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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살아 남아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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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살아 남아야 한다고?'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道'] 제3장 天道가 무너진 땅 <16>

그러나 김굉필은 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입을 다물었다. 찻물을 끓이던 선돌이 정여해를 부르고 있었다. 선돌은 돌 위에 항아리를 놓고 찻물을 끓이고 있었는데 방 안의 분위기가 너무나 엄숙하여 말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으리, 찻물을 진즉 끓여 놓았습니다요. 약주를 드시려면 차를 마셔야 몸이 상하지 않을 것입니다요."
선돌이 말하는 차는 능주에서 가져온 발효차의 일종인 떡차였다. 능주에는 고찰 주위에 야생 차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으므로 선승들과 선비들이 차를 매개로 하여 교유하는 전통이 있었다. 쌍봉사는 통일신라 때 철감(徹鑒) 도윤(道允) 선사가 중국의 조주 선사에게서 차씨를 얻어와 산 주위에 퍼뜨려 능주 선비들이 차를 마시고 싶을 때 찾아가는 다사(茶寺)가 되어 있었고, 개천사는 고려시대 말에 다승(茶僧) 행제(行齊) 선사가 주석하면서 목은 이색에게 명차를 보냈던 이후 뛰어난 제다(製茶) 기술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무등산 산자락의 규봉암이나, 나한산의 만연사와 선정암, 그리고 유마사의 샘물 등은 무겁고 단맛이 도는 다천(茶泉)으로서 손꼽는 곳이었다.
"찻물을 다시 펄펄 끓여 들여오너라."
"네, 나으리."
마당은 찻물을 끓이는 불빛으로 환하게 밝았다. 솔가지가 탁탁 소리를 내며 타는 동안 불티가 반딧불이 불처럼 캄캄한 허공으로 날았다. 옥처럼 맑은 물이 흐르는 옥천에는 반딧불이가 무리지어 서식하고 있었는데, 그 반딧불이가 밤이 되면 적소 마당까지 날아들어 허공의 별처럼 반짝였다.

김굉필이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중화, 전하께 올릴 상소문을 써 왔구려."
"초안을 써 왔소이다."
"중화의 말은 의분에 넘치는 뜻에서 나왔겠지만 요망한 말들이 전하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으니 우리들의 원통함은 풀리지 않고 만에 하나라도 화색(禍色)을 불러올지도 모르겠구려."
화색이란 재앙이 일어나는 빌미를 말했다. 그래도 정여해는 품속에서 상소문 초안을 꺼내 김굉필에게 전했다.
"대유, 전하께서 측은지심이 들어 너그러워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김굉필은 가물거리는 간솔 불을 끌어당겨 놓고 상소문을 읽어가다 몇 번이나 회한에 사무쳐 눈을 지그시 감곤 했다. 스승 김종직의 억울함을 낱낱이 밝히는 구절에서는 가는 비명을 토해냈고, 특히 가장 절친했던 동지 정여창의 신원(伸寃)을 논한 구절에서는 한숨을 쉬며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백욱(정여창의 자), 이 술 받으시오."
"나도 첨작을 하겠소."
정여해도 정여창을 위한 술잔에 술을 따랐다. 김굉필은 상소문을 방바닥에 내려놓고 정여창의 술잔을 들고 밖으로 나가 북쪽을 향해 붓고 들어왔다. 북쪽에 술을 부은 것은 정여창의 유배지가 함길도 종성이기 때문이었다. 정여해는 친척으로부터 정여창의 소식을 종종 들어 그가 지금 어찌 고생하는지 대충은 알고 있었다. 정여창은 '함길도 종성 7년 안치'란 형을 받아 그곳에 가 있었는데, 안치(安置)란 정해진 곳을 벗어날 수 없는 형벌을 말했다.
함길도 종성-. 그곳은 조선반도의 끝자락에 있는 산적들의 출몰이 잦고 산세와 사람 모두 거칠기로 유명한 땅이었다. 의원도 변변치 못해 유배를 가서 중병에 걸리면 살아 돌아오지 못하는 지옥 같은 곳이었다.
더구나 정여창은 유배와 노역의 벌을 받아 종성 관아의 화부(火夫) 노릇을 했다. 미관말직의 아전들이 보기가 민망하여 만류하곤 했지만 정여창은 눈보라치는 날에도 장작을 만들어 지게에 지고 나르거나 불을 지피곤 했다. 노역이 끝나 시간이 나면 종성의 양인 자제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고, 동지들에게 서신을 띄웠다. 정여해도 정여창의 서신을 받아 답신을 보낸 적이 있고, 특히 양희지(楊熙止)의 서신은 정여창의 마음에 큰 위안이 되었다.

