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 정부의 한미 FTA 추진은 정말 이론적으로 면밀한 검토와 탄탄한 기반에서 실행되고 있는 것인가? 참여정부의 최근 국제정치경제 상황에 대한 사실적 이해가 정확한 것인가? 며칠 전 노무현 대통령이 한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문제를 논하는 자리에서 한미 FTA 비판 세력을 역으로 비판하며 대통령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한미 FTA (일반론으로서의 FTA가 아닌)에 대한 철학과 이론적 이해, 사실관계에 대한 해석 등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밝혔다. 이는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을 보다 이론적, 분석적으로 할 수 있는 몇 가지의 자료 혹은 단서들을 제공한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자료와 단서를 이용하여 서두에 제기한 질문에 답하면서 대통령의 한미 FTA에 대한 인식의 오류를 정리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하에서는 한미 FTA에 대한 대통령의 이론적, 논리적 오류, 그리고 공부의 편식에 대하여 몇 가지 지적하고자 한다.
1. 한미 FTA를 비판하는 이론은 종속이론밖에 없나?
대통령은 진보세력도 변해야 한다며 한미 FTA 반대세력은 시대착오적인 (대통령 스스로도 공부해 보았던) 종속이론을 가지고 한미 FTA를 반대하는 것으로 언급했다.
이 언급은 잘못하면 한미 FTA를 비판하는 이론이 종속이론밖에 없다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고, 또 한미 FTA 반대세력은 모두 종속이론밖에 모르는 진보세력으로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한미 FTA를 반대, 혹은 비판하는 이론은 소위 진보적인 종속이론 이외에도 보수적인 경제이론이 무수히 많이 있다. 필자의 한미 FTA비판도 종속이론이 아닌 이러한 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전략무역정책 이론(Theory of Strategic Trade Policy)
우선, 이미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 시절 대외무역정책의 근간이 되었던 "전략무역정책이론"이 있다. 당시 공공연하게 "관리무역(managed trade)"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클린턴 정부의 대외무역정책은 NEC(National Economic Council)의 의장이었던 로라 타이슨(Laura Tyson)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 교수가 중심이 되어 전개한 전략무역정책이 그 이론적 배경이 되고 있다. 요즈음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로도 유명한 천재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Paul Krugman)이 한 때 열렬히 주장하고 다니다 우여곡절 끝에 등을 돌린 이론이 바로 전략무역정책 이론이다.
이 이론은 당시 잘 나가던 일본의 경제적 성공(economic performance)을 설명하기 위하여 개발된 것인데 산업 경쟁력을 키우기 위하여 자유무역이 아닌 보호무역의 유용성과 국가의 전략적 개입을 정당화하는 측면이 있다. 한미 FTA와 관련된 내용은 다른 이론과 함께 뒤에 간략히 소개하기로 한다.
경제지리학(Economic Geography)과 신성장 이론(New Growth Theory)
한미 FTA를 반대 혹은 비판하는 근거를 찾을 수 있는 두 번째 이론은 소위 말하는 경제지리학(economic geography)이다. 이는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y)이라는 논리로 자유무역의 기초인 비교우위론(comparative advantage)의 신성함을 깨는 이론으로서 잘 알려져 있다. 앞에서 언급한 폴 크루그먼이 자기가 여태껏 공부한 경제학이 나중에 알고 보니 "경제지리학"이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던 바로 그 학문이다.
경제지리학과 더불어 순수한 자유시장경제 이론을 비판하는 또 다른 경제이론이 소위 신성장이론(New Growth Theory, or Endogenous Growth Theory)이다. 이는 참여정부가 좋아하는 혁신(innovation)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론으로서 내생적 혁신이 성장을 이끌어 내는 것을 설명한다.
국가주도형 경제개발 모델
한미 FTA 비판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또 다른 이론은 대통령이 비판한 일본식 모델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이른바 70년대와 80년대를 풍미한 국가주도형 경제개발이론으로서 후발 국가(late developmental state)들은 자유시장 경제(Laissez Faire Economy)보다는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는 국가주도형 경제개발로 선발 국가를 따라잡는다는 내용이다. 이와 관련한 이론으로 잘 알려져 있는 학자가 독일의 거셴크론(Gerschenkron), 일본의 경제성장을 설명한 찰머스 존슨(Chalmers Johnson: 일본 통산성(MITI)의 역할을 통해 일본의 경제성장을 설명한 것으로 유명한 학자) 등이다.
