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선이 있느냐. 어서 활을 가져오너라."
여닫이문 밖에서 허리를 구부린 채 대기하고 있던 상선 김처선은 즉시 말했다. 아무리 품계가 높은 내시라 하더라도 늑장을 부리면 바로 태형이나 장형이 가해졌다.
"전하, 무슨 활을 가리키는 것이옵니까?"
"즉위식 날 사슴을 맞혀 죽였던 활이 있지 않느냐. 그 활을 가져오너라."
김처선(金處善)은 눈앞이 아득했다. 연산주가 아끼는 활은 복수의 감정이 끓어오를 때만 사용하는, 피를 부르는 살생 무기이기 때문이었다. 김처선은 복도를 오가며 활을 찾는 시늉만 했다. 당황하는 김처선의 행동거지를 보고 있는 아랫것 내시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상이 되어 우왕좌왕했다.
"전하, 처선은 마음이 급하여 활이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알지 못하겠사옵니다."
"네 놈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전하."
"반드시 활을 찾아내어 네 놈도 죽이고 말 것이다."
분기탱천한 연산주는 더 이상 김처선에게 지시하지 않고 정전을 나섰다. 김처선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서너 걸음 따라가다 주저앉고 말았으나 도승지와 내시 김자원은 뛰다시피 하는 연산주의 뒤를 쫓느라고 소동을 일으켰다.
늙은 김처선은 연산주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울부짖었다. 얼굴에 접힌 주름살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전하, 전하."
김처선.
경기도 전의(全義)에서 태어나 환관으로 입궐하여 세종부터 연산주에 이르기까지 일곱 임금을 시종한 인물로 사서삼경의 대의를 익히어 다른 환관과 달리 직언을 자주했다. 그 때문에 김처선은 늘 곤경에 처해지곤 했는데 문종 때는 영해로 유배를 갔고, 단종 때는 삭탈관직 당하여 고향에서 관노가 되기도 했다. 세조 때는 원종공신 3등에 추록되었으나 세조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장형을 자주 당하였다. 그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성종 때로 자신의 의술로 병환 중인 인수대비를 쾌차하게 하여 품계가 자헌대부에 이른 후부터였다. 특히 73세의 한명회가 노환으로 드러눕자, 인수대비가 성종에게 의술을 아는 김처선을 보내달라고 부탁하여 김처선은 좌승지 한언과 함께 한명회를 돌보다 그의 임종을 지켜보기도 했다. 성종에서 연산주로 왕위가 바뀐 이후에도 김처선은 환관으로 남았는데, 연산주는 직언하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김처선이 정성을 다하여 진실한 말로 간할 때마다 노여움을 마음속으로 쌓아갈 뿐이었다.
연산주가 달려가고 있는 곳은 부왕(성종)의 후궁이 사는, 정전에서 지근거리에 있는 초라한 궁이었다. 그곳에는 성종의 사랑을 받아 후궁이 된 숙의 엄씨와 숙의 정씨가 살고 있었다. 후궁의 품계는 임금에게 사랑을 받는 정도에 따라 종 4품 숙원, 정 4품 소원, 종 3품 숙용, 정 3품 소용, 종 2품 숙의, 정 2품 소의, 종 1품 귀인, 정 1품 빈으로 나뉘어졌다. 그러니까 엄씨와 정씨가 종 2품의 숙의가 된 것은 성종의 깊은 사랑이 없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반면에 이들에게 잠자리를 밤마다 빼앗긴 연산군의 생모 윤비(尹妃)의 입장에서는 투기가 나는 것도 당연했다. 더구나 윤비는 성격이 독하고 급하여 엄숙의와 정숙의가 정 3품의 소용이었을 때 그들을 해치고자 아는 사람을 시켜 숙의 권씨 집에 투서를 한 일도 있었다. 그 사람은 투서에 자신을 감찰상궁의 집안사람이라고 속였는데 투서는 곧 성종에게 보고가 되었다. 투서는 '엄소용과 정소용이 장차 왕비와 원자를 해치려고 한다'라는 내용으로 누가 보아도 윤비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연산주에게 동작이 느리다고 태형을 자주 받았던 내시 김자원은 연산주 뒤에 바짝 고개를 숙이고 붙어서 불안하게 말했다.
