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도학의 강은 어디로 흘러가나?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도학의 강은 어디로 흘러가나?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道'] 제4장 소인배의 나라 <21>

김굉필이 사약을 받고 사사 당했다는 소식은 곧 능주 땅에도 전해졌다. 먹고 살기 힘든 양인들은 관심이 없었지만 능주의 향교 교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렸다. 특히 정여해의 제자들은 스승의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굉필과 정여해는 한 스승 밑의 문인이자 도우이기 때문이었다.
제자들의 걱정대로 정여해는 큰 충격을 받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김종직의 제자로서 가장 가깝게 지냈던 정여창에 이어 김굉필마저 죽자, 중풍을 앓는 자신의 육신이 비루하고 구차스럽게 여겨졌다.
연산주 밑에서 가늘고 길게 사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장부다운 삶 같게도 느껴졌다. 정여해는 방을 정리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삿갓을 쓰고 집을 나섰다. 용머리 산으로 올라가 베틀바위 위에서 지석강으로 몸을 던져버릴 생각이었다. 동지들이 가고 없는 세상에 자신만 살아남아 연명한다는 것이 자존심이 강한 그에게 용납되지 않았다. 더구나 명분과 의리를 내세우는 유도(儒道)에 남다른 자부심을 갖고 있는 그였다. 혼자 남아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명분도 의리도 없는 허깨비 짓이라고 단정했다.
그런데 방에 누워 있어야 할 그가 사라지고 없자, 아들 억령과 제자들 사이에서는 소동이 벌어졌다. 장남인 억령이 아침 약사발을 들고 방에 들었을 때 이부자리가 반듯하게 개진 채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순간 억령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학당의 좌장인 구두남을 찾아 알렸다.
▲ 구 봉서루 건물과 봉서루 복원된 건물. ⓒ프레시안

"형님, 아버님이 어디로 가신지 아십니까."
"아무리 몸이 불편하셔도 새벽 일찍 학당에 들르시는 어른이 아니신가.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어르신 존안을 뵙지 못했네."
"이부자리를 반듯하게 개고 나가신 것이 이상합니다."
"원래 깔끔한 분이 아니신가."
"이부자리만 갠 것이 아니라 지인들에게 부치지 못한 서신들도 다 태워버리고 없습니다. 당신의 자리를 정리하신 느낌입니다."
"그렇다면 나도 걱정이 드네."
그제야 구두남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형님, 망측한 생각이 자꾸 듭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리는 소식들이 안 좋아. 일두 선생에 이어 한훤당 선생이 돌아가셨으니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는가. 점필재 선생 문하에서 공부한 세 분의 깊은 우정을 세상이 다 알고 있지 않은가."
"날도 차갑고 한데 어디로 가셨는지…."
억령이 말끝을 흐리자, 구두남은 학당에서 글을 읽고 있는 정여해의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선생님 몸이 불편하신데도 외출하고 없소. 가실만한 곳을 찾아가 모시고 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병환이 더 깊어질 것입니다."
"먼저 지석강으로 나가 찾아봅시다."
지석강변은 오래 전부터 정여해가 낚시를 하거나 산책을 하는 곳이었다. 정여해는 희로애락의 감정이 솟구칠 때마다 지석강으로 나가 술 한 잔에 시를 읊조리며 자신의 마음을 무심하게 흐르는 강물에 띄워 보내곤 했던 것이다.
말없이 흐르는 강에 계절을 알리는 것은 강변의 갈대숲이었다. 가을이 깊어가는 지석강변은 갈대꽃이 하얀 눈꽃처럼 만발해 흔들리고 있었다. 강을 오가는 바람은 벌써 싸늘하여 목을 움츠러들게 했다.
억령은 먼저 봉서루를 찾아갔다. 봉서루에는 김종직의 시판(詩板)이 걸려 있었으므로 정여해는 반드시 시판을 향해서 스승이 앞에 있는 것처럼 두 번 절하고 물러나 강으로 나갔기 때문이었다.
하늘은 금세 눈이라도 뿌릴 것처럼 잔뜩 흐려 있었다. 이런 날에는 수심이 없는 사람의 마음도 우울해지게 마련이었다. 아버지를 찾는 억령의 마음은 돌이 짓누르듯 답답하고 무거웠다. 지석강 상류 쪽으로 스승을 찾아 나선 제자들도 발걸음이 무겁긴 마찬가지였다. 정여해는 그들에게 절대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능주라는 시골구석에서 생원시만 합격해도 고을 전체가 들뜨게 되는데, 정여해는 진사시 합격 후, 정 5품의 사헌부 지평이란 벼슬을 제수 받고도 성종에게 거절의 상소를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던 도학자로서의 기개를 보인 참다운 선비였기 때문이었다.

