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두게나. 이 조위는 쉽사리 쓰러지지 않아."
김굉필은 조위의 취기가 사그라질 때까지 바라보기만 했다. 조위가 거칠게 갈 지(之)자 걸음을 걸으며 휘청거리는 것은 대취해서라기보다는 답답한 가슴이 터질 듯하여 자신에게 하소연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조위는 한사코 최충성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치고 있었다.
"술이 없다면 난 미치광이가 돼버렸을 것이네. 이 술이 없다면 말일세."
조위의 두 눈은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윽고 그는 무오사화로 고인이 된 선비들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땅바닥에 술을 조금씩 뿌렸다.
"억울하게 능지처참 당한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權景裕) 그대들이여, 내 술 한잔을 받으시게나. 어찌 그대들을 두고 나 혼자 마실 것인가."
"매계 선생님, 이러시면 큰일 납니다. 누군가 고발하면 어찌 하시려고 그러하십니까."
"고발하라지. 내가 이 암흑 같은 세상에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는가. 또 살아 있은들 무엇을 하겠나."
조위의 소란은 포졸들이 달려와 술병을 빼앗고 그를 포박해 간 뒤에야 잠잠해졌다. 김굉필은 아침을 물리쳤다. 보리밥을 한 숟갈 떠서 억지로 입에 넣었지만 모래를 씹는 것 같아 도저히 삼킬 수 없었다. 평안도 희천에서는 구경해 보지 못한 순천만 꼬막과 곰삭은 돈베젓(전어창젓)과 갈치젓이 상에 올라 왔지만 도무지 젓가락이 가지 않았다.
김굉필은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참았다. 무오년에 당한 동지들의 박해는 참으로 어이가 없고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천도가 무너져버리니 의가 스러져 자취를 감추고 악이 득세하여 기승을 부릴 뿐이었다.
천도를 무너뜨린 사람 중에 이극돈(李克墩)이란 자가 먼저 떠올랐다. 그도 역시 무오년의 재앙을 불러들인 장본인 중에 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작은 재앙이라도 그것은 암세포 같은 속성이 있어서 한번 자리를 잡으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법이었다.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이 사간원 헌납(獻納)으로 있을 때였다. 일찍이 성종의 초상을 당하였을 때 이극돈은 전라도 감사였는데, 그는 서울에 향(香)을 바치지도 않고 자신의 행차 길에 기생을 데리고 다닌 비행이 있었다. 게다가 이극돈은 뇌물을 먹고 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아무리 권세가 있더라도 꺼리지 않고 할 말을 다하는 성격의 김일손은 사관이 되어 이러한 사실을 사초(史草)에 모두 기록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극돈이 성종실록을 편수하기 위한 사국(史局)에서 당상관(堂上官)이 된 것이었다. 사초를 본 이극돈은 김일손에게 '탁영(濯纓; 김일손의 호),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한 번의 실수를 사초에 기록하여 놓으면 후대에 내 꼴이 무엇이 되겠어. 그러니 자네의 고마움을 결코 잊지 않을 테니 가만히 지워줄 수 없겠나' 하고 자신에 대해 쓴 부분을 삭제해 주기를 간청했다. 그러나 김일손은 '비행을 저질렀으면 참회를 하셔야지요. 그래야 후대의 벼슬아치들이 언행을 삼갈 것이 아니옵니까. 삭제를 하다니요. 차라리 제 목숨을 가져가시지요' 하고 거절해버렸다.
이때부터 이극돈은 '이노옴! 어디 두고 보자, 네 명대로 사는지…. 사초의 붓을 쥐어주니 눈에 보이는 것이 없구나' 하면서 노골적으로 보복의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이극돈은 다른 사관을 물리치고 총재관(總裁官) 어세겸(魚世謙)에게 다가갔다. 어세겸은 세조의 총애를 받아 남이장군 옥사 이후 익대공신이 되어 순탄하게 벼슬길에 오르더니 연산군 때에는 우의정, 좌의정에 이른 훈구대신이었다. 이극돈은 어세겸을 믿고 말하였다.
