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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패악의 시대에 순리를 따라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道'] 제5장 폭군의 몰락 <25>

갖바치가 사는 마을은 낙산 산자락을 따라 초가들이 꼬막껍질을 엎어놓은 듯한 모습으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십 여 호가 될까 말까 했다. 거친 눈발이 멈춘 탓인지 눈에 덮인 초가들은 한 폭의 수묵화처럼 보였고, 홑바지를 입은 아이들은 동네 어귀에서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때물이 꼬질꼬질하고 손발이 얼어터진 아이들은 흡사 부잣집으로 몰려다니는 거지 떼를 연상시켰다.
조광조가 아이들 중에서 얼굴이 희고 두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데다 댕기머리를 한 아이를 불러 물었다.
"갖바치가 사는 집이 어디냐."
"성 안에 사는 양반들이 찾는 그분 말입니까요."
"양반들이 찾다니 그 말이 사실이냐."
"성 안에 사는 양반뿐만이 아닙니다요. 궁 안에 사는 궁녀들도 가끔 찾아옵니다요."
"어서 만나보고 싶구나. 네가 앞장을 서겠느냐."
"아이쿠, 나으리. 고개를 숙이셔요."
돌담 저쪽에서 조광조를 향해 얼음덩이처럼 단단한 눈뭉치가 계속해서 날아왔다. 조광조는 아이들이 던진 눈뭉치를 피할 사이 없이 얻어맞고 말았다. 그러나 삿갓에 맞아 탈은 없었다. 백정 마을 아이들은 벌써 골목 안으로 도망치고 없었다. 아이들은 그런 방식으로 양반들을 골탕 먹이는 모양이었다. 길라잡이를 하려던 아이가 쩔쩔맸다.
"나으리, 철부지들이니 용서하십시오."
"괜찮다."
"아이들뿐만이 아닙니다요. 어른들도 양반들을 보면 겉으로는 고개를 숙이나 돌아서서는 손가락질을 하고 속으로는 저주를 퍼붓습니다요."
▲ 경기도 용인에 있는 심곡서원. 현재 아파트 숲에 싸여 있다. 이 서원은 정암 조광조 선생을 배향한다(좌). 근처에 있는 정암 선생 묘소(우). ⓒ프레시안

"허허. 왜 그렇다고 생각하느냐."
비로소 조광조는 아이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아이는 또래들보다 키가 컸고 조숙해 보였다. 백정마을 출신이 아닌 듯 예의도 갖추고 있었다.
"먹고 살기 어려우니 성 안의 양반들 탓으로 돌리는 것 같습니다요."
"살기 어려워진 까닭 중에 양반들 탓도 있을 것이다."
"무도한 임금이라도 간하는 신하가 5명만 있어도 나라를 잃지 않다고 했습니다요. 임금다운 임금이 없고 신하다운 신하가 없는 나라를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까요. 불쌍한 것은 힘 없는 양인입니다요. 더욱 불쌍한 것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버러지 같은 백정들이고요."
"지금 네가 말하고 있는 것은 <소학>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이 아니냐."
"갖바치 어른께서 가르쳐주신 얘깁니다요."
"갖바치 어른이 네 스승인 것이냐."
"쇤네의 스승일뿐더러 우리 백정 마을의 임금이십니다요."
"허허."
조광조는 아이의 당돌한 말에 웃고 말았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적어도 백정 마을에서는 연산주를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방금 네가 한 말을 나는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 네 말을 누가 고변(告變)이라도 한다면 전하의 귀에 들어가 네 목숨은 물론이고 이 마을사람들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야. 알겠느냐."
"다시는 입 밖에 내지 않겠습니다요."
"처음 본 대로 영민한 아이로구나. 내 이름이 무엇이냐."
"쇤네는 백정의 자식이옵니다. 이름을 갖고 싶어도 이름을 가질 수 없는 천한 것이옵니다요."
"아비가 백정이란 말이냐."
"쇤네를 기른 아비가 그렇습니다요."
"네 아비가 둘이라는 말이구나."
"쇤네는 나은 아비는 알지 못합니다요."
"알겠느니라. 너를 기른 아비가 백정이란 말이구나."
"그렇습니다요. 그런데 나으리, 갖바치 어른께 어디선 온 누구라고 말씀드릴까요."
