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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정치를 비방한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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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정치를 비방한 죄'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道'] 제3장 天道가 무너진 땅 <14>

김일손을 국문하는 수문당의 좁은 마당은 한여름의 뙤약볕이 내리쬐어 불길이 번지는 화재 현장처럼 뜨거웠다. 햇볕에 달구어진 검은 기왓장 골에서는 뜨거운 복사열이 마당으로 흘러내렸고, 바람은 한 점도 수문당 담을 넘어오지 못했다. 상투가 풀어헤쳐진 김일손의 얼굴은 땀과 흙먼지로 뒤범벅이 되어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었다. 중풍으로 맥이 풀리고 기운이 빠져버린 그의 몸은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처마 밑 그늘에 앉아 국문하는 추관들도 더위를 참지 못하고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유자광도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사초장(史草帳)을 짜증스럽게 넘기더니 버럭 고함을 질렀다.
"넌 덥지도 않느냐. 사실대로 자백하면 옥사의 시원한 그늘에 가 쉴 수 있을 터인데 무엇 때문에 이 화탕지옥에서 생고생을 하느냐!"
"그건 대감께 내가 하고 싶은 말이오."
"다시 묻겠느니라. 사초에 단종 때 정본의 시체를 중이 호위했다 썼으니 죄인을 호위했다고 쓴 의도가 무엇이냐. 소능복위의 상소를 올리고, 세상이 다 아는 황보인이나 김종서 같은 난신(亂臣)을 절의에 죽었다고 썼으니 네가 반심(叛心)을 품은 게 아니고 무엇인가."
정본은 단종을 섬긴 대신이었다. 문종의 뒤를 이어 단종이 12세로 즉위하였을 때 어린 단종을 보필한 고명대신으로 황보인, 정본, 김종서 등이 있었는데, 이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한 수양대군은 역사(力士) 홍윤서, 양순정을 시켜 김종서 등을 난신이란 누명을 씌워 척살하게 했고, 이때 충청도 도체찰사가 되어 충주로 가던 정본은 다시 명을 받아 광양으로 귀양을 갔고 거기에서 죽임을 당했다.
김일손이 어이가 없어 대답하지 않자, 유자광은 헛기침을 하면서 다그쳤다.
"네가 보다시피 세조대왕께서 중흥하신 공덕은 하늘과 땅에 그득하시지 않는가. 어디 그뿐인가. 금지옥엽의 존귀한 자손이 지금 계계승승하시는 중인데 네가 만일 반심을 먹었다면 어찌 우리 조정에 염치없이 벼슬을 했더란 말이냐."
"기가 차 말이 나오지 않소. 반심이라니 당치 않소. 세조 때의 일은 허반(許磐)에게도 듣고, 정여창, 최맹한, 이종준에게도 듣고 알았소. 이 사람들은 실로 믿을 만한 사람들이 아니오. 사기(史記)란 그 법에 따라 목이 달아날지언정 붓을 휘지 못하는 것이요. 황보인, 김종서, 정본은 그들의 임금을 섬기어 두 마음이 없었던 사람들이오. 마땅히 추장(推獎)하여 칭찬할 만하기에 정본을 정몽주 선생에게 비했고, 황보인, 김종서는 절의에 죽었다고 썼소.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 아니오. 어찌 대감만 모른단 말이오.
세조께서는 영웅호걸의 임금이시매 중흥의 업을 이룩하시었고, 성종께서는 불세출의 어지신 임금으로 수성을 잘하시었고, 주상(主上)께서도 밝은 임금이 되고자 하시는데 이러한 태평성대에 내가 왜 벼슬을 안 하겠소!"
김일손이 머리를 흔들며 말하자, 상투를 풀어헤친 봉두나발의 머리가 얼굴을 가려 마치 귀신 형상이 되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김일손의 눈빛이 자못 날카로워지자 유자광은 발정한 암캐처럼 으르렁거렸다.
"네 이놈! 이 자리가 국법에 의해 죄인에게 공초를 받는 자리가 아니더냐. 함부로 입을 놀리다니 무엄하구나. 나졸들은 주리를 틀지 않고 뭐하고 있는 것이냐!"
