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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한 역사학자와 투철한 공산당원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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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한 역사학자와 투철한 공산당원 사이에서

타계한 맑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일대기

20세기 최고 권위의 마르크스주의 사학자로 꼽히는 에릭 홉스봄이 지난 1일(현지시간) 9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뉴욕타임스>는 1일(현지시간) 부고기사를 통해 그의 죽음을 알리며, 공산당원과 사학자로서의 그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신문은 그의 출생부터 성장배경, 열정적인 볼셰비키 혁명의 신봉자가 된 과정, 런던으로 건너가 사학자로서 명성을 얻게 되기까지 그의 일생 전반을 이야기했다. 특히 홉스봄에게는 직업으로서의 역사학자와 공산주의자 투사로서의 불안한 공존이 있었음을 언급했다. 故 토니 주트 뉴욕대 사학과 교수는 "그가 치러야 했던 가장 거대한 비용은 그가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고집 센 공산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으로 기억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편집자> (☞원문보기
)

▲ 런던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던 에릭 홉스봄 ⓒAP=뉴시스

산업 자본주의의 부상을 다룬 3권의 경제사 서적을 써 영국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최고 권위자로 입지를 다졌던 에릭 홉스봄이 1일(현지시간) 9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사인은 폐렴이었다고 그의 딸 줄리아 홉스봄이 밝혔다.

홉스봄은 크리스토퍼 힐, 에드워드 팔머 톰슨, 레이몬드 윌리엄스가 함께 했던 영국 공산당 내 사학자 그룹을 이끈 인물로 위인들이 만든 중요한 사건 위주로 서술되던 전통적인 역사 이해 방식을 재구성하는 데 일조했다. (위인 중심의 서술) 대신 그는 19세기의 노동운동과 초기 자본주의 사회의 의적, 천년왕국운동가(millenarian), 도시 폭도들의 소위 "정치 이전"(pre-political)의 저항이라고 지칭했던 사건에 초점을 맞췄다.

홉스봄의 명저에는 그가 "긴 19세기"라고 언급한 시기에 대한 예리하고, 종종 설득력 있는 조망이 담겨 있다. 그는 이 시기를 <혁명의 시대: 1789-1848>, <자본의 시대: 1848-1875>, <제국의 시대: 1874-1914>라는 3권의 책에서 분석했다. 이 3부작의 결말부 격으로 그는 1994년 미국에서 '세계의 역사, 1914-1991'의 부제가 달린 <극단의 시대>를 펴냈다.

토니 주트 뉴욕대 사학과 교수는 그가 사망하기 2년 전인 2008년 썼던 한 이메일에서 "에릭 홉스봄은 영국의 이야기 중심의 역사 서술 전통에서 뛰어난 사학자였다"라며 "그가 손을 대는 모든 사안에서 그는 최신 풍조를 좇는 모방꾼들보다 더 잘 썼고, 더 많이 읽었으며 더 넓고 섬세한 이해력을 보였다. 만일 그가 평생 동안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면 그는 20세기 최고의 역사학자 중 한 명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소련이 1956년 헝가리 혁명과 1968년 체코의 민주화운동을 진압했을 때 당시 영국에 거주하던 홉스봄은 많은 공산당원들과는 달리 계속 공산당을 지지했다. 그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이 붕괴할 즈음 결국 당적을 내려놨다.