"용인에서 온 조광조라고 일러라."
아이가 앞장서서 마을의 고샅길로 들어섰다. 고샅길은 눈이 깨끗이 치워져 빗자루질이 선명했고, 갖바치 집에서는 저녁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이가 먼저 갖바치 집으로 들어가 인기척을 냈으나 한참 만에 나온 사람은 앞치마를 두른 초설이었다. 초설은 저녁을 짓고 있는 중이었다.
"손님이 갖바치 어른을 뵈려고 왔습니다."
"갖바치 어른은 지금 좌선 중이니 저 방으로 들어와 기다리든지 아니면 내일 오시라고 그래라."
"알겠습니다요."
"헌데 손님은 어디서 오신 분이더냐."
"용인에서 온 조광조라는 분입니다요."
"용인에서 온 조광조라는 분이라고 했느냐."
초설이 놀라자 아이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씨, 아시는 분입니까요. 왜 그리 놀라십니까."
"어서 가서 어른의 사정을 말씀드리고 방으로 모시어라."
"아시는 분이라면 아씨가 모셔야 하지 않습니까요."
그러나 초설은 황급히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고,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광조에게 돌아가 말했다.
"갖바치 어른께서는 지금 좌선 중이라 합니다요."
"좌선을 하고 있다는 말이냐."
"네, 갖바치 어른께서는 날마다 벽을 쳐다보고 가만히 앉아 있곤 합니다요."
"아마도 이곳에 오기 전에는 중이었던 모양이구나."
"맞습니다요. 금강산에서 도를 닦았다고 쇤네에게도 얘기해주었어요."
"식구는 몇이더냐."
"식구는 없습니다요. 도 닦는 사람에게 무슨 가족이 있겠습니까요. 가끔 젊은 아씨가 갖바치 어른께 공부하러 찾아오기는 한데 원래 가족은 아닌 것 같습니다요."
"젊은 아씨라 했느냐."
"네."
조광조는 부엌에 있는 여인이 초설일 것이라고 믿었다. 자신에게 비녀를 주려다 거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만났을 때 호의를 베푼 초설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초설에 대한 조광조의 생각은 그뿐이었다.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미안하고 고마울 뿐 자석처럼 끌리는 사사로운 정은 없었다. 지금 눈길을 무릅쓰고 백정마을을 찾아온 것은 오직 갖바치를 만나 그와 얘기를 나누고 싶을 따름이었다. 조광조가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자 아이가 물었다.
"나으리, 아씨를 정말 아십니까요."
"모른다고 해도 맞고, 안다고 해도 맞는 말이다."
"나으리, 아씨가 들으면 섭섭하겠습니다요. 쇤네 귀에는 아씨를 무시하는 것 같이 들립니다요. 무시당한 사람치고 기분 좋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요."
"도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여색을 경계하고자 한 말이다. 여인을 무시해서 한 말이 아니니라. "
갖바치는 안방을 자신의 선방(禪房)으로 삼아 수도를 하고, 손님을 맞이하거나 마을 아이들을 가르칠 때는 사랑방으로 건너오는 모양이었다. 사랑방에는 선비의 독서당처럼 서책들이 벽에 의지하여 가득히 쌓여 있었다.
조광조는 네 벽을 가득 채운 서책을 보고는 질려버렸다.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장서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불경은 한 벽을 채우고 있었고, 유서와 노장(老莊) 및 제자백가들의 서책들이 시루 속의 콩나물처럼 들어차 있었다.
"이게 네 선생이 읽은 책이라는 것이냐."
"그렇습니다요. 어떤 책은 앞뒤로 달달 외우신다고 했습니다요."
"너는 무엇을 배우고 있느냐."
"<천자문>은 배운 지 오래 됐고요, 요즘은 <반야심경>을 배우고 있습니다요."
"<반야심경>이라 하면 불경이 아니더냐."
"네, 선생님께서는 <반야심경>만 3천독(讀)을 하면 세상 이치를 통달하여 걸림 없는 도인이 된다고 했습니다요."
"그것이 네 꿈이냐."
"도인은 늙어서 되고 싶고요, 젊어서는 역관(譯官)이 되는 것이 제 꿈입니다요. 그리하여 공자와 맹자가 태어난 중국을 거쳐서 부처님이 태어나신 천축에도 가보고 싶습니다요."