한편 정치경제학에서는 이미 통설과 같이 알려져 있지만 주류 경제학에서는 경제사를 많이 다루지 않기 때문에 간과되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국제정치경제사를 보면 후발 국가는 대부분 일정 기간의 보호무역을 통해 자국의 주요한 산업의 경쟁력을 키운 다음 시장을 개방하는 패턴을 보였다는 것이다(이는 전략무역정책, 신성장이론 등과 상당부분 부합한다). 영국에 대하여 후발주자였던 프랑스, 독일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금 FTA를 하려고 하는 미국도 보호무역을 통해 19세기 말 패권국가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국제경제사에서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이는 개방을 통해 경쟁력이 생겨나는 것인지, 경쟁력이 생겨난 후에 개방을 하는 것인지에 대한 순서(sequence)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들 이론이 한미 FTA에 비판적인 이유
전략무역정책이론을 위시하여 순수 자유시장경제 이론을 비판하는 경제이론 등이 한미 FTA를 비판하는 근거로 작동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한 국가의 주요 산업, 특히 서비스 산업을 포함한 미래의 성장동력은 소위 말하는 규모의 경제(scale economy)를 가진 산업들이다(하이테크 산업뿐만 아니라 금융, 서비스 산업도 이에 해당된다). 이러한 규모의 경제를 가진 산업들이 경쟁력을 갖게 되는 패턴은 다음과 같다. 일단 자국 산업에 대한 보호된 큰 시장을 확보하고, 여기서 시행착오를 거치지만 남들보다 먼저 다량생산의 학습효과(learning by doing)를 거쳐 다른 국가보다 먼저 경쟁력을 갖게 되고, 그런 다음 세계 시장에서 이 시장을 선점하는 것이다. 여기서 상당히 많은 경우 국가의 이런 저런 형태의 지원이 들어간다. 산업정책이나 보조금의 형태로 지원을 했거나, 자국시장을 보호하는 보호무역으로 지원을 했거나, 닫혀 있는 다른 국가의 시장을 열어 초기에 큰 시장을 확보하는 지원을 하거나, 아니면 다양한 국내의 민-관-학 혁신체제를 만드는 데 일조를 하거나 하는 것이 그러한 예다(시장 조건이 자연적으로 경쟁력이 있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논리에서 보았을 때 한국은 미국보다는 우선 자국시장의 보호와 한국보다 경쟁력이 없는 제3국의 시장에서 learning by doing의 효과로 경쟁력을 제고하고, 그 이후 세계시장에서 선진국과 경쟁하여야 하는데, 한미 FTA는 오히려 순서가 거꾸로 가는 전략이다. 역으로 미국의 전략에 이용당하는 순서다.
미국이 캐나다, 멕시코와 NAFTA를 체결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미국의 미래성장 동력인 하이테크 산업(규모의 경제를 가지고 있음)으로 하여금 전략무역을 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분석도 이미 나와 있다. 즉 초기 보호된 혹은 유리한 일정 규모의 시장(미국 + 캐나다 + 멕시코)을 확보하도록 하여 경쟁력을 제고하고, 그를 통해 세계시장에서의 경쟁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 다양한 국내정치적인 로비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그것이다. 이러한 규모의 경제를 가진 산업들은 비교우위의 이론과 달리 소위 산업내 무역(intra-industry trade)을 하게 된다. 즉 미국이 프랑스에 자동차를 팔고 프랑스가 미국에 포도주를 파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 프랑스 모두 서로의 시장에서 자동차를 파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경제지리학의 이론에 의하면 경쟁력이 꼭 자유무역을 통한 경쟁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우연적인 요인에 의해서 발생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우연적으로 발생한 경쟁력이 경로의존적(path-dependency)으로 경쟁력을 지속적으로 재생하게 된다. 실리콘 밸리의 경쟁력은 비교우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요인에 의해서 나온 것이며, 한번 생겨난 경쟁력 때문에 이곳으로 반도체 및 하이테크 산업이 모이고, 따라서 이들 산업의 경로 의존성이 생겨난다. 이는 자유시장(Laissez Faire Economy)의 원칙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경로의존성이라는 개념과 연관되어 함께 중요하게 등장하는 개념이 표준(standard)이라는 개념이다. 