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인척이 많은 그는 조정의 소식도 누구보다 빨리 알았다. 순천에 있는 김굉필의 제자들에게 최충성은 서울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하는 소식통 역할을 했다. 김굉필 문하에서 도학을 연마하는 제자 중에는 순천에서 태어났거나 부근에서 성장한 인물이 몇 사람 있었는데, 최산두와 유계린(柳桂隣), 맹권(孟權), 장자강(長自鋼) 등이 그들이었다.
유계린은 진사 유공준의 아들로 순천 땅에서 태어났으나 최부의 사위가 되면서 처가가 있는 해남으로 가 살다가 최부가 무오사화를 당하여 함길도 단천으로 유배를 가자, 순천으로 돌아와 김굉필의 제자가 된 사람이었다.
특히 유계린은 장인인 최부와 김굉필이 절친한 동지이자 도우(道友)였으므로 김굉필을 스승이듯 장인이듯 각별하게 섬기었다. 최부가 유배지에서 서신을 보내어 김굉필 문하에서 성리학을 익히라는 당부도 유계린을 명심케 하였다.
유계린은 강의가 끝난 후, 옥천 가를 거니는 최충성에게 다가가 물었다. 혹시나 최충성에게 근자에 들은 서울의 해배 소식이 없을까 하고 살폈던 것이다.
"선생님께서 중얼거리시는 말씀을 어찌 생각하시오."
"무슨 말씀을 하셨는데 그러시오."
유계린은 고개를 저으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이상하지 않소. 선생님께서 가끔 '이제 너희들은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지 못했단 말이오. 아, 하루 빨리 해배가 되어야 하실 텐데."
그러나 유계린의 기대와 달리 최충성은 며칠 전에 서울에서 온 지인에게서 전해들은 얘기를 할까 말까 망설였다. 너무도 믿기지 않는 전언(傳言)이어서 지금까지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끙끙 앓고 있는 처지였던 것이다. 전언인즉 의금부 도사가 사약을 가지고 내려올 것이라는 귀띔이었다. 너무도 끔찍한 전언이어서 제자 된 도리로서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던 것이다.
김종직 제자들에게 난신(亂臣)의 예에 따라 죄를 더 주라는 연산주의 명이 떨어진 뒤, 이미 죽은 정여창과 남효온이 부관참시를 당하였으므로 살아 있는 김굉필이나 최부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최충성은 유계린에게 목에 가시처럼 걸려 있는 서울의 소식을 말해버렸다.
"사실은 선생님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듯하오. 돌아가신 일두 선생과 추강 선생의 묘를 파헤치고 관을 쪼개어 무도하게 시신에까지 칼을 대었다 하오. 소인배들이 군자의 씨를 말리려 하니 우리 선생님을 어찌 모셔야 할지 답답하기만 하오. 답답한 것이 아니라 눈앞이 캄캄하오."
"우리 선생님이나 나의 장인어른의 목숨이 그렇단 말이오."
유계린이 장인이라고 한 사람은 무오사화 때 함길도 단천으로 유배를 간 최부를 말함이었다.
"임금께서 난신으로 몰아붙여 형벌을 더 주려 하니 무슨 방법인들 있겠소."
"아, 캄캄한 세상이로다. 세상이로다."
유계린은 기어이 옥천으로 내려가 꺼이꺼이 울음을 토해냈다. 두 손으로 옥천에 흐르는 물을 훔쳐 얼굴에 끼얹으며 소리 내어 울었다. 최충성도 흐려진 눈으로 유계린의 울음을 말릴 생각을 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그날 밤.
다섯 명의 제자들이 모여 스승인 김굉필에게 서울에서 온 소식을 알릴지 말지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좌장 격인 최산두는 그의 직선적인 성품과 스승에 대한 믿음이 두터워 알려야 된다는 주장을 폈다.
"선생님은 이미 생사를 초월한 도학자이십니다. 생사를 두려워하는 소인이 아닙니다. 두고 보세요. 선생님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우리들의 초라하고 비루한 잣대로 이렇다 저렇다 따지고 있을 일이 아닙니다. 지체 없이 알리어 스승 앞에 한 치도 숨김이 없는 제자 된 도리를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가르침을 받은 제자로서의 도리입니다."