"김일손이 선왕(先王; 세조)을 무망(誣罔), 훼방(毁謗)했으니 신하로서 이 같은 일을 보고서 임금께 알리지 않는 것이 옳겠습니까. 나의 생각에는 사초를 봉하여 위에 아뢰어서 처분을 기다리면 우리들은 후환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세겸은 사초를 문제 삼는 이극돈의 대담한 말에 놀라 대답을 못하였다. 사초의 내용은 옳고 그름을 떠나 임금은 물론 그 누구도 논박할 수 없다는 것이 불문율이었기 때문이었다. 세조를 들먹이면 세조의 은총을 입은 어세겸이 당연히 분개하며 나설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극돈은 난감해 하면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세조를 무망했다는 글이란 김일손이 사초에 넣은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두고 한 말이었다. <조의제문>이란 김종직이 젊은 시절에 꿈을 꾸고 나서 의분을 참지 못하고 쓴 짤막한 글이었다. 초나라 회왕(懷王; 義帝)이 항우에게 억울하게 죽은 것을 호소해 와 비록 중국의 고사이기는 하지만 김종직은 꿈에서 깨어나 의분을 참지 못하고 회왕을 조위(弔慰)하는 글을 썼던 것이다.
이극돈은 훈구대신들을 찾아다니며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지어 세조를 항우에, 회왕을 단종에 빗대어 모함한 바가 있는데, 김일손은 그 <조의제문>을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사초에 기록하였다고 비방했다. 그러나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그가 젊은 혈기로 쓴, 의분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초나라 회왕을 조상하는 글일 뿐이었다.
<정축년 시월 어느 날에 내가 밀양에서 경산으로 가다가 답계역에서 잤다. 그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임금의 예복을 입고 훤칠하게 찾아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초나라 회왕의 손자인 심(心)이다. (회왕은) 서초(西楚)의 패왕(覇王: 항우)에게 피살되어 침강에 빠져 있노라' 하고는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나는 깜작 놀라 잠에서 깨어나 생각해 보니 회왕은 남초(南楚) 사람이고 나는 동이(東夷: 한국)의 사람이었다. 서로 만여 리나 떨어져 있고 시대가 또한 천년이나 차이가 있는데 나의 꿈에 나타나는 것은 무슨 징조일까 싶었다.
역사를 상고해 보면 회왕을 죽여 강물에 던졌다는 말이 없는데 이것은 필시 항우가 비밀리에 사람을 시켜 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졌는지도 알 수 없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글을 지어 회왕을 조위하였다. 즉 하늘이 사물의 법칙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누구나 그 사대오상(四大; 道天地王, 五常; 仁義禮智信)을 따라야 하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중국 사람에게만 이 법칙을 넉넉하게 주고 동이 사람에게만 적게 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또 옛 적에만 이러한 법칙이 있고, 지금에 와서 없을 리도 없다.
그래서 나는 동이 사람으로서 또 몇 천 년 후이지만 삼가 초나라의 회왕이 비명에 죽은 것을 슬퍼하노라.
옛날 진시왕이 어금니와 뿔을 한번 휘두르니 사해의 물이 피바다가 되었다. 비록 전어, 상어, 미꾸라지, 고래인들 어찌 생명을 보존하리. 그래서 그물에서 빠져나오고자 바쁘게 날뛰었던 것이다.
이때 여섯 나라 한, 위, 조, 제, 초, 연 왕의 후손들은 모두 세력이 없어지고 모두 딴 곳으로 피하여 평민이 되어 겨우 지내는데, 그중 항량(項梁)만 남초(南楚) 무장(武將) 집의 후손으로 진승(陳勝)의 뒤를 이어 진나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그래서 초나라 회왕의 손자 심을 찾아내어 왕으로 추대하고, 백성들의 신망을 얻어 옛 초나라를 다시 세우게 했다. 병부를 쥐고 왕위에 올랐으니 세상에서 천씨(芊氏; 회왕의 姓)보다 더 높은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유방(劉邦)을 시켜 관중(關中; 진나라의 서울)에 들어가게 하니 또한 인의(仁義)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항우는 양처럼 성내고 늑대처럼 탐욕을 내어 관군(冠軍; 宋義)을 잡아 죽였는데, 어찌하여 그 항우를 잡아 죽이지 못했느냐고 하지만 세력이 이미 미치지 못하였으니 어찌하랴. 백성은 그 임금을 더욱 두렵게 여겼더니 마침내 항우한테 어복(魚服)이 되었다. 길러놓은 자에게 오히려 해침을 당하였음은 과연 천운(天運)이 가로막힘이던가.