경제에 있어서 표준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예가 IBM PC와 Apple 컴퓨터 간의 경쟁과 비디오 미디어 시장에서 VHS와 Beta Max간의 경쟁, 그리고 타자기의 자판 등이다. IBM PC보다 기술적으로 훨씬 우월한 Apple 컴퓨터(맥킨토시 컴퓨터)가 빌 게이츠의 MS 운영체계를 깐 IBM PC의 표준에 밀리는 바람에 경쟁에서 밀려나는 사건이 그 하나이고, 마찬가지로 기술적으로 우월한 Sony의 Beta Max라는 비디오 포맷이 VHS의 표준에 밀리는 바람에 비디오 미디어 시장에서 자취를 감춘 것이 다른 예이다. 타자기 자판의 경우에는 현재의 영어 타자기의 자판보다 훨씬 효율적인 타자기 자판이 있었으나 타자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타자기가 엉켜서 (자판을 두드리면 톡 튀어 나오는 손가락 같은 부분이 엉킴) 좀 효율을 떨어뜨린 순서의 자판이 현재의 영어 자판이다. 그러나 이미 이러한 자판이 하나의 표준이 되어 버려서 엉킴의 염려가 없는 컴퓨터의 시대가 되어도 자판의 순서를 바꾸지 못하는 경로의존성이 생겼다.
이러한 표준과 경로 의존성의 의미는 한번 표준 경쟁에서 지면 소위 표준의 네트워크 효과(network externality)가 생겨서 새로운 시장 진입자가 들어가서 공정하게 경쟁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토이 스토리 등의 만화영화로 재기한 과거 Apple의 스티븐 잡스가 최근 ipod라는 mp3 플레이어로 부활하였으나 본래의 컴퓨터 시장에서는 아직 크게 시장점유율을 높이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와 함께 퍼지는 소위 글로벌 스탠다드(global standard)라는 것도 문자 그대로 표준(standard)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므로 이러한 global standard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또한 이러한 global standard는 이른바 IMF-Wall Street-Treasury Complex라는 워싱턴에서 만들어진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로 불렸던 점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즉 신자유주의 글로벌 스탠더드가 사실은 미국적 스탠더드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사실 유럽, 일본 등 세계를 비교정치경제학(comparative political economy)의 시각에서 보면 소위 신자유주의 스탠더드가 일반화된 글로벌 스탠더드가 아님을 곧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적 글로벌 스탠더드를 일반화된 스탠더드로 인식하여 잘못 성급히 받아들이면 경로의존성 때문에 세계경제의 흐름이 또 다시 변화하게 될 때 빨리 적응하지 못하는 경직성을 갖게 된다. 한미 FTA는 산업 및 제도의 미국 표준을 한국에 이식하여 이의 경로 의존성을 만들게 된다. 당연히 여기서는 표준을 장악한 미국이 유리한 게임을 할 수밖에 없다.
위의 이론들을 한국의 입장에서 응용하고, 전략을 세운다면, 한국이 추진할 FTA 상대의 순서는 당연히 미국이 상당히 후순위로 밀려야 한다. 전략무역이론, 경제지리, 신성장이론 등이 FTA에 주는 시사점은 자국의 미래성장동력을 일정기간 비교적 보호된 자국시장 혹은 지역시장(regional market)에서 Learning By Doing을 통하여 성장시켜 경쟁력을 확보하면서 지역시장에서 자국 산업의 시장점유율을 높이고 이와 동시에 자국의 표준을 깔아 경로의존성을 만드는 전략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자동차 산업은 표준부분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패턴을 따른 전형적이 예라고 생각된다. 에너지 절약형, 디자인 중심형, 브랜드 공략형 일본 자동차 산업은 표준까지 깔아나가는 패턴을 보이고 있다(한국 삼성의 와이브로는 세계시장에 표준을 깔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기대가 크다)
이러한 면에서 현재 미국은 자국의 경쟁력 있는 산업을 FTA를 통하여 진출시키고,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전략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금융, 서비스 산업은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가진 산업으로서 미국식 제도의 표준을 까는 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국가 소송제도도 이러한 무서운 표준이라고 할 수 있다) 잘못하면 여기서 한국 금융 서비스 산업이 위에서 예로 든 Apple 컴퓨터나 Sony의 Beta Max의 운명을 겪거나, 미국 산업에 흡수되게 될지도 모른다. 즉 한국이 키우고자 하는 미래의 성장동력이 가장 먼저 미국의 먹이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미 FTA에서 농업도 문제이지만 더욱 큰 문제가 바로 한국 금융, 서비스 산업의 운명이다.