유자광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나졸들이 김일손에게 달려들어 고문을 가하기 시작했다. 결박된 양 다리 사이에 두 개의 주장(朱杖)을 넣어 가위 벌리듯 하여 고통을 주었다. 정강이뼈를 부러뜨릴 것처럼 가하는 고문에 이를 악물고 버티던 김일손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토해냈다.
"저 놈의 입에서 바른 말이 나올 때까지 주리를 틀어라."
김일손의 비명 소리가 더욱 커졌고, 추관용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졸고 있던 노사신, 신수근 등은 깜짝 놀라 고쳐 앉으면서 수염을 쓸어내렸다. 유자광이 턱짓을 보내고 나서야 나졸들은 주장을 놓고 물러섰다. 그러나 김일손은 유자광에게 침을 뱉고 난 뒤 말했다.
"나, 김일손은 목이 베어져 없어지더라도 밤을 낮이라 할 수 없고 낮을 밤이라 할 수 없소. 단종을 모신 정본이 어찌 정몽주에 비할 수 없고, 황보인, 김종서가 어찌 절의에 죽었다 할 수 없다는 말이오."
"무슨 거지발싸개 같은 망발인가! 네가 반심을 아니 먹었다면 막중한 실록에 벼슬도 아니하고 백두포의(白頭布衣)로 떠돌아다닌 미치광이 남효온의 사적을 왜 적어놓았느냔 말이다. 도대체 미치광이 남효온을 왜 사초에 올렸느냔 말이다."
"남효온의 사적을 적은 것은 그가 이태 전에 저승으로 돌아갔기 때문이오. 일찍이 스승 김종직 선생에게 그의 재주와 행실을 듣고 늘 추앙하고 흠모하던 때문이며 그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일치했던 것이므로 다 같이 소능복위를 청했던 것이오. 이제 그 까닭을 아시겠소."
남효온 역시 김종직의 애제자 중에 한 사람이었다. 이태 전 38세의 아까운 나이로 유명을 달리한 그의 행적을 추모하는 사람은 김일손뿐만 아니라 김굉필, 정여창 등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 행우(杏雨), 벽사(碧沙) 등이었고, 스승 김종직은 그에게만은 유일하게 이름을 부르지 않고 '우리 추강이'라고 그를 높이고 아끼었다.
사람들은 그의 성품을 두고 담박하면서도 굳세고, 초탈하면서도 법도에 맞아 얌전하였으며 가슴 속이 시원하고 깨끗하였다고 추모하였다. 일찍이 김시습을 스승으로 삼아 세상 밖에서 놀며 세속의 일에 관여하지 않더니 18세에 성종에게 소능복위를 청하다가 물리침을 당했으나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는데, 늙은 대신들은 그때 그를 미치광이라고 불렀던 바 그는 물러나 시 한 수를 다음과 같이 지은 적이 있었다.

북쪽 대궐에 일찍이 글을 올리니
뭇사람의 평판이 자못 시끄럽구나
부질없이 손자(孫子)의 호를 얻었고
짤막한 도롱이를 걸치고 추강에 왔도다.
北闕曾上書
物論頗紛厖
謾得孫子號
短蓑來秋江
▲ 오현당은 필문 李先齊을 주벽으로 오른쪽에 청심당 李周元,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죽은 동암 李潑, 남계 李洁와 복소제 李仲虎 등 5명을향사하는 사당이다. ⓒ프레시안

손자(孫子)란 당나라 때 시대에 맞지 않는 말을 하여 조롱당한 벼슬아치 손창윤(孫昌胤)을 말했다. 그가 김종직의 제자가 된 것은 조위의 아우인 조신(曺伸)의 소개가 계기가 되었다. 조신은 어학에 능통하여 일찍이 신숙주와 중국에 7회, 일본에 3회나 왕래했던 외교통이자 성종 때의 대문장가로 그와 시문을 주고받는 사이였던 것이다. 김종직의 제자가 된 후, 남효온의 재주와 행실은 더욱 드러났다. 그러나 옷과 음식을 늘 누추했다. 항상 못생기고 허술한 암말을 타고 다녔으므로 아이들과 부녀들이 구경거리처럼 따라 다니면서 웃었다. 또한 천성이 술을 즐겼으나 홀어머니가 꾸짖으므로 '술을 끊는 글'인 지주부(止酒賦)를 지어 10년 동안 술을 마시지 않았었고, 훗날 중풍을 앓아 다시 술을 마시다가 병이 나으므로 다시 술을 끊는 부지주부(復止酒賦)를 지어 5년 동안 마시지 않기도 했다.