침(郴) 땅의 산이 높아 하늘에 닿아서 햇빛을 가리니 날은 어둑어둑하여 저문 해처럼 되었다. 침 땅의 강물은 밤낮으로 흐르나 물결이 넘쳐서 돌아오지 않는다. 하늘이 길고 땅이 오래이나 한(恨)이 어찌 풀리겠는가. 혼령은 지금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닐 것이다.
나의 마음이 쇠와 돌을 뚫으려 하니 회왕이 홀연 나의 꿈속에 나타났도다. 주자(朱子)의 필법(筆法)에 따르고자 하니 마음이 불안하고 조심스러워진다. 술잔을 들어 땅에 부으면서 영령이 와서 흠향(歆饗)하기를 바란다.>
김일손은 이 <조의제문>을 사초에 적고 '충분(忠憤)이 이곳에 담겨 있다'고 덧붙였다. 회왕과 항우의 예는 군신유의(君臣有義)라는 도덕규범에 어긋나는 일이므로 충분을 느끼기에 족하다는 촌평이었다. 사관 권경유도 '김종직이 일찍이 의제를 조상하는 글을 지었으니 충의분발(忠義憤發)하여 이 글을 보고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다'고 사초에 적었다. 또한 권오복도 사초에 '김종직이 일찍이 의제(회왕)를 조상하는 글을 지었으니 간절하고 측은하며 침통하여 사림(士林)이 전하여 이 글을 외웠다. 또 청구풍아(靑丘風雅; 우리나라 시집)를 만들어 인물의 성명 밑에 주를 달았다. 성삼문이 이개와 함께 노산(魯山)을 복위시키려고 꾀하던 일과, 권남이 세조를 추대한 일을 자세히 기록했다. 꼿꼿한 바른 붓이 늠연하여 듣는 자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고 평했다.
어세겸을 끌어들이려다 실패한 이극돈은 유자광을 찾았다. 유자광은 소심한 성격의 어세겸과 달랐다. 소매를 걷어 올리고 팔뚝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이것이 어찌 의심하고 주저할 일입니까."
"무령군 대감은 역시 대장부 중에 대장부이올시다. 이렇게 흔쾌하게 동조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소이다."
"나뿐만이겠습니까. 노사신(盧思愼)과 윤필상(尹弼商)은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신하이고, 한치형(韓致亨)은 그 족당(族黨)이 궁중에 관련되어 있으니 반드시 우리 일에 따를 것입니다."
이렇게 유자광이 나서는 것은 김종직에 대한 구원이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글인 함양 학사루의 시판을 김종직이 철거하도록 한 것에 대한 구원을 지금까지 숨겨 왔던 것인데, 기회는 이때다 싶었다. 유자광은 이처럼 원한을 숨기고 산 사람이었다. 김종직이 성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을 때는 교분을 맺고자 갖은 노력을 다하며 구원을 숨겼고, 김종직이 죽었을 때는 제문을 지어가지고 가서 그를 왕통(王通)과 한유(韓愈)에 비교하며 거짓으로 애통해 했던 것이다.
과연 노사신, 윤필상, 한치형은 이극돈과 유자광의 말에 동조했다. 신수근도 그들의 음모에 동참했다. 성종의 외척이 되는 신수근 역시 김일손 등에게 감정을 품고 있었던 차였다. 신수근이 승지로 발탁될 적에 김일손 등이 대간과 시종관으로서 '신수근이 승지가 된다면 외척이 권력을 잡게 될 발단이 될 것'이라며 극렬하게 간하였던 것이다.
