"사주의 운명을 바꿀 수 없는데도 왜 사주를 보는 것입니까."
조광조는 취기를 가까스로 누르며 막힘없이 얘기하는 갖바치에게 묻곤 했다.
"바꿀 수는 없다 해도 조심을 하면 그 운명을 피해 갈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대사의 변재(辯才)를 저는 따를 수 없습니다. 외람되지만 저의 사주를 보아 줄 수는 없겠습니까."
"정암의 사주를 빈도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대사께서 저의 사주를 알고 있다는 말입니까."
조광조는 몹시 놀라 들었던 술잔을 놓으면서 갖바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갖바치는 초설이 서 있는 방문 밖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초설은 들키기라도 한 듯 움찔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초설에게 물어보았소. 한훤당의 제자 중에 나라의 동량이 될 만한 사람의 사주를 알아 오라고 했던 것이오."
"초설이 저의 사주를 알고 있었다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초설이는 정암을 사모하고 있지요."
"대사님, 저는 이미 내자가 있는 몸입니다. 선비들이 첩을 두기도 하나 저는 도학을 더 깊이 닦기 위해 여색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하오니 초설에게 사모의 정을 거두라고 전해주십시오."
"전해주겠소만 한 여인을 지극히 사랑해 보지 않고 어찌 백성을 사랑할 수 있겠소. 그렇지 않습니까."
"초설에게 인(仁)으로 대할 수는 있지만 남자로서 흐트러짐을 경계하겠다는 것입니다."
"정암은 깊은 사랑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오. 어찌 빈도의 말 한 마디로 초설이의 오래 된 정이 끊어질 수 있단 말이오. 낮과 밤의 기운이 만나 안개가 피어오르듯 사랑도 짝이 있으니 생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갖바치가 놀리듯이 말하자 조광조는 화제를 바꾸었다.
"초설이 알려준 제 사주는 어떤 것입니까. 틀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노천에게 들은 것이니 정확할 것입니다."
"노천이라면 김식에게 전해 들었단 말입니까."
"정암은 초설이가 노천을 만나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는 말입니까. 그러고도 어찌 가까운 동지라 할 수 있겠소."
▲ 사액서원인 죽수서원의 편액. ⓒ프레시안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제가 태어난 시(時)는 무어라 했습니까."
"시는 모른다고 했지요."
"제가 태어난 일은 무어라 했습니까."
"10일이라 했소. 그러니 신유(辛酉) 일이지요."
"제가 태어난 월은 무어라 했습니까."
"8월이라 했소. 그러니 무신(戊申) 월이지요."
"제가 태어난 연은 무어라 했습니까."
"성종 13년이라 했소. 그러니 임인(壬寅)년이지요."
조광조는 자신의 사주를 알고 있는 갖바치에게 항복하듯 술잔을 올렸다.
"잠시 의심했던 것을 대사님께 사과드리겠습니다. 허나 여전히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오."
"왜 하필이면 저의 사주를 보았던 것입니까."
"지금 우리 조선은 혹독한 겨울에 접어들었소이다. 이때는 모두 두꺼운 옷을 입고 나서지 말아야 할 때이지요. 허나 봄에 입을 옷을 준비하고 있어야 할 때이기도 하지요."
"대사께서는 무슨 의도로 이런 얘기를 저에게 하시는 것입니까."
"의도는 없지요. 제 눈에 보이는 대로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어찌 도 닦는 사람이 거짓을 말할 수 있겠소. 빈도는 천민입니다. 세상의 운을 얘기할 수는 있으나 세상을 바꿀 만한 힘이 없는 천민이지요. 허나 정암은 빈도와 출신이 다릅니다. 장차 정암의 말 한 마디는 칼이 될 수 있지요. 조정에 나아가 낡고 바르지 못한 구악(舊惡)들을 베어버리는 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 사주를 보았던 것입니까."
"정암뿐만 아니지요. 정암이 앞에 설 때 수족이 될 만한 동지들을 이미 모두 보았소."
"누구를 보았단 말입니까."
"남의 사주를 알아 어찌하시려고 그러시오. 정암 자신의 운명만도 헤쳐가기가 버거울 텐데 말입니다."
