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지체되는 시간을 이용해서 그 동안 미루어 놓았던 화동이와 플루스닌 교수의 팔씨름대회를 갖기로 했다. '한·러 친선 팔씨름대회'였다. 말이 친선이지 일생동안 콜라를 못 마시느냐 맥주를 못 마시느냐 하는 엄청난 자존심이 걸린 대결전이었다.
밝은 아침 우리 캠프에는 갑자기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시합 전 양 선수는 각자 몸을 풀면서 간혹 강렬한 눈빛으로 눈싸움을 하는데 플루스닌 교수는 애써 태연한 척 하고, 화동이는 자신이 있는 듯 야릇한 미소를 짓곤 했다. 갑자기 양 선수의 트레이너도 등장, 괜히 친한 척 어깨도 주무르고 쓸데없는 기합도 넣어주곤 했다. 대회의 운영진에서도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서진수 교수가 언제 만들어놓았는지 조인식에 쓸 공식 문건을 내놓았다. 순식간에 시합은 한국과 러시아의 명예를 건 A매치로 성격이 바뀌어 버렸다.
조인식에서 양국 대표이자 시합의 공동 조직위원장인 나와 꾸바레프 교수가 정식으로 시합이 성사되었다는 것을 선언했다. 조인식에는 양국의 조직위원장과 당사자인 두 선수, 양 선수의 트레이너와 관람객이 2명이나 참석했다. 조인식이 끝난 뒤 두 선수는 진지한 탐색전부터 들어갔다. 누구 팔뚝이 더 굵은지 비교도 해보고 괜히 상대방의 팔도 찔러보고 시합 전 불꽃 튀는 신경전이 점점 더 격해졌다. 양국 선수의 두 눈에서는 국가의 명예를 건 불타는 의지와 자칫하면 평생 마시지 못할 콜라와 맥주를 응시하는 애처로운 눈빛이 교차했다.
KBS(Koguryo Broadcasting System)측에서 방송 카메라도 이미 준비해 놓았다. 물론 현지 생방송이다. 드디어 양 선수 서로 상대를 마주하게 되었다. 손을 잡자마자 김화동 선수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평소 자신은 상대의 손만 잡으면 자신이 이길지 질지 다 안다고 했다. 이번에도 느낌이 왔는지 자신 있는 표정을 환하게 지어 보였다. 반면 유리 선수는 뜻밖에 담담했다. 평생 마시지 못할 맥주를 떠올려 보는 것일까. 갈수록 표정이 어두워졌다. 과연 시합의 승자는 누구일까? 한국 대표 김화동 군일까, 러시아 대표 플루스닌 교수일까? 20대일까, 50대일까? 콜라일까 맥주일까?
상당히 시끄럽고 분주한 과정을 거쳐서 본 시합이 시작됐다. 예상과는 달리 '50대 맥주'의 승리였다. 두 번째 왼팔로 다시 붙었으나 결과를 뒤집지 못하고 김화동 선수의 깨끗한 패배 선언이 있었다. 플루스닌 교수가 트레이너를 두고 정식으로 팔씨름 연습을 하여 대회에 참가했던 것은 사실이었고, 그의 트레이너가 세계팔씨름대회에서 2등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프로에게 아마추어가 이긴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회가 끝나고 플루스닌 교수는 화동이에게 점잖게 한 수를 가르쳐 주었다. 화동이가 아무리 힘이 더 셌다고 해도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기술을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서 양국의 트레이너의 2차전이 있었다. 원철이와 이리나, 대한민국 육군을 제대한 정원철 병장과 시베리아를 누비던 강인한 러시아 여성 대표 이리나, 당차게 덤빈 이리나는 결국 정원철 병장에게 아까운 패배, 이렇게 해서 한·러 팔씨름대회는 1:1로 끝났다.
나는 플루스닌 교수에게 최근 올림픽에 새로 추가된 경기를 소개하겠다며 다른 시합을 제의했다. 이번에는 팔씨름이 아니라 바로 "다리씨름"이었다. 다리씨름이란 두 사람이 서로 다리의 정강이 안쪽 부분을 맞대고 힘을 써서 넘어뜨리는 것이다.
우코크에서 40㎞ 이상 산악자전거를 탄 일명 '러시아의 곰'에게 과연 60세인 내가 이길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나는 자신이 있었다. 40년 이상 등산으로 다지고 세계 80개 국을 돌아다닌 다리가 아닌가? 만일 힘으로 안 되면 2차전에서는 체선(體禪)으로 10년간 가다듬은 기(氣)를 써서라도 국가와 민족에 승리를 안겨줄 것이다. 시합은 의회로 싱겁게 끝났다. 단 한 판에 플루스닌 교수가 손을 든 것이다. "내 다리에 구멍이 뚫린 것 같다." 이것이 패배의 변이다.
이렇게 해서 한·러 팔·발씨름대회는 2:1이라는 근소한 차이로 한국의 승리였다. 이 다리씨름은 내가 처음 고안한 것이 아니고 어렸을 때 시골 사랑방에서 청년들이 한 것을 많이 보았던 것인데 알타이에서 재현한 것이다.
화동이는 이 대회를 통해 정말 귀중한 것을 두 가지 얻었다. 고수에게 팔씨름 비법을 전수 받았고, 한편으로 '악마의 물'이라는 콜라를 마시지 않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 뒤 화동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정말 일생 동안 콜라를 마시지 않았을까?'
10시 15분 한바탕 신나게 웃고 난 뒤 우리는 깔박따쉬를 떠나 다시 추야도로를 거슬러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돌아가는 길이기 때문에 모두들 밝은 얼굴들이다. 12시, 온구다이를 거쳐 오후 1시부터 2시까지 낮밥을 먹었다. 까라꼴에 거의 다 가서 꾸라따강이 우르술강과 만나는 지점인데 몇 년 전 발굴할 때 야영장으로 썼던 곳이라고 한다. 야영장까지 가는 들판의 꽃들이 참 아름답고, 야영장도 숲속에 있고 깨끗한 물이 흘러 아주 훌륭한 곳이다. 특히 눈 녹은 물이 아니라 깨끗하게 씻을 수 있어 즐거운 시간이었다.
오늘 낮밥은 우리가 가지고 간 매운 라면이다. "이번에는 매운 맛 시합을 하자." 플루스닌 교수가 소리 치고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먹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물론 이번 제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국 사람과 러시아 사람이 매운 맛을 가지고 시합을 한다는 것은 시합이 아니기 때문이다. 꾸바레프 교수와 이리나는 매운 라면이 별로인 모양이다. 라면으로 일찍 낮밥을 때우고 느긋하게 쉬는 동안 나는 꾸바레프 교수와 유리 할아버지로부터 주로 먹을거리에 대한 현지 말을 배웠다. 두 사람 모두 수 십 년간 현장을 돌아다니며 발로 배운 말들이기 때문에 얼마나 정확한지는 자신이 없지만 참고가 될까 해서 기록해 놓는다.
* 아이을(알타이), 우이(알타이, 키르키즈) : 옮겨다니며 사는 천막, 겔(몽골), 빠오(중국), 유르타(러시아어), 어그(투바),
* 싸를르크 : 양, 소, 염소, 말, 야크 같은 동물의 고기.
* 아에라크 : 신 우유(우유를 끓여서 놔두면 된다).
* 아아르치 : 신 우유를 다시 달여서 물을 뺀 것으로 말랑말랑하다.
* 쿠그트 : 아아르치로 만든 치즈(러시아말 시르치크)
* 싸류 : 끓여서 만든 버터.
* 카이막 : 우유가 오래 되면 위에 남은 층(러시아말 슬리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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