유자광의 이야기를 귓속말로 들은 도승지 신수근은 김일손 등을 견제해야 한다고 지난번에 한 얘기를 또 했다.
"조정은 문신들의 수중에 있는 물건이나 마찬가지이니 우리들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마침내 이극돈은 유자광에게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사초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유자광은 도승지 신수근과 입궐을 상의한 후 연산군 앞에 나아가 김종직의 <조의제문> 내용을 왜곡하여 설명하고 자신의 뜻을 아뢰었다.
"김종직이 우리 세조를 비방하고 헐뜯었으니 마땅히 대역부도(大逆不道; 임금에게 반역하는 것)로써 논죄하고 그가 지은 글들은 세상에 전파되어서는 안 되니 아울러 모두 불살라 없애야 될 것이옵니다."
이로써 유자광은 자신의 글 한 줄을 떼어내도록 한 김종직에게 몇 천만 배의 복수를 한 셈이었다. 연산군은 즉시 김일손이 쓴 사초를 모두 가져오라고 명했다. 그러나 유순(柳洵), 윤효손(尹孝孫), 안침(安琛) 등은 연산군에게 사초의 열람을 반대했다. 이때 이극돈도 겉으로는 유순 등의 의견에 동조하는 척 입을 다물었다.
"예부터 임금은 사초를 볼 수 없으며, 임금이 사초를 보게 되면 후세에 직필이 없어질 것이옵니다."
연산군은 입을 다물고 있는 이극돈을 다그쳤다.
"김일손의 사초를 당장 가져오시오. 무엇을 망설이시오."
이극돈이 망설이는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김일손이 사초에 자신의 불미한 비위 사실도 기록해 놓고 있기 때문에 난처했던 것이다. 이극돈은 궁리 끝에 김일손의 사초 중에서 왕실에 관계되는 부분만 떼어 올리기로 했다.
연산군은 이극돈이 올린 사초를 보더니 유자광의 예상대로 분기탱천했다.
"명예를 구하고 나더니 임금을 능멸하여 나를 자유스럽지 못하게 한 자는 모두 이 무리들이다."
연산군은 유자광에게 '이 나라에 충성한다'고 격려하면서 남쪽 빈청(賓廳)에서 죄인을 국문하도록 명했고, 내시 김자원(金子猿)을 시켜 왕명의 출납을 맡게 하고 나머지 사람은 참예해 듣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의금부 경력(經歷; 종 4품) 홍사호(洪思灝)와 도사(都事) 신극성(愼克成)에게 명하여, 곧 함양으로 달려가 김일손을 잡아오게 하였다. 또 왕명을 전달하는 액정서(掖庭署)의 아랫것(下隸) 중에서 말 잘 타는 자를 시켜 중도에 가서 죄인을 잡아오는 걸음이 더디고 빠른지를 살피어 보고하라고 명했다.
이때 김일손은 어머니의 거상 중으로 정여창이 살고 있는 함양에 내려와 있었다. 그는 중풍으로 몸이 불편하여 3년 동안의 시묘를 다하지 못하고 남계천 가에 청계정사(淸溪精舍)를 지어 요양을 했다. 그러면서도 김일손은 암울한 현실을 개탄하며 눈물을 흘리곤 했고, 정여창은 김일손을 위로하는 일이 많았다.
"탁영, 어찌 지나치게 염려하는가."
김일손은 크게 고개를 저었다. 김굉필과 달리 온화하기만 하고 분개할 줄 모르는 정여창이 때로는 섭섭하기도 했다.
"그대는 대유(大猷; 김굉필의 자)의 말을 듣지 못했는가. 대유는 식견이 없는 사람이 아닐세. 일찍이 덕우(德優)에게 이르기를 '지금 선비들의 풍기(風氣)를 보니 바로 동한말엽(東漢末葉)과 같은데 백원(伯源), 백공(伯恭), 정중(正中), 문병(文炳)은 모두 진(晋)나라적 기풍이 있으니 10년을 넘지 않아서 화(禍)가 이 무리에게서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였네.