조광조는 취중에도 방금 들은 갖바치의 말이 자신의 목덜미를 차갑게 낚아채는 것을 느꼈다. 갖바치는 지금 자신의 운명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더구나 갖바치의 얘기대로라면 자신의 운명은 바뀌는 세상의 중심에 서게 돼 있었다. 갑자기 조광조는 자신에게 다가올 앞날이 불안했다. 그런 운명이 버거웠다. 자신이 낡고 바르지 못한 것들을 베어내는 칼이 된다니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역할이었으므로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방문 밖에서 눈송이를 맞으며 두 사람의 얘기를 엿듣고 있던 초설이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김굉필을 시봉하면서 보았듯 도학자는 무릇 세상을 떠나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학처럼 고고하고 조용하게 사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 함께 조정에 나아가 낡고 바르지 못한 구악들을 도려내는 것이 조광조의 운명이라니 어마어마한 비밀을 들여다본 듯 몹시 두려웠다.
초설은 가슴이 뛰어 그 자리에 더 있지 못하고 물러섰다. 부엌방으로 돌아와 누웠으나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었다. 조광조의 그림자가 되어 그를 조선의 빼어난 도학자가 되게 하고 싶었는데, 소인들의 술수가 난무한 조정으로 나가게 된다니 걱정이 되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초설은 자리에서 일어나 얼음물처럼 차가워진 숭늉을 한 그릇 마셨다. 그리고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정암님이 조정에 나가지 못하게 막을 것이다. 그것이 정암님을 지키는 일일 것이다. 정암님이 공부만 할 수 있도록 하고 말 것이야. 그래서 정암님이 해와 달처럼 세상에 빛나는 도학자가 되게 하고 말 것이야.'
그러나 초설은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이 무슨 방법으로 조광조의 운명을 바꾼단 말인가. 자신이 조광조에게 무슨 존재인 것이기에 조광조가 자신의 말을 듣는단 말인가. 자신은 조광조의 아내도 첩도 아랫것도 아닌 것이다. 그래도 초설은 자신의 가슴 속에서 조광조를 지울 수 없었다. 평안도 희천에서 도둑고양이를 지키지 못하여 말리던 꿩을 잃어버렸을 때 김굉필에게 야단을 맞고 있던 중, 김굉필의 제자들 중에서 단 한 사람, 조광조가 나서서 자신을 두둔했고 결국 김굉필은 노여움을 풀었던 것이다.
'정암님을 가까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정암님의 동지들을 도울 수는 있을 것이야. 갖바치 어른께서도 정암님이 두령이 되면 정암님에게 사람들이 몰린다 하지 않았던가. 그들을 돕는 것도 정암님을 돕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야. 정암님이 나를 어찌한다 해도 원망하지 말자.'
초설은 도무지 자신을 받아들일 기미가 없는 조광조에게 섭섭한 마음을 거두었다. 그제야 마음이 진정되어 초설은 다시 밖으로 나가 갖바치와 조광조가 나누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한천은 이미 곯아떨어졌는지 코를 고는 소리가 뒷방에서 들려왔다.
갖바치의 목소리는 여전히 힘이 넘쳤으나 조광조는 술에 취한 듯 했던 말을 반복하곤 했다.
"대사님, 다시 한번 듣고 싶습니다. 제 사주의 운명을 말입니다. 성종 13년, 8월 10일에 태어났으니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을 테고 계절은 어김없이 가을로 접어드는 백로를 사흘 앞둔 임인년(壬寅年) 무신월(戊申月) 신유일(辛酉日)일 것입니다."
"듣잘 것 없는 빈도의 얘기에 적잖이 놀란 모양이오. 빈도가 초장에 불가의 인과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앞날의 운명은 오늘 내가 무슨 생각으로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오늘의 내 모습에 달린 것이지요."
"사주의 운명을 안다면 적어도 가시밭길은 피해갈 수 있는 지혜를 얻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다시 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서 얘기한 것과 다르게 말씀드리겠소. 태어난 달과 일이 강한 금(金)의 기운, 즉 쇠의 기운을 받고 있어요."
"금의 기운은 무엇을 말합니까."
"강하고 구부러지지 않는 것이 쇠가 아니겠소. 하늘의 뜻을 땅에 관철시키려는 기세가 산이라도 무너뜨릴 것 같소,"
▲ 정암영정. ⓒ프레시안

"달과 일의 운명에서는 무엇을 조심해야 합니까."