그는 2003년 <뉴욕타임스>에 "나는 내 삶의 전부였던 전통과 처음 공산주의 활동을 시작했을 때의 생각과 단절하고 싶지 않았다"며 "나는 여전히 인간해방이 대의라고 생각한다. 아마 우리가 잘못된 길로 들어섰을 수도 있고, 잘못된 판단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 위에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에릭 홉스봄은 1917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당시 영국 영사관 직원은 그의 성을 잘못 기재했다. 그의 아버지인 레오폴드 퍼시 홉스바움(Hobsbaum)은 영국 동부 이스트 엔드 지역에서 사업에 실패했던 상인이었다. 어머니 넬리 그륀은 오스트리아 출신이다. 유대인이었던 그의 가족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비엔나에 정착했다. 1929년 아버지가 집 앞 계단에서 넘어져 사망한 이후(아마도 심장마비로 추정된다) 남은 가족들은 근근이 먹고 사는 형편이 됐다. 2년 후 어머니마저 폐병으로 유명을 달리한 후 그는 베를린으로 가 친척들과 함께 살았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쇠퇴하던 몇 달 간, 재능 있는 학생이었던 홉스봄은 열정적인 공산당원으로 볼셰비키 혁명의 신봉자가 됐다. 그는 2003년 출간한 회고록 <미완의 시대>(원제:Interesting Times)에서 "컴퓨터 하드 디스크 어딘가에 삭제된 문서들이 전문가에 의해 복구되기를 여전히 기다리는 것처럼, 10월 혁명의 꿈은 여전히 나의 내면 어딘가에 있다."라고 썼다.

침착하고 내성적이었던 홉스봄은 독일의 급진적 정치 상황에서 스릴과 동료애를 찾았다. 공산당 학생조직의 구성원이었던 그는 히틀러가 수상으로 임명된 몇 주 후에 공산당 전단지를 아파트 문 아래로 밀어 넣고 다녔고 당시 불법이었던 복사기를 그의 침대 아래에 숨기고 살았다. 그러나 몇 주 되지 않아 그는 다른 친척들과 함께 영국으로 보내졌다.

그의 삼촌이 공산당이나 (홉스봄이 내부에서 파멸되기를 원했던) 노동당 어느 곳에도 가입을 허락하지 않은 상황에서 홉스봄은 런던에 있는 성 메리레본 중등학교에서 학업에 열중했고 케임브리지대에서 장학금을 받았다. 그곳에서 그는 1936년 공산당에 가입했고 주간지 <그랜타>의 편집을 맡았으며 '사도'(Apostles)라고 알려진 비공식 지식인 모임에 초대받았다.

그는 회고록에서 "당시 그 초대는 어떤 케임브리지 학생도 거절하기 힘든 것이었다. 혁명론자조차도 적당한 전통 안에 있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그는 스스로를 "보수적인 공산주의자"라며 1960년대를 상징하는 개인 자유를 중시한 정치문화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 에릭 홉스봄 ⓒ프레시안 자료사진
홉스봄은 1939년 (케임브리지대) 킹스 칼리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942년에 석사, 1951년에 박사학위를 땄다. (영국의 점진적 사회주의 사상 단체) 페이비언 협회에 논문을 쓰기도 했다. 1943년 그는 공무원이자 공산당 동료였던 뮤리엘 시먼과 결혼했지만 1950년 이혼했다. 1962년 홉스봄은 마를린 슈왈츠와 결혼했고, 마를린은 현재까지 생존해 있다. 그에게는 딸 외에도 아들 앤드류, 조스 베나단이 있고 7명의 손주, 1명의 증손주를 두었다.

홉스봄은 1939년부터 1946년까지 영국군에서 복무했는데, 그는 그 기간을 인생에서 가장 불행한 때라고 회상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어떠한 보직에서도 제외된 채 다른 이들이 파시즘에 대항해 위대한 무장투쟁을 벌일 때 영국에 남아 무기력해졌다. 그는 당시 전쟁에 대해 "나는 군에서 어떤 중요한 일도 하지 않았다"며 "그리고 아무것도 요구받지 않았다"라고 썼다.

그는 1947년 런던대 버벡 칼리지에서 역사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1949년에서 1955년까지 킹스 칼리지 사학과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재직했다.

홉스봄과 공산당 사학자들의 연구 모임에 속한 그의 동료들은 노동의 역사를 연구의 중요한 부분으로 확립했고 1952년 영향력 있는 학술지 <과거와 현재>(Past and Present)를 창간해 그들의 본거지로 삼았다.