이 말도 진실로 그러하거니와 나는 이르기를 '유독 선비의 풍기가 그러할 뿐이 아니라는 것일세. 선왕(성종)께서는 어진 이를 좋아하기를 예쁜 여자처럼 했고, 간(諫)하는 말 따르기를 물 흐르듯 하시었네. 우리들 나이 젊고 뜻있는 선비는 스스로 몸이 성명(聖明)한 임금을 만났으니 공부한 바를 펼쳐서 당우시대(唐虞時代)의 다스림을 오늘날에 다시 이룩할 수가 있다 하면서 마음에 있는 것은 다 말해서 권세를 가진 간신들을 거푸 거스렸던 것일세. 그런데 하늘이 복을 내리지 않아서 임금께서 갑자기 빈천(賓天)하시어 때가 옮겨가고 사정이 변해지니 뭇 소인이 뜻을 이루어서 지금 화가 벌써 다가왔네. 어찌 화를 면하겠는가!"
"탁영, 얘기를 듣고 보니 그러하이."
그러자 김일손은 스승 김종직이 일찍이 청계정사가 지어지기 전에 와서 지었던 시 한 수를 가야금 가락에 맞추어 비장하게 읊조렸다.
남계수 서쪽 언덕 좁은 길 얽히고
황서산 봉우리 준마 되어 달려오네
해 저믄 화림동 비바람 급한데
조각구름은 대고대를 지나가누나.
灆溪西岸路縈回
黃石奇峰駿馬來
日暮花林風雨急
斷雲飛過大孤臺
정여창은 김일손이 타는 가야금 가락과 목소리를 누구보다 많아 들어왔지만 오늘따라 그 구슬픈 소리는 울음에 가깝게 들렸다. 신금(神琴)이라 불리는 김일손의 가야금 소리는 마침내 정여창의 뺨을 눈물로 적시게 했다.
과연, 이별가 같은 시를 길게 읊조리고 나니 의금부의 홍사호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말을 타고 달려와 소리쳤다.
"죄인, 김일손을 체포한다."
나졸들이 흙먼지 속에서 튀어나와 김일손을 포박하자, 홍사영과 신극돈은 신을 신은 채 청계정사 안으로 들어가 서찰과 책들을 수거해 상자에 담아냈다. 정여창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왕명이니 거역할 수도 없었다. 다만 정여창은 포승줄에 묶인 김일손을 보고 이렇게 한 마디 했을 뿐이었다.
"사류(士類)의 화가 이로부터 시작되는가!"
그러자 김일손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은 반드시 극돈이 사기(史記)를 트집 잡아 터트린 것이니 나는 돌아오지 못할 것일세. 원하거니와 백욱(伯勗; 정여창의 자)은 도를 위해서 자신을 조심하게."
"여러 말 말게. 나도 자네를 쫓아서 갈 것일세."
김일손의 목에는 벌써 큰 칼이 씌워져 있었다. 김일손을 서울로 압송할 소달구지도 정사 밖에 대기하고 있었다. 정여창은 가야금 가락이 끝났는데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러나 김일손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정여창을 보고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도를 위해서 자신을 조심하게."
보름 후.
김일손은 친국 장소인 수문당(修文堂) 마당에 칼을 쓴 채 꿇어앉았다. 그의 몰골은 귀신의 형상이나 다름없었다. 중풍을 앓고 있는 데다, 압송해 오던 중에 토사곽란을 일으켜 그의 육신은 이미 만신창이로 변해 있었다.
연산군은 의식만 살아 있을 뿐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김일손에게 고함을 질렀다.
"이노옴, 죄인 김일손은 듣거라! 네 놈이 세조조(世祖朝) 일을 어찌 알고 사초에 함부로 썼더냐."
"사관이란 본시 춘추필법을 본받아야 하거늘 소신이 어찌 다른 뜻이 있겠사옵니까. 다만 듣고 본 바를 그대로 적었을 뿐이옵니다."
김일손의 몸은 무너져 있으나 그의 정신은 살아 있었다. 힘이 소진하여 겨우 뱉어내는 목소리였지만 말의 시작과 끝이 분명했다.
