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이틀 차이 때문에 축제는 구경도 못하고 떠나는구나 하고 개울을 건너오는데 많은 알타이 사람들이 모여 있다. 알타이는 우리를 외면하지 않았다. 내일 개막식에 공연할 우스트-칸 예술팀이 연습을 하러 바로 우리 앞에 와 있는 것이다. 음악팀은 물론 알타이 전설을 공연할 어린이 연극팀도 함께 왔고, 20~30명이나 되는 학부형과 관계자들이 동원된 대부대였다. 아이들 연극은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인간과 동물과 신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 같았다. 배경은 아주 간단하다. 펠트 위에 벽화처럼 그림을 그렸는데, 사람 눈을 그려 아래를 내려다보는 존재를 나타내고, 그 아래는 여러 가지 동물을 사냥하는 인간들이 그려져 있는데, 활을 쏘는 사냥꾼과 말을 타고 짐승을 쫓는 사람도 있다. 이 배경 옆에는 제법 큰 산짐승을 잡아 네 발을 묶어 거꾸로 매달아 놓았다.
촬영을 위해 특별 연주를 부탁했더니 기꺼이 연주해 주었다. 한국에서 온 우리 4명을 위해서 특별 공연이 시작되었다. 젊은이 악단은 단순한 아마추어가 아니고 "알띈-뚜우(Altyh-Tuu)"라는 5인조 악단이다. 알띈-뚜우, 황금의 산(Golden Mountain)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한 이 악단은 남자 4명에 여자는 1명으로 다른 지역에 연주차 초대를 받을 정도로 알려진 악단이다.
그들의 공연은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다. 한 청년이 그 유명한 알타이의 '목젖노래'를, 다른 한 청년이 옆에서 두 줄 현악기인 '툴쉬르'로 반주를 하는 동안 하늘과 땅과 땅속이 모두 하나가 되는 영혼의 트랜스 상태에 들어가게 해 주었다. 알타이 예술에서 이 발성법이 독특한 '목젖노래'는 나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음역과 전혀 다른 소리를 내던 청년이 이번에는 카무스(러시아어 : 보르간)를 꺼내 입에 대더니 주변의 모든 영혼을 달래는 울림의 소리를 들려준다. 이어 가야금을 연상케 하는 '자다간'이라는 8줄의 현악기를 연주하며 잔잔한 물소리를 따라 우리를 알타이의 품속으로 안내해 주었다.
어딘가 좀 어설픈 점이 있는 것 같기도 하면서 너무나 깨끗한 연주가 정말 맘에 들었다. 그들은 순수했다. 마지막이 되어 선물로 줄 것이 별로 없어 어찌하지를 못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낮밥이 다 되었다고 우리를 끌고 한사코 먹으라고 한다. 그저 즐겁게 노래하고, 연주하고, 먹고, 마시고, 그리고 찾아온 손님 극진하게 대접하고, 그래 이것이 바로 알타이의 고갱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알타이 최고의 선물, 산꿀
오늘 일정은 학술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이 어우러져 정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우리가 알타이 예술에 빠져 있을 때 우리 차량들은 이미 자리를 옮긴 뒤였다. 날이 흐리기 때문에 비가 많이 와 물이 불면 차가 건널 수 없기 때문에 건너편 길가로 차를 옮겨 낮밥 준비를 마친 지 오래였다. 통조림 육개장과 감자탕으로 낮밥까지 잘 먹고 나니 이미 시간은 2시 40분이나 되어버렸다.
출발하여 우스트-칸을 지나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그 사이 나는 잠깐 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니 포장이 안 된 도로를 달리고 있다. 꾸바레프 교수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여러 번 길을 묻더니 드디어 마을로 들어가 어떤 농가 앞에 차를 세운다. 내가 집에 돌아갈 때 선물로 유명한 알타이의 산꿀을 사고 싶다고 했더니 낮밥 먹고 첫 행사가 꿀 사는 일이었던 것이다. 비오는 날을 이용한 점도 있지만 이제 중요한 일정을 거의 소화하고 초과달성한 팀의 여유라고도 할 수 있다.
현재 알타이공화국에서 가장 으뜸을 이루는 러시아 농가들의 삶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널찍한 울타리 안에는 이층짜리 큰 목조 건물이 있고 안쪽으로 5~6칸 되는 창고 건물이 길게 늘어서 있고, 한쪽에는 제법 큰 텃밭이 있다. 텃밭에는 감자, 양배추, 사탕무, 당근, 호박, 해바라기 같은 여러 가지 작물들이 있어 스스로 먹고도 남을 만큼 농사를 짓고 있다. 그러나 이 집의 가장 으뜸가는 일은 벌을 치는 것이다. 본 건물 지하에 내려가 보니 우유를 나르는 통과 2말은 들어감직한 플라스틱 통에 꿀들이 가득가득 들어 있다.
말은 꿀 사러 왔다고 하지만 마치 초대받은 사람처럼 환대를 받았다. 먼저 꿀술을 맛보라고 주는데 나는 술을 마시지 않아 모르지난 원철이가 먹어보고 막걸리 비슷하다고 한다. 술 좋아하게 생긴 주인 멜토코비치 씨의 꿀술 자랑은 대단하다. 꿀술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자 그것은 '비밀'이라고 입을 딱 다문다. 하기야 술 먹고 깨려면 꿀물을 먹는데 꿀로 술을 만들었으니 얼마나 좋겠는가? 그리고 바로 그 점이 멜토고비치를 술꾼으로 만든 것은 아닌지! 멜토코비치 씨의 친절은 꿀술로 끝나지 않는다. 차를 끓여 먹는 나무껍질인데 '붉은 뿌리(krasnyi koren, 학명 : kopeechnik)'라는 것을 꺼내와 설명하자 꾸바레프 박사가 가장 먼저 신청하여 빼앗듯이 챙겼다. 술에다 2~3주 담근 뒤 꺼내 한 숟갈씩 마시면 장을 튼튼하게 하는데 아주 효과가 크다고 한다.
오늘의 방문 목적은 꿀을 사는 것이다. 보통 설탕 값은 1㎏에 20~23루블(1루블=37원이니 1㎏=740~851원)인데, 꿀은 설탕보다 3배 이상 비싼 1㎏=70루블(70×37=2590원)이라고 한다. 5ℓ짜리 플라스틱 한 통(1ℓ=1.6㎏) 8㎏은 560루블(2만720원)이다. 러시아팀 4명에게도 작은 통 하나씩 해서 꽤 많은 12.5ℓ(1660루불=5만1420원)의 꿀을 구입했다. 꿀 사러 갔다가 알타이의 러시아 농부와 아주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술 좋아하는 주인 아저씨, 깐깐해 보이는 할머니, 가냘픈 며느리, 귀여운 손녀, 손자…. 1시간이 훌쩍 넘어가버렸다.
꿀을 사가지고 돌아오면서 지도를 아무리 둘러봐도 지금 우리가 어디를 달리는지 알 수가 없다. 플루스닌 교수에게 지도에 표시를 해달라고 해서 보았더니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딴 방향으로 가 있었다. 나는 다음 목표인 데니소바 가는 도중에 있는 마을에 들어간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꿀을 사기 위해 일부러 우스트-칸에서 서쪽으로 22~23㎞ 떨어진 뜌드랄라(Tyudrala)라는 마을까지 간 것이다. 유리 할아버지가 20년 전 좋은 꿀을 샀던 기억이 나는 바람에 양봉하는 마을까지 찾아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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