정여해는 제자들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대답하지 않았다. 구두남을 비롯한 제자들은 자신이 지금 올라 있는 베틀바위 맞은편의 강가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정여해는 베틀바위 위 이름 없는 띳집에 올라 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명의 띳집은 훗날 기와집 정자로 바뀌어 현학정(玄鶴亭)이라고 불려지게 되는데, 당시에는 비바람을 피하는 정도의 독서당에 불과했던 것이다. 방 안에는 누구라도 지석강을 내려다보고 시 한 수를 읊조리게끔 항상 벼루와 붓이 준비되어 있었다.
정여해는 벼루에 물을 붓고 먹을 갈았다. 이른바 목숨을 끊기 전에 읊조리는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거친 강바람에 펼친 종이가 접혀져 버렸다. 세 번이나 반복해서 그랬다. 접혀진 종이를 다시 펴 먹을 묻히려 했지만 그때마다 강바람이 방해를 했던 것이다. 정여해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알 수 없는 조화로구나. 하늘이 나의 절명시를 가로막다니. 근원을 알 수 없는 조화로구나.'
바로 그때였다. 정여해는 김굉필이 자신에게 한 부탁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정여해가 동지들의 신원(伸寃)을 위해 상소문 초안을 들고 순천에 갔을 때, 김굉필이 상소문 초안을 불에 넣기 전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중화(정여해의 자)가 살아 있는 것도 우리들에게는 희망입니다. 동지들을 위해 살아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살아남아 우리 점필재 선생과 문하의 문인들이 어찌 살았는지 뒷사람들에게 전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어찌 부끄러운 일입니까. 중화 형이 바로 그 일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점필재 선생과 참혹하게 죽은 동지들의 원혼을 달래주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 봉서루 안에 있는 김종직 시판. ⓒ프레시안

정여해는 벼루에 붓을 놓았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 눈을 흩뿌릴 것 같은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몸을 강 아래로 던지려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래, 한훤당과 굳게 약속하지 않았던가. 점필재 선생과 참혹하게 죽은 동지들의 원혼을 달래주는 일이 바로 살아남은 자들이 할 일일 것이야.'
바람이 정여해의 삿갓을 벗기고는 달아났다. 마치 김굉필의 혼이 나타나 그의 삿갓을 빼앗아가는 것도 같았다. 이마에 강바람이 부딪치자 정신이 퍼뜩 났다. 숲속에서 데굴데굴 구르던 그의 삿갓이 강 아래로 떨어졌다.
그제야 강물에 떨어진 스승의 삿갓을 본 제자들과 억령은 그가 베틀바위 위 띳집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서둘러 나룻배를 띄워 강을 건넜고, 정여해는 차분하게 김굉필의 혼백에게 바치는 제문을 짓기 시작했다.
붓을 들기 전 정여해는 잠시 묵상에 잠겼다. 밀려오는 슬픔을 억누르면서 김굉필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다가 왜 죽었는지를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망자를 추모하는 단순한 제문이 아니라 도학의 강이 어디로 흘렀는지를 뒷사람에게 알리는 증언의 글이 되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정여해가 막상 붓을 들었을 때는 억령과 그의 제자들이 띳집으로 올라와 모두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병환이 더 깊어지시면 어찌 하시려고 그럽니까' 하고 울었다. 그러나 정여해는 육신의 고통을 누르며 겨우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쓰는 글은 도학의 역사가 될 것이다. 한훤당 공(公)이 왜 점필재 선생의 도학을 이어받았는지 밝히게 될 것이고, 한훤당 공이 왜 군자인지를 증언할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내가 쓰는 이 제문을 귀감 삼아 유도에 더 매진하도록 하라."
정여해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모두가 정여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정여해의 제자들은 조선 도학의 증인이 되어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는 셈이었다.
"내가 글을 쓰는 동안 의문이 나거든 지체 말고 묻거라. 내가 너희들과 만나 공부한 시간 중에 지금이 가장 엄숙하고 엄정한 순간이 될 것이니라."
정여해의 글은 지석강의 강물이 흐르는 듯 도도했다. 때로는 감정이 솟구쳐 거칠어지기도 했지만 거품 같은 그것은 곧 도도한 수면 아래로 잠겨들었다. 그래도 강물이 맑으면 어쩔 수 없이 푸르러지듯 마음에서 퍼져 나오는 슬픈 감정의 빛깔만은 어쩌지 못했다.

