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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밑에 빌붙어 연명하는 기생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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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밑에 빌붙어 연명하는 기생충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道'] 제5장 폭군의 몰락 <22>

우의정 허침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입궐하지 않았다. 성종 때 세자인 연산군을 가르치는 시강관을 지낸 인연으로 승승장구하여 우의정까지 올랐으나 늘 명치끝에 무엇이 들어앉은 듯 편치 못한 그였다. 어제는 동궁에서 연산군을 함께 가르쳤던 조지서(趙之瑞)가 참형을 당한 후 강물에 시신이 던져졌다는 소식을 연산주에게 직접 들었던 것이다. 연산주는 자신을 가르쳤던 조지서를 그렇게 죽임으로써 갑자년 사화의 참극을 마무리 지을 모양이었다.
허침은 취기로 몸이 무거웠으므로 느지막이 일어나서 누나 집으로 갔다. 늙은 말은 말고삐를 잡아당기지 않는데도 길에 익숙하여 뚜벅뚜벅 나아갔다. 허침의 누나는 백세까지 살았는데 식견과 지혜가 넘쳐 도인의 별호처럼 사후에도 문중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 '백세할머니'로 불리었다.
사실, 허침이 김일손의 사초에 연루되기는 했지만 무오년에 이어 갑자년을 무사히 넘긴 것도 누나가 시키는 대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허침의 형 허종도 마찬가지였다. 조정에 큰 일이 생기면 반드시 형제가 누나를 찾아가 지혜를 구했던 것이다.
성종이 윤비(연산군 생모)를 폐하려 할 때도 형제는 누나를 찾아가 처신의 지혜를 구했는데, '아들이 세자로 있는데, 그 어머니를 죄 주고서 훗날 어찌 무사하겠느냐'고 하였으므로 허종은 신병을 핑계하여 입궐하지 않았고, 허침은 폐비 논의를 하는 조신들에게 이의(異議)를 제기함으로써 당시에는 체직을 당했으나 연산주가 폐비사건에 참여한 선비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죽일 때 화를 면했던 것이다. 허침은 누나 집에 당도하여 말에서 내리자마자 큰소리로 말하였다.
"누님, 제가 왔습니다."
그래도 대문이 열릴 기미가 없고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토방에 누나의 신발이 놓여 있는데도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허침은 누나가 낮잠을 자나보다 하고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불렀다.
"누님, 동생 허침이 왔습니다."
그제야 방문이 열리고 노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이 늙은이의 좋은 꿈을 깨트리는 놈이."
"대낮에 꾸는 개꿈을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누님."
"개꿈을 꾸든 용꿈을 꾸든 입궐에서 일을 보아야 할 놈이 왜 여기를 왔느냐."
노파가 대문을 열며 짜증을 냈다. 그러자 천성적으로 부딪치기를 싫어하는 성격의 허침이 코를 벌름거리며 동문서답을 했다.
"누님, 국화꽃 향기가 좋습니다."
"노국(老菊)이라 며칠 후면 사라질 향기다. 좋아하지 마라. 향기 때문에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목이 꺾여져 죽는 게 꽃이 아니더냐. 사람도 마찬가지다. 네가 폭군 밑에서 화를 당하지 않고 이만큼 산 것도 남보다 재주가 빼어나지 않아서이다."
허침은 눈을 크게 뜨고 놀랐다.
"누님, 폭군이라니요. 전하를 폭군이라 했습니까. 그렇다면 저는 폭군 밑에 있는 우의정 허침이라는 말입니까."
"호호호."
노파가 입을 벌리고 웃자 노파의 얼굴이 참으로 볼품없이 변해버렸다. 이가 듬성듬성 빠진 데다 잇몸마저 문드러져 있어 괴기스럽기조차 하였다.
"누님, 입을 벌리시니 쥐꼬리만한 정마저 떨어지겠습니다."
"그렇다면 입을 닫고 있을 테니 돌아가거라."
노파가 돌아앉은 후 벌렁 드러누워 버리니 난감해진 허침이 그녀를 달랬다.
"누님 농담도 못합니까. 누님을 극진히 섬기는 사람이 우리 형제 말고 또 누가 있습니까. 우리 형제가 무오년, 갑자년을 무사히 넘기고 있는 것도 모두 누님 덕분이 아닙니까. 그런 누님의 고마움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노파가 다시 호호호 하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알기는 알고 있군. 그래, 오늘은 무엇 때문에 왔느냐."
"전하가 조지서마저 죽였습니다. 그것도 시신을 강물에 던져 자손들이 찾지 못하게 하라고 명했습니다."
"이놈아 그래서 폭군이라고 했다. 세상이 자기를 가르친 스승을 죽인 임금을 폭군이라 부르지 않으면 무엇이라고 부르겠느냐."
"그래도 제 입으로 그리 말할 수는 없습니다."
"너는 그러겠지."
"누님, 요즘 전하가 더욱 난폭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입궐하는 것이 죽을 맛입니다. 어찌 하면 좋겠습니까. 마음 같아서는 당장 사직을 하고 싶습니다."
연산주 아래서 보아도 보지 않은 것처럼, 들어도 듣지 않은 것처럼 처신해 온 허침이었지만 조지서의 죽음만은 견딜 수 없는 충격이었다. 누나의 말대로 연산주는 삼강오륜을 무너뜨린 폭군이 틀림없었고, 자신은 폭군 밑에서 빌붙어 연명하는 기생충 같은 벼슬아치에 불과한 것이었다. 허침은 고지식한 조지서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백부(伯符; 조지서의 자), 이 사람아. 성질 좀 죽이고 살지. 곧은 나무는 부딪치면 부러지지 않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의 재주가 너무나 아깝단 말일세. 우리 누님의 말이 맞아. 향기가 빼어나 목이 꺾여버린 꽃이 바로 자네일세.'