그는 가끔 낚시대를 들고 남포로 나가 고기를 잡으며 대낮의 해가 환하게 비치는 것을 보고 탄식하였다.
'사람 사는 것이 곧아 사람도 속일 수 없는데 하물며 하늘을 속일 수 있으랴.'
그리고는 드디어 다음과 같은 12자의 경지재명(敬止齋銘)을 지어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해와 달은 머리 위에서 환하게 비치고
귀신은 좌우에서 굽어 살핀다.
日月昭昭頭上 鬼神鑑臨左右

김일손은 말문이 막혀 한동안 유자광을 꿰뚫어보기만 했다. 그러자 김일손을 대역부도(大逆不道) 죄인으로 몰아가려던 유자광이 책상을 주먹으로 치면서 일어났다.
"고얀 놈 같으니라고! 여기 사초에, 의제(義帝)를 조상하는 김종직의 글을 놓고 '충분(忠憤)이 이곳에 담겨 있다'고 했는데, 이것이 반심이 아니고 무엇이라는 말이냐."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해석이 가능했다. 김종직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아름답게 보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었으므로 신하인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의제를 단종에 비유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젊은 날 여행을 하다 꿈을 꾸고 난 뒤 소회를 적은, 누구라도 충분(忠憤)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의제를 조상하는 글에 불과할 뿐이었다.
"우리 김종직 선생은 충성과 효도를 본받은 사람이오. 노산의 일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 아니라 충효의 대의(大義)를 밝히기 위하여 조의제문을 지었기에 그것을 사초에 얹은 것이오."
"충효의 대의가 하필 <조의제문>에만 있더란 말이냐."
"신하인 항우가 섬기던 의제를 죽였거늘 어찌 충효를 생각하는 고사(古事)가 아니란 말이오."
"그렇다면 하필 노산(魯山; 단종) 이야기 끝에 <조의제문>을 실은 이유는 무엇이냐."
"뒷세상 사람들이 경계하라고 한 것이지 다른 뜻은 없소."
유자광은 이 정도면 대역죄로 엮는 데 부족함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제는 김일손의 무리를 잡아들이는 데 역점을 두어 문초했다.
"이 일을 누구와 더불어 상의하여 써넣었는가."
"이 일에 관여한 사람은 없소."
"대역부도 죄인인 네 말을 누가 믿겠는가."
"누구의 사주를 받은 일도 없고 나 혼자 한 노릇이니 제발 나 하나만 죽여주시오."
"이제야 죽여 달라고 하다니, 네 죄를 수긍하는 모양이구나."
김일손은 대꾸할 힘마저 소진한 듯 스르르 눈을 감고 고개를 떨구었다. 밤이 되어 수문당이 어두워지자, 마당가에 선 나졸들이 횃불을 켜 들었다. 사방이 다시 환해지고, 불볕더위는 한풀 꺾였으나 바람이 불지 않는 국문 장소는 여전히 찜통 속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김일손과 연루된 선비들이 하나 둘 잡혀와 꿇어 앉았다. 청계정사에서 압수한 서신들을 증거 삼아 잡혀온 선비들이었다. 이목과 권오복이 먼저 잡혀와 국문을 받았다. 김일손은 주범이고 이목과 권오복 등은 서로 호응한 공범 취급을 받았다.