<아아, 우리 공(公)께서 어찌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아아, 돌아가신 스승 점필재 선생 문하에 공이 자리했던 것은 하늘의 뜻한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스승께서 정자와 주자에게 다다른 듯, 공자님이 제자를 가르치던 곳에 접한 듯, 심원한 도리를 열어젖히고 광대한 조화의 근원을 파헤쳐 홀로 밝고 넓은 도체(道體)를 관찰하여 그 거룩한 모습을 환하게 깨달았으니, 춘추 전국시대의 울타리를 부수어버리고, 또한 춘추전국시대의 여러 학자들 가운데 겨와 쭉정이를 쓸어버리고 누가 그 참된 궁극을 들을 수 있었겠으며, 누가 그 적실한 근원을 계승할 수 있었겠습니까.
공자의 문하에 안자가 있어 종일토록 함께 도를 말했고, 주자에게 채원정이 있어 미묘한 이치를 말할 수 있었습니다. 유학에 공이 있어 스승의 도가 더욱 밝아졌으니 어찌 천년 만에 한 번 만난 큰 행운이 아니겠습니까. 얻기가 어렵고 알기도 어려운 것이 도일 것입니다.>

정여해의 제자들은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붓끝을 응시했다. 제문의 시작은 정자와 주자와 같이 심원한 도리와 광대한 조화의 근원을 파헤쳐 홀로 밝고 넓은 도체를 깨달은 스승 김종직을 찬탄하는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이것은 중국의 유학을 무작정 추종하고 연모하는 자세가 아니라 조선 도학의 정맥을 당당하게 내세우는 정여해의 자주적인 견해였다. 그러고 나서 정여해는 김종직을 공자에, 김굉필을 안자에 비유하여 조선 도학의 계보를 확실하게 밝혔다.

<아아, 스승님과 문답을 하는 여가에 물러나와 여러 벗들과 더불어 조용히 토론하고 화락하는 모습과 친절하고 간절한 인정은 혼연히 봄바람의 따뜻한 기운처럼 온화했으며, 우리 족형 일두 옹과는 더욱 친하고 성심껏 화합하여 한 사람이 앞에서 부르면 한 사람은 뒤에서 응하여, 상성(商聲)과 궁성(宮聲)이 내는 음률의 어울림보다 나았으며, 질나팔과 저(壎箎; 형제을 비유하는 말)를 부는 것보다 화합함이 나았습니다. 그래서 유도가 크게 밝혀지기를 바랄 수 있었고, 백성들이 그 행복을 누리게 되기를 바랄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김굉필과 정여창의 우정을 기술하고 있었다. 오음(五音) 중에서 상성과 궁성의 화음처럼 화합하여 지낸, 질나팔과 저의 음률과 같이 서로 어울렸던 사이가 김굉필과 정여창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어찌 된 일인지 하늘이 현인(賢人)을 돕지 않고 간인(奸人)들이 악을 나타내어 마침내 스승이 사후에까지 헤아릴 수 없는 화란(禍亂)을 입게 되었고, 문하의 제자들도 멀리 귀양을 가 학문의 문호(門戶)가 빈 것 같고 육경(六經; 시경, 서경, 역경, 춘경, 예경, 악기)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듯한데, 공도 또한 세상을 버리게 되니 모든 일이 이로부터 그만입니다.>
▲ 현학정과 지석강 풍경. ⓒ프레시안

스승 김종직이 사후에까지 헤아릴 수 없는 화란을 입었다는 것은 부관참시 당한 것을 말했고, 영호남과 서울에 거주하던 동지들이 한꺼번에 귀양을 가버리니 문호가 비고 육경이 사라져버린 듯하다는 토로였다.

