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을 내려온 조광조와 김식은 평평한 길에서 말을 탔다가 눈길이 미끄러웠으므로 다시 말에서 내려 걸었다. 남산을 오르내린 탓으로 허기가 졌으나 몇 잔 들이킨 술기운의 힘으로 흥인문(興仁門) 쪽을 향해 갔다.
함박눈은 세설로 변해 떡가루를 흩뿌리듯 내리고 있었다. 삿갓을 벗자마자 눈썹이 금세 희어졌다. 갑자기 늙은이 모습으로 변한 김식이 말했다.
"성 대감 댁으로 가세."
"그 댁도 빈 집이 돼 있을지 걱정이 되는구먼."
"가도 걱정, 안 가도 걱정이지 뭔가."
"그러게 말일세."
김식이 말한 성 대감이란 무오년에 영의정을 지낸 성준(成俊)을 가리켰다. 원래 창녕 사람으로 성준 역시 폐비윤씨 사건에 연루되어 갑자년에 직산으로 귀양 갔다가 69세에 사사를 당한 강직한 인물이었다. 연산주는 무인 기질이 강한 성준을 겉으로는 공경하는 체했으나 속으로는 송충이를 보듯 꺼려 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성준이 영상이 되었을 때였다. 하루는 정전 옆의 누각에서 잔치가 벌어졌는데, 연산주가 재상들이 보는 앞에서 기생을 껴안고 음란한 추태를 벌인 일이 있었다. 임사홍과 유자광이 다투어 술을 올리며 비위를 맞춰주자, 연산주는 더욱 노골적으로 추태를 부렸다. 기생의 저고리를 벗기고 나서는 젖꼭지가 드러나게 하여 손가락으로 퉁기더니 지목하는 재상 앞에 가서 음부를 보여주도록 하는 추행이었다.
그때 성준이 죽기를 각오하고 꼿꼿하게 서서 아뢰었다.
"노신은 아직 죽지 않았사오니 전하께서는 결코 이러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순간, 연산주의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뒤따라 기생의 젖가슴을 만지던 임사홍과 유자광의 손이 멈춰지고 눈치를 보던 재상들이 헛기침을 해대니 잔치는 싱겁게 파해버렸다.
여러 재상 앞에서 모욕을 당한 연산주는 성준을 가만 두지 않았다. 그 일이 아니었다면 폐비윤씨 사건에 경미하게 연루된 그를 연산주는 죽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연산주는 성준의 충직함을 마지못해 존경하는 체 해 왔기 때문이었다.
김식이 성준의 집 부근에서 말했다.
"성 대감의 배짱에 전하도 꼼작 못했지. 총명이 출중하고 말 잘 타고 활 잘 쏘는 명상이었어."
"자네 말이 맞아. 성 대감만큼 그릇이 웅위한 재상도 앞으로 드물 것이네."
"무오, 갑자년에 현인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니 소인배들만 날뛰는 세상이 돼버렸어."
"망할 징조지 뭔가."
"뭐가 망한단 말인가."
김식이 알면서도 모른 체하며 조광조에게 되물었다.
"노천, 내 입으로 말해야 알겠는가. 방금 한 말을 누가 듣고 고자질한다면 무슨 죄가 씌워지는 줄 아는가."
"난언죄에 대역부도죄."
"삼족이 극형을 면치 못할 것이네."
"삼족은 물론이고 팔촌까지 화를 면치 못할 것이네."
농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걷던 조광조와 김식은 성준의 집 앞에서 갑자기 어두운 얼굴을 했다. 성준의 집은 홍귀달의 집보다 더 흉하게 변해 있었다. 흙담은 무너져버렸고, 방문은 누군가가 뜯어갔는지 뻥 뚫려 있었다. 사사 당한 정승의 집이라 하여 살 사람도 없는지 폐가로 변해 방치되어 있었다.