그러나 이미 목이 멘 유계린은 다가올 상황을 조금도 두렵지 않게 여기는 듯한 최산두의 의견에 반대를 했다.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일을 어찌 미리 알린단 말이오. 그것은 스승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입니다. 신재(최산두의 호) 형님은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에게 설령 사실이라 하더라도 얘기할 수 있단 말입니까. 목석이 아닌 이상 어찌 그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주경(周卿; 유계린의 자)은 선생님의 경지를 아직도 모른단 말이오. 선생님은 소아(小我)의 울타리를 넘어 이미 대아(大我)의 군자 경지에서 노니는 분입니다."
맹권도 최산두에게 설득을 당하여 한마디 했다.
"알리는 것도 예요, 알리지 않는 것도 예일 것 같습니다. 허나 제자 된 도리로서는 조금도 숨기지 않는 것이 더 떳떳하겠습니다. 선생님께 그리 배우지 않았습니까. 군자인 선생님께 제자의 좁은 소견을 보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초생달이 기울 무렵에야 유계린이 체념한 듯 양보하며 물러났다.
"그렇다면 누가 선생님께 이 사실을 말씀드려야 하겠습니까."
"내가 말씀드리겠소."
최산두가 망설이지 않고 나섰으나 뜻밖에 최충성이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서울의 소식을 듣고 발설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사실이 왜곡되지 않고 바르게 전달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최산두가 최충성을 말을 듣고 나서 바로 조건을 달았다.
"무엇입니까."
"선생님께 알리되 제자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말씀드려야 합니다."
"신재 형님, 왜 그렇습니까."
"선생님의 유훈(遺訓)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오."
최산두의 말은 옳았다. 유훈이란 성인이나 스승이 숨을 거두기 전에 제자들을 향하여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훈계를 말했다. 제자들에게 가르친 바를 한두 마디로 요약한 내용이 유훈인 것이었다. 그러니 제자가 스승의 유훈을 놓친다는 것은 안타깝고 불행한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유훈이야말로 스승의 가풍과 진면목이 한두 마디에 담겨지고 한껏 드러나는 가르침이기 때문이었다.
김굉필의 제자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유훈을 듣는다는 설렘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스승을 다시 뵙지 못할 것이라는 기막힌 비통함 때문이었다. 최산두는 스승 김굉필의 일생을 더듬으면서 밤을 밝혔다. 최산두뿐만 아니라 모두가 입을 다문 채 누워 있거나 밖으로 나가 툇마루에 한동안 앉았다가 들어오곤 했다.
김굉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사용(司勇; 정 9품 무관)이 된 아버지를 닮아 호탕하였으며 구속을 싫어하였고, 철부지 어린 시절에는 거리에서 또래의 아이들을 회초리로 때리는 등 장난치고 다녔으므로 아이들이 그를 보면 피하여 숨었다고 한다. 어머니의 고향인 경상도 현풍으로 가 살면서 학문에 뜻을 두었고 김종직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자, 김종직은 바로 <소학>부터 가르치면서 그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둔다면 이 책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주렴계(周濂溪; 송나라 문장가)의 광풍제월 같은 쇄락한 인품도 역시 이에 벗어나지 않는다.'
김굉필은 스승의 이 말을 말뚝 삼아 부지런히 공부하였는데, 밤중에도 연자(蓮子) 갓끈이 앉은뱅이책상에 부딪치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니 주위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아직도 그가 글을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특출한 행실도 비교할 상대가 없을 정도였는데, 사계절 내내 집 안이건 밖이건 갓을 바르게 쓰고 띠를 찼으며 아무리 늦게 잠이 들더라도 닭이 울면 곧바로 일어났고, 일찍이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혹시 나라 일을 물으면 반드시 '<소학>을 읽는 동자가 어찌 알겠습니까' 하고 대답했으니 그가 지은 다음과 같은 시처럼 <소학>의 진가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글을 업으로 삼아도 오히려 천기를 알지 못하였으나
<소학> 책 속에서 그 전의 잘못을 깨달았네.
業文猶未識天機
小學書中悟昨非
김종직은 이를 평가하고 칭찬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이 말은 성인이 되는 기초이니 허노재(許魯齋; <소학>을 중시한 원나라 許衡) 후에 어찌 김굉필 같은 사람이 있으리오.'
