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을 충분히 가지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해도 좀 부족할 것 같아 5통을 새로 샀다. 그 가운데 3통은 유럽산 아그파, 1통은 일본산 후지, 그리고 나머지 1통은 한국의 삼성필름인데 모두 EU라는 회사에서 만들었다. EU라는 것은 유럽연합이 아니라 러시아에 있는 한 업체가 필름을 만들어 각종 상표를 붙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 회사가 세계의 여러 필름회사 제품을 동시에 낸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을 뿐 아니라 한국의 삼성이 필름을 생산해 러시아에 수출한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어 실상을 잘 모르겠다.
다행히 돌아와 현상해 보니 필름들이 못 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도 삼성필름을 쓰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있다. '대우 배터리' 생각이 나서 쓸 수가 없었고, '삼성필름'이란 기념품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더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5시 반 악따쉬(789km)를 떠나 깔박따쉬로 향했다. 길을 많이 포장해(지금도 진행 중이다.) 예정보다 빨리 7시쯤 깔박따쉬(723km)에 도착했다. 열흘 만에 돌아오는 깔박따쉬는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편안하다. 꾸바레프 교수는 추야도로 근처에 있는 유적을 탐사할 때 깔박따쉬를 베이스캠프처럼 쓰고 있고, 우리도 이미 익숙해진 것이다.
버너 불을 피워 저녁밥을 짓도록 하고, 우리는 꾸바레프 교수와 함께 바위그림 전시장으로 올라갔다. 오늘은 꾸바레프 교수의 특별 보너스가 있는 날이다. 한 사람에 하나씩 작은 바위그림 탁본을 해 주는 것이다. 영어로는 'rubbed copy'라고 하는데 rub란 '문지르다'라는 뜻이니 바위그림 위에 종이를 대고 문질러 베낀다는 뜻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종이를 대고 물을 뿌려 옷솔로 두드린 뒤 어느 정도 물기가 마르면 먹물로 두드려 탁본을 뜨는데 이곳 탁본 방법은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이곳 탁본 방법을 좀 자세하게 기록해 놓겠다.
먼저 따뜻한 물에 하얀 가루를 탄다. 이 하얀 가루는 감자로 만든 '크라크마오'라고 했는데 이 단어가 러시아어 사전에도 에스페란토 사전에도 없다. 아마 감자로 만든 녹말가루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바위그림에다 기름종이를 대고 종이테이프로 붙인 뒤 감자가루 액체를 스펀지에 묻혀 조심스럽게 두드린다. 이것은 러시아에서 유리에 종이를 깨끗하게 바르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이렇게 종이를 바른 뒤 완전히 마를 때까지 기다린다.
한국에서 탁본할 때는 종이가 완전히 마르기 전에 먹물을 쳐야 한다. 말라버리면 종이가 떨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바른 감자가루는 풀처럼 종이를 바위에 약하게 붙이기 때문에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종이가 마르면 바위그림의 모양대로 종이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림꼴이 그대로 나타난다. 그 종이 위에 옛날 타자 칠 때나 문서를 여러 장 만들 때 썼던 까만 먹지를 가지고 문지른다. 그렇게 하면 그림이 있는 곳은 스펀지로 두드릴 때 오목하게 들어가 있기 때문에 하얗게 나오고 나머지 부분은 까맣게 나와 흑백으로 그림이 떠지는 것이다.
주로 작은 사슴그림을 하나씩 했는데 서진수 교수는 꼭 여자 샤먼을 뜨고 싶다고 해서 소원을 이루었다. 오늘따라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와 탁본하는 과정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본다.
9시부터 10시까지 늦은 저녁밥을 먹고 좀 일찍 자리에 든다. 열흘 만에 돌아온 추야강은 그동안 내린 비로 수량이 많이 불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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