"강직한 사람에게는 추진력이 있지요. 허나 양보와 타협을 모르니 자신이 고독해질 수 있소이다. 부딪히면 갈등이 생기고 도전을 받고 시련을 겪게 되겠지요. 또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정암은 호랑이해에 태어났습니다. 허나 태어난 달은 원숭이달입니다. 두 짐승은 공생을 못하지요. 먹고 잡혀 먹히는 충돌이 있을 뿐입니다. 잡혀 먹이는 짐승에게 한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이 운명에는 무엇을 조심해야 합니까."
"내가 무엇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하지요. 호랑이는 호랑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하고 원숭이는 원숭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알겠습니까. 다시 말하자면 무엇을 가리려는 시비를 버려야 합니다. 유도는 불도와 달리 시비에 집착하는 바가 큽니다. 선비들은 군자냐 소인이냐 하고 밤낮으로 가리지 않습니까. 시비를 가리는 데는 충돌이 있을 뿐입니다. 충돌이 생기면 불꽃처럼 서로의 기를 소모하다가 재가 되어 스러질 따름이지요."
갖바치는 조광조가 알 듯 모를 듯한 운명의 얘기를 한동안 계속 이어나갔다.
"태어난 해는 금(金)의 기운이 강하다고 했습니다. 헌데 태어난 달은 목(木)의 기운이 있습니다. 마음속의 쇠붙이와 나무가 부딪치면 어떠합니까. 처음에는 나무가 꺾이겠지만 나중에는 쇠붙이도 부러지고 맙니다. 충돌하면 결국에는 상극이지요."
어느새 조광조는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양극단을 모두 가지고 있는 화약고 같은 것이 자신의 운명인 것이었다.
"대사님, 상생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시비를 떠나 마음을 비우는 것이지요."
"시비를 가리는 것이 선비의 근본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유도의 울타리 안에서는 시비를 초월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인(仁)을 유도의 중심에 내세웠을 것입니다. 시비도 산과 같은 너그러움의 인(仁) 앞에서는 스치는 빗방울 소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소."

그러나 조광조는 고개를 꺾고 눈을 감고 있었다. 대취하여 그대로 잠에 빠져 있었다. 갖바치는 쓰러진 조광조를 사랑채 윗방에 눕히고는 밖으로 나왔다. 갖바치는 초설이 밖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놀랐다.
"아직 자지 않고 있었던 게냐. 그러고 보니 술상을 보려고 그랬던 게구나. 어서 들어가 자거라."
"선생님, 차를 드시겠습니까."
"난 술이 다 깨어 정신이 오히려 맑아졌다. 정암은 술을 좀 하는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는 약하구나. 좀 전에는 술이 깬 듯 얼굴이 희어지더니 이내 쓰러지고 마는구나."
"삼경입니다. 초저녁부터 마셨으니 넘어지지 않을 장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모처럼 기분 좋게 통음을 했구나."
"선생님, 저 달을 보십시오. 산등성이 아래로 굴러와 있지 않습니까."
"하루 종일 눈이 내리다 말다 하더니 이제는 완전히 그쳤구나. 구름이 걷히고 달이 떴으니 더 이상 눈은 내리지 않을 것이다."
갖바치와 초설은 마루에 걸터앉아 눈 위에 쏟아지는 달빛을 보고 있었다. 눈은 은가루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초설아, 정암이 그리도 좋으냐."
갖바치는 조광조를 향한 초설의 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소저도 제 마음을 잘 모르겠습니다."
"정암은 바위 같은 사람이야. 정암의 관심은 오로지 도학일 뿐이야. 내가 정암에게 너를 얘기했더니 사모의 정을 거둬달라고 하지 뭐냐."
"사실은 저도 밖에서 들었습니다."
"정암이 그 말을 할 때도 대취해 있었다만."
"정암님은 술이 취했을 때난 깨어 있을 때나 같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말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래, 포기하겠다는 것이냐."
초설은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으면서 말했다.
"사모의 정을 세월에 맡겨두겠습니다. 세월이 흐르다 보면 잊혀지지 않겠습니까. 다만, 정암님의 그림자가 되어 정암님을 돕고 싶습니다. 그것이 정암님에게 은혜를 갚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평안도 희천에서의 일을 말하는구나."
"그때 정암님이 나서서 저를 감싸주지 않았더라면 저는 한훤당 선생의 적소에서 쫓겨났을 것이고, 배우고 싶었던 <소학>도 공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갖바치는 초설의 마음이 이미 조광조에게 굳어져 있음을 느끼고는 더 이상 만류하지 않았다.