역사 서술에 대한 이들의 새로운 접근법은 <원초적 반란자들>(Primitive Rebels: Studies in Archaic Forms of Social Movement in the 19th and 20th Centuries), <노동하는 인간>(Laboring Men: Studies in the History of Labor)와 <산업과 제국>(Industry and Empire), 동료인 크리스토퍼 힐의 <산업혁명으로의 개혁>(Reformation to Industrial Revolution) 등과 같은 결실을 맺었다.

이 기간 동안 홉스봄은 (영국의 진보 성향 주간지) <뉴 스테이츠맨 앤드 네이션>에 프란시스 뉴튼이라는 필명으로 재즈 비평을 썼다. 그의 필명은 스스로 공산주의자라고 인정한 재즈 트럼펫 연주자 프랭키 뉴튼에서 따온 것이다. 그의 재즈에 대한 글은 1959년 <재즈 동네>(The Jazz Scene)라는 책으로 출간되기까지 했다.

회고록에서 그가 주장한 것처럼 그의 정치적 헌신이 직업상의 출세를 방해했더라도 결국 명예와 명성이 그에게 찾아왔다. 그는 1959년 런던대에서 부교수로 승진했고 1970년에는 경제·사회 역사학자로 임명됐다. 1982년 은퇴한 이후 그는 스탠포드대, MIT, 코넬대, 맨하탄에 있는 신사회연구원에서 강의를 맡았다.

그의 <시대> 3부작에 대한 찬사는 그에게 역사학회 회원 자격과 명예 학위를 가져다주었지만 인생 말미로 가면서 직업으로서의 역사학자와 공산주의자 투사의 불안한 공존이 이어졌다.

홉스봄은 80대에 이르러서야 겨우 <극단의 시대>를 통해 그의 정치적 견해를 형성한 끔찍한 사건들이 있었던 20세기를 돌아볼 수 있었다. <극단의 시대>는 그가 사학자로서 회피하려했던 시기를 괴롭게 돌아본 책이다. 그는 이 시기를 회피한 이유에 대해 회고록에서 "20세기에 대한 당과 소련의 강력한 공식 견해를 고려하면, 정치적 이단자로 비난받을 가능성이 없이 1917년 이후에 대해 어떤 것도 쓸 수 없었다"고 밝혔다.

홉스봄은 90대가 되어서도 <뉴욕 리뷰 오브 북스>같은 간행물에 자주 등장하는 등 집필 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어떻게 세계를 바꾸는가: 맑스와 맑시즘에 대한 이야기>(How to Change the World: Tales of Marx and Marxism)는 지난해 출간됐고, 20세기 문화와 사회에 대한 수필집 <분열된 시대>(Fractured Times)가 영국 리틀 브라운 출판사에서 내년 3월에 출간될 예정이었다.

▲ 에릭 홉스봄의 저서 미완의 시대 ⓒ 민음사
비록 점점 수세적인 입장에 처하고, 거대한 공산주의 실험이 실패했을 뿐 아니라 시작에서부터 불길한 운명이 주어져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많은 비평가들이 불만을 표한 것처럼 홉스봄은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거나 그 실험이 낳은 인류의 고통을 직시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내가 구하려는 것은 역사에 대한 이해이지 동의나 지지, 연민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1994년 그는 <BBC>의 마이클 이그나티에프와의 인터뷰에서 시청자들을 경악케 했는데, 그는 만약 진정한 공산주의 사회가 건설되는 결과가 만들어진다면 스탈린 통치하에서 수백만 소련 시민들이 죽어간 것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주트 교수는 "그가 치러야 했던 가장 거대한 비용은 그가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고집 센 공산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으로 기억되는 것"이라며 "그것은 공정하지 못하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가 감내해야 할 십자가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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