<바로 북쪽 삼천리 길을 밤낮으로 갔으나 능히 죽지 않았음은 천명입니다. 밝은 때에도 귀양을 가는 것은 현인(賢人)도 면치 못했습니다. 평생 동안 읽은 글을 어느 곳에 쓰시려 하십니까. 모름지기 자신을 사랑하시기를 바라오며, 이밖에 무슨 말을 드리겠습니까. 다 못합니다.>

밝은 때란 어진 성종 시대를 말하고, 그 시절에도 간신의 모함을 받은 현인이 귀양을 갔던 바, 연산군이 난정을 펴는 어두운 시대에 차라리 유배를 가지 못한 양희지 자신이 서글퍼진다는 그의 속마음이 담긴 서신이었다. 그러니 절망하지 말고 도학의 구현을 위해서도 성명(聖明)한 때를 기다리라는 양희지의 부탁인 것이었다.

"대유, 백욱 형의 <안령대풍(鞍嶺待風)>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종성으로 가는 고개를 안령이라 하는 모양입니다. 안령에서 바람을 기다린다는 시인데 들어보시겠습니까."
"군자를 바람으로 비유하여 읊은 백욱의 절절한 시이겠구려."
"그렇소이다. 절절하기도 하지만 안타까워지는 시입니다.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알고 읊조리는 시를 비원(悲願)의 시라 하지 않습니까."
▲ 쌍봉사의 차맛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는 봉사 앞 골짜기에 있는 쌍봉다원 사진(좌)길목의 들꽃(우). ⓒ프레시안

바람을 기다려도 바람은 오지 않고
뜬구름이 푸른 하늘 가리었네
어느 날에나 서늘한 바람이 일어
뭇 그늘 쓸어버리고 다시 하늘을 볼까나.
待風風不至
浮雲蔽靑天
何日涼飆發
掃却羣陰更見天