<아아, 함양(涵養)이 완고하고 실천이 독실했으며, 본 바와 도달한 바가 이미 고명한 경지까지 이르렀는데도 몸소 청소하는 일과 진퇴하는 예절에 임하면서 아래로 인사(人事)를 배우는 공부를 떠나지 않고도 위로는 천리(天理)에 도달하는 묘한 이치를 깨달았으며, 사물(事物)을 벗어나지 않고도 태극(太極)의 심오한 이치를 궁구하였습니다. 겸손하고 근신하여 스스로 소학을 배우는 어린이로 처신하면서 지식이 있으면서도 없는 것 같고, 지식이 실하면서도 빈 것 같이하여, 많은 지식을 가졌음에도 적은 지식을 가진 이에게 묻고, 잘하면서도 잘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묻는, 훌륭한 덕행을 어디 가서 보겠습니까.
지리산과 쌍계사 사이와 섬진강과 악양정 위에 봄꽃이 난만하고 가을달이 명랑할 적에 소요하고 배회하면서 시를 읊고 노래를 불러, 가슴 속에는 속기가 없고 마음의 궁극은 장원(長遠)하여 개연(慨然)하고 천년을 지나도 다하지 못할 느낌을 품었으며, 간곡하게 강의 토론하여 많은 성현들이 서로 전승한 비결을 알아낸 사람이 또 누가 있겠습니까.
스스로 생각하건대, 저는 변변치 못한 자질로서 15세의 나이에 점필재 스승을 모셔서 의지하게 되었고, 또 공을 만나 튼튼한 보호(輔護)로 삼아서, 공이 삼이 되고 나는 쑥이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공에게서 도움을 받은 일이 헤아릴 수 없었던 바, 내가 돌이라면 공은 옥이었으니 혹시 돌이 옥을 연마하는 도구가 된 적은 없었는지요. 끊임없이 따라다니며 해파리가 새우를 만난 듯이 했는데, 정인(正人)이 시속에 영합하지 않음으로써 문인의 모임을 맺지 못한 채 한 사람은 남쪽, 한 사람은 북쪽으로 떨어져서 숨어 살고 귀양살이를 하다가 오늘에 이르러 갑자기 저승과 이승으로 영원히 갈려질 줄 어찌 생각했겠습니까. 지난번 병을 무릅쓰고 가마를 타고 나아가 방문했을 때 친절히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했는데, 갑자기 나를 버리고 떠나시는 것입니까. 한편으로는 유도를 위해 슬퍼하고, 한편으로는 나의 사정(私情)을 위해 슬퍼하니 눈물이 줄줄 흘러 동해 바닷물을 기울인 듯합니다. 허둥지둥 치전(致奠)을 드리니 천지가 캄캄합니다. 아아, 슬프도다! 바라옵건대 흠향(歆饗)하소서.>

정여해가 제자들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제문을 놓고 먼저 일어서 나가자, 억령이 자리를 수습했다.
'이번이 두 번째구나.'
아버지가 쓴 제문을 들고 조문을 가는 것은 억령의 몫이었다. 지난번에는 정여창의 시신이 함길도 종성에서 반장되어 왔을 때 아버지를 대신하여 갔으므로 이번이 두 번째인 것이었다.
억령은 제문을 접어 품에 넣고 띳집을 나섰다. 아버지 정여해는 벌써 제자들의 부축을 받아 산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제야 억령은 하루 종일 불안했던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버지가 제문을 짓기 위해 용머리 산을 올랐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집을 나선 것은 김굉필의 부고를 듣고는 극도로 절망한 나머지 무언가를 선택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 틀림없었다.
억령에게 아버지 정여해는 부자간이라기보다는 사제간이나 다름없었다. 억령의 꿈은 아버지를 닮는 것이었다. 억령이 생진사시를 보지 않고 있는 것도 아버지의 뜻이었다. 정여해는 벼슬을 하는 것보다 유도를 닦는 것이 중요하다고 늘 가르쳐 왔던 것이다. 그렇다고 억령에게 갈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억령의 사서삼경 실력은 정여해의 제자 중에서 으뜸이었다. 진사시와 달리 사서삼경을 주요 과목으로 시험을 치르는 생원시는 언제 보아도 합격할 만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시부(詩賦)를 짓는 실력도 아버지 정여해의 문재(文才)를 닮아 능주에 들르는 벼슬아치들을 놀라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억령은 <논어>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좌우명 삼아 도학에 정진할 뿐이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노여워하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느냐.'
억령이 공부하는 궁극은 서울로 올라가 과거 급제하여 벼슬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처럼 숨어 살면서 군자의 길을 가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억령은 처마 밑에 내어걸린 돈(遯) 자를 새삼스럽게 보았다. <주역>의 33괘에 나오는 '물러남의 지혜'를 말하는 글자였다. 아버지 정여해의 마음과 기개와 뜻이 단 한 글자로 함축된 돈(遯) 자였다.
정여해는 지석강에서 돌아와 방에 들자마자 쓰러졌다. 찬 강바람을 종일 쐰 탓으로 오한이 들어 이부자리를 둘러쓰고 쉬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건강에 따라 학당이 쉬는 것은 반대했다. 몸이 따뜻해진 뒤 기운이 나면 한 식경이라도 강의를 할 생각이었다. 제자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듣지 않고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그의 결벽증 때문이었다.<계속>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는 화순군 홈페이지와 동시에 연재됩니다.
☞ 화순군 홈페이지 바로가기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