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2년간 시인과 방송인의 두 가지 길을 걸어왔던 그가 최근 방송생활을 마감하고, 남은 시간은 시를 쓰는데 모든 열정을 집중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탁월한 시적 재능으로 '소년시인'으로 이름을 날렸던 유자효씨... 방송사 기자이기 이전에 시인이었던 그는 기자가 되면서 15년간 시 쓰는 일을 접기도 해야했지만, 이제는 마음껏 시를 쓸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시를 통해 아름다운 제2의 인생을 설계하고 있는 유자효 전 SBS 라디오 본부장을 만나봅니다.
시는 그의 삶에 어떤 의미였는가? 시를 통해 살고자 하는 제2의 인생은 어떤 것인가?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시인 유자효씨입니다.
유자효씨는 서울대 사범대학을 다니던 1968년에 신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입선됐고, 1972년 시조문학에 <혼례>로 추천받으면서 등단했습니다. 1974년 대학졸업을 1년 앞두고, KBS 공채 2기로 합격. 정치부 사회부 기자를 거쳐 파리특파원을 지냈습니다.
1991년 SBS개국과 함께 SBS로 옮기면서 정치부장, 보도제작국장, 해설위원 등을 역임했고, 지난 3월 라디오 본부장을 끝으로 32년간의 방송생활을 접었습니다. 방송생활동안 꾸준히 시를 쓰며 현대시조문학상, 후광문학상, 편운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 굵직한 문학상을 수상했고 시인과 비평가들의 모임인 시와 시학회 회장이며 잉여촌 동인이기도 합니다. 최근 아홉번째 시집인 <성자가 된 개>를 출간했습니다.
박인규 : 안녕하십니까?
유자효 시인 : 네 안녕하세요.
박인규 : 32년간 시인도 하시고 방송인도 하시다가 방송생활은 지난 3월에 그만 두셨습니다. 한 30년 동안 한 직장에 다니다가 갑자기 나갈 데가 없으면 좀 이상하다고 하는데,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유자효 시인 : 저는 생애 처음으로 긴 휴가를 요즘 만끽하고 있습니다. 제가 SBS를 사직하게 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게 시는 평생의 동반자기 때문에 방송업을 일단 떠나면서 시와 완전히 동행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상당히 기쁜 일입니다. 또 요즘처럼 어려운 시대에 방송사라는 좋은 직장에서 32년 동안 일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저는 아주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3월에 SBS를 그만두시면서 <성자가 된 개>.. 아홉번째 시집을 내셨는데요, 독자들 반응은 좋습니까?
유자효 시인 : 네. 요즘 시집이 잘 안 팔린다고 해요. 그런데 이번에 나온 <성자가 된 개> 는 그런 출판불황에도 불구하고 곧 3판에 들어갈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의 반응이 좀 있는 편이죠.
박인규 : 이번 시집에 실린 게 70편이고 그동안 9권의 시집을 다 합치면 한 500편 이상의 시를 쓰셨는데, 바쁜 기자생활 하시면서 언제 그렇게 시를 쓰셨습니까?
유자효 시인 : 제가 등단 이후 34년이 됐습니다만, 그 가운데 절반가량은 시를 못 썼어요. 제가 1974년에 KBS기자로 입사를 해서 86년에 파리특파원으로 나가서 89년에 프랑스에서 귀국할 때까지는 거의 못 썼습니다. 그런데 제가 프랑스 생활을 하면서 상당히 문화적인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당시 40대 중반에 귀국하면서 인생을 바꿔야 하지 않는가 하는 번민도 있었고 나름대로 좀 새로운 삶을 살아야겠다는 꿈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귀국 이후에 제가 쓰는 일에 좀 몰두할 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직장경력으로 볼 때도 KBS에 있을 때는 일선기자로서 주로 뛰는 기간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직장에 헌신하는 것 외에는 힘들었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제가 간부가 되면서는 사실 어느 정도는 제 노력에 따라서 밤시간이라든지 이런 걸 활용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시간을 주로 이용했죠.