성종 때 어린 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되었을 때, 허침과 조지서는 시강관이 되어 동궁으로 나아가 연산군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연산군은 학문에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고 날마다 유희에 빠져 놀기를 좋아했는데, 부왕인 성종의 엄한 훈계가 두려워 마지못해 동궁의 서연(書筵)에 억지로 나올 뿐이었다. 허침(許琛)과 조지서(趙之瑞)가 마음을 다하여 강의를 하여도 모두 귀 밖으로 흘리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조지서는 연산군의 그러한 태도를 용서하지 않았다. 천성이 굳세고 곧아 어떤 날은 강의를 하면서 연산군을 크게 나무란 적도 있었다.
"저하께서 학문에 힘쓰지 않으시면 신은 마땅히 임금께 아뢰겠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선비가 고작 고자질이나 하겠다니 한심하구려."
"고자질이라니 장차 이 나라의 임금이 되실 저하께서 어찌 고상하지 못한 말을 함부로 하십니까. 지금 저는 저하를 가르치는 동궁의 관원입니다. 고맙다는 말을 듣기는커녕 제자에게 책망하는 말을 듣는 선생이 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입니까."
조지서는 화가 나 연산군 앞에 강의하던 책을 던져버리고 서연을 나와 분을 삭였던 반면에 허침은 절대로 그런 일이 없었다. 허침은 부드러운 말로 연산군을 달래어 책상 앞에 앉아 있게 하였다. 연산군이 강의가 따분하여 졸더라도 허침은 책장을 넘기며 진도를 나갔다. 그러다 보니 연산군은 조지서와 있을 때는 몹시 고통스러워하였고, 허침과 있을 때는 전혀 부담을 갖지 않았다. 어느 날은 서연의 벽에 연산군이 이런 낙서를 써 붙여 분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조지서는 큰 소인(小人)이요
허침은 큰 성인(聖人)이다.

조지서는 연산군에게 소인이라고 불리는 치욕을 당했다. 군자를 삶의 목표로 사는 선비에게 소인이라고 함은 능멸에 가까운 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난기 섞인 연산군의 낙서는 크게 문제되지 않고 넘어갔다. 성종은 조지서의 인품과 학식을 높이 사 세자를 가르치는 동궁의 시강관으로 계속 임명하였던 것이다.
조지서.
본관은 임천(林川)이고 자는 백부이며 호는 지족정(知足亭)이었다. 성종 갑오년에 생원과에 장원하고 진사시에 2등(실제로 1등이었으나 생원시에 1등을 하였으므로 관례에 따라 2등을 줌), 기해년에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벼슬이 시강관인 보덕(輔德)에 이르고 호당(湖堂)을 거쳐 응교가 되었다. 이와 같이 조지서는 시험 때마다 세 번이나 삼장원(三壯元)을 한 천재였으나 연산주의 폭정에 회의를 느껴 내직에서 외직 지방관으로 자청하여 나갔다가 그것마저 버리고 고향인 진주로 돌아가 10여 년을 야인으로 묻혀 지내다 갑자년에 화를 당한 인물이었다.
갑자년 여름에 진주에서 성종 때 승지를 지낸 정성근(鄭誠謹)과 함께 압송되어 올라올 때 조지서는 죽음을 면하기 어려울 줄 직감했는데, 함께 잡혀가는 정성근의 죄명이 너무나 어이없기 때문이었다. 성종이 승하하자 3년상을 행했다는 '괴이한 행실'이 정성근의 죄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자신은 세자 연산군을 성군의 싹을 틔우고자 원칙대로 엄하게 대했기 때문에 극형에 처해질 것이 뻔했던 것이다.