과거 냉전과 GATT 체제에서는 개도국이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 산업정책을 통하여 자국 산업경쟁력을 키우고, 그 이후에 세계시장에서 경쟁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였지만 WTO체제에서는 이러한 보호와 산업정책의 여지가 상당히 줄어들었고, 이제 산업의 중심이 제조업에서 금융, 서비스, 지식산업으로 넘어가면서 특히 지적재산권, 투자, 서비스 등에 있어서 매우 강력한 시장개방 조치가 취해져 왔다. 그런데 이러한 WTO 협상이 도하(Doha)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은 다자적 시장개방보다는 양자적 시장 개방인 FTA를 통하여 자국의 경쟁력 있는 산업을 세계시장에 진출시킬 것으로 전망된다. (과거 클린턴 행정부 시절 반도체 산업에 있어서 미국과 일본간의 무역분쟁을 보면 일본이 일본 시장에서 미국 반도체 산업의 시장 점유율을 몇 년도 몇 월까지 얼마로 올려놓지 않으면 무역 보복을 하겠다는 수치목표까지 정해주곤 하였다. 이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강요하는 작금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위의 이론들이 제시하는 또 다른 시사점은 한국이 FTA를 추진할 때 전략적인 시장 개방의 속도와 순서가 중요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제조업은 일찍 열고, 한국의 차세대 성장동력은 한국보다 우위에 있는 미국보다는 열세에 있는 중국이라는 큰 시장, 혹은 제3세계의 시장을 선점하여 경쟁력을 높이고, 중국을 위시한 아시아에 표준을 깔아 세계시장에서 경쟁하는 전략이 그것이다. 그러한 이유에서 필자는 스크린 쿼터를 이 시점에서 축소하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다. 무턱대고 미국과 경쟁하면 경쟁력이 생길 것이라는 주장은 많은 경제이론 중 하나의 주장일 뿐이고, 그렇지 않다는 위험성이 경제사를 통하여 무수히 증명되고 있다. 따라서 노무현 대통령이 "제3세계와 FTA를 해봤자 관세가 낮아지는 것 이외에는 이득이 없습니다"라고 말한 부분은 곧 FTA와 관련한 다양한 이론적 검토와 공부를 안 했음을 반증하는 발언이다.
생각보다 내용이 길어 졌지만 이상의 요지는 한미 FTA를 비판하는 근거를 제공하는 이론은 종속이론이 아닌 경제학 이론과 경제사에서 풍부하게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한미 FTA에 반대할 이론적 근거로 조절이론(regulation theory)도 있으나 종속이론과 같이 Marxism에 뿌리가 있어서 생략한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듯이 Fordism, Keynesianism, Taylorism으로 전후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설명하는 것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또한 선도산업의 부침 싸이클 개념을 도입한 슘페터, Mensch 등의 싸이클 이론도 한미 FTA에 반대하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으나 논의가 복잡해지는 관계로 생략한다).
그런데 한국의 진보 성향의 지식인과 운동가들이 종속이론에 나오는 용어들을 주로 사용하는 바람에 FTA 논의가 정치화되는 왜곡이 생겨나 버렸다. 이러한 면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말 중 진보가 변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즉 현시점에서 진보도 상대방과 공통의 언어를 사용하여 상대방을 비판할 수 있는 방향으로 변해야 한다.
2. 종속이론이 틀린 것이 한미 FTA 추진을 정당화해 주나?