이목이 잡혀왔을 때 가장 반가워한 사람은 윤필상이었다. 이때 윤필상은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치부하는 데만 힘써 곳간에 넘치는 무명베가 천여 동(同)이요, 소작농과 빚쟁이 같은 사람들부터 거둬들인 곡식만도 수천 섬이 넘어 당시 조선의 제일의 갑부라 하는 심금손(沈金孫)과 1등을 다투고 있는 처지였다.
▲ 삼충각 선조26년(1593) 진주성 제2차 혈전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순국한 최경회(1532~1593)선생과 문홍헌(1539~1593)그리고 명종 10년 (1555) 을묘왜변으로 해남 달량포에서 전사한 조현 등 3인의 충절을 표창하기 위하여 숙종 11년 (1685)에 관민에 의하여 언덕 위에 독립적으로 건립된 3동의 정려건물이다. ⓒ프레시안

윤필상과 이목의 악연은 성종 때부터 시작했다. 나라에 가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한 터에 성종은 어진 선비들로 하여금 상소를 올리게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이목은 '윤필상을 삶아 죽여야만 하늘이 비를 내리실 것이다'라는 요지의 극언을 했다. 그런 뒤, 윤필상이 길에서 이목을 만나 '이보게 한재, 자네가 꼭 늙은 나의 고기를 먹어야만 하겠는가. 이 늙은 고기가 무슨 맛이 있어 나를 해치려 하는가' 하고 가시 박힌 말로 시비를 걸었으나 이목은 말대꾸도 하지 않고 지나쳐버렸다. 이 일로 어린 이목에게 무시를 당한 늙은 윤필상의 모욕감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윤필상과의 악연은 또 있었다. 윤필상이 대비의 뜻을 좇아 불교를 숭상하기를 성종에게 권하자, 이목은 유생들을 거느리고 윤필상의 간사함을 논하여 간귀(奸鬼)로 지목하고 성종에게 거침없이 주살하기를 청했다. 이에 성종이 크게 노하여 '네가 어찌하여 함부로 정승을 귀(鬼)라고 욕하느냐'고 말하자, '그의 소행이 저러한데도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으니, 귀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성종은 이목을 옥에 가두려다 공주로 귀양 보내는 것으로 그쳤다.
이목의 기운이 준열한 것은 이뿐 아니었다. 성종이 언젠가 병이 나서 대비가 무당을 불러 성균관 안 벽송정(碧松亭)에 굿을 벌이려고 하였는데, 이목이 유생들을 데리고 와서 무당을 매질하여 내쫓아버렸다. 무당의 호소를 들은 대비가 성종의 병이 나은 뒤에 사실을 고하자 성종은 거짓으로 화를 내고, 성균관에 명하여 연루된 유생들을 모두 불러들이라 했다. 그러자 모든 유생들이 몸을 피했는데 이목은 숨지 않고 혼자 나아갔다. 그러나 성종은 대사성을 불러 전교하기를 '네가 능히 여러 유생들을 인도하여 선비의 기습(氣習)을 바르게 하였으니, 내가 가상히 여긴다' 하고 술을 내린 적이 있었다.

윤필상은 추관으로서 하루 종일 하는 일 없이 졸다가 이목이 잡혀온 것을 보고는 국문을 자청했다. 윤필상은 주로 이목이 김일손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을 가지고 추궁하였지만 이목은 '주리를 틀라'고 고함치는 윤필상에게 맞서 할 말을 다했다.
"노산군의 숙의(淑儀) 권 씨는 곧 권람(權擥)의 친족입니다. 그 논밭과 집과 노비를 권람이 다 차지하고 주지 않아서 숙의를 굶주리게 한 까닭으로 신이 일찍부터 권람을 박하게 보았습니다."
며칠 후, 서울로 압송된 정여창도 유자광에게 국문을 당했다.
"김일손이 정본에 대한 얘기를 그대한테서 들었다는데 사실인가."
유자광은 다른 사람과 달리 정여창에게는 자못 부드럽게 물었다.