할 수 없이 조광조와 김식은 성준의 집에서 좀 멀리 떨어진 이극균의 집으로 갔다. 이극균 역시 갑자년에 사사 당한 인물로 성준보다 한 살 아래의 강골로 초년에는 무인으로 공을 세웠고, 연산주 때는 좌의정까지 올라 연산의 황음(荒淫)을 바로잡으려고 안간힘을 썼던 신하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극균이 인동으로 귀양 가서 사사당할 때의 일화를 조광조와 김식은 소문으로 들어 잘 알고 있었다. 도사가 도착하여 어명을 전하기 전에 이극균이 아랫사람을 추궁하듯 엄하게 물었다.
"나에게 무슨 죄가 있어 이러는가."
도사가 대답 대신에 서둘러 어명을 읽어 내려가자, 이극균은 끓어오르는 분기를 애써 누르며 사약을 단숨에 마셨다. 그런 다음 죽기 위해 불을 지핀 유실(幽室)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 소리쳤다.
"내 나이 장차 칠십이고 몸에 백병이 얽혔으니 지금 죽어도 한은 없다만 나라를 위한 공로가 있고 몸에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을 돌아가거든 임금께 반드시 아뢰어라. 만약 그러하지 않는다면 내 넋이 너를 반드시 벌하고야 말 것이다."
이 말을 한 후, 이극균은 장작불에 점점 더 뜨거워진 유실로 들어가 몸에 사약의 독이 퍼지자 피를 쏟고 죽었다. 도사가 돌아가 연산주에게 이극균의 말을 사실대로 전하자마자 연산주는 즉시 형벌을 더 가중시켰다. 도사에게 다시 명한즉 시신의 해골을 쇠망치로 부수어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도록 하였던 것이다.
연산주 때에 이르러서도 이극균이 좌의정에, 그의 조카 이세좌가 형조판서에 이르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였지만 그의 가문은 일시에 멸문의 화를 입고 말았으니 김식과 조광조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이극균의 서울 집은 여섯 명의 하인과 다섯 명의 소복 차림의 여인들이 잘 지키고 있었다. 여섯 명의 하인이란 이극균이 두만강변 건주위(建州衛)의 여진족 정벌의 공으로 3등 공신이 될 때 받은 노비였다. 그리고 다섯 명의 소복 차림의 여인이란 이극균의 아내와 조카 이세좌의 아내, 그리고 이세좌의 세 아들들의 부인이 함께 있으니 그러했다. 이세좌의 세 아들 모두 홍문관 관원으로 수형(守亨)은 사인(舍人), 수의(守義)는 한림(翰林), 수정(守貞)은 수찬(修撰)으로 있다가 귀양을 갔기 때문이었다.
조광조와 김식은 빈소로 들어가 '아이고 아이고' 하고 곡을 했다. 곡을 하는 동안 소복 차림의 여인들은 빈소로 들어와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눈물을 뿌렸으며, 하인들은 빈소 밖에서 고개를 숙이고 곡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빈소는 마당가에 초가로 대충 지어져 있었고, 상례에는 맞지 않으나 두 사람의 위패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이극균의 위패 앞에는 그가 여진족을 정벌할 때 입은 갑옷과 칼이 놓여 있었고, 이세좌의 위패 앞에는 그의 관복 한 벌이 놓여 있었다. 연산주가 정전에서 음란한 잔치를 베풀었을 때 그 자리에서 입었던 관복으로 부끄럽다 하여 다시는 입지 않고 벗어버린 것이었다.
곡을 마친 김식의 눈시울은 붉어져 있었다. 김식은 얼굴에 자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잘 드러냈다. 그는 소복한 여인들을 보더니 끝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송구합니다. 위로의 말씀을 드리려고 왔는데 그러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다니 부끄럽습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랩니다. 저희 집에 오면 피해를 입을까 봐서 그런 듯합니다. 그러 함에도 이렇게 조문을 와주셔서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곳을 다녀간 사람은 지난 가을 이후 몇 분 안 됩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조광조도 한 마디 했다.
"패악의 시대는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부디 건강하셔야 합니다. 대감의 충직을 표창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니 이 겨울을 반드시 견디셔야 합니다."