"대유, 하늘을 가린 뜬구름이나 뭇 그늘이 무엇인 줄 아시겠습니까."
"허허허. 그야 천도를 가린 소인배들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바람, 그것도 가을바람이 낙엽을 쓸어버리듯 서늘한 바람이 일어 뭇 그늘을 쓸어버리고 싶다는 것이 백욱의 마음입니다."
"중화께서는 형제간이라 백욱의 소식을 더 잘 알고 있겠구려."
"그렇습니다."
"양희지의 말대로 백욱의 목숨이 그나마 종성에서 보존되고 있는 것은 하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아니 그렇습니까."
"그렇다고 보아야지요. 암 그러고 말고요."
"헌데 중화는 하늘의 뜻을 거스르려 하고 있습니다."
"대유,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하늘의 뜻을 거역하려 하다니. 도대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중화께서 상소문을 올린다면 그 이후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올리려는 상소문이 틀렸단 말입니까. 도학의 성인인 점필재 선생의 명예를 되찾고, 억울하게 죽은 우리 동지들의 혼을 달래고, 누명을 쓰고 유배 중인 우리 동지들을 구하려는 내 뜻이 틀렸다는 것입니까."
"중화, 그게 아닙니다. 패악에 빠진 전하께서 상소문을 곡해하고 대노하여 이미 내려진 형에 형이 더해진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나는 그것이 염려스러울 뿐입니다."
"대유, 이것은 누구와도 상의한 일이 없습니다. 나 혼자서 내린 결단입니다. 그런데 나 말고 누가 화를 당한 말입니까."
"아닙니다. 중화의 마음을 내 어찌 모르겠습니까. 중화의 마음이야 도심(道心)의 발로이겠지만 그 결과는 처참할 것입니다. 우리 동지들이 모두 지금보다 더욱 참혹한 화를 당할 것입니다."
"의를 내세우고 내 목숨을 내놓겠다는 것인데 이마저도 할 수 없는 세상이라니…. 도대체 이 세상을 어찌 살아야 합니까."
어느새 술이 취해버린 정여해는 주먹으로 방바닥을 쳤다. 그러나 김굉필은 하나도 흐트러짐이 없이 냉정했다.
"중화께서는 나를 보자마자 살아 있는 것이 희망이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중화가 살아 있는 것도 우리들에게는 희망입니다. 동지들을 위해 살아 있어야 합니다."
"대유,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을 아시면서도 어찌 그리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누군가는 살아남아 우리 점필재 선생과 문하의 문인들이 어찌 살았는지 뒷사람들에게 전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어찌 부끄러운 일입니까. 중화 형이 바로 그 일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점필재 선생과 참혹하게 죽은 동지들의 원혼을 달래주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난 그리 할 자신이 없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이 괴로울 뿐입니다."
"아닙니다. 범이 바람을 만나고 용이 구름을 만나듯이, 현신(賢臣)이 명군(明君)을 만나는 것도 또한 좋은 시대의 운수에 관계되는 일입니다. 그러니 해가 밝게 내리비치는 가운데 조용히 운명에 순응하는 것도 평소에 한 공부로 다져진 힘의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김굉필의 설득에 정여해는 더 이상 대답을 못하고 술에 취해 주먹으로 방바닥을 칠 뿐이었다. 그러자 김굉필은 상소문을 들고 밖으로 나가 찻물을 끓이는 불속에 넣어버렸다. 불속에서 사라지는 상소문을 보더니 김굉필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중화, 어찌 내가 그대의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그대의 굳은 도심을 왜 모르겠습니까. 다만 시절이 이러하니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살자는 것이지요. 좋은 시대의 운수를 기다려보자는 것이지요."
김굉필이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을 때는 선돌이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정여해를 부축하고 있었다.
"우리 나으리를 어느 방으로 모실까요."
"너는 저 골방에서 자거라. 나는 중화와 함께 이 방에서 자면서 먼저 간 동지들을 꿈에서라도 만나 볼 것이니라."
선돌이 방안의 술상을 치우고 나가자 김굉필은 간솔 불을 껐다. 적소는 밖에서 우짖는 새소리만 들릴 뿐 적막강산으로 바뀌었다. 김굉필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툇마루로 나가 앉았다. 날카로운 초승달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쩍새가 적소 가까이까지 날아와 울었다. 김굉필은 문득 정여창의 목소리를 듣는 듯했다.

두견새는 무슨 일로 산꽃에 눈물 짓는가
남은 한은 분명코 옛 등걸에 의탁했구나
맑은 마음과 붉은 마음 어찌 너 홀로이랴
충신과 지사도 맹세코 딴 데 가지 않았으리.
杜鵑何事淚山花
遺恨分明託古査
淸怨丹哀胡蜀爾
忠臣志士矢靡他