필자가 미국에서 정치경제를 공부할 때 미국의 정치경제학은 종속이론이 틀리다는 것을 이론적, 경험적으로 검증하는 커리큘럼이 대다수였다. 그래서 필자도 동아시아의 신흥개도국(소위 NICs 혹은 NIEs로 표현된다)을 사례로 종속이론을 비판하는 공부를 상당히 많이 한 편이다. 그런데 이 때 배운 종속이론이 틀린 이유는 참여정부가 이해하고 있는, (특히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으로 유추할 수 있는) 또 참여정부가 한미 FTA를 정당화하는 논리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왜냐하면 종속이론이 실패한 이유가 바로 국가 혹은 정부의 경제에서의 역할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서 경제개발을 추동하였기 때문에, 그리고 유능하고, 청렴한 관료, 정부의 정보획득 능력, 재벌의 독특한 지배구조 및 노동시장, 국가주도형 금융시스템, 이에 결합된 교육 및 저축열, 중산층을 위주로 한 비교적 공평한 부의 배분 등이 동아시아 신흥개도국, 특히 한국이 종속이론의 예언에서 벗어나도록 한 주요한 이유로 거론된다.
자유시장(Laissez-Faire Economy)을 강조하는 경제학자들은 당시 이들 국가의 경제발전이 국가의 역할보다는 자유시장경제를 채택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다가 1997년 아시아에서 금융위기가 터지자 갑자기 입장을 바꾸어 이들의 경제발전은 국가의 개입과 소위 정실자본주의(crony capitalism)로 가능했지만 그것이 금융위기를 초래한 주범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국가주도형 경제발전 이론을 금융위기 이전 시기에 한정하여 인정하는 듯한 입장 선회인데, 이에 대한 지적은 그리 많이 찾아볼 수 없다.)
여하튼, 한국이 종속이론이 예언한 것과 같이 되지 않은 것은 국가가 개입하였고, 정실자본주의라고까지 불릴 만큼 독특한 정부-자본-노동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미 신자유주의자들도 이 점을 인정하고 있다. 이제 이러한 독특한 한국 경제의 시스템은 금융위기와 신자유주의 세계화, 그리고 글로벌 스탠더드 및 WTO체제로 인하여 작동하기 매우 어려워 졌다. 정부의 역할은 최소화되는 것이며, 더욱이 한미 FTA가 체결될 경우 한국 정부의 역할은 소위 말하는 사회안전망(social safety net)을 구축하는 것 이상으로 커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참여정부의 논리가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국가의 역할" 부문이다. 종속이론이 틀린 이유가 바로 "국가의 역할" 때문이라면 종속이론을 비판하면 오히려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반대로 종속이론이 틀렸기 때문에 "국가의 역할"을 거의 죽여버리는 "신자유주의"로 가자는 앞뒤가 안 맞는 논리가 나온다. 이는 종속이론이 틀린 것과 한미 FTA 추진 간에는 특별한 상관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관관계가 있는 것 같이 말하는 매우 잘못된 논리적 오류이다. 종속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강조하려면 "국가의 역할"을 더욱 강조해야 한다. 그런데 참여정부의 한미 FTA는 "국가의 역할"을 최소화시키는 좌파 신자유주의가 아니던가.
또한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로 국가의 역할이 문제가 있다는 경제담론이 글로벌 스탠더드로 퍼지고 있으나 앞에서 소개한 "전략무역정책이론", "경제지리학", "신성장이론" 등과 신자유주의 간의 싸움은 결판이 난 싸움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은 비교적 양심적인 미국의 주류 경제학자인 조셉 스티글리츠(전 세계은행 부총재, 노벨경제학상 수상)와 제프리 삭스에 의해서 이미 여러 차례 지적된 바 있다. 지금 참여정부가 종속이론을 문제 삼는 것은 한미 FTA 반대 주장에 대한 정치적인 공세일 뿐, 진지한 이론적, 경험적 근거에 기반한 반격이라고 할 수 없다. 즉 참여정부는 한국 및 아시아의 신흥개도국에서 종속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가지고 한미 FTA를 절대로 정당화할 수 없다.
3.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비주류이론이 반드시 틀린 이론인가?
참여정부의 경제관료들은 대부분 신자유주의의 이론을 받아들이고 따르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는 사실 자연스러운 일이다. 엘리트 관료들은 미국에서 이러한 경제학을 공부하고 돌아오고, 또 세계 경제학계를 이러한 담론들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고시의 경제학 시험 문제도 비슷하리라 생각된다.) 멕시코의 경제관료들과 한국의 경제관료들의 경제관은 아마도 비슷할 것이다. 예전에 이를 비판하는 용어로 "Chicago Boys" (Chicago 대학에서 경제학 교육을 받은 제3세계의 경제관료)라는 말도 있었다.
