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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에 남은 '북방문화 요소'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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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에 남은 '북방문화 요소'를 찾아서

서길수 교수의 '알타이 답사기' 〈51〉

사진 촬영을 마치고 1, 2, 3, 4호 꾸르간을 자세히 관찰했다. 정말 거대한 외형은, 기본적으로 쌓은 시기와 내부 구조에서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어쩐지 낯설지가 않다. 참 많이 보아온 고구려의 돌무지무덤이 연상된 것이다.

무덤의 형식은 주검을 어떤 방법으로 처리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가장 일반적인 것은 땅속에 묻는 토장(土葬)과 돌을 이용하는 석장(石葬)이 있고, 이에 따라 무덤 형식은 흙무덤과 돌무덤으로 나뉜다. 또 주검을 땅 속이나 돌 안에 묻을 때 묻히는 공간을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널무덤(土壙墓), 나무덧널무덤(木槨墓), 돌덧널무덤(石槨墓), 돌방무덤(石室墓)으로 나눌 수 있다. 또한 주검을 안치하는 널(棺)을 짠 재료에 따라 나무널무덤(木棺墓), 돌널무덤(石棺墓), 오지관무덤(甕棺墓)으로 나눌 수 있다.

이와 같은 일반적인 기준을 가지고 빠지릭의 꾸르간을 분류해 보면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먼저 문제가 되지 않는 것부터 들면 돌무덤이라는 것이다. 돌무덤 가운데서도 단이나 계단이 없는 돌덩이를 그냥 쌓아 올리는 돌무지무덤(積石墓)이라는 점은 우리가 쉽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 학계에서는 이것들을 빠지릭의 돌무지나무덧널무덤(積石木槨墓)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15평 집만큼이나 큰 공간을 덧널(槨)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덧널이란 널을 넣기 위해 널보다 좀 더 크게 짠 널이기 때문에 그다지 크지 않다. 덧널보다 더 큰 것이 널방(墓室)이고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는 돌방무덤(石室墓)이 많다. 빠지릭의 형식은 돌방과 같거나 더 큰 방이지만 통나무로 만들었다는 점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이름을 정확하게 붙인다면 나무방무덤(木室墓)가 되는 것이다. 자연히 돌무지나무덧널무덤(積石木槨墓)이 아닌 돌무지나무방무덤(積石木室墓)이 되는 것이다.
▲ 빠지릭 꾸르간의 내부 모형도(바르나울 향토지 박물관) ⓒ프레시안

고구려 무덤의 특징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을 들라면 역시 돌을 이용하여 무덤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돌무덤은 시대에 따라 변천하게 되는데 돌무지무덤(積石墓)→ 네모단돌무지무덤(方壇積石墓) → 네모단계단돌무지무덤(方壇階段積石墓)→네모단계단돌방무덤(方壇階段石室墓)으로 발전하게 된다. 여기서 초기 돌무지무덤을 바깥모습만 본다면 바로 빠지릭의 대형 꾸르간과 똑 같다는 것이다. 물론 돌무지 안의 널방 모습은 사뭇 다르다.

그러나 돌무지무덤이라는 모습이 같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우리는 상당히 깊은 관심을 가지고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우리가 문화교류가 가장 많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국 중원지방에는 이런 돌무지무덤이 없다. 농경문화가 주를 이루는 한반도 남부에서도 돌무지무덤이 없다. 몇 년 전 울산에 돌무지무덤이 1기 발견되어 다큐멘터리를 할 때 그것이 돌무지무덤이라는 사실 때문에 바로 고구려계 무덤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왜냐하면 경상도 지역 다른 곳에는 이런 돌무지무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알타이지역을 비롯한 초원지대에서는 흙으로 봉분을 만들지 않고 돌로 쌓는 것이 일반적이다. 돌무지무덤은 확실히 남방의 농경문화보다는 북방의 유목문화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유목문화의 관습이 유독 고구려에서 나타나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고구려는 유목문화와 농경문화의 경계에서 두 문화를 모두 아우르는 문화를 형성했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것을 바로 알타이와 연관시키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선 시대적으로 빠지릭 문화는 우리나라 단군조선시대이기 때문에 고구려와 상당한 시간차가 난다. 그리고 요동반도에 대련지역의 강상(崗上)과 누상(樓上)에서 신석기 말기에서 청동기시대에 걸친 돌무지무덤이 나왔고, 요서지역의 홍산문화에서도 상당히 발달된 돌무지무덤이 나왔다. 기원전 4000~3000년 무렵 신석기시대의 홍산문화와 그 뒤를 이은 강상·누상무덤은 바로 고구려 문화의 원류와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유적과의 연관성을 먼저 공부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모든 문화가 황하나 시베리아에서 들어왔다는 도식적인 사관이 지배적이었으나 최근 20년간 요서지방에 9000년 전의 흥륭와문화, 5000~6000년 전의 홍산문화, 이어지는 하가점상·하층문화 같은 찬란한 문화들이 계속 발굴되고 있고, 요동반도에서도 앞에서 본 강상·누상무덤, 7200년 전의 신락문화 같은 많은 새로운 자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문화들은 분명히 중국 문화와는 다르고 우리 문화와 연관성이 크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젊은 후학들이 차분하고도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다만 그렇게 이른 시기를 연구하면서 그런 문화들이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를 비롯한 주변의 문화가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고 발전하였는지를 비교 연구하는 것은 세계사에서 우리를 찾는 아주 중요한 학문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돌무지무덤은 확실히 남방문화보다는 북방문화적 요소가 많다는 점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북방문화적 요소를 찾는 노력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본다.
▲ (좌)꾸르간 5호 평면도((Rudenko, "Frozen Tombs of Siberia") ) (우)꾸르간 5호의 바깥 모습 ⓒ프레시안

▲ (좌)마선구2378호 돌무지무덤(『집안 고구려 왕릉』, 2004) (우)마선구2378호 돌무지무덤 전경(『집안 고구려 왕릉』, 2004) ⓒ프레시안

▲ 고구려 돌무지무덤(집안 우산하992호무덤)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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