벼슬은 생원과에 합격한 후 참봉에 임명되어 형조좌랑에 올랐으나 그는 부귀공명에는 애초부터 뜻이 없었으니 처음에 자신의 호를 '도롱이 걸친 늙은이'라고 하여 사옹(蓑翁)이라 지은 것은 '비록 큰비를 만나 밖은 젖어도 안은 젖지 않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이었으며, '이름을 지어 날리는 것은 흔연히 처세하는 도리가 아니다'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최산두는 잠을 한숨도 이루지 못하고 엎치락뒤치락 했다. 스승 김굉필을 만나 군자의 삶이 무엇인지 그 경계를 어렴풋이 깨달아가고 있는데, 임사홍이나 유자광 같은 소인배들이 날뛰어 임금의 귀가 막히고 눈이 멀어 세상은 여전히 캄캄한 밤인 듯 암울했던 것이다. 새벽이 되자 어김 없이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최산두는 벌떡 일어나 앉으며 중얼거렸다.
'선생님은 비록 큰비를 만나 밖은 젖어도 안은 젖지 않는 도롱이가 되겠다고 하셨다. 아, 도심(道心)이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세상을 적시는 큰비 속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젖지 않는 그것이 바로 도심이 아니겠는가.'
어느새 제자들 모두가 방에 모여 각자 배운 공부의 진도에 따라 책을 폈다. 최산두는 <대학>을 폈고, 유계린과 최충성은 <소학>을, 맹권은 <논어>를, 장자강은 <근사록>을 읽었다. 그러나 제자들의 눈에 글이 들어올 리 만무했다. 이전의 글 읽는 습관처럼 돌부처처럼 앉아 있을 뿐이었다.
아침 햇살이 동창에 비쳐들 때에야 최충성이 무섭게 입을 떼었다.
"선생님, 소자에게 허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삭망 전에 서울에 사는 인척으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이옵니다."
"어두운 얼굴을 보아하니 좋은 소식은 아닌 것 같구나."
"그렇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김굉필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맑았다. 그러나 최충성의 목소리는 비통했다.
"소자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의금부 도사가 곧 순천에 내려온다는 불길한 소식이옵니다."
"알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나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느니라."
최산두는 혼잣말로 '선생님' 하고 중얼거렸다. 사사를 당할지 모른다는 소식을 접하면서도 군자다운 기상을 조금도 잃지 않고 있는 스승 앞에서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다들 어제의 얼굴이 아니구나. 일찍이 나는 큰비가 내려도 속이 젖지 않는 도롱이가 되겠다고 내 자신과 약속을 했느니라. 그러니 오늘은 공부에 매진하라. 맹권이 <논어>의 첫 구절을 외어 보거라."
맹권은 김굉필 쪽으로 자세를 바로잡고 앉아 <논어>를 1천 번 읽은 제자답게 능숙하게 외웠다.
공자가 말하였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느냐."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겠느냐."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노여워하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느냐."
子曰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
有朋이 自遠方來면 不亦樂乎아
人不知而不慍이면 不亦君子乎아
"여기에 군자의 삶이 다 드러나 있지 않은가. 군자는 살아 있는 동안이나 죽은 후에나 공자님의 이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죽어서도 배우고 때때로 익히어 새로운 것을 깨우치는 기쁨을 누릴 것이고, 죽어서도 벗을 가까이하는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먼 곳의 벗이 찾아도 즐겁거늘 하물며 가까이 벗이 있는데 그 즐거움이 얼마나 크겠는가. 나는 죽어서도 남이 아닌 내 안에서 도덕이 충만한 중용의 낙(樂)을 누리리라."
최산두를 비롯한 제자들은 김굉필의 말이 끝나자마자 눈물을 흘렸다. 김굉필에게 죽음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군자는 생과 사 어느 경계에 서든 배움을 가까이 하고 벗을 가까이 하고 도덕이 충만한 중용을 즐기는 사람을 말함이었다.
"선생님의 가르침이 이처럼 깊고 넓은 줄 오늘에야 깨달았습니다. 군자의 삶이 생사를 초월해 있다는 것을 오늘에야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니 매우 기쁜 일이구나. 허나 나는 너희들에게 늘 말했다시피 소학동자일 뿐이다."
말수가 너무 적어 벙어리 같다고 놀림을 받았던 장자강도 한마디 했다.
"일찍이 선생님의 호가 사옹이었다는 것이 지금 이 순간에는 벼락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도롱이는 큰비를 맞아도 밖이 젖을 뿐 안은 젖지 않는 법이다. 그것을 도심(道心)이라고 하느니라."