전문적인 경제지식에 문외한인 참여정부의 정치 전문가들은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다른 이론들은 다 학계에서 인정을 못 받는 비주류 이론들 아닌가? 왜 우리가 그러한 이론을 검토하고 따라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다면 참여정부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를 믿고 따르라"는 것이다. 한미동맹, 전시작전통제권, 북핵문제에 대한 주류의 이론과 사고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에 다 나와 있다. 꼭 주류 이론만을 따라야 한다면 참여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은 소위 말하는 조, 중, 동과 같아야 한다. 그러나 참여정부가 외교 안보 부문에서 추진하는 것은 비주류의 이론과 사고에 근거한 정책들이다. 이들 이론과 사고는 매우 위험하고, 현실에서 증명되지 않은 것으로 공격받고, 또 주류 학계의 잡지와 회의에서 잘 다루어지지 않는다. 즉 주류 외교안보 담론에서 참여정부가 추진하는 이론과 사고는 왕따가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정부는 자신들의 외교안보 정책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럴만한 이론적, 경험적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한미 FTA에 반대하는, 위에서 소개한 이론들도 그러하다. 오히려 많은 부분에서 한미 FTA를 지지하는 이론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다.
대학교 다닐 때 "과학철학" 과목 혹은 "사회과학 방법론" 과목을 하나만 들었어도 주류 담론, 혹은 패러다임이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한 토마스 쿤(Thomas Kuhn)의 사회학적 이론을 알고 있을 것이다. 패러다임은 다수가 장악하는 것이지 다수가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참여정부는 외교안보 문제와 경제문제를 접근하는 태도와 수준이 전혀 다르다. 외교안보 문제는 그래도 다양한 사고와 검증을 해본 수준이고, 경제문제는 공부의 편식을 한 수준이다. 대통령이 말하는 "좌파 신자유주의"는 공부 부족을 실토하는 것이지 뭔가 대단한 역발상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래서 참여정부는 일관성이 없고, 아마추어 같다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참고로 참여정부가 주장하는 외교안보와 정책을 뒷받침하는, 국제정치의 설득력 있는 비주류의 이론과 담론도 무수히 많다.)
요약하자면, 참여정부는 외교안보 사안보다 훨씬 복잡하고, 전문적인 분야에서는 주류 담론을 장악한 전문가들에 의지하게 되고 그들이 제시하는 처방을 따라가고 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전문화되면서 이러한 전문가들의 역할이 커진다는 것을 이론화한 것이 바로 전문가들의 인식공동체 이론(epistemic community, 필자는 이를 인식 공유체로 부른다. 왜냐하면 이들 전문가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공동체적인 삶을 살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이다. 지금 참여정부는 이들 경제분야의 인식공유체에 딱 걸려들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전문적인 분야라서 다양하게 공부하고, 검토하고, 생각할 능력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사실 이는 참여정부만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준비된 전문가를 보유하고 있지 않은 정권에서는 복잡하고, 전문적인 분야에서는 항상 이런 일이 생겨날 가능성이 크다.)
참여정부는 한미 FTA 추진을 정당화하는 이들 인식공유체(통상교섭본부, 경제부처의 경제관료 등으로 구성된 비공식적인 네트워크)의 주장을 종교적으로 믿고 따라가지 말고 좀 더 엄밀하고 정교하게 검증하고 따져보아야 한다. 장하성 교수의 주장처럼 경제정책은 신념에 의해서 추진하는 것이 가장 반(反)시장적인 것이다. 또 나라의 경제를 도박과 같이 한번 이쪽에 걸어보겠다는 식으로 결정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위험한 짓이다. 끝까지 연구하고 검토해 보고, 최종적인 결단을 내려야지, 감이 이쪽이니까 이쪽에 베팅하겠다는 식으로 도박을 하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발상이다.
4. '제3의 모델 : 일본 모델 + 싱가폴 모델'이 무엇인가?