"전하, 무슨 일이시옵니까."
"너는 지금 정전으로 돌아가 칼을 가져오너라."
"전하."
"아니, 보검에 추잡한 년들의 피를 묻힐 필요가 없다. 자원이 너는 즉시 몽둥이를 구해 오너라."
연산주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누군가를 증오하는 듯 주먹을 쥐고 진저리를 쳤다. 연산주는 김자원이 몽둥이를 구하러 갔을 때 도승지를 불러 엄하게 지시했다.
"정전으로 나아가 어서(御書)를 내리겠노라. 엄씨와 정씨가 중죄를 범했으므로 서인으로 삼겠노라. 하사받은 노비 및 재산을 빠짐없이 찾아 들이고 후궁에 끼지 못하게 하며, 그 아들 역시 종친(宗親)으로 보지 말게 하라."
그제야 도승지는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지 눈치를 챘다. 지금 연산주는 자신의 생모를 곤경에 빠트린 숙의 엄씨와 숙의 정씨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김자원이 박달나무 몽둥이를 구해오자 연산주는 매우 흡족해 하며 말했다.
"도승지는 엄씨와 정씨의 숙소로 먼저 가 나인들을 문밖으로 쫓아내도록 하라. 자원은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도록 엄금하라."
연산주의 한 마디에 엄숙의와 정숙의는 선왕의 후궁이 아니라 서인이 돼버렸다. 영문을 모른 채 길쌈을 하고 있던 엄숙의는 어명을 받고 놀라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연산주는 엄씨를 보자마자 나무랐다.
"엄서인은 죄를 아는가."
"전하, 무슨 말씀이온지요."
"선왕 때의 네 죄를 모른단 말이냐. 뻔뻔스럽구나."
엄숙의는 연산주의 눈에 가득한 살기를 보고는 겁에 질려 버렸다. 무슨 말을 하려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 말이 없는가."
엄숙의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하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성종의 인자한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앞날이 불안한 엄숙의에게 어느 날 이렇게 말한 뒤 몇 달 만에 승하했던 것이다.
'엄숙의는 나의 어마마마(인수대비)께서 지켜주실 것이니라. 신하들에게도 당부해 두었느니라. 앞으로 백 년 동안 폐비 윤씨의 일을 꺼내지 말도록 명하였느니라. 그러니 연산이 임금이 되어도 안심하라.'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는 엄숙의에게 연산주는 다시 고함을 쳤다.
"엄서인의 죄를 아는가, 모르는가."
"선왕께서 명하는 대로 따라 했을 뿐인데 무슨 죄를 졌다는 것입니까. 지금 전하의 언행은 법도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엄숙의가 모기만한 소리로 용기를 내어 말하자, 연산주는 급기야 분노를 터트렸다.
"지금 자세히 보니 주둥이가 여우같구나."
연산주가 발길로 엄숙의를 걷어차자 엄숙의는 비명을 지르며 자신이 가꾼 화초 사이로 넘어졌다. 그러나 쓰러진 엄숙의의 얼굴이 표독스럽게 바뀌었다.
"이 무슨 패악한 짓이오. 나는 선왕의 사랑을 받은 후궁이오."
"선왕의 후궁이라…. 너는 서인이니라. 아직도 네가 범한 죄를 모르다니 나는 지금 네 주둥이를 청소하고 말 것이다."
연산주는 몽둥이로 엄숙의의 얼굴을 내리쳤다. 먼저 입술이 깨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입술이 사라져 말을 할 수 없게 된 엄숙의는 살기를 품은 눈으로 맞섰다.
'하늘이 무섭지 않습니까. 반드시 하늘의 벌을 받아 나를 죽인 것보다 더 참혹하게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피 묻은 몽둥이로 수십 차례 가격당한 얼굴은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이 되었고 곧 사지가 늘어져버렸다.
"저년의 머리카락 한 올도 이 궁에 남아 있지 않게 자취를 없애라."
이때 산책에서 돌아온 정숙의가 나타났다. 도승지가 다가가 눈짓으로 피하라고 일렀지만 정숙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미치광이처럼 날뛰는 연산주에게 나아갔다. 정숙의는 함께 산책했던 시종에게 '오늘이 선왕을 뵈러 가는 날이로구나' 하고 조용히 미소를 흘렸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한 마디 했다.