박인규 : 프랑스를 3년간 다녀오시면서 15년간 잊었던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하신 건데, 그렇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그냥 시인이나 문인이 됐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유자효 시인 :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저는 입사를 했어야 했습니다. 그 당시 KBS에 입사할 당시는 제 개인적인 사정이 직장을 가져야 하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박인규 : 사실 시인이란 게 배고픈.. 생활은 안 되는 직업이죠.
유자효 시인 : 네. 그래서 방송인 생활을 시작했는데 방송생활이 저한테는 아주 맞았어요. 아주 어울리는 직업이었습니다. 그래서 방송기자로서 보낸 저의 생애가 저로선 아주 행복했어요. 바쁘긴 굉장히 바빴습니다. KBS라는 직장이 굉장히 많은 노력과 땀을 요구하는 직장입니다.
박인규 : 그래서 처음 KBS에 입사하실 때는 '내가 기자일도 하고 짬짬이 시도 써야지..' 그런 생각을 하셨을 것 같아요.
유자효 시인 : 그런 생각도 처음엔 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올인을 요구하는 직업이 방송입니다.
박인규 : 그렇죠. 기자라는 게 두 가지를 하기가 쉽지 않은데.. 특히 유자효 시인께서 기자가 되셨을 때는 74년. 엄혹했던 유신시절이어서 87년까지는 기자들이 좀 활개펴고 일하던 때는 아니었어요.
유자효 시인 : 그렇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74년.. 제가 기자생활을 시작한 때가 유신시대였습니다. 그래서 그당시 기자선배들도 자조하는 분위기도 있었고 상당히 갈등이 많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당시는 필름시절이어서 기자들이 필름을 전부다 손으로 편집해야 했습니다. 아주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많습니다. 심지어는 필름을 거꾸로 붙이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면 사람이 뒤로 걷는.. 그런 에피소드도 많았고. 또 저희들이 필름을 편집하고 오디오를 믹스하면서 그게 안 맞아서 방송사고도 많았죠. 원시적인 사고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80년대에 컬러화가 되면서 ENG가 본격 도입되면서 방송계는 새로운 혁명을 맞았고. 그러나 또 정치적으로는 10.26 사태가 터지면서 이른바 신군부가 등장하고, 그러면서 저희가 저널리스트적인 입장에서는 괴로운 점이 많았습니다. 모든 기사는 검열단의 검열을 받아야 했고, 저희가 검열을 받으러 가고 그랬어요. 검열을 통과한 기사만 나갈 수가 있고 신문은 삭제가 되기도 했죠. 그런 시절을 참 많은 갈등 속에서 보냈죠.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아주 격변하던, 격동하던 시기에 저희들은 일선에서 기자생활을 하면서 보냈는데. 제 경우는 10.26사태, 12.12사태가 터졌을 때 외무부 출입기자였어요. 지금은 없어진 중앙청건물에서 말하자면 역사의 현장이죠. 그런 격변을 현장에서 보는 기회를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정치부 기자를 했기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박인규 : 유자효 시인은 원래 중고등학교 때부터 워낙 감수성이 뛰어나셔서 시인으로 소문이 나셨다고 하는데, 기자생활을 하면서 기자생활이 시작에 영향을 미친 경우도 있습니까?
유자효 시인 : 영향을 많이 주는데, 제 시가 이제 500여 편씩 되면서.. 제 시가 갖는 한 가지 특징이 있어요. 비평가들이나 시인동료라든지 여러 사람들이 얘길 하는데 제 시가 기사를 닮았대요. 아주 객관적인 표현을 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사건을 가지고 시화하는 경우가 많다고 얘길 해요. 예를 들어 이번 <성자가 된 개>에 실린 '집'이란 시가 있습니다. 이것은 지난해 전방의 총기난사사고를 테마로 한 것인데, 이렇게 돼있습니다. '2005년 6월 19일. 전방에서는 총기난사사고로 군인 여덟 명이 비명에 갔다. 그 엿새 뒤 장례식이 끝나고 영정과 관이 군인들의 손에 들려나오자 어머니는 관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아가 엄마랑 집에 가자. 20여 년의 꿈이 재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게 전문인데요 사실 기사나 똑같습니다. 그래서 제 시가 어떤 의미에서는 간결하고 객관적이고 어떤 상황을 그대로 옮겨주면서 감동을 주는 특징이 있다고 하는데, 사실은 기자를 처음 시작할 때는 제가 시를 쓰는 일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왜 그런가 하면, 시는 압축된 표현이거든요. 에센스만 딱 뽑아서 표현합니다. 방송기사가 요구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방송기사는 압축하거든요. 에센스만 뽑아냅니다. 이른바 리드를 뽑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리드를 뽑는 것은 역시 대단한 문장력과 창의력이 필요하거든요. 제가 해보니까 시인이 시를 쓰는 행위가 방송기자가 기사를 쓰는, 특히 리드를 뽑는 것과 아주 유사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일선기자 할 때는 상당히 제가 시를 썼다는 것 때문에 좀 유리한 입장에 있었고 또 선배들로부터 귀여움을 많이 받았던 것 같습니다. 인정도 많이 받았던 것 같고..