대통령은 제3의 모델로서 '일본 모델 + 싱가폴 모델'을 언급했다. 그런데 한미 FTA를 통해서 어떻게 이러한 모델을 달성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구체적으로 일본 모델 + 싱가폴 모델의 내용이 무엇인지 그림을 그려서 국민들에게 보여준 적이 한번도 없었을 뿐더러 (준비부족을 의미함) 한미 FTA를 통하여 이것이 가능할 것인지도 의심스럽다. (필자가 기억하기로는 싱가폴 모델에 대한 대통령의 이해도 상당히 의문시 된다. 장하준 교수가 지적하였듯이 싱가폴은 겉으로 드러난 것 이상으로 제조업의 비중이 큰 것으로 알고 있다. 또 정부의 힘이 매우 강한 일당 지배의 권위주의 국가다.)
싱가폴 모델(혹은 일본 모델 + 싱가폴 모델)의 문제점을 따지게 되면 내용이 또 길어지기 때문에 여기서는 한미 FTA가 어떻게 일본 모델 + 싱가폴 모델을 가져올 수 있는지 무척 궁금하다는 질문을 하는 정도로 넘어가고자 한다. 다만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도시국가인 싱가폴 모델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고 가능한 것인지는 쉽게 이해가 안 간다. 그리고 일본식 모델 + 싱가폴 모델은 전혀 신자유주의적인 모델이 아니다. 싱가폴의 국가부문의 개입에 대해서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 같고 또한 일본의 기존 제도의 견고함에 대해서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대통령의 이해와 달리 모든 국가들이 미국과 FTA를 하려고 난리를 피우는 것이 아니다. 미국은 이미 전체 미국 대륙을 하나의 거대한 자유시장으로 묶으려는 FTAA라는 것을 추진해 왔는데, 얼마 전 브라질을 위시한 중남미 국가들의 반대로 중단되었다. 특히 브라질은 이에 대한 대안으로 브라질 고유의 경제구조를 미래의 성장산업과 연결시키는 새로운 모델을 시험하고 있다. 즉 브라질 농업과 에너지, 환경산업을 연결하는 Agro-Energy프로젝트가 그 한 예이다. 브라질에서 풍부한 사탕수수를 가지고 에탄올 에너지를 가공하고, 이를 통하여 새로운 표준의 농업 및 에너지 산업을 브라질이 주도하겠다는 야심 찬 구상이다. 이는 브라질 농업의 구조전환과 미래 성장동력을 만드는 일석이조의 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브라질은 인도, 중국, 일본 등과 이 부문에서 협력을 심화하는 경제외교에도 열심이다.
아직 성공할지 실패할지 두고 보아야 하겠지만 이러한 브라질의 프로젝트는 앞에서 소개한 소위 비주류 경제학 이론에 상당부분 부합하는 매우 전략적인 행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미래의 성장동력을 키워내는 제3의 모델과 같은 느낌마저 든다. 물론 이러한 단편적인 예를 가지고 제3의 길이 있다고 주장하기는 어렵지만 무언가 창조적인 생각을 해 내야 한다는 점에서 브라질의 프로젝트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상당히 크다.
5. 결론
노대통령의 언급을 통해서 나타난 현 정부의 한미 FTA 정당화 논리는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상당한 이론적 편식과 잘못된 논리 및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 사실관계를 정확히 아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같은 사실을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 더욱 큰 문제이다. 사회과학에서는 사실관계를 정확히 안다는 것은 사실을 어떠한 이론적 틀에서 해석하는 것이 정확하게 보는 것이냐의 문제로 연결된다. 사실을 정확하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공부의 편식을 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사회현상은 서로 다른 부문과 영역의 것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복잡한 상호연결관계를 파악하는 학제적 훈련이 안 되어 있으면 막연하게 전문가 집단에 의존하게 된다. 그것이 한미 FTA를 추진하는 참여정부가 걸려든 덫이라고 보인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주장하는 "통합적 사고"를 하는 지식인을 길러내는 것이 한국의 미래에 매우 중요하다. 통합적이고, 종합적인 사고에서 국가전략이 나와야지, 아무런 전략 없이 그저 개방만 하면 된다는 기계론적 이론의 적용은 국가의 불행으로 연결될지 모른다. 한미 FTA를 이대로 무작정 추진하지 말고 참여정부 내부에서 좀 더 따져 보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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