"전하, 고정하십시오."
"오늘부터 너도 숙의가 아니라 서인이니라."
"전하의 분부를 따르겠사옵니다."
"네가 지은 중죄를 아느냐."
"저의 죄뿐만 아니라 선왕의 후궁들이 진 죄를 달게 받겠나이다. 선왕을 어서 뵙게 하여 주십시오."
"너는 서인이 됐으니 선왕을 뵐 수 없느니라."
"죽어 혼백이라도 뵐 것입니다."
정숙의의 얼굴에는 여전히 희미하게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순간, 연산주는 숙의 정씨의 미소가 숙용 장씨(張綠水)의 것과 흡사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탓에 몽둥이를 휘두르지 못하고 멈칫거렸다. 연산주는 장녹수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들어줄 정도로 빠져 있던 참이었다. 제안대군의 여종으로 미모와 가무가 뛰어났는데 어느 날 연산주의 눈에 들어 당장 종 4품의 숙원으로 입궐하였던 그녀였다.
연산주는 장녹수에게서 사사 당한 폐비의 모습을 찾아 헤맸다. 따라서 장녹수가 원하는 것은 폐비가 원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장녹수가 자신의 부모 환갑 때 장수를 빌려고 하자, 악공을 보내 음악을 하사했고, 경복궁에 드나드는 장녹수가 궁 안 기생들의 따가운 시선을 부담스러워하자, 여러 명의 군졸을 거느린 부장(部將)이 앞뒤의 사람을 물리쳤으며, 장녹수의 패물을 만들기 위해 종들을 광산으로 보내 은을 캐오게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장녹수의 사가에 쌀과 면포 정포, 백포 그리고 중국에서 들여온 후추까지 하사했으며, 사가가 민가 가운데 있어 화재의 위험이 있다고 주변의 민가를 헐어 관에서 값을 지불하게 했다. 심지어는 장녹수가 자신의 옷을 밟은 궁녀를 두고 분해 하자 연산주의 지시를 받은 승정원에서는 다음과 같이 연산주에게 아부하는 전교를 한 일이 있었다.
<옥지화(玉池花)의 죽음을 남형(濫刑)이라고 이르지 않겠는가. 지금 흥청(궁 안으로 들어온 기생)으로 후정(後庭)을 채우니, 운평(채홍사에 의해 뽑힌 기생)들이 저의 동배로 보고 능만하는 마음이 있다. 하늘이 사람을 낼 때에 처음부터 어찌 저절로 귀한 자가 있으랴. 윗사람이 명위(名位)와 등급을 더해 준 후에 높고 낮음이 정해지는 것이다. 근자에 조계형(曺繼衡)은 겨우 각대(角帶)를 띤 미관인데도 특별히 당상을 제수받자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게 됐는데, 실제로는 그 사람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주상의 명령을 공경하는 것이다. 그런데 옥지화가 숙용(장녹수)의 옷을 밟았으니, 비록 흥청의 옷이라도 옳지 못하거늘 하물며 숙용일까 보냐.>
연산주는 정숙의를 연민의 눈초리로 노려보더니 정숙의의 정수리를 향해 몽둥이를 내리쳤다. 그러자 정숙의는 짧은 비명을 토해내며 옆으로 쓰러졌다. 엄숙의와 달리 단번에 숨이 끊어졌다. 정숙의가 죽음을 맞아들이는 모습이었으므로 연산주에게 타살됐다기보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처럼 보였다.
정숙의의 주검은 편안해 보였다. 입가에 피를 조금 물고 있을 뿐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김자원은 재빨리 수하의 내시들에게 들것을 가져오게 하여 엄숙의와 정숙의의 시신을 비밀 통로를 통해 궁 밖으로 내보내 자취를 없앴다.
다음날에는 두 숙의의 죽음을 상궁을 통해 전해들은, 성종의 생모인 인수대비가 충격으로 드러누웠다. 연산주가 문병 왔을 때에야 인수대비는 갑자기 일어나 앉으며 소리쳤다.
"주상, 두 숙의는 모두 부왕의 후궁인데,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자 연산주는 또다시 미치광이가 되어 인수대비의 몸에 자신의 머리를 들이밀어 부딪쳤다. 일찌이 왕실에 없었던 전대미문의 악행이었다.