김굉필이 소쩍새의 울음소리를 듣고 종성에서 유배중인 정여창의 시를 떠올린 것은 소쩍새에 얽힌 고사 때문이었다. 소쩍새는 중국에서 두견(杜鵑), 귀촉도(歸蜀道), 불여귀(不如歸), 자규(子規), 원조(怨鳥), 망제혼(望帝魂) 등으로 불리는데, 중국 촉나라의 망제가 오령(鰲靈)이라는 사람에게 임금의 자리를 빼앗기고 죽은 후, 새가 되어 피를 토하듯 운다는 고사가 전해지고 있는 것이었다.
김굉필은 심신이 허약해진 정여창이 피를 토하는 듯한 예감이 들어 눈물지었다. 실제로 정여창은 천성적으로 강한 자신과 비교한다면 물가의 갈대처럼 쉬이 꺾일 듯한 약골이었던 것이다.
▲ 정여해와 정여창을 모시는 해망서원 사우. 화순군 춘양면 대신리에 위치한 해망서원은 중종 3년(1508년)에 돈재 정여해가 그와 사우관계가 되는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이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인해 화를 당하자 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해망단을 만들어 향사한 것이 시초다(좌), 정여해 위패(우). ⓒ프레시안

다음날.
능주로 돌아온 정여해는 낙담하여 지석강으로 나가 꺼이꺼이 통곡을 했다. 저물녘 집으로 돌아와서는 상소문마저 올릴 수 없게 된 못난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주역 점을 쳤다. 그러자 주역의 64괘 중에서 돈괘(遯卦)가 나왔다. 돈괘란 물러남의 지혜를 일러주는 33괘였다. 돈괘의 구절 중에 정여해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다음과 같은 구절이었다.
'군자는 잘 물러나 길하지만 소인은 거부한다(好遯君子吉小人否)'
중국 송나라의 주자(朱子)가 봉사(封事; 상소문)의 초고를 불살라 버리고 주역 점을 쳐서 돈괘를 얻은 후 자신의 호를 둔옹(遯翁)이라 한 것이나 다르지 않았다.
정여해는 모지랑 붓을 가지고 썩은 판자에 둔(遯; '돈'으로도 읽음)이라고 쓰고 나서 먹이 마르기도 전에 처마 밑에 액자처럼 걸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호를 돈재병옹(遯齋病翁)이라 하고 허공을 향해 중얼거렸다.
'입을 다물고 말을 삼갈 것이니라. 세상일에는 귀머거리와 소경 노릇을 할 것이니라. 이후로는 울타리 안에 숨을 것이며 산수 사이에 거주하며 오늘의 일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니라.'
시와 술을 즐겼던 정여해는 자신의 심중을 담은 시 한 수를 토해냈다. 병든 자신에게 다짐하는 맹세의 시였다.

부질없는 세월 몇 해를 보냈는가
천지간에 대장부 몸 되었음을 부끄러워 하노라
스승 문하에서 가르침 받았으니 여생은 지탱하겠고
성대(聖代)에 태어났으나 재주 없으니 일민(逸民; 은둔자)으로 늙어가네
새소리 듣고 꽃을 바라보니 모두 즐거움을 누리는데
바람을 타고 달을 맞아 스스로 자연의 참된 맛을 찾으리로다
한 평생의 칭찬과 비방 어찌 말할 필요 있으랴
이 문제는 상관하지 않는 세속 밖의 사람이로다.
荏苒光陰問幾春 愧吾天地丈夫身
師門有授支餘日 聖世無才老逸民
聽鳥看花皆得樂 乘風迎月自尋眞
一生譽毁何須說 到此不關物外人

그러나 정여해는 닫아 건 싸리문을 얼마 후 다시 열지 않을 수 없었다. 능주의 학인뿐만 아니라 여러 지방에서 제자가 되겠다고 학동들이 모여들었다. 진사시험에 합격한 능주의 구두남(具斗南), 함종의 어계선(魚季瑄), 김해의 김경추(金景秋), 함양의 박간손(朴幹孫), 삭령의 최언수(崔彦粹) 등이 그들이었다. 할 수 없이 정여해는 해망산(海望山) 아래의 월곡리 우거(寓居)에 조그만 학당을 열고 규약을 만들었다.