"선생님, 정암님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십시오."
"정암은 너의 도움을 거절할 터이니 그의 동지들을 도와주는 방법이 있겠구나. 언젠가 그들은 한 배를 타게 될 것이니 말이다."
"한 배를 타다니요, 무슨 배를 탄단 말입니까."
"이 나라에 무너진 삼강오륜을 바로세우는 개혁의 배다."
"힘없는 소녀가 그들을 어떻게 돕는단 말입니까."
"너의 힘이야말로 절대적일 것이다."
"선생님, 이해할 수 없습니다."
"넌 용인에서 다장(茶莊)을 하여 부(富)를 얻었다. 이제 용인은 너에게 운이 다한 땅이다. 정암에게 마음이 끌려 용인으로 내려갔지만 이제 운이 다한 땅이니 떠나야 마땅할 것이다. 정암의 동지들이 자주 모일 수 있는 서울에 다장을 마련하거라. 그리하다 보면 자연히 너에게 정암의 동지들이 신세를 지게 될 것이다. 다행히 노천이 너를 믿고 좋아하지 않느냐."
▲ 죽서서원유지추모비(1868년). ⓒ프레시안

"사실은 이미 서울에 다장을 마련할 자리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이번에 선생님을 뵈러 온 것도 다장의 장소를 구하러 올라온 것입니다."
"그래, 자리는 정했느냐."
"심정(沈貞)이 소개해 주어 집을 한 채 마련했습니다."
"심정이라면 정암과도 교유가 잦은 사람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너는 전생에 바르게 수행한 비구니였어. 그래서인지 속세의 남자 복은 없지만 살아가는 데 도무지 걱정이 없는 팔자다. 전생에 쌓은 공덕이 크기 때문이야."
"선생님, 혼인의 인연을 맺어야만 남자의 복이 있는 것입니까. 일찍이 한훤당 선생에게 <소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금강산 도인이라 불리시는 선생님을 뵙고 있으니 이보다 더한 정복(淨福)이 어디 있겠습니까."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겠구나. 하하하."
"선생님, 정암님의 동지들을 어떻게 도와야 합니까. 그것이 궁금합니다."
"너나 나나 인과를 믿는 사람이다. 정암의 동지들이 네 다장에 들리거든 술값이든 찻값이든 받지 말거라. 아낌없이 주되 훗날을 생각하여 외상으로 달아 놓아라."
"무주상보시란 주었다는 생각마저 지우라는 보시가 아닙니까. 헌데 받지 말라고 하시면서 외상으로 남기라니요. 무슨 말씀인지요."
"모두가 여여(如如)하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하지만 이 세상에 변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고,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이다. 정암의 동지들 중에는 누군가 배반할 사람도 나올 것이야. 얄궂지만 그것이 받아들여야 할 인생사다. 그러니 술값 찻값을 돌려받아야 할 못난 사람도 있을 것이야."
"선생님, 밤이 깊었습니다. 이제 주무십시오."
"그래, 너도 자거라."
그러나 갖바치는 돌아서며 초설을 불러 세웠다. 무엇이 잡히는 듯 걸음을 멈춘 채 말했다.
"조금 전에 심정이라 했더냐."
"그렇사옵니다."
"그 자를 너무 가까이 하지 말거라."
"정암님과 친분이 두터운 분입니다."
"사람 마음속을 어찌 알 수 있겠느냐."
그래도 초설은 수긍하지 못했다. 대답하지 않고 돌아섰다. 심정은 성격이 싹싹하고 부드러운 말솜씨를 지닌 사람이었던 것이다. 조광조가 오르지 못할 산 같은 존재라면 심정은 자신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봄바람 같은 사람이었다. 김식은 학식을 드러내놓기 좋아하여 상대를 주눅이 들게 하곤 했지만 심정은 그런 적이 없었다.
갖바치가 혀를 끌끌 차면서 중얼거렸다.
"예부터 교언(巧言)에 능한 사람을 경계하라 했거늘, 쯧쯧."
그러나 초설의 마음은 이미 조광조에게 가 있었으므로 심정에게 기울질 염려는 조금도 없었다. 심정이 조광조보다 상대하기가 편할 뿐이었다.<계속>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는 화순군 홈페이지와 동시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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