"흉악하구나. 흉악하구나."
결국 인수대비는 병이 더 깊어져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엄숙의 아들 안양군 항과 정숙의 아들 봉안군 봉은 섬으로 귀양 보내졌고, 더 나아가 연산주는 '항과 봉은 이미 그 아내와 인연을 끊었으니 그 아내는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라'고 명했다.
그리고, 엄씨와 정씨의 부모와 동생을 난신의 예로 연좌하여 장 1백를 쳐서 먼 변방으로 안치하도록 명하기도 했다. 그러자 의금부 당상 허침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엄씨의 아비 엄산수는 82세요, 정씨의 아비 정인석은 81세입니다. 율에 이르기를 '나이 80 이상인 자는 연좌하는 범위에 들지 않고, 출가 및 양자 간 자는 모두 연좌되지 않는다' 하였으니 율대로 한다면 모두 연좌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산주는 엄산수와 정인석으로부터 폐비라는 화근이 생겼으므로 중죄를 주라고 명했다.
"그들의 재산을 다 몰수하고 화근이 이들로부터 나왔으므로 이들은 율문에 구애될 수 없느니라."
허침과 김감에게는 이번 일의 교서를 짓게 명하였다.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은 곧 근본에 보답하고 원통함을 씻으려는 것이다. 당시의 후궁은 죽어도 남은 죄가 있기 때문에 그 상복 역시 서인의 예에 의하여 하게 한 것이다. 이것이 부왕의 일이기는 하지만 보복하지 않으면 천백 년 뒤 혼백이 되어서도 오히려 잊을 수 없을 터이니 이런 뜻으로 교서를 지으라고 한 것이다."
물론 성종조 때 모든 신하가 윤비를 폐위시키는 데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성종이 윤비를 폐위하려 하자 허종(許琮)은 '진 왕후를 폐한' 한나라 무제와 '맹 왕후를 폐한' 송나나 인종의 실수를 들어 옳지 않음을 진술하였다. 또한, 경상감사 손순효(孫舜孝)는 울면서 소를 올려 극력 간했다.
<부인에게 일곱 가지 내쫓길 나쁜 일(七去之惡)이 있으니 첫째는 자식이 없으면 내쫓기고, 둘째는 질투하면 내쫓긴다 했습니다. 두 가지를 비록 다 가졌더라도 만약 세 가지 내쫓기지 않을 일(三不去)이 있으면 옛 사람은 오히려 용서했는데, 한 가지 내쫓길 것만 있고, 여섯 가지 허물이 없는데도 용서하지 못하겠습니까. 하물며 원자의 모후(母后)를 단 하루 동안이라도 궁벽한 여염집에 있도록 하겠습니까. 왕비 윤씨는 일찍이 만복의 근원을 받아 홀로 아들 많이 낳는 경사를 얻었는데, 하루아침에 어염 집에 물러가 있게 하고 또 받을 물자까지 끊어버렸으니 비록 자기 허물로 인한 것이지만 이렇듯 전하께서 박정해서야 되겠습니까. 군신과 붕우 사이에서는 마땅히 의리가 은혜보다 앞서야 되겠지만 부자와 부부 사이에서는 은혜가 의리보다 앞서야 될 것입니다. 훗날에 원자가 측은한 마음을 가진다면 전하께서 어찌 후회가 없겠습니까.>
대사헌 채수(蔡壽)와 교리 겸 동궁 시독관(侍讀官)인 권경우(權景祐)도 마찬가지였다.
"폐비 윤씨는 비록 폐위되었으나 일찍이 전하의 배필이었는데, 지금 어염집에 거처하고 봉양도 또한 군색하니 청컨대 따로 한 집에 거처하게 하고 관에서 일용할 물자를 공급해주소서."
이에 성종은 크게 노했다.
"너희들이 원자에게 아첨해서 훗날을 바라는구나."
성종은 채수와 권경우를 친국하였으나 그들은 끝내 굴복하지 않았으므로 관직만 잠시 파면을 하였다.