박인규 : 말하자면 시인과 기자가 서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셈이군요. 보통 시 하면 서정적이라고 하는데 유자효 시인의 시는 좀 서사적이다. 그런 말씀을 많이 하시고. 이번에 <성자가 된 개>가 원래 제목이 '개'였는데 서울대 문학평론가 하시는 김윤식 선생께서도 그 시가 제일 맘에 든다고 하셨습니다. 표제로 올릴 정도니까 굉장히 좋은 시인 것 같은데요, 이 기회에 한 번 낭송을 부탁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유자효 시인 : 그러시죠. <개> 의정부에서 열린 전국 시 낭송 경연대회 경기도 예선 눈먼 여인이 누런 개의 인도를 받으며 건물로 들어섰다 대회장의 밖에 개는 공손하게 앉았다 여인은 화장실로 가서 짊어지고 온 가방을 풀어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여인의 차례는 마지막이었다 몇 번을 맨발로 연습한 대회장 바닥의 감각을 맨발로 확인하며 단상에 올랐다 아무도 그녀가 눈이 먼 줄 몰랐다 여인은 창과 함께 시를 낭송했다 낭송은 다소 서툴렀지만 절절한 한 같은 것이 묻어있었다 여인의 차례가 끝나고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는 동안 개는 눈을 껌벅이며 구석에 묵묵히 엎드려있었다 누가 바라보면 개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진 눈 어진 눈이었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마치 어느 착한 사람이 개의 형상을 하고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듯했다 여인은 장려상을 타고 개는 다시 여인을 인도해 건널목을 건넜다 아무도 그 개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묵묵히 엎드려 있던 누런 등과 천천히 끔벅이던 어진 눈 이름 없는 무수한 성자 중의 하나가 개가 되어 여인을 인도하고 있었다 저 흔한 우리 누렁이 중의 하나가 되어
박인규 : 네.. 불교의 고승께서는 개도 불성이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이게 맹도견이 사실은 웬만한 성자보다 낫다는 말씀이시죠?
유자효 시인 : 조주선사의 화두에 그런 게 있죠. 개에 불성이 있느냐. 어떤 사람이 오면 조주선사가 개에 불성이 있다고 했다가 어떤 사람이 오면 없다고 합니다. 그게 지금까지도 유명한 불교선승들의 화두인데, 이 시에서 제가 얘기한 것은 '개도 불성이 있다'죠.
박인규 : 서사적이네요. 그러면서 끝에 가서 그 개가 정말 성인이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지난 32년간 시인과 방송기자 두 가지 일을 해오시다가 최근 방송일을 접고 시쓰는 일에 전념하시기로 한 시인 유자효씨와 함께 합니다. 앞에서는 기자를 하신 게 시인으로서 상당히 도움이 됐다고 하셨는데 또 시인인 게 기자로서 도움이 됐다.. 그런 쪽도 얘기를 들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파리특파원을 하시면서 상당히.. 이른바 특종이라고 하죠. 특종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유자효 시인 : 파리특파원 할 때 제가 특종을 열 건을 했는데 그건 사실 제가 당시 몸담고 있던 KBS 덕이었어요. 그당시 제가 파리에 있던 80년대 말기가 동구가 무너지기 직전입니다. 그리고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있을 때거든요. 불란서 주재 특파원들이 굉장히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것이 동구에 누가 먼저 들어가느냐였습니다.