"역관이 되려면 중국어가 기본이 아니겠느냐."
"나으리, 역관이 되고 싶습니다요. 도와주신다면 평생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요."
아이가 엎드려 조광조에게 큰절을 하며 말했다.
"도와줄 기회가 온다면 힘이 돼주겠다만 너 스스로도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보아하니 저 <홍무정운(洪武正韻)>이 중국의 음운서다. 저 책을 독파하다 보면 중국말을 하게 될 것이다. 틈틈이 선생에게 배우고 익혀두어라."
"너를 만난 것도 인연이다. 네 이름을 지어줄 터이니 평소에 너를 부를 때 무엇이라 하느냐."
"쇤네가 태어난 곳이 찬새미골이었는지 사람들이 쇤네를 찬새미라 부릅니다요."
"찬새미라면 한자로 한천(寒泉)이다. 앞으로 너를 한천이라 부를 것이다. 네 마음에 드느냐. 말해 보거라."
"찬물을 들이킨 듯 정신이 번쩍 나는 이름입니다요. 나으리, 고맙습니다요."
아이가 일어나 조광조에게 다시 큰절을 하였다.
"앞으로는 신분을 떠나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름이 있어야 할 것이야."
"왜 그렇습니까요."
"하늘의 녹을 먹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렇다면 왜 굶어죽는 사람이 있습니까요."
"천도는 평등한 것이나 사람이 천도를 어기니 그런 것이다."
"천도가 무엇이기에 그렇습니까요."
"한천아, 천도는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보아라. 이 세상에 이름 없는 풀이 있더냐. 독풀이건 이로운 풀이건 간에 다 이름이 있다. 그러니 사람에게 이름이 없다는 것은 천도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겠느냐."
그쳤던 눈발이 다시 흩날리는 듯 방문이 삐걱거렸다. 그때 초설의 목소리가 바람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저녁상을 보았사옵니다. 시장하실 텐데 어서 드시지요."
한천이 방문을 열었을 때는 밥상이 사랑방 마루에 놓여진 채였고, 초설은 부엌으로 가버리고 없었다. 한천이 밥상을 들여놓고 물러나 앉았다.
"네 선생의 밥은 왜 없느냐."
"아닙니다요. 선생님은 도인이라서 하루에 한 끼만 드십니다요."
"그렇다면 이 밥은 네 것이구나. 어서 다가와 먹어라."
"나으리, 쇤네는 따로 먹겠습니다요. 그러니 먼저 드십시오."
한천은 조광조가 겸상을 하자는 데도 여전히 물러나 앉아 거절했다. 양반과 상민이 겸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조광조는 두 끼를 굶었으므로 몹시 허기가 졌으나 그래도 한천을 앞에 두고 밥을 먹을 수 없었다.
"너를 두고 혼자 먹을 수가 없구나. 그러니 이리 와 앉아라."
"나으리, 그렇다면 좋은 수가 있습니다요."
"무엇이냐."
"제 밥을 들고 부엌으로 가 먹고 오겠습니다요. 그러면 나으리께서도 편히 드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요."
"네가 원한다면 그리 하여라."
조광조는 또 한번 한천의 지혜에 놀랐다. 한천에게는 거칠게 자란 백정 마을 아이답지 않게 막히면 돌아가 흐르는 물 같은 지혜가 있었다. 실제 나이는 14살이나 15살 정도일 것이지만 언행은 2, 3살이 더 들어보였다. 갖바치는 한천을 수제자로 생각하고 가르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 불도(佛道)를 가르칠 리 없었다. 유도(儒道)가 대접을 받는 세상에 불도를 가르친다는 것은 자신의 분신쯤으로 여기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갖바치는 한천에게 늘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우리 같은 천민들에게는 불도가 의지할 만한 것이다. 유도는 군자가 되는 것이 삶의 목표이고, 또 군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양반일 뿐이다. 허나 불도는 누구나 다 깨달으면 부처다. 양반이건 상놈이건 깨달으면 다 부처가 되는 것이 불도이니 그렇지 않겠느냐."
그뿐만 아니라 이렇게도 말했다.