초가의 빈소를 나와서 김식이 허허롭게 말했다.
"대감 같은 분들이 안 계시니 세상이 텅 빈 듯하네. 이제는 서울에서 글 읽는 소리를 듣기 어렵게 되었어. 서울은 이미 적막강산이 돼버렸단 말일세."
이극균의 아내가 뒤늦게 이름을 물었다.
"어디서 온 뉘신지요."
"용인에서 온 조광조라 합니다."
"서울에 사는 김식이라 합니다."
조광조와 김식은 이극균의 집을 나왔다. 집을 나서면서 김식이 조광조에게 말했다.
"효직은 소복한 다섯 여인을 보고 나니 무슨 생각이 나던가."
"울컥 치미는 것을 참아냈다네. 선비의 집들이 폐가가 되고, 집들마다 소복한 여인들이 넘쳐나니 이런 세상을 무어라 할지 기가 막힐 뿐이네. 어느 왕조에 이런 비극이 있었더란 말인가."
"슬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네. 태평성대에 태어나지 못하고 이런 세상에 살고 있다니 억울하기도 하고 말일세."
"일찍이 이런 세상은 없었지."
"효직, 이런 세상을 어찌 살아야 하겠는가."
"두 가지의 길밖에 더 있겠는가."
"그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 하나는 세상에 나아가 벼슬을 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벼슬을 하지 않고 세상에서 숨어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효직의 말이 옳은 것 같으이."
"나처럼 생진사시에 아예 나가지 않았다면 몰라도 4년 전에 진사시에 합격한 자네야말로 고민이 되겠구먼.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를 더 하든지 아니면 벼슬길을 포기하든지 말이네."
김식이 17살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자 선비들 사이에서는 천재가 출현했다 해서 화제가 분분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만큼 김식의 출현은 화려했으나 어쩐 일인지 김식은 벼슬길에 별 흥미를 못 느끼고 주춤거렸다. 진사시 합격 이후에는 용문사를 들락거리며 주역 공부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효직, 자네의 실력이면 생진사시에 장원 합격을 하고도 남을 텐데 자네야말로 왜 나서지 않는 것인가."
"나야 한훤당 선생의 제자가 아닌가."
한훤당 김굉필의 제자들은 벼슬길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그것보다는 도학으로 자신을 담금질하여 군자처럼 고고하게 사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벼슬에 관심이 없는 효직 같은 사람만 있다면 이 세상을 누가 바로잡겠는가."
"군자란 굳이 세상에 나아가지 않는다 해도 세상을 정화시킨다고 했네. 깊은 산속의 매화나무가 스스로 꽃을 피워 계곡 아래로 향기를 내려보내는 것처럼 말이네."
"나는 도학을 이렇게 생각해 보았네."
"노천, 어서 말해 보게."
"산속의 매화나무처럼 고고하게 사는 것도 군자의 삶이요, 저잣거리 백성의 배고픔을 해결해주는 쌀이 되는 것도 군자의 삶이 아니겠는가."
"노천, 세상으로 나서겠다는 말이군."
"허나 아직은 때가 아니네. 전하 밑에서 벼슬을 하는 것은 전하의 황음과 패악에 동조하는 것밖에 무슨 의미가 있겠나. 대사성 어른이 성균관에 입학하라고 몇 번이나 권유했지만 나서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네."
"그러고 보니 노천은 주역을 공부하면서 때를 기다렸던 것이구먼."
"사계절 중에서 지금은 죽은 듯 움츠려야 하는 한겨울이라네."
세설도 계속 내리다 보니 신발이 빠질 만큼 쌓였다. 두 끼니를 거르며 걷고 있자니 뱃속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다. 기운이 떨어지고 추위까지 겹치니 어깨와 턱이 떨렸다.
"술기운마저 떨어지니 더 걷지 못했겠네. 노천이 요기를 시켜주게나."