- 먼동이 틀 때 반드시 일어나서 요와 이불을 가지런히 개어놓고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곧 낯을 씻고 머리를 빗어 의관을 착용하고 단정하게 앉아 책을 읽을 것.
- 조반 후에는 잠시 동안 거닐면서 정신과 기력을 펴고는 곧 벼루를 열어 글씨를 쓰거나, 혹은 옷깃을 여미고 꿇어앉자 의리를 강의 토론하면서 방심하거나 만심(慢心)하지 말 것.
- 행동거지는 반드시 엄숙하고 공손히 하여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옆으로 기울어지지 말 것. 옛날 사람이 '두 다리를 뻗고 앉아서 마음이 방자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 언어는 반드시 삼가 해서 실없는 말로 농지거리하거나 떠들지 말 것. 대체로 실없는 말로 농지거리하지 않는 것이 바로 마음을 단단히 가지는 한 부분이 된다.
- 드나들기를 너무 자주 하거나 일정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걸음걸이나 종종걸음을 할 때는 모름지기 안온하게 하고 경솔하게 뛰지 말 것.
-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모름지기 온화하고 공경해야 하고, 일을 처리할 때는 반드시 자세하고 치밀하게 하라. 대체로 글을 읽는 것은 이 시대에 바로 징험을 해야 하니, 부질없이 읽기만 하고 소용이 되지 않는다면 필경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 선생이나 어른이 드나들 때는 젊은 사람은 반드시 일어나야 하고, 교만한 자세로 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
- 모름지기 군자와 소인의 구분을 분별하는 것은 한 마음이 선(善)과 불선(不善)의 차이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맹자가 말씀하시기를 '순제(舜帝)와 도척(盜蹠 ; 춘추시대의 악인)의 구분을 알려고 한다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利)와 선(善)의 사이에 있다'고 했다.
- 저녁밥을 먹은 후에는 반드시 죽 늘어앉아서 심성을 함양하고, 또 혹시 낮에 읽은 글을 외우다가 밤이 오래된 후에 잠자리에 나아갈 것. 아아, 공부는 중단되기 쉽고 세월은 물 흐르듯이 빠르니 어찌 태만할 수 있겠는가.
▲ 영벽정 안에서 바라본 지석강 풍경. 아마도 이 강물로 나가 정여해는 통곡했을 것이다. ⓒ프레시안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짧은 강규(講規)는 일찍이 정여해가 스승 김종직의 문하에서 지켰던 규약을 참고한 것인데, 능주 양인들의 가정과 호남의 향교로 유행처럼 급속하게 퍼져 이 집 저 집에서 글 읽는 분위기를 고취시켰다. 비통한 심정으로 물러난다는 의미의 돈(遯) 자를 처마 밑에 내건 정여해였지만 그의 존재는 선비와 학교의 교생들에게 이전보다 더욱 부각될 뿐이었다.
정여해의 문인 중에서 특히 상례(喪禮)의 으뜸 제자는 능성에 사는 구두남이었다.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여 유생이 된 그는 부모상을 당하자, 벼슬의 꿈을 버린 채 스승 정여해가 젊은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3년 동안 산중의 그곳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훗날 그가 능성 사람들의 천거를 받아 공릉의 참봉(參奉 ; 종9품)이 되고, 벼슬아치들의 봉급을 나눠주는 광흥창의 봉사(奉事 ; 종8품)가 된 것은 그의 뛰어난 효성 때문이었다.
정여해는 제자들에게 강의를 하면서도 가끔 순천의 적소에서 만난 김굉필의 말이 떠올라 책을 덮곤 했다.

'누군가는 살아남아 우리 점필재 선생과 문하의 문인들이 어찌 살았는지 뒷사람들에게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어찌 부끄러운 일입니까. 중화 형이 그 일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점필재 선생과 참혹하게 죽은 동지들의 원혼을 달래주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때마다 정여해는 고개를 흔들었다. 억울하게 죽은 원혼의 그림자 같은 것이 검은 나방처럼 눈앞에서 어른거리고, 김굉필이 그에게 던진 말이 문득문득 유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었다.<계속>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는 화순군 홈페이지와 동시에 연재됩니다.
☞ 화순군 홈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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