박인규 : 그 때는 아무나 못 들어갔죠.
유자효 시인 : 반드시 그 나라에서 허가를 해줘야 들어갔기 때문에. 그래서 비자신청을 하고 기자들이 굉장히 애를 썼는데 항상 1번으로 나온 게 저였습니다.
박인규 : 그게 말하자면 공영방송. 한국을 대표하는 공영방송이라는 것때문에..
유자효 시인 : 바로 그겁니다. 그 때 KBS라고 하면 한국을 대표하는 공영방송이다.. 그리고 공산주의 국가들 아닙니까... 그 사람들이 보기에는 자기들 식으로 생각을 했나봐요.
박인규 : 관영방송..?
유자효 시인 : 그렇죠. 그러니까 아 이 사람들은 믿어도 되는 사람 아닌가. 그래서 저한테 비자가 제일 먼저 나왔던 게 아닌가 생각해 보는데. 그 때 헝가리, 폴란드, 동독,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유고가 연방으로 있을 땝니다. 이런 나라들을 다녔는데 항상 제가 1번으로 들어갔어요.
박인규 : 그때가 그럼 85, 86년쯤 됩니까?
유자효 시인 : 87, 88년입니다. 그래서 타 기자들의 부러움을 많이 샀죠. 폴란드 같은 경우는 제가 바르샤바에 들어가 있으니까 며칠 뒤에 신문기자들이 들어오더라구요. 그러니까 KBS를 먼저 보낸 다음에 신문을 보냈는데..
박인규 : 무엇보다도 그 당시 폴란드 반체제운동의 지도자였던 바웬사를 처음으로 인터뷰하셨죠..
유자효 시인 : 그렇습니다. 그때 세계적인 뉴스였는데, 레흐 바웬사가 연금상태에 있었습니다. 가택연금이 돼서 꼼작을 못하게 해두고 있었는데, 폴란드가 대단한 가톨릭의 나랍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구국 아닙니까. 굉장한 가톨릭의 나라죠. 그래서 연금상태에 있는 바웬사한테 딱 한 가지 허락을 해준 게 일주일에 한 번 성당에 예배보러 가는 것은 허락을 해줬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가 폴란드 들어가서 렌트를 했던 기사가 저한테 물어봐요. 제가 바웬사를 못 만나서 애를 태우는 걸 이 친구가 보더니 바웬사를 꼭 만나야 하느냐고 그래요. 꼭 만나야 한다. 안 그러면 못 나가겠다 그러니까 내가 만나게 해준다고 하더라구요. 어떻게 당신이 만나게 해주냐고 하니까 자기 친구라고 해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 때 바웬사는 노동자들의 친구.. 그런 친근함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일요일에 바웬사가 오는 교회의 주교관에 제가 먼저 가서 들어가 있었습니다. 숨어들어가 있다가 바웬사가 도착을 해서 주교관으로 들어오는데, 바웬사는 일반 사람들과 같이 예배를 못하게 했습니다. 주교관으로 들어오는 바웬사를 붙들고 한 시간 이상 단독 인터뷰를 했죠. 그것에 KBS를 통해 보도가 되고 AFP통신으로 세계에 타진이 되고,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박인규 : 말하자면 국내최초가 아니라 세계최초인 겁니까?
유자효 시인 : 한국기자로서는 최초였고, 아마 외신은 좀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다른 형태로 간단한 인터뷰들은 했을지 모르지만 그때 KBS를 통해 나간 인터뷰는 상당히 길게 나갔죠.
박인규 : 저도 기자를 해봤지만 그런 거 한 번 나가면 타 사 기자들은 완전히.. 통쾌하셨겠습니다.
유자효 시인 : 그때 좀 미안하다고 할까요? 그러나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박인규 : 할 수 없죠. 기자라는 게 항상 그런 거니까..