"누님, 요즘에는 정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피를 두어 되씩 토합니다. 전하께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대니 화병이 나서 그렇습니다. 그러니 사직하려고 합니다."
"네 혼자만 살려고 그러느냐."
"날마다 피를 토하며 동생이 죽어 가는데 누님은 어찌 그리 무심하십니까."
"너는 지금의 너에게 만족해야 한다. 지족(知足)이란 말을 생각하거라. 폭군 밑이라 하더라도 네 할 일이 있지 않느냐. 비록 조정의 잘못된 일을 바로 잡지는 못해도 의정부에 앉아 죄인들의 죄를 논죄할 적에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지 않느냔 말이다."
"조지서마저 목이 베이니 조정에 정나미가 떨어져서 누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나를 찾아올 것이 아니라 조지서의 부인을 찾아가 위로를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느냐."
며칠 후, 허침은 누나의 조언대로 조지서의 아내에게 연산주 몰래 사람을 보내어 위로를 했다. 그 사람이 들려준 조지서의 아내는 대대로 산음(오늘의 산청)에 터를 잡아 살아 온 정몽주의 증손다웠다. 조지서가 압송되기 전 헤어지면서 술잔을 들고 '내가 이번에 가면 돌아오지 못할 것이니 조상의 신주를 어찌 하겠소' 하니 그의 아내가 울면서 '마땅히 죽음으로써 보전하겠습니다' 하였다는 말에 허침은 가슴이 먹먹했다. 더욱이 재산을 몰수당한 후 친정아버지가 '시집이 망했으니 친정으로 돌아와서 사는 것이 어떠냐' 하고 말하자 '남편이 저에게 조상의 신주를 부탁하였고, 저는 죽음으로써 보전하겠다고 했으니 어찌 마음을 바꾸겠습니까. 또 남편의 첩에게 집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서 의지해 살겠습니다' 했다는 말에 허침은 과연 정몽주의 피가 흐르는 충신의 후손이구나 하고 눈물을 흘렸다.
허침은 정무를 마치고 돌아온 후 또 목에서 피를 넘겼다. 진언하는 일도 지치어 자신의 무력감을 견디는 것마저 고역이었다. 아까운 선비들이 하나 둘 죽어갈 때마다 허침은 송곳으로 온몸을 쑤시는 듯한 고통을 받았다.
특히 갑자년은 일년 내내 고통스러운 날이 계속됐다. 폐비 윤씨를 종묘에 모시자고 논할 때 '일이 불가하다(事不可)'는 주장을 폈던 전력으로 사형을 당한 교리 권달수(權達手)의 죽음도 허침을 괴롭혔다. 김안로(金安老)가 권달수를 만난 얘기를 세세하게 전해주었던 것이다. 권달수가 '일이 불가하다'는 주장을 편 죄로 용궁으로 귀양 가 있다가 서울로 압송돼 오면서 가족이 사는 영순리(永純里)에 들렀을 때였다. 김안로가 술병을 가지고 가서 권달수를 위로했는데, 그때 이렇게 부탁의 말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내가 죽거든 시신에서 내 두 눈을 뽑아 주시오."
"통지(通之; 권달수의 자), 그게 무슨 말이오."
"옛날부터 참소하는 간사한 자가 임금의 악함을 막지 않고 어떻게 선비들을 해치고 제 몸을 보전하였는지 죽고 난 후라도 보고 싶소."
이에 김안로가 대답을 못하고 술잔을 기울이자, 권달수가 다시 강개한 목소리로 말했다,
"간사한 그들이 멸망하는 것을 내 두 눈으로 보게 해주시오."
의금부 감옥에 들어가자, 심하게 고문을 당하여 옷이 피로 얼룩진 이행(李荇)이 먼저 와 있었다. 다음 날, 권달수가 국문 중에 고문을 당하고 들어오더니 이행의 손을 잡아끌면서 '햇볕 아래 흰 기운이 공중에 뻗친 것을 자네도 보았는가' 하고 말했다. 이행이 보지 못했노라고 대답하자, 권달수가 '아, 난 죽을 것이네. 흰 기운은 햇빛을 가리고자 나에게 이른 것이라네'라고 말했다. 그 뒤 권달수는 죽고 이행은 거제도로 귀양을 갔는데, 이행은 꿈에 권달수가 평소와 같은 모습을 보이므로 시를 한 수 지었다.