"사실이오. 지난해 성종대왕 19년 기유년 간에 김일손과 지리산으로 유람을 갔을 때 중 탄선(坦禪)에게서 단종 때 정본이 광양으로 유배 와 죽었던 사실을 들어 알았고, 그 뒤 을묘년에 안음현감으로 있을 때 일손이 탄선의 이야기를 적어 보내 달라 하기에 그대로 적어 보냈소."
"정본을 어찌 생각하는가."
"그의 임금을 위해 희생된 분이라 생각하오."
유자광은 김일손과 달리 유리한 대답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다가 정여창의 대답도 김일손과 대동소이하므로 미간을 찌푸렸다.
"정본을 전조(前朝)의 정몽주에 비유한 김일손과 생각이 같다는 말인가."
"그러하오."
유자광은 실망을 금치 못하면서도 위세를 부렸다.
"일두(一蠹; 정여창의 호)는 그러고도 살아남기를 원하는가. 그대의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목숨이라 한들 어찌 내 것이 있으리까. 다만 선대 후대에 욕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오."
유자광은 정여창을 더 이상 문초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한 마리 쓸모없는 좀벌레'라는 뜻의 그의 호가 말하듯 김종직의 제자 중에서 모가 나지 않은 온화한 성품인 데에다 평소에 적을 두지 않는 그의 행적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여창도 특별하게 누구를 원망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태연하고 담담한 태도를 처음부터 끝까지 흩트리지 않으니 독이 잔뜩 오른 유자광도 제풀에 꺾이고 말았다.

김일손과 직접 연루된 사람들의 국문이 모두 끝나자, 유자광은 연산군의 노여움을 이용하여 김종직의 제자들을 한꺼번에 죽일 계획을 세웠다. 입궐하여 윤필상에게 눈짓하면서 동조를 구하고자 말했다.
"이 사람들의 죄악은 무릇 신하된 우리로서는 한 하늘 밑에서 함께 살 수 없는 원수이니 마땅히 그 무리들을 찾아내어 모두 죽여 없애야만 조정이 맑고 깨끗해질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머지 무리들이 일어나 얼마 안 가서 다시 화란(禍亂)이 생길 것입니다."
장차 화란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이번 기회에 청류라 불리는 사림세력을 모조리 제거하자는 것이었다. 엄청난 일을 함부로 발설하는 유자광이었으므로 입궐해 있던 좌우의 신하들은 아무도 대답을 못했다. 다만 천성이 무른 노사신이 손을 흔들며 말릴 뿐이었다.
"무령은 어찌 이런 말까지 하시오. 옛날 당고(黨錮)의 일을 듣지 못했습니까. 금고(禁錮)의 법망(法網)이 날로 혹독하여 선비의 무리들을 용납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한나라도 뒤따라 망했으니 청류(淸流)의 의논이 마땅히 조정에 있어야 될 것이오. 청류의 의논이 없어지는 것은 나라의 복이 아닌데 무령은 어찌 틀린 말을 하시오."
당고란 동한(東漢) 시대의 말년에 간신들이 천하의 명사들을 붕당(朋黨)이란 죄명으로 일망타진하여 금고(禁錮)시킨 것을 말하는데, 금고라는 것은 다시 벼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유자광은 노사신의 말에 조금 기가 꺾였으나 물러서지 않았다.
"내 말은 대역죄에 관련된 자들을 남김없이 다스리자는 것이지 다른 뜻은 없소이다."
"당초에 우리들이 임금께 아뢴 것은 사초의 일뿐인데, 지금은 지엽으로 연루되어 사초 일에 관계되지 않은 사람도 잡혀 갇힌 이가 날로 늘어나니 이것은 우리들의 본 뜻이 아니오."
그러나 연산군은 온건한 처리를 주장하는 노사신보다는 화란을 없애기 위해 사림의 씨를 말리자는 유자광의 의견을 들어 김종직과 그 제자들을 다스렸다.