김굉필의 맞은편에 앉은 제자들 모두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스승과 제자 간에 몇 마디의 말이 오갔을 뿐인데,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는 밝은 표정들이었다. 간밤에는 비통해서 눈물을 흘리었는데, 지금은 도를 얻는 즐거움에 겨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주경(유계린의 호)은 왜 말이 없는가. 이 순간에 무엇을 그리 깊이 생각하고 있는가. 말해 보거라."
"도를 어찌 입 밖의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소자의 잘못을 하나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주경의 잘못이 무엇인가."
"선생님을 평소에 스승의 예로 대하지 않고 장인어른을 생각하여 아버지로 여기었던 잘못입니다."
"그것이 어찌 잘못이겠느냐. 더구나 금남(錦南; 최부의 호)은 나의 동지가 아니더냐."
"스승을 대하는 제자의 예와 어버이를 대하는 자식의 예는 같은 듯하면서도 다른 것 같습니다."
"아니다. 주경은 어버이 앞에서 자신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소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스승 앞에서 자신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소자라고 합니다."
"허허허. 그러니 같다는 것이야. 얘기를 하다 보니 일찍이 돌아가신 어버이가 생각나는구나."
김굉필은 눈을 감았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리운 듯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서너 번 주억거렸다. 다시 눈을 뜬 김굉필이 조용히 말했다.
"귀전(歸全)하는 것이 효도의 첫 번째 걸음걸이다."
"귀전이 무엇이옵니까."
"날 낳아 주고 길러 주신 부모님에게 온전하게 돌아간다는 뜻이지."
"선생님, 소자는 공부가 부족하여 이해를 잘하지 못하겠습니다."
유계린은 잡힐 듯하면서도 그 뜻이 분명하지 않았으므로 되물었다. 그러자 김굉필은 제자들의 손에 쥐어주듯 소상하게 말했다.
"어버이가 자식을 걱정하는 것 중에 첫 번째가 무엇이겠느냐. 자식의 몸이 성한 것이다. 부귀와 공명이 아무리 높고 귀하다 해도 그것은 그 다음이다. 효도란 부모의 마음을 언짢지 않게 하는 것이니 몸을 온전하게 지키는 것이야말로 효도의 시작이자 끝이다."
유계린은 김굉필의 가르침이 화살처럼 가슴에 꽂히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김굉필은 밤마다 옥천 맑은 물에 머리를 감고 몸을 씻었는데 그것은 일찍 돌아가신 어버이를 만나기 위한 귀전의 의식임이 틀림없었다.
김굉필과 제자들 간에 이러한 문답이 오간 나흘 후.
최충성의 전언대로 의금부 도사가 사약을 가지고 내려왔고, 도사가 적소 마당에서 다소 위엄 있게 어명으로 받으라고 소리치자, 김굉필은 서두르지 않고 관대를 찾아 두르고 문을 열고 나왔다.
김굉필의 얼굴빛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평소와 같이 편안하고 우뚝한 콧날은 적소로 드는 햇살에 난반사되어 빛이 났다. 마당으로 내려서는 걸음걸이도 당당했다. 오히려 도사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무슨 말을 더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움찔했다.
김굉필은 사약이 한 사발 올져진 개다리소반 앞에 꿇어앉아 짧은 어명을 받았다. 그런 후, 사약을 들기 전에 허공을 한번 응시하더니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고 나서는 수염을 가지런히 손질하여 입에 물면서 한 마디 했다.
"이것까지 상해를 받을 수 없다."
사약을 받아 피를 토할지 모르나 수염 한 올까지도 온전하게 보존하여 저승에 계신 부모님을 만날 때 걱정을 끼쳐드리지 않겠다는 소학동자다운 생애의 마지막 한 마디 말이었다.
이와 같이 사약을 받은 김굉필은 51세의 나이로 눈을 감고 말았지만 그의 예언대로 죽은 후 그의 삶은 더욱 빛이 났다.
훗날, 중종은 도승지에서 다시 우의정으로 증직하더니 선조는 영의정으로 증직하고 문경(文敬)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광해군 때는 문묘에 배향되었는데, 오현(五賢) 즉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의 다섯 학자 중에 그가 으뜸이었다.<계속>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는 화순군 홈페이지와 동시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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