칼날을 무릅쓰고 혼자 나아가니
하늘이 요기로 햇빛을 가리네
밤중의 꿈속은 평일과 같은데
두어 줄기 눈물이 요를 적시네.
橫衢白刀獨能前
天遺妖氛翳日邊
半夜夢魂如宿昔
數行淸淚濕寒氈

김안로가 허침에게 전해준 또 다른 이야기는 성종을 위해 3년상을 치렀다는 '괴이한 행실'로 죽음을 맞은 정성근의 개결한 성품에 관한 것이었다. 정성근이 일찍이 대마도에 사신으로 간 일이 있었는데, 그곳에 매림사(梅林寺)라는 자못 맑고 깨끗한 절을 지나치게 되었다. 일행이 정성근에게 청하기를 '배 안에서 오랫동안 답답하게 지냈으니 외국의 절이라도 한번 구경하지 않겠느냐'고 하자, 정성근은 이렇게 거절하여 일행이 공무에 전념하도록 일깨워주었다는 것이었다.
"가고 싶으면 너희들이나 갈 것이지 나는 필요가 없다. 나는 이미 앉아서 다 상상하고 있다. 법당을 깨끗이 쓸고 부처를 놓고 향을 피우고 뜰에는 귤나무와 치자나무 따위의 과실수를 심은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우리나라의 절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윽고 대마도 도주(島主)의 집에 이르렀는데, 도주가 문밖에 나와 조선 임금의 왕명을 받아야 할 터인데 문밖에 나오기를 꺼려했다. 이에 정성근이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통역을 시켜 왕명을 의식대로 공경하게 받도록 재촉하여 그러도록 하였고, 돌아올 때 도주가 그림부채, 차는 칼, 후추, 판향(瓣香) 등을 폐백으로 바쳤으나 정성근은 하나도 탐하지 않고 접대하던 왜인에게 주어 도주에게 돌려보내버렸다. 도주가 조선에 사람을 보내 받기를 청하니 성종이 허락했으나 정성근은 성종에게 아뢰기를 '신이 그곳에 가서는 받지 않다가 여기서 받으면 앞뒤 마음이 다르게 되니 원치 않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성종도 별 수 없이 왜인에게 물건들을 돌려보내고 말았다.
정성근의 성품이 이렇게 까다로우니 연산주가 좋아할 리 없었다. 자연히 정성근은 연산주 시대에는 합당한 벼슬을 하지 못하고 불우하게 보내면서 나라걱정을 할 뿐이었는데, 이때 그가 부른 시를 김안로가 한시로 번역했던 것이다.

내가 님 생각하는 마음으로 보아
님은 내 마음 같지 않도다
님의 마음이 진실로 같을진대
세상이 어찌 이럴 수 있으리오
비록 생각은 아니하나
미워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以我思子心 子無我心似
子心苟可似 天下寧有是
思之縱無能 無嫉猶可已

복숭아와 오얏은 봄바람에 아첨하여
아름다운 빛깔을 다투도다
늦은 국화도 마침내 꽃이야 피련만
외롭고 쓸쓸하니 누가 보아 주려나
서리 바람이 풀잎을 싹 쓸어 없앨 제
의로운 향기만 가을 동산에 의탁하리.
桃李媚恩光 競此色婉娩
老菊終赤花 寂歷誰省玩
霜風掃卉空 孤芳托秋苑