"부처는 인생을 고(苦)라 했다. 부귀영화를 누리는 선비들의 인생도 고요, 우리 같은 백정들의 삶도 고인 것이다. 그러니 고를 받아들여야만 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고, 무엇 때문에 고인지를 깨달으면 성불할 수 있는 것이다. 백정이 아무리 천한 것이라 하더라도 백정의 신분을 받아들여야만 백정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치와 다를 바 없다. 선비가 백정의 행동을 하면 백정이 되는 것이고, 백정이 선비의 행동을 하면 선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불도의 요체이니라."

부엌으로 들어간 한천은 초설과 겸상을 하려다가 날이 어두워지고 있으므로 부엌을 가린 거적때기를 걷었다. 그러자 흩날리는 눈발의 빛이 부엌으로 흘러들어와 부엌이 조금 밝아졌다. 초설이 한천에게 말했다.
"나으리께서 진지를 잘 드시더냐."
"저를 두고 혼자 드실 수 없다고 했습니다요. 그래서 제가 부엌으로 나온 것입니다요."
"도학을 닦는 분이라 다르시구나."
초설은 뭔가 더 말을 하려다 가만히 눈을 감고 미소만 지었다. 한천은 초설이 조광조의 모습을 그리면서 미소를 짓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으리를 아십니까요."
"나으리를 왜 모르겠느냐. 나으리를 오래 전부터 지켜보아 왔으나 나으리는 나를 잘 모르실 것이야."
한천이 밥을 먹느라 말하지 못하자 초설은 숟가락을 놓고 거적때기를 내렸다. 눈보라가 부엌 안까지 들이쳐 바닥에 눈가루가 쌓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관솔에 불을 붙이자 다시 부엌 안이 환해졌다.
한천이 번개같이 보리밥 한 그릇을 비우고 나더니 숭늉 한 바가지를 마저 마시고는 일어섰다.
"나으리 밥상을 가져오겠습니다요."
"그리 하거라."
초설은 정성을 다해 밥상을 보았지만 갖바치가 먹다 남은 잡곡밥에다 시래기 국을 상에 올려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양반이 먹기에는 밥과 반찬이 모래알처럼 거칠어 그대로 물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상에 올려진 밥과 국, 그리고 짜디 짠 무장아찌마저 남김없이 비워져 있었다. 한천이 상을 가지고 나오자 초설이 말했다.
"나으리께서 몹시 시장하셨던 모양이구나."
"오늘 저녁처럼 맛있게 드시기는 처음이라 했습니다요."
"선생님은 아직도 좌선 중이시느냐."
"막 사랑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요."
"그렇다면 어서 들어가 시중을 들어라. 두 분께서는 술을 드시든지 차를 드시든지 할 것이니라."
눈보라는 여전히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초설은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나눌지 궁금했다. 그렇다고 두 사람 사이에 불청객으로 끼어 얘기를 들을 수도 없었다. 갖바치 선생과는 상관없지만 아내가 있는 조광조와는 남녀유별이니 한 방에 들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럴 때는 비록 백정 마을에서 천민으로 산다고는 하지만 한천이 한없이 부러웠다.
한천이 방에 들어왔을 때는 갖바치와 조광조는 오랜 지기처럼 스스럼없이 얘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한 사람이 그림자처럼 어른거리어 누군가 찾아올 줄 알고 있었소이다."
"불도를 닦으면 그런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까."
"금강산에는 수도하는 중이 많습니다. 웬만큼 수도하면 백리 밖의 것들도 보이지요. 더러는 천리 밖의 것들을 보는 도인도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들은 천안통(天眼通)을 얻어다 하지요."
"대사께서 제가 올 줄 알았다니 놀랍습니다."
"처음에는 그림자처럼 어른거리다 나중에는 선비의 행색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뚜렷해졌습니다. 다만 두 개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다 한 개로 줄어들었는데, 혹시 두 분이 오시다가 헤어진 것은 아닌지요."
"대사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루 종일 함께 움직이다가 헤어진 사람이 있습니다. 김식이라는 서울친구입니다."
조광조는 이미 갖바치에게 압도되어 숨이 막힘을 느꼈다. 갖바치는 얘기를 바람이 불어가듯 허허실실 끌어갔고, 조광조는 맞장구를 치며 속으로 놀랄 뿐이었다.