"여러 사실을 어떤 사람한테 들었는가."
"사관이 적은 기록에 대하여 그 출처를 대라 하심은 부당한 줄 아옵니다."
"전일(前日)에 소능(昭陵)을 복위(復位)하자는 것은 무슨 뜻인가."
소능이란 문종의 왕비 현덕왕후의 옛 능호(陵號)를 말했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고 단종을 살해한 뒤, 세조의 꿈에 현덕왕후의 혼령이 나타나 '죄 없는 내 자식(단종)을 죽였으니 네 자식도 죽이겠다고' 했는데 꿈에서 깨자마자 세자의 운명 소식이 전해졌다. 크게 화가 난 세조는 소능을 파헤쳐버리라고 명하여 능은 폐허가 돼버렸는데, 김일손이 일찍이 충청도 도사가 되었을 때 소능을 복위하자고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신(臣)은 성종 때 등과하였으니 소능에 대하여 무슨 사정(私情)이 있겠습니까만 다만 국조보감(國朝寶鑑)을 보니 왕가의 계통은 끊어지지 않으며 숭의전(崇義殿)을 두어 의(義)를 숭상하고 있습니다. 이는 국가의 미덕이며 만세에 전해지는 것입니다. 임금의 덕은 인으로서 더해지는 것이니 전하의 인정(仁政)이 더해지라고 소능복위를 청한 것입니다."
연산군은 물러서지 않는 김일손의 태도에 질렸으면서도 부러 목소리를 높이어 놀란 마음을 감추었고 내전으로 들어가다 말고 다시 김일손을 노려보았다.
"하나의 사실도 빠짐없이 자백을 받도록 하라."
국문을 인계받은 유자광은 눈을 크게 뜨고 사초를 한 구절 한 구절 천천히 읽어가며 김일손에게 공초를 받았다.
"어찌하여 단종 때 죽은 김종서와 황보인을 감히 사(死)자를 놓아서 썼는가."
"김종서와 황보인은 역적이 아니오. 신하로서 단종을 위하여 죽었으니 누가 역적이라 하겠으며, 이렇게 사절(死節)을 다한 사람들이니 어찌 절의(節義)에 죽은 사람이라 하지 않겠소."
연산군에게는 신하로서 예를 갖추어 목소리를 낮추었으나 유자광 앞에서의 김일손의 태도는 조금도 굴함이 없이 당당했다.
"사초에 소능을 파헤쳐 바닷가에 버려두고 폭양을 쬐었다고 썼으니 그대가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유자광은 죄를 자백 받아 진실을 밝히겠다는 것보다 죄인을 다루는 국문 자체를 즐겼다. 학문과 도덕이 높은 청류(淸流) 사림이라 하여 평소에 자기를 무시하던 김일손이었던 것이다.
유자광은 거드름을 피우며 국문을 도맡다시피 했다. 국문하는 데 들러리를 서게 된 노사신과 윤필상, 한치형과 신수근, 이희순(李希舜) 등은 추관(推官)으로서 위엄은 부리고 있지만 헛기침을 하거나 뜨악한 얼굴로 변했다.
"내가 보지는 못했소만 김담(金淡)이 하위지(河緯之) 집을 찾아가 위태한 나라에 벼슬할 때가 아니라 한 일과, 세조께서 박팽년(朴彭年)의 재주를 사랑하시어 신숙주(申叔舟)를 보내어 달랬으나 모두들 듣지 않고 참혹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은 작고한 최맹한(崔孟漢)에게서 듣고 쓴 것이오."
김일손은 말을 마칠 때마다 입가에 비웃음 같은 것을 물었다. 유자광은 그의 그런 표정을 정면으로 내려다보지 않고 훔쳐보면서 '독한 놈' 하고 혀를 내둘렀다. 자신이 묻는 말마다 자신 있게 대답을 해오니 자존심이 구겨지는 것 같아 옆에 앉아 있는 추관들에게 창피한 생각도 들었다.<계속>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는 화순군 홈페이지와 동시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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