유자효 시인 : 그리고 어느날은 제가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니까 웬 한국 젊은 여성이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데 사회자가 그런 얘기를 해요. 천재를 알아보는 데 천재인 카라얀이, 저 여성의 목소리는 신이 내린 최고의 선물이라고 얘길 했다. 그리고 꼬렌느라고 그래요. 한국여성이라는 뜻인데. 깜짝 놀랐어요. 처음 보는 여성이었는데. 그래서 TF1. 프랑스 제1텔레비전. 프랑스 민영방송인데 그 방송국에 달려가서 제가 테이프를 샀죠. 사가지고 서울로 보내서 KBS에서 한 시간 가량 특집이 나갔는데, 그것이 바로 조수미씨가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된 것이었습니다. 그때가 조수미씨가 막 알려질 땐데 그래서 조수미씨가 프랑스 공연을 오면 저한테 연락을 하고 보고 그랬죠. 저는 격려해 주기 위해서 공연을 하면 가서 취재도 해주고 그랬는데, 그 뒤에 아주 조수미씨가 급속도로 스타가 돼가고 오늘날 세계적인 프리마돈나가 됐습니다.
박인규 : 요즘도 가끔 만나십니까?
유자효 시인 : 아니죠. 워낙 바빠서.. 스타가 되니까 만나기 힘들어지더라구요.
박인규 : 방송 들으시면 한 번 연락 올지도 모르겠네요.
유자효 시인 : 글쎄 말이에요. 그런 기회가 있으면.. 조수미씨 어머니도 전에는 가끔 연락이 있었어요. 책이 나오면 보내주기도 하고 고마워한다는 얘긴 듣고 있었는데 워낙 세계적인 스타가 됐으니까..
박인규 : 보람이 있었겠습니다. 유자효 시인께서는 기자를 하시면서도 정치부 기자를 오래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평소 지론이 '정치가들이 시를 알아야 된다'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보통 많은 사람들이 시하고 정치는 좀 안 어울리는 걸로 생각하고 있는데요.
유자효 시인 : 그게 크게 잘못된 것인데요, 우리나라는 시인정치의 전통을 오래 갖고 있는 나랍니다. 고려 광종때부터 과거가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거기서 인재를 등용하는데 과거에서 보는 게 명경과와 진사과입니다. 명경과는 경전을 해석하게 하는 것이고 진사과는 시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춘향전을 보면 이도령이 시 짓고 장원급제 하는 게 나오죠. 관료가 되기 위해서 시를 쓰는 게 필수조건이었는데, 이것이 급속도로 산업화가 되면서 많이 무너졌죠. 그러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를 보면 시를 많이 쓴 사람입니다. 그런 식으로 시를 썼고, 시라는 것은. 결국 정치인이 옳은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내면과 정서를 이해해야 합니다. 시는 가장 기초적인 예술이에요. 시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내면과 정서를 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인은 당연히 시를 알아야 합니다. 서양의 경우를 보면, 정치인들이 상당히 철인의 풍모, 예술인의 풍모를 갖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세네갈 같은 경우 대통령 셍고르가 노벨문학상 후보로 여러 번 올라갔죠. 그 후배인 디우프가 대통령이 됐는데 디우프도 시인입니다. 윈스턴처칠이 노벨문학상을 받지 않았습니까? 회고록으로.. 그리고 독인의 브란트라든지, 프랑스의 미테랑이라든지 대단한 저술가입니다. 굉장한 지식인들입니다. 그런 지식인들이 정치를 하는 것이죠.
박인규 : 말하자면 시를 제대로 쓰는 것은 사람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유자효 시인 : 그렇습니다, 인간성에 대한 이해. 그리고 정서적인 완결성. 완전함을 갖는 것이죠.
박인규 : 저희는 언제부턴가, 시와 정치는 좀 아닌 거다. 우리나라에선 시를 수능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 배우고 있는 것 같아요.
유자효 시인 : 문제가 있죠. 한 가지 예를 들어드리면, 제가 프랑스 특파원을 했기 때문에.. 프랑스의 경우 교과목은 우리나라처럼 8과목입니다. 8과목 중의 반이 국어예요. 어떻게 반이 국어냐. 읽기, 쓰기, 문법, 시. 이게 다 독립된 과목으로 돼있습니다. 프랑스는 국어교육 잘하기로 유명한데, 저도 상당히 재밌게 봤는데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면 아이들에게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게 시교육입니다. 시를 외우게 해요. 그래서 프랑스의 경우 초등학교를 졸업을 하면 아이들이 수백 편의 시를 외웁니다. 지금 우리가 서울에서 보는 프랑스 사람들 있죠. 명시들을 많이 외우고 있어요. 어려서부터 시를 외웠기 때문에. 그것이 기초가 돼있기 때문에 이 분들의 정서적,예술적 소양이나 인간에 대한 깊이 같은 것이 다릅니다. 그러니까 프랑스가 세계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을 제일 많이 냈죠.