"우리 아이 이름을 한천이라 지어주었다고 하니 고맙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한천이라, 아이의 사주와 딱 들어맞는 이름입니다. 아이의 팔자가 목마른 사람들에게 한 모금의 물 같으니 말입니다."
"한천이가 선생의 법을 잇는 명민한 제자가 될 것 같습니다."
"무슨 얘기를 듣고 그런 생각이 드셨습니까."
"무도한 임금이라도 간하는 신하가 5명만 있어도 나라를 잃지 않는다는 <소학>의 한 구절을 말하더니 나름대로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간하는 신하가 없으니 무도한 임금 밑의 양인이 불쌍하고, 그보다는 양인에게서조차 손가락질을 당하는 백정들이 더 불쌍하다는 뜻의 말이었습니다."
"허허허."
갖바치는 한천이 대견하여 헛웃음을 치더니 갑자기 버럭 고함을 쳤다.
"네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만 사람은 세 치 혀 때문에 화를 입는다고 하지 않았더냐. 공부가 깊어지기 전까지는 아무리 입이 근질근질해도 입을 닫고 있어야 할 것이야. 알겠느냐. 술상이나 봐 오거라, 이놈아!"
한천이 나가고 없자, 갖바치가 화제를 바꾸어 소리를 죽여 나직이 말했다.
"지금 나라가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조광조가 대답을 못하고 주춤거리는 사이 갖바치가 잘라 말했다.
"백성들이 나라를 잃은 지 오랩니다. 간하는 신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무오, 갑자년의 참극 때문입니다."
"참극은 참극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간하지 못하는 선비들의 입은 입이 아닌 것입니다. 세상은 막혔다가도 극에 치달으면 뚫리고, 뚫렸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막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막히고 뚫리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순리나 이치는 막히고 뚫리는 현상 너머에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막혔다고 고통스러워 할 것도 없고, 뚫렸다고 좋아할 것도 없습니다.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집착이요 좋아하는 것도 집착입니다. 사람은 집착을 버리고 순리대로 살아야 합니다. 순리라고 생각되면 가을바람에 미련 없이 낙엽이 지듯 때로는 목숨을 던질 줄도 알아야 합니다. 빈도(貧道)가 왜 이러한 말을 하는지 아십니까."
조광조는 어렴풋이 갖바치의 의도를 알고는 있었으나 그의 얘기를 끊고 싶지 않아 침묵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갖바치가 다시 얘기를 이어갔다.
"한훤당 공(公)은 세상에 나오지 않고 숨어 사는 것을 도학의 근본이라 했습니다. 인정(仁政)를 펴던 성종조의 일이니 그것이 그때는 순리였습니다. 허나 패악의 시대에 도학을 닦는다고 하여 세상에 나오지 않는 것은 도학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 도학이란 숨고 나오는 것을 초월한 곳에 있는 것입니다. 숨는다거나 나온다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세상의 부름, 즉 순리에 응하는 것이 바로 초월이라는 말이지요. 이것을 불가에서는 시절인연이라 하오. 빈도가 보기에는 지금은 도학자들이 세상에 나와 간하는 신하가 되어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을 때라고 보오."
"공부가 깊지 못하다면 더 기다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부를 하다 보면 스스로 힘이 느껴질 때가 있는 법이지요. 그때가 바로 나설 때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한훤당 선생께서 사사를 당하신 후였습니다. 공부를 하다가 목숨과 바꾸어도 좋을 그 무엇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세상에 나아갈 힘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을 우리 불가에서는 초견성(初見性)이라 합니다. 처음으로 자신의 성품, 즉 무한한 가능성, 힘을 본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확철하게 자신의 성품을 볼 때까지 더 밀고 나가야 합니다."
갖바치의 얘기는 당장 세상에 나가기보다는 더 공부를 한 후 나가라는 말이었다. 조광조는 갖바치의 얘기에 반해버렸다. 벼슬길에 있어서 나아가는 진(進)과 물러서는 퇴(退)를 지킴이 군자가 행해야 할 최고의 덕목이라는 것을 그도 알고는 있었지만 갖바치의 얘기는 차원이 달랐다. 진과 퇴는 다르면서도 같은 불이(不二)한 것이니 그것에 집착하지 말고 그 너머에 있는 순리를 따르라는 말에 반해버렸던 것이다.<계속>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는 화순군 홈페이지와 동시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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