▲ 양팽손 부조묘는 학포 양팽손 선생을 향사하는 사당으로 인조 9년(1631년)에 창건된 것으로 1868년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하여 철거되었다가 광복후인 1947년에 복원하였다. ⓒ프레시안

김종직은 의금부 도사의 감시 아래 부관참시 당했다. 도사를 호위하며 내려온 나졸들이 그의 묘를 파헤쳐 관을 쪼갠 다음 시신의 목을 잘라 들판에 던져버린 것이었다. 서울에서는 그의 제자 김일손이 형장으로 끌려 나왔다. 망나니가 삼키다 만 술을 긴 칼에 뿜어내자, 갑자기 음풍(陰風)이 불었다. 쾌청한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회오리바람이 일고, 흙먼지와 모래가 하늘로 치솟았던 것이다.
김일손의 죄명은 대역죄로 형벌은 능지처참이었다. 가족이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도록 망나니가 목을 베고 팔과 다리를 잘라 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는 극형 중의 극형이었다. 광풍이 멎자 캄캄한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형장에 뿌려진 붉은 피마저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
김일손이 처형되고 나자, 차례로 같은 장소에서 김종직의 <조의제문>에 호평을 가한 사관 권오복과 권경우도 능지처참되었다. 날뛰는 망나니 칼에 사관들은 물론 이목과 허반의 목이 베어져 피를 뿌리니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형장 부근의 양인들이 공포에 떨며 집 밖 출입을 며칠 동안 하지 못할 정도였다.

연산군은 난역(亂逆)한 신하를 처형했으므로 유자광 등에게 글을 지어 종묘에 고하게 했다.
<간사한 신하가 몰래 모반할 마음을 품고 옛일을 문자로 거짓 표현하며, 흉악한 사람들이 당을 지어 세조의 덕을 거짓 꾸며 나무라니 난역부도(亂逆不道)한 죄악이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또한, 난역한 신하들의 죄상을 세상에 알렸다.
<간사한 신하 김종직은 나쁜 마음을 품고 몰래 그 무리들을 모아 음흉한 계획을 시행하려고 한 지가 오래 되었다. 항우가 의제를 죽인 일에 거짓 핑계하고 문자로 표현하여 선왕을 나무라고 헐뜯었으니 하늘에 닿으리 만큼 악독한 죄이니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대역죄로 논단하여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베게 하노라. 그 무리 김일손, 권오복, 권경우는 간악한 덩어리로 뭉쳐서 서로 호응하고 도와 <조의제문>을 칭찬하기를 충분(忠憤)에서 나왔다고 사초에 기록하여 영원히 뒷세상에 전하고자 하였으니 그 죄가 김종직과 같다. 아울러 능지처참하도록 한다. 김일손은 이목, 허반, 강점 등과 더불어 선왕의 일을 거짓 꾸며서 서로 전하여 말하고 사초에 썼으니 이목과 허반도 목을 베어 죽이는 형벌에 처하고, 강점은 곤장 1백대를 치고 가산을 적몰(籍沒)하여 먼 변방에 보내어 관노를 만들게 한다. 표연말, 홍한, 정여창, 무풍 부정총(茂豊 副正摠) 등은 난언죄를 범했고, 강경서, 이수공, 정희량, 정승조 등은 난언을 알고도 고하지 아니하였으니 곤장 1백대를 치고 3천리 밖으로 귀양을 보낸다. 이종준, 최부, 이원, 이주, 김굉필, 박한주, 임희재, 강백진, 이계맹, 강혼은 모두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만들어 서로 칭찬하고 혹은 나라의 정치를 비방하여 세상의 일을 비평했으니, 임희재는 곤장 1백대를 치고 1천리 밖으로 귀양을 보내고, 이주는 곤장 1백대를 쳐서 먼 변방에 부처시키고, 그 나머지의 사람은 모두 곤장 80대를 쳐서 먼 지방에 부처시키되 귀양 간 사람들을 모두 봉수(烽燧), 노간(爐干)의 천역(賤役)을 맡게 한다.>
이것이 이른바 무오사화의 전말이고, 김굉필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만들어 조정을 비방했다는 죄로 곤장 80대를 맞은 뒤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 갔다가 전라도 순천으로 이배를 온 것이었다.<계속>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는 화순군 홈페이지와 동시에 연재됩니다.
☞ 화순군 홈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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