허침을 괴롭히는 사건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온 나라가 연산주의 음행을 저지르는 놀이터로 변하고 있었다. 성균관마저 연락(宴樂)의 장소가 되어 공자 이하 모든 위패가 다른 곳으로 옮겨져 방치되고 강당과 사당은 음탕한 유흥장소로 변한가 하면 태학을 비워 무당을 모아 난잡한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음란한 행동거지를 두고 논박하는 홍문관에 이어 간언하는 사간원마저 폐지하였다.
이러한 연산주의 패악을 보다 못해 하루는 환관의 우두머리인 김처선이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심정으로 나섰다. 입궐하려던 김처선은 이미 마음의 정리를 하고 있었으므로 집안사람을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오늘 반드시 죽을 것이다."
띠를 건네주며 무심히 듣고 있던 아랫것 하나가 물었다.
"대감님, 왜 죽습니까. 오래오래 사셔야죠."
"세종대왕으로부터 지금까지 일곱 임금님을 모셨으니 이만하면 환관으로서 누릴 바를 다 누린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환관으로서 정 2품 벼슬에 오른 김처선은 이미 목숨을 버릴 것을 작심하고 있었다. 이 무렵 연산주는 김처선이 보거나 말거나 숙원의 품계에 오른 장녹수를 불러 온갖 음행을 즐겼다. 침소를 나와 수조(水槽)에서도 서로 발가벗고 뒹구는가 하면 망측한 자세로 짐승처럼 교합했다. 일찍이 내시가 될 때 거세당한 김처선은 그때마다 심한 모욕감에 몸을 떨었다. 늙은 나이와 상관없이 온몸에 불이 붙은 듯 뜨거워지곤 했던 것이다. 그런 고통은 김처선뿐만 아니라 연산주의 눈을 끌지 못한 후궁이나 궁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참지못하여 같은 성(性)끼리라도 밤마다 은밀하게 음란해지기 일쑤였다.
연산주는 직언하는 김처선에게 그런 식으로 고문을 하고 보복을 했다. 김처선은 무오년과 갑자년에 죽은 선비들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연산주 앞에 홀로 나아가 작심하고 말했다.
"늙은 놈이 여러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를 대강 통하였지만은 고금을 통하여 전하처럼 악행을 저지른 분은 없었습니다."
"이제야 네가 이빨을 드러내는구나. 여봐라, 아무도 없느냐. 과인의 활을 가져오너라."
연산주가 가져오라는 활은 부왕인 성종이 애지중지하던 사슴을 맞혀 죽였던 바로 그 활이었다.
"이 늙은 내시 놈이 나를 능멸하는구나. 네 모가지가 몇 개이더냐."
"조정의 대신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늙은 내시가 어찌 감히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연산주는 화가 치밀어 숨을 쉬기도 힘든 듯 헉헉거렸다.
"네, 네 놈이 정 2품 상선에 오르더니 이제는 보이는 것이 없구나."
"전하, 고정하소서. 이 늙은 내시의 목숨은 전혀 귀하지 않사옵니다."
"이놈이 나를 능멸하더니 이제는 협박도 서슴지 않는구나."
연산주는 당장에 화살을 쏘아 김처선의 가슴을 맞혔다. 그러자 김처선은 가슴에 박힌 화살을 붙잡은 채 피를 흘리며 마루바닥에 쓰러졌다.
"전하, 저의 목숨은 아깝지 않으나 전하께서 오래도록 임금 노릇을 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연산주는 임금 노릇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에 활을 놓고 벌떡 일어나 칼을 들었다. 잠시 후에는 김처선에게 다가가 칼을 휘두르니 김처선의 다리 하나가 단칼에 잘렸다.
"목숨이 아깝지 않다고 하니 서서히 죽여주마. 다리 하나를 마저 자르겠으니 내게 가까이 오라."
"전하, 전하는 다리 하나가 베어져도 다닐 수 있사옵니까."
"이제 보니 내 다리가 베어지기를 바라는 놈이 바로 네 놈이구나. 이번에는 네 혀를 잘라 벙어리로 만들어 버리겠노라."
연산주는 내시들에게 김처선을 붙잡게 하여 혀를 뽑아 칼로 끊어버렸다. 그런 다음에는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 놓고 김처선의 입을 주시했다. 그래도 김처선은 연산주를 위하여 웅얼거리고 있었다.
'전하께서 오래도록 임금 노릇을 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연산주는 그러한 김처선에게 침을 뱉으며 승지에게 명했다.
"저 시체를 산에 버려 범의 먹이가 되게 하라. 나를 능멸한 김처선의 처(處)자를 앞으로는 조정이나 민간에서 쓰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김처선의 전 재산을 압수하고 김처선에게 양자로 들어온 이공신(李公信)과 7촌까지도 연좌시켜 처형케 하고, 그의 본관인 전의란 지명도 없애버리라고 명했다.
김처선이 죽고 난 후, 허침은 마침내 조정의 정무에서 받은 고통이 원인이 되어 퇴궐하여 집에 돌아와 피를 쏟더니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무도 그를 발견하지 못했으므로 어의를 부를 겨를도 없었다.
그가 쏟아낸 피가 마침 마당에 내려쌓인 흰눈을 적시어 연산주 아래서 영화를 누렸다고는 하지만 그의 죽음을 초라하고 허허롭게 했다. 하인들이 나와 그를 들어올렸을 때는 이미 맥이 끊어져 있었고, 시신은 새털처럼 가벼운 상태였다.
허침은 마지못해 조정에 나가느니 그렇게 죽기를 원한 듯했다. 오장육부와 명치끝에 삭였던 간언들을 연산주가 있는 곳을 향해 하나도 남김없이 토해내듯 많은 양의 붉은 피를 눈 위에 토하고 죽었던 것이다.<계속>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는 화순군 홈페이지와 동시에 연재됩니다.
☞ 화순군 홈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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