춘추관에 폐비사약시말단자(廢妃賜藥始末單子)를 적어 바치라는 명령을 내린 연산주는 다급하게 기다렸다. 폐비윤씨사건에 얽힌 인물들을 모두 조사해 보고하라는 명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폐비 윤씨 사건에 연루된 인물 중에는 이미 죽은 사람도 있고, 연산주의 신임을 받고 있는 당상, 당하의 신하들도 많았다.
이미 죽은 사람으로는 한명회가 대표적이었다. 명나라 사신으로 가서 윤비를 폐위시킨 일을 고하고 허락을 받아왔던 것이다. 이 일로 한명회는 갑자년에 무덤을 파고 관을 열어 시신을 베는 부관참시를 당했다.
숙청의 피바람은 살아 있는 사람일수록 더 가혹했다. 윤씨의 폐비 문제를 성종과 논했던 당시 영의정 윤필상은 맨 먼저 진도로 귀양을 갔다. 연산주는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자, 사자(使者)를 보내어 죽이고 친척과 자제들을 모두 먼 섬으로 안치시켰다. 윤필상의 시체는 10여 일 동안이나 들판에 엎어져 있었으나 까마귀와 소리개가 먹지 않았으며 이웃 개도 돌아보지 않았다.
폐비에게 사약을 가지고 갔던 형방승지(刑房承旨) 이세좌도 윤필상과 비슷한 시기에 죽었다. 그의 죽음은 부인이 예견한 바 그대로였다. 폐비에게 사약을 내리고 집에 돌아와 아내와 한 방에서 자는데, 아내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듣건대 조정에서 계속하여 폐비의 죄를 논한다 하는데 결국에는 어찌 될까요."
"지금 이미 약을 내려 죽였소."
아내가 깜짝 놀라 일어나 말했다.
"슬프군요. 우리 자손도 종자가 남지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죄 없이 죽음을 당했으니 훗날 아들이 보복하지 않겠습니까."
아내의 말대로 이세좌의 세 아들 모두 연산주에게 죽임을 당했다. 세 아들 모두 벼슬을 하고 있는 융성한 가문이었으므로 임사홍과 유자광의 시기를 받아 단 한 사람도 살아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폐비사약시말단자에 오른 인물들은 대역죄로 추죄(追罪)하여 삼족이 멸해지고 사촌까지 연좌되니 형벌의 범위는 전국에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연산주는 폐비를 논의한 주요 인물을 십이간(十二奸)이라고 불렀다.
"윤필상, 한치형, 한명회, 정창손, 어세겸, 심회, 이파, 김승경, 이세좌, 권주, 이극균, 성준을 나는 열두 명의 간신이라 부르겠노라."
윤필상, 이극균, 이세좌, 권주, 성준은 죽임을 당했고, 이미 고인이 된 나머지는 참혹하게 부관참시를 당했다.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베고 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려 보냈으며, 심지어는 시체를 찾지 못하게 강물에 던져버리기도 했다.
그래도 연산주는 어머니가 비명에 죽은 것을 분하게 여기어 단자에 오른 인물들의 집을 헐고 그곳에 못을 파고 비를 세워 죄명을 기록하게 하였다.
정여창이 병으로 종성에서 죽고 난 6개월 후-. 마침내 연산주는 숙청의 범위를 넓혀 추풍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갑자년 9월 29일에 추상같은 명을 내렸다.
<무오년 사초 사건으로 그 무리들을 지방으로 귀양 보냈는데, 그 당시에 간사하고 음흉한 무리들이 사정(私情)으로 죽일 자를 살리고, 살릴 자를 도리어 죽였으니 이 무리들을 두었다가 어디에 쓸 것인가. 모두 잡아오라.>
입궐한 정승들에게 다시 반복해서 명을 내렸다.
<무오년의 무리들은 재주를 믿고 서로 결탁하여 조정의 일을 비난했으니 난신(亂臣)을 처단하는 전례대로 모두 죄를 더 주라.>
이번에는 대부분 김일손의 사초 사건에 연루된 김종직의 제자들이 화를 입었다. 6개월 전에 죽은 정여창은 함양에서 부관참시 당했고, 순천에 유배 중인 김굉필에게는 의금부 도사에 의해 사약단지가 내려갔다.<계속>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는 화순군 홈페이지와 동시에 연재됩니다.
☞ 화순군 홈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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