박인규 : 교과목의 절반을 국어를 가르친다. 대단하네요. 시의 생활화가 헛말이 아니네요.
유자효 시인 : 그렇습니다. 그런데 영국이나 독일이나,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이 대부분 그런 전통들이 있어요. 시교육이나 문학교육을 상당히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유자효 시인께서는 자유시. 서양풍의 자유시를 쓰시지만 시조에도 굉장히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유자효 시인 : 시조는 우리 것이죠. 700년간 이어져온 장르가 오늘날에도 씌어지는 것은 유래를 찾기가 힘듭니다. 일본의 하이쿠, 단가 정도고. 소네트는 과거의 장르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하이쿠는 국민문학이 됐죠. 우리나라의 시조는, 오세영 시인이 미국에 갔을 때 강연을 하는데 한국의 현대시에 대해서 강연을 했답니다. 그랬더니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더래요. 다 나가버리더라는 거죠. 자기들도 다 아는 거니까. 한국의 현대시가 서양에서 온 건데.. 그래서 이 분이 '아, 내가 코드를 잘못 잡았구나.' 그 순간에 이 사람이 테마를 바꿔서 시조 얘길 했다고 합니다. 한국에는 시조라는 고유의 장르가 있다. 700년 된 장르인데 오늘날도 쓰고 있다. 한국의 운율에 맞춘 정형시다. 하니까 나갔던 사람들이 다 들어와서 아주 열심히 듣더라는 얘깁니다. 그래서 오세영씨가 요즘 시조를 열심히 써요. 또 이근배 시인이 유럽에 갔을 때 얘긴데, 아직도 무식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국 고유의 언어가 있느냐. 한국 고유의 문자가 있느냐. 아직도 그런 사람이 있어요. 한국에 한국 고유의 문학이 있느냐. 있다. 시조라는 장르가 있는데 700년간 존속해오고 있는 장르다. 하니까 유럽 사람들이 깜짝 놀라더라는 거죠. 이렇게 좋은 것을 갖고 있는데 우리가 우리 것을 아껴야 되지 않느냐 그런 생각을 저는 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한 32년간 방송생활을 하시다가 두 달째 달콤한 휴식이랄까.. 앞으로 좀 큰 시를 쓰고 싶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앞으로의 계획을 마무리로 말씀해 주시죠.
유자효 시인 : 김춘수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좋은 시인은 많다. 그러나 큰 시인이 없다.' 저는 받아들이기를 T.S. 엘리어트나 발레리 같은 큰 시인이 없다는 말로 해석했습니다. 저는 큰 시를 쓰고 싶습니다. 저는 방송인으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송과 시는, 제가 앞부분에 말씀드린 것처럼 떼어서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저의 양면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제가 살아온 인생이 시인으로서의 길과 방송인으로서의 길이었습니다. 그 둘을 병행하면서, 때로는 갈등하면서, 찢어지면서, 때로는 좋아하면서 그렇게 살아왔고, 이 두 길은 저의 두 가지 속성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저는 열심히 시를 쓸 것이고. 또 사람일은 알 수 없습니다. 방송과 유관한 일을 또 할 수도 있겠죠. 당장은 아니겠지만. 그래서 저는 제가 살아왔던 시인으로서의 생애, 방송인으로서의 생애를 보람있게. 앞으로 이모작인생에서 더 꽃피우고 싶습니다.
박인규 : 내년이면 이순이 되시는데, 예전에는 환갑이면 그 뒤를 여생이라고 했지만 지금부터는 제 2의 인생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도 좋은 시를 많이 써오셨지만 앞으로도 큰 시 써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유자효 시인 : 고맙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박인규 :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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