"좀더 가면 유 정승 댁이 있네. 유 대감은 남부학당 출신으로 내 선친과 죽마고우였다네.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한 대감의 성격이 맘에 들지 않지만 오늘은 배가 고프니 고개를 한번 숙여 보겠네."
"연산주 아래서 눈치만 보며 '네, 네'만 일삼아 영의정까지 오른 유 정승 댁에 가자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배가 고프긴 고픈 모양이군."
"그래도 유 정승이 임사홍이나 유자광보다 나은 것은 영상이 되어서도 밤을 새며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지. 어느 날은 한 책을 읽고는 '노부(老父)가 하마터면 이 책을 알지 못하고 죽을 뻔했다'고 한 적도 있다네. 책을 보고 이 정도로 감탄할 줄 안다면 썩 괜찮은 벼슬아치가 아닌가 말이네."
"노천, 자네는 예부터 박학다식한 사람을 좋아했다네."
"밤새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양심을 아주 팔아치운 사람은 없지 않은가."
영의정 유순(柳洵)은 흥인문에서 성균관 가는 길에 살고 있었다. 말을 다시 탄 김식이 앞서고 조광조가 뒤따랐다. 유순도 허침이나 안동 출신의 김수동(金壽童)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해치거나 해코지한 일은 없었다. 유순은 허침보다 부드럽고 김수동보다 가벼운 성격이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그래서 그는 연산주 아래서 벼슬과 목숨을 무사히 보전할 수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가 자기주장을 내야 할 때도 어름어름하고, 연산주가 무슨 지시를 내리든 '네, 네'만 할 줄 아는 정승이라고 험담을 하였다.
대감 집 행랑채에는 늘 식객이 붐비기 마련이었다. 유순의 솟을대문 앞에는 초라한 행색을 한 사람들이 눈을 맞으며 대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미끄러운 눈길인데도 한 사내가 말을 빠르게 몰고 와 솟을대문 앞에서 소리쳤다.
"이리 오너라."
그래도 안에서 인기척이 없자, 대문을 발로 걷어찰 듯이 가까이 다가가 소리 치고 있었다.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솟을대문 앞에서 위엄을 부리며 행랑채 아랫것을 부르던 사내가 뒤를 돌아보자 모두들 기세에 눌려 고개를 숙였다. 다만 김식과 조광조만이 바로 서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연산주에게 팔도를 돌아다니며 반반한 처녀를 뽑아 올리는 채홍사가 되어 권세를 잡은 임사홍이었다. 김식이 투덜거렸다.
"재수 없는 놈을 보았으니 돌아가세."
"저 자가 누구인데 그런가."
"효직은 천하의 간신 임사홍도 모르는가."
"그렇다면 저 자가 팔도를 돌며 닥치는 대로 연산주에게 여인을 잡아 올려 아부한 임사홍이란 말인가."
"저 자뿐만이 아니네. 저 자의 아들도 채홍사가 되었다네."
"헌데 말이네, 알다가도 모르겠거든. 저 임사홍의 아들 중에는 점필재 선생의 제자도 있잖은가. 무오년에 귀양을 갔던 임희재(任熙載) 말이네."
무오년 이후 임희재도 역시 연산주의 미움을 더 사게 되어 화를 입었는데, 임희재가 글씨를 쓴 병풍을 집안에 펼쳐놓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연산주가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임사홍 집에 들러 그 병풍을 보았던 것이다. 임희재가 병풍에 쓴 절구는 연산주를 희롱하는 글이었다.
요순을 본받으면 저절로 태평할 것인데
진시황은 무슨 일로 백성을 괴롭혔는지
재화가 집안에서 일어난 줄 모르고
공연히 오랑캐 막으려고 만리장성 쌓았구나.
祖舜宗堯自太平
秦皇何事苦蒼生
不知禍起蕭墻內
虛築防胡萬里城
누가 보아도 연산주를 진시황에 빗대어 비웃는 절구였다. 연산주는 임사홍에게 노기를 띠며 물었다.
"누가 쓴 것이오."
임사홍은 사색이 되어 사실대로 말하였다.
"신의 아들이 썼습니다."
"경의 아들은 불초한 사람이오. 내가 죽이려고 하는데 경의 의사는 어떠한가."
임사홍은 등골이 오싹하여 입에서 나오는 대로 둘러대었다.
"자식의 성질과 행실이 온순하지 못한 것은 전하의 말씀과 같습니다. 신이 아뢰고자 하다가 미처 아뢰지 못했습니다."
임사홍은 연산주에게 아들을 죽여도 좋다고 아부하였는데, 아들과는 이미 정적이 되어 있었던 바, 임희재가 비록 아버지이긴 하지만 임사홍의 잘못을 연산주에게 죄주기를 바라며 간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김식과 조광조는 날이 어두워지고 있으므로 그 길로 헤어졌다. 김식은 조문을 더 하겠다고 성현(成俔)의 집으로 갔고, 조광조는 떨어지는 해를 붙잡는 심정으로 혜화문 밖의 갖바치 집을 서둘러 찾아 갔다.
김식은 말을 타려다가 그만 두었다. 말도 역시 끼니를 건너 뛰어 다리를 휘청거리고 있었다. 김식은 말고삐를 잡은 하인에게 먼저 집으로 돌아가라고 일렀다.
갑자년에 죽은 성현의 집도 적막할 것이었다. 성현의 아들 성세창(成世昌)은 김식의 친구였으므로 김식은 성현의 집을 빠트릴 수 없었다. 물론 가봐야 만날 사람은 소복한 여인이나 하인뿐일 것이 뻔했다. 성세창이나 그의 동생도 모두 귀양을 갔기 때문이었다.
김식은 친구인 성세창보다는 그의 아버지 성현을 더 좋아했다. 성현은 김식이 동경하는 신선이나 다름없었다. 갑자년이 시작되던 정월, 매화꽃이 만개한 날 밤이었다. 성현은 그해 가을에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나 한 듯 무심하게 백발을 날리며 사랑방에 손님이 와 있는 줄도 모르고 달빛에 환하게 드러난 매화나무 아래서 거문고를 뜯고 있었던 것이다.
거문고 소리는 맑기 그지없어 그 소리를 듣자마자 몸에 시원한 기운이 가득 차오름을 느끼게 했다. 그때 김식도 홍사부(洪士俯)와 함께 사랑방 문을 열고 보았는데, 김식은 지금도 홍사부가 '용재(傭齋; 성현의 호) 선생이야말로 참으로 선풍도골(仙風道骨)이라 할만 하구나'하고 중얼거렸던 말을 기억했다.
성현의 호는 용재 말고도 부휴자(浮休子)라고 했다. 그는 부휴자라고 한 근거로 부휴자전(浮休子傳)을 지었는데, 그 짧은 글에도 선풍(仙風)이 미묘하게 흘렀다.
'세상에 나서 사는 것이 마치 떠 있는 것 같고, 죽어서 세상을 떠나는 것이 쉬는 것 같으니 무엇이 영화로우며 또 쉰들 또 무엇이 슬프리오.'
그래서인지 갑자년에 66세로 죽으면서 남긴 유서도 세상 사람들과 달리 개결했다.
'상례와 장례를 모두 간략히 하고, 문 앞에서 상여를 소로 끌게 하고, 만장은 10장쯤으로 하여 나의 검소한 뜻을 표하게 하라. 내가 임금의 은혜를 입어 벼슬이 육경에 이르렀으되 내세울만한 덕이 없으니 다만 표석이나 세우고 비를 세우지 말라.'
그러나 연산주는 무덤에 묻힌 그의 시신에까지 해를 가했다. 자신이 총애하는 기생과 문란해지는 것을 두고 생전에 그가 간하였다고 트집 잡아 그의 무덤을 파헤치는 보복을 하였던 것이다.<계속>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는 화순군 홈페이지와 동시에 연재됩니다.
☞ 